* * *
내 ‘신의 문양’이 발현한 것은 다섯 살 정도의 일이었다.
내가 있던 다락방에는 아콰의 힘을, 그러니까 신의 힘을 억누르는 붉은색으로 그려진 진이 있었다.
그들은 그것이 저주를 억누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작용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나쁜 방향으로, 내게는 다행인 방향으로 말이다.
보통 신의 문양이 발현하는 것은 생후 직후부터 일 년 사이의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시기라는 것이 쓸모없게도 태어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다락방에 갇혔다.
다섯 살의 나는 정말 약자였다.
내가 기억하는 다섯 살의 나는 제대로 된 단어라곤 하나도 내뱉지 못했다. 굶는 것과 시녀들의 박대에 익숙해져 있던, 인간인지 아닌지도 모를 바싹 마른 어린애였다.
시녀들은 들어오는 대로 나를 욕하거나 한 번씩 때릴 뿐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들은 게 없었으니, 배우는 것도 없었다. 다섯 살의 내가 말할 수 있는 단어는 많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보기 싫을 정도로 말라서, 갈비뼈마저 드러난 상태였다. 살아있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곧바로 대답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내가 성장하면 할수록, 아콰는 힘이 점점 강해진다고 했다.
그랬기에 아콰는 오랜 시간 동안 묵묵히 내 성장을 기다렸다. 붉은색 진에 억눌려있던 아콰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어느 정도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캄캄한 정적 속에 갇혀 두려움에 떨고 있던 때였다. 아콰는 어느 날 갑자기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그 신비롭던 모습만큼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것은 세상에 있는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답고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주인님, 주인님.>
아콰가 속삭이듯 내게 말했다. 오랜 기억을 끄집어내던 머릿속이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숙여 아콰를 쳐다봤다.
“……응, 아콰.”
매만지던 손을 뒤집어 습관적으로 손바닥을 펼치니 아콰가 그 위에 조심스레 올라탔다.
지금도 아콰는 그때와 다름없는 빛을 내고 있다. 아름답고 선명하면서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빛이다.
<순찰병을 제외하고는 이 집에 있는 사람들 모두 잠이 들었어요.>
“그래? 오늘은 다행히 페델리우스는 오지 않는 모양이네. 어제 그 의원이랑 다시 온다고 한 것 같은데, 까먹었나 봐.”
<아! 어제와는 다르게 그 남자의 기운이 굉장히 매서웠는데, 오늘 뭔가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쉽게 흥분할 것처럼 보이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어지간히 큰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궁금하긴 하지만, 굳이 가서 묻고 싶진 않다. 지금부턴 해야 할 일도 있으니 말이다.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오늘도 떨어지진 않겠지?”
조금 불안해져서 창문으로 다가가다 말고 아콰에게 물었다. 아콰가 위아래로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네! 그 뒤로도 몇 번 연습을 해봤는데 이상은 없었어요. 지금도 문제없답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일단 날개를 만들어서 바닥에 한번 내려갔다가 다시 날아봐요.>
“그래, 곤두박질치는 것보단 그게 낫겠지.”
창문을 열고, 그 위에 발을 디뎠다. 아콰가 나를 따라오며 내 등에 물로 된 날개를 만들었다.
여전히 등에 팔이 두 개 더 돋아난 것 같은 감각이다. 손을 파닥거리는 이미지를 상상하니,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은 금방이었다.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공중에서 몇 번 돌고 한참을 허공에 떠있어도 날개가 사라지는 느낌은 없다. 불안한 표정이던 아콰의 얼굴이 환해졌다.
“굳이 안 내려가도 될 것 같아. 갈까?”
<네! 주인님.>
아콰가 내 옆으로 날아와 어깨에 앉았다.
“하늘로 가면 경비병들한테 들킬 일도 없겠지.”
보통은 사람이 하늘을 난다는 생각을 할 리가 없다. 하늘까지 순찰할 일도 없고 말이다.
왕궁도 담벼락은 제법 높았다. 하지만, 역시 하늘을 날아 침입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물론 뛰어넘기는 불가능한 높이다. 침입을 막기 위해서인지 왕궁 근처에는 나무조차 없었다.
왕궁의 담벼락을 넘어가니 아콰가 어깨에서 떨어져 내 앞을 날아간다.
<주인님, 이쪽이에요!>
아콰의 빛무리가 어둠을 밝힌다. 그렇다고 태양처럼 눈이 부실 정도는 아니어서 바라보는 데는 문제가 없다.
아콰의 뒤를 따라 날아가는 도중 아래쪽으로 순찰하는 병사들이 보였다.
“흡.”
조금 놀라서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다행히 저쪽에선 못 본 모양이다.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 최대한 숨을 죽였다. 괜히 들켰다간 여러 가지로 복잡해진다.
아콰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아콰가 돌연 어느 창문 앞에 멈춰 선다. 그리곤 몇 번이나 뱅글뱅글 돌다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손가락으로 창문 안을 가리켰다.
안쪽에는 잠이 든 이리나가 보였다.
정말 편안해 보인다.
‘누군 애처럼 군다고 매일매일 고생하고 있는데…….’
스스로 원한 일이니 불만은 없지만, 저렇게 발 뻗고 자는 걸 보니 거슬리긴 한다.
창문은 다행히 잠겨 있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어렵지 않게 방에 침입했다. 방문 앞이 조용한 걸 보니 병사나 문지기도 없는 듯했다.
“음, 안 일어나네.”
인기척에 눈을 뜰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내키지 않지만 결국 손을 뻗어 이리나의 몸을 흔들었다.
두어 번 흔들었는데도 별 반응이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깊이 잠든 것인지. 괜히 머쓱해졌다.
“아콰, 시원한 물이라도 한번 뿌려줘.”
<네! 얼마든지요!>
대답과 동시에 아콰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물을 모으기 시작했다. 공기 중의 수분을 모아서 만든 물일까? 아콰의 주변에 무서운 기세로 물이 모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물방울 정도였던 크기가 순식간에 아콰의 몸만큼 불더니, 몇 초 지나지 않은 지금은 내 얼굴만 해졌다.
그런데도 아콰는 물을 모으는 걸 멈추지 않았다.
점점 불어나는 물에 도리어 내가 질려 버렸다.
“아콰. 내가 보기엔 그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으음, 그런가요? 이거의 세 배는 더 해도 부족할 것 같은데요…….>
내 제재에 아콰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가늘게 뜬 눈이 위험하게 빛나고 있다.
몇 번이고 죽이겠다고 하더니, 정말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손가락으로 이리나를 가리키니 아콰가 물 덩어리를 이리나를 향해 던졌다.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퍽.
“악!”
아콰가 만든 거대한 물 덩어리가 이리나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철썩’ 같은 가벼운 소리도 아니다.
주먹으로 때릴 때 들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도 다행히 효과는 제대로였다.
“꺅!! 뭐야! 누구야!”
이리나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처음부터 이랬으면 좋았을걸.
“오. 진짜 아프겠다.”
<주인님은 더 아팠으니까 괜찮아요.>
흥, 아콰가 고개를 홱 돌리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잔잔하던 물소리가 조금 거칠게 요동친다.
그래도 여전히 듣기 좋게 찰랑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아직 정신없어 보이는 이리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안녕? 이리나.”
“다…… 당신은……. 오시리아 황녀?”
“음. 최근 들어서 내 이름을 많이 듣네.”
어제는 왕에게서 듣고, 오늘은 이리나에게서 들었다.
어느 쪽도 유쾌한 부름은 아니었기 때문에 기쁜 마음은 전혀 없지만, 이렇게 연속으로 불린 적도 처음이라 감회가 새롭다.
화등잔만 하게 커진 이리나의 눈동자가 가장 먼저 보였다.
“당신이 어떻게……. 아니, 말을…….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이리나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을 비비며 말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꿈으로 치부해버릴 것 같아 오른손을 들어 이마를 긁적였다.
내 손등을 본 이리나의 눈이 한층 더 커지며 입이 떡 벌어졌다.
“그건……!”
“정말 힘들었어. 멍청한 척하는 것도 십 년이나 하니까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거야. 적당한 시기에 버려줘서 정말 고마워.”
이리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 이상 갇혀있었으면 참다못해 내가 먼저 백기를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눈과 귀가 어두운 이들 덕에 나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
“오시리아 황녀, 당신이…….”
이리나의 눈동자에 경악이 담겼다. 말없이 침대에 앉아 있는 이리나의 앞에 선 채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리곤 말갛게 웃으며 허리를 살짝 굽혔다.
“난 널 죽이러 왔어. 이리나.”
그리고, 마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껏 참고 있던 것을 드디어 말했다. 줄곧 꽉 막혀있던 속이 뻥 하고 뚫린 느낌이다.
놀란 이리나의 눈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봤다.
이런 식으로 이리나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고 있는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 거다.
그동안은 거의 겁먹은 척 고개를 숙이기에 바빴으니까 말이다.
“나를 때리고 내리누르니 즐거웠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정말 궁금했던 건 아니고, 그냥 반응이 보고 싶었던 거다.
사실 대답이 나올 거라는 기대는 별로 없다.
“아니, 그…… 그건…….”
“아, 별로 탓하는 건 아니야. 내가 약한 탓이니 어쩔 수 없었고. 근데 이젠 상황이 역전됐네?”
실제로도 별다른 대답을 내놓진 못했다. 차라리 재밌었다고 솔직히 말했으면 기분이 어땠으려나.
슬쩍 뒤를 돌아보니 아콰가 뒤에서 열심히 물을 모으고 있었다.
어느새 불어난 물은 내 얼굴 두 개는 합쳐놓은 것만 했다. 그 때문인지 이리나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간다.
허공에서 모이는 물이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아콰의 푸른 모습이 무서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리나도 바보가 아닌 이상 분명 생각이라는 걸 할 거다.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사람의 공포심이란 금세 생겨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할수록,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무서움이 커지는 법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떨리던 이리나의 입술이 한참 만에 열렸다.
“당신이 신의, 신……. 신께서 선택하신…….”
몸을 떨며 제대로 된 문장을 내뱉지 못하는 게 마치 연기를 하던 나 같았다. 그녀가 그렇게 무시하고 업신여겼던, 멍청한 오시리아 황녀 말이다.
“응. 이번 대 문양은 공교롭게도 내가 가지고 태어났어.”
손등을 아예 이리나의 코앞에 보여주며 말했다. 손등에는 여전히 푸른 빛을 내는 문양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리나의 눈이 내 손등을 보더니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곧 몸까지 벌벌 떤다.
왜 그런가 싶었는데 아콰가 거대해진 물 덩어리를 끌어다가 내 주변에 하나씩 둥둥 띄우고 있었다.
푸른 빛을 내는 물 덩어리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기이했으며 제법 위협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리나의 입이 한층 더 벌어졌다.
투실투실한 얼굴 위에 번진 경악이 기껍다. 입꼬리가 통제를 잃을 것 같아서 입술 끝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내가 재밌는 거 알려줄까? 이제 제국에는 비가 내리지 않을 거야. 그나마 유지됐던 호수도, 강도 전부 사라지겠지. 너희들이 원하는 신의 힘을 이용해서,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아……?”
이리나가 멍청한 소리를 냈다.
“제국에 비가 내리지 않기 때문에 주변의 국가에도 점점 물이 말라가기 시작할지도 몰라. 아, 타국으로 대피하고 싶어도, 물을 수입하고 싶어도 거친 바다가 배가 뜨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경우도 있겠지.”
최대한 무겁지 않게, 장난기 어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는 내용과 정반대인 가벼운 행동거지에 이리나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히길 반복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있잖아, 사람은 불리한 일이 생기면 원인을 찾으려고 해. 이상하지?”
이리나의 말을 끊고 던진 내 물음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사실 답을 바라고 물은 것도 아니니 상관없지만.
“그리고 그 이유를 누군가의 탓으로 만들어. 탓할 대상이 생기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지는 모양이야. 너희가 내게 그랬던 것과 똑같이 말이야.”
사람의 나쁜 부분은 아콰의 물거울을 통해 실컷 봐왔다.
사람의 나쁜 점을 책으로 쓰라고 한다면 내가 쓸 말은 더없이 많을 거다. 그에 비해 좋은 점을 쓰라고 한다면 다섯 줄도 채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이 싫다.
나 역시 사람이지만, 사람만큼 잔인하고 비정한 생물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리나는 여전히 말이 없다. 그녀는 마치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소리 없이 입만 뻐끔거렸다.
“사실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해봤어. 내가 만약 단순히 물만 없애면 분명 다들 도망갈 거잖아. 그렇지?”
국경을 넘든, 망명을 하든, 있는 자들에겐 어려운 것이 없다. 어디를 가든지 돈만 있으면 해결되지 않을 일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되면 피해를 보는 건 국민뿐이다.
가장 큰 죄를 저지른 왕과 귀족이 발을 빼게 된다면, 그건 조금 불공평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나는 너희가 도망갈 수 있는 수로를 전부 막아볼까 해. 물론 이웃나라에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게 수를 써볼 생각이야.”
트럼프 제국이 있는 거대한 대륙을 고립시켜버리자고 생각했다.
파도가 거세거나 혹은 강의 급류가 너무 빨라서 배를 띄울 수 없게 되면 말 그대로 그 대륙은 고립되고 만다.
거기에 트럼프 제국에서 신의 문양을 가진 황녀를 버렸다는 소문이 돌게 하는 거다.
트럼프 제국의 가뭄으로 이웃 나라에도 피해가 가게 된다면?
이웃 나라에도 비가 내리는 횟수가 줄어들게 된다면?
땅이 메마르기 시작한 이웃 나라들이 트럼프 제국의 물이 전부 말라버렸다는 소문을 듣는다면?
해상을 통한 최소한의 무역조차 되지 않는다면?
분노한 이웃 나라들의 칼끝이 어디로 향할지는 뻔한 일이다. 모든 것은 신을 저버린 트럼프 제국의 탓이라고 하겠지.
‘물론, 내 생각대로 이 계획을 진행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굳이 그 불안정함을 이리나에게 가르쳐줄 필요는 없다. 생각은 생각만으로 끝냈다.
실제로 저 계획은 아콰와 상의도 하지 않고 혼자서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 것이다. 그러니 확신은 할 수 없다.
하지만, 극한의 상황에 몰렸을 때 그들의 검이 향하게 될 곳이 어딘지는 확실했다.
나와 내 어머니가 당한 일을 트럼프 제국이 고스란히 당하게 되는 거다. 그들이 마녀사냥의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트럼프 제국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도 그 대륙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거야. 물론, 내 이기심에 타국에까지 피해를 줄 생각은 없으니까 심하게 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일이 년 정도는 좀 힘들 수도 있겠네.”
이리나의 벌어진 입에는 이제 주먹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더 벌렸다간 찢어질지도 모른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표정에 제법 기분이 좋아졌다.
그것과는 별개로 다리가 아파서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고 와 등받이를 끌어안으며 앉았다. 이리나와 드디어 앉은 채 정면에서 시선을 마주했다.
“당, 당신은 당신이 태어난 모국을 망하게 할 생각인가요?! 그랬다간 정말로…….”
“응.”
“……네?”
“응. 맞아. 난 트럼프 제국을 멸망시킬 거야. 아예 지도에서 싹 사라졌으면 좋겠어. 영원히, 내 눈에 띄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
등받이 위에 턱을 얹으며 담담히 말했다. 사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그만한 목표도 없다면 누가 십 년이나 그곳에서 멍청한 연기를 하겠는가.
“내 인생은 줄곧 그 더럽고 좁은 다락방이 전부였어. 오랜 시간 너희들의 방패막이가 되어줬지. 그러니까 그 대가로 나라 하나쯤 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아?”
누군가에게 내 인생을 보상해달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처음 십 년은 몰라도, 그 이후의 십 년은 내가 선택한 삶이다. 내 인생은 전부 열매를 기르기 위한 시간이었다.
“너는 내가 다락방 안에서 어떤 생각을 밥 먹듯이 했을 거라고 생각해?”
사실 머릿속에서 제국은 수십, 수백 번은 더 멸망했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노력의 대가로 열매가 맺혔다.
그러니까 줄곧 노력한 만큼, 수확은 해야지 않겠는가.
“그건……. 그건 살인이에요.”
이리나가 시퍼렇게 질린 입술로 내 말에 대답했다. 이리나의 말에 고개가 절로 기울었다.
“당신은 지금 살인을 하려고 마음먹은 거라고요! 신께서 내려주신 힘을 이용해서!”
이리나가 겁에 질린 채 경악한 표정으로 내게 소리쳤다.
그녀의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벌벌 떨리고 있었는데, 어찌나 심하게 떠는지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응, 맞아. 근데 그게 어때서?”
이리나의 말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딱, 딱. 딱.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계속 난다. 추위보단 두려움 쪽에 가까운 떨림이다.
내가 하는 말이 두려워서만은 아닌 듯했다. 이리나의 시선을 따라 몸을 돌리니 아콰가 수많은 물 덩어리를 내 뒤로 열을 맞춰 늘어놓고 있었다.
쉬지 않고 전부 얼굴에 맞으면 정말 숨이 막혀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히히히.>
의기양양하게 웃는 아콰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아콰의 머리를 톡톡 두드려주곤, 다시 이리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내가 하려는 게 살인이라고?”
“그, 그래요. 살인입니다. 사람을 죽이면 평생 죄가 따라다닐 거예요! 죄책감에 휩싸여 정상적인 생활도 못 하실 거고요. 게다가 신께서 내려주신 힘은 구원의 힘입니다. 그렇게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이 상황에 와서도 나를 가르치려 들다니, 그녀는 자신이 옳다고 굳게 믿는 모양이다.
신이 내게 준 힘이지만, 지금은 내 힘이 아닌가. 그걸 이용하는 게 뭐가 나쁘다는 거지?
내 기준으론 도저히 이리나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게다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절대 해선 안 되는 일입니다.”
이어지는 이리나의 연설에 결국 고개가 툭, 하고 완전히 옆으로 기울었다.
기이하게 꺾인 목에 신경 쓸 새도 없이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펴지지 않는 주름에 문양이 드러난 손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이리나의 시선이 내 손등에 꽂혔다.
문양을 빤히 바라보는 그녀를 무시하고 손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왜?”
“뭐가 왜냐는…….”
“그게 왜 안 되는 일인데?”
여전히 고개를 기울인 채 물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살인’이라고 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무슨 행위에든 이름을 붙이는 건 당연하니까.
하지만, 왜 그것이 안 되는 일인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이것 외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데? 나와 내 어머니가 당했던 일을 복수하기 위해 도대체 뭘 해야 하지?”
“그건! 법이라든가 그런…….”
조금 기분이 아연했다. 이미 모국에서 추방된 내가 어느 법을 들어 처벌을 요청하면 될까.
제국 전체를 상대로? 설사 그게 가능하더라도 왜 내가 그래야 하지?
“있잖아, 이리나.”
나지막하게 이리나를 불렀다. 내 부름에 이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비협조적인 모습에 아콰가 옆에 떠다니던 물 한 덩어리를 위협적으로 움직였다.
“예, 예……?”
그제야 입을 여는 이리나의 목소리가 떨린다. 시선은 아콰에게 고정된 채다.
아무래도 그녀는 아콰가 신과 관련 있는 무언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보단 아콰의 눈치를 더 살핀다.
이리나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안 돼?”
“그건 당연한 겁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건 해선 안 되는 일이에요.”
이리나가 내 물음에 언성을 높였다.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왜 죽이면 안 되는지 이유를 묻고 있지 않은가.
답답함에 미간을 눌렀다. 조금 짜증이 치솟아버렸다.
“그럼 내 어머니는 왜 죽였어?”
아콰가 보여주는 물거울 속에서 다른 어린아이들은 하루의 태반을 어머니의 품에서 지냈다.
굳이 보지 않아도, 그 안에서 따뜻한 열기가 느껴지는 건 나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왜 죽였어?”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평생 온기를 몰랐다. 앞으로도 몰랐다면 아마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프신 곳은 없으십니까?>
<안녕히 주무셨어요? 황녀님.>
하지만, 나는 뒤늦게 온기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서슴없이 마주 잡아 오는 손길이나 걱정스러운 목소리는, 평생 닿으려야 닿을 수 없는 먼 곳에만 있었다.
그것은 내가 언젠가 어머니로부터 받았어야 했던 것이기도 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친 햇살 같던 그 온기는 내게 또 다른 원망을 일깨웠다.
“너는 이 상황이 굉장히 억울한가 본데, 날 만든 건 너희야.”
애초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적어도 생각해뒀던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몰랐어야 했을 것에 나는 닿아버렸으니까.
“그건, 그자가…….”
변명하려는 듯 반사적으로 입을 연 이리나에게선 결국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무슨 말이 나올지 들어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리나는 입술만 열었다 닫기를 반복할 뿐, 무언가 말을 해줄 마음은 없어 보였다. 조금 짜증이 났다.
“그러니까…….”
이리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치 금붕어가 숨을 쉬는 것 같다. 뻐끔뻐끔 입을 움직이는 꼴이 우습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머니의 죽음엔 이유조차 필요 없었던 건가.’
아니면 까먹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저 원망을 몸소 받아들일 사람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저주의 근원인 줄 알았던 내가 사실은 ‘신에게 선택받은 자’라서 할 말이 없어진 건가?
생각하니 기분이 나빠졌다. 뜨거워지는 속을 참기 위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 그건 됐어. 이제 와서 이유를 듣는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니까.”
이유를 아무리 찾아도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진 않는다. 안타까운 죽음이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내 물음에 이리나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샐쭉한 표정의 아콰가 당당히 내 어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왜?”
“네?”
얘는 멍청한 건가. 왜 자꾸 반문하는지. 내 목소리가 작은 편도 아닐 텐데 말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먹히는 건 당연한 일이야. 물론, 나는 내가 강하다는 이유로 주어진 힘을 함부로 낭비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너희에게 나를 짓밟은 이유가 있었듯이 내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당해온 것을 되돌려줘야 한다는 목표는 있지만, 내가 강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을 깔아뭉갤 마음은 없다.
단지, 이것은 이들을 향한 분노일 뿐이다. 똑같이 이유가 있는 살인인데, 왜 나는 해선 안 되는 것일까.
단지, 다수와 소수의 차이라서?
“그건……!”
말하려던 이리나의 말문이 또다시 턱 막힌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이리나가 고민에 빠졌다는 것이 뻔히 보였다.
문득, 그녀는 모순에 휩싸여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이리나가 자신들이 했던 행위를 두둔하면 지금 내가 하는 행위가 정당화된다. 그러나 그것을 두둔하지 않자니 그건 그들의 태양을 무시하는 짓이었다.
‘뭐가 잘못됐는진 여전히 모르겠지만.’
나는 단순히 트럼프 제국이 싫은 것뿐이다. 나는 그들이 어떠한 형태로도 남아있는 것이 싫었다. 그 꼴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굳이 먼 길을 돌아온 것은 단순히 이들의 얼굴에 절망이 새겨지는 꼴을 보고 싶어서다.
그리고, 영원히 역사의 저편에 묻히길 바라서였다.
무엇보다 나는, 그것 이외의 가장 잔인한 방법을 모른다.
‘죽음보다 두려운 게 있나?’
줄곧 가꿔온 모든 것을 눈앞에서 잃게 되는 것이 가장 큰 절망일 거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는 이리나를 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멀리서 찾지 않아도 돼. 어제까지만 해도 너 역시 그랬잖아.”
이리나는 더 이상 입술도 뻐끔거리지 않았다. 그녀의 입매는 단단히 굳어있었다.
“너는 내가 저주받은 황녀에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천치인 약자였고, 네가 아비인 황제에게 권한을 하사받은 강자라고 생각해서 날 서슴없이 때렸지.”
“…….”
무언과 침묵은 대체로 긍정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정곡을 찔렀으니 변명할 말도 없겠지.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확인하니 입 안이 쓰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이번엔 그 반대가 됐을 뿐이잖아.”
애써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래, 그뿐이다.
나는 단지 내게 주어진 방법 중에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며, 사람을 절망시킬 수 있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다.
내게 그럴 만한 힘이 있다면, 실행에 옮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근데 무엇이 문제가 되는 거지?’
사람이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는 말이 정말로 이해되지 않는다.
아비인 황제는 강자였기에 내 어머니를 죽였다. 잔인하고 끔찍한 방법으로 죽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몸을 지킬 힘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거다.
나는 아콰가 보여주는 물에 담긴 기억을 봤다.
사지가 찢어지는 어머니를 봤다.
그 안에서 웃고 있던 사람들을 봤다. 그것은 내가 가진 기억 중 가장 서글픈 과거였다.
나는 이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다섯 살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아콰에게 말을 배웠고, 이치를 배웠고, 세상을 배웠다.
어린 날의 나는 작은 다락방 안에서 물거울을 통해 처음으로 세계에 닿았다.
그렇게 열 살이 되던 해 마치 미친 것처럼, 어린아이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안심해, 당장 죽이진 않을 거야.”
여상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겁에 질린 표정은 그동안 핍박받았던 스트레스를 한껏 날려주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기대고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옆으로 밀어뒀다.
차분한 얼굴로 침대 밑에 쪼그려 앉아, 이리나를 밑에서 올려다봤다.
“이리나. 사람의 몸에서 수분이 서서히 빠져나가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무슨…….”
“처음에는 갈증이 나서 물을 계속 찾아. 근데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질 않아. 몸은 점점 말라가기 시작하고, 입술은 바짝 마르고, 입 안은 버석거리지.”
아콰가 늘 내게 속삭이는 것처럼, 나도 차분하게 앞으로 있을 일을 읊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게 심해져. 배가 터질 것처럼 물을 뱃속으로 집어넣어도 갈증이 해소되는 건 잠시뿐이야. 뭐, 그렇게라도 물을 계속 먹으면 어떻게든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장난스럽게 말하다가 곧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트럼프 제국은 물이 귀한 나라잖아?”
질문이긴 했지만, 대답이 들려오진 않는다. 물론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기 때문에 곧바로 말을 이어 붙였다.
“하물며 배 위에서 네게 할당되는 물의 양은 얼마나 될까? 점점 바싹 말라가는 자신의 몸을 보다가, 미쳐 날뛰다가, 결국은 미라처럼 처참한 꼴로 죽는 거야.”
새하얗게 변하는 안색을 보다가 환하게 웃어줬다. 그녀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바가 아니지만, 죽어가는 어머니를 보며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질렀던 그들처럼.
손을 뻗어 이리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리나가 경련이라도 난 듯 파드득 몸을 떤다.
“음, 아콰. 어떻게 하는 거랬지?”
<그냥 명령하시면 된답니다. 그 ‘이리나’라는 이름의 그릇에서 물이 전부 사라지기를요.>
“괴, 괴무……. 당신은 미쳤, 미쳤어.”
내가 손을 대자 이리나의 떨림이 손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에 대한 두려움이기보단, 아마도 신의 힘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듯했다.
실제로 이리나는 겁에 질린 채 아콰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겨, 경비벼……. 억!”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려는 이리나의 얼굴에 물 덩어리가 던져졌다.
“쿨럭, 콜록콜록. 캑! 어흑…….”
이번에는 가까워서 그랬는지 퍽 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코와 입으로 물이 제대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물을 토해내는 꼴이 애처롭다. 조금 진정되었는지 이리나가 한참 만에 고개를 든다.
“나 몰래 나온 거니까 조용히 해줘.”
손가락을 내 입술에 가져다 대며 조곤조곤 말했다.
“음, 그럼…….”
막상 명령을 하려니 조금 어색하긴 했다. 주변을 한번 돌아보고 다시 이리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깨에 닿은 손등의 문양이 달빛에 비쳐 선명하게 보였다.
민망함에 주변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눈동자를 굴리다 입을 열었다.
“몸에 있는 수분이 서서히 빠져나가기를.”
아마 이곳이 이리나가 밟는 마지막 땅이 될 거다.
“종국에는 그 몸에 끔찍한 죽음이 내릴 수 있도록.”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등 위에 새겨진 문양에서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꾸물거리며 한곳에 뭉친 빛이 곧 이리나의 몸 안으로 스며든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떨떠름한 눈으로 이리나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빛이 스며든 것 외의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정말 허공에 혼자 중얼거린 것 같은 민망함이 몰려와 고개를 꺾어 아콰를 쳐다봤다.
“아콰, 이러면 된 거야?”
손톱으로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네! 주인님의 손이 닿았던 곳에 푸른 반점이 생겼을 거예요. 그건 낙인이에요.>
아콰가 뽀르르 다가와 허공에서 이리저리 뱅글뱅글 움직이다가 내 어깨에 앉으며 경쾌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연다.
<이제 이 여자가 죽으면 주인님도 알 수 있을 거예요.>
이리나는 제 몸을 여기저기 확인하더니 나를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전부 다 말할 겁니다!! 당신이 멀쩡하다는 걸 말할 거라고요! 당신이 신에게 선택받은 자라는 이야기도! 전부! 그렇게 되면 다시, 다시 원래대로……!”
그녀는 당장 몸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여서 헛웃음을 머금었다.
‘차라리 지금 당장 죽지 못한 걸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게다가 소문이라니…….
당연히 내줘야지. 그걸 위해서 지금 당장 죽이지 않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바였다.
겁에 질려 발악하는 이리나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원래대로 돌아가는 건 없어, 이리나.”
아, 정말 유쾌하다.
“기왕이면 조금 더 좋은 선택을 하지 그랬어. 나 같으면 살려달라고 빌었을 거야. 역시 죽는 건 싫거든.”
그녀는 물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저러는 것이다.
차라리 빌었으면 조금이나마 동정심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인데. 잔잔한 물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 중의 하나다.
지금껏 그 메마름을 느껴왔을 텐데도, 왜 물이 없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직접 소문을 내준다니 더 바랄 게 없네. 물론, 네가 아무리 부르짖어도 네 목숨이 끊길 때까지 아무도 믿지 않을 테지만.”
간결하게 대답하곤 훌쩍, 창문 위로 올라섰다. 아콰가 모아둔 물 덩어리로 내게 날개를 만들어줬다.
등 뒤에 손이 돋아난 감각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쏟아진 물에 의해 이리나의 머리카락과 옷은 엉망이었다.
“걱정하지 마, 이리나. 네가 죽고 한두 달쯤 뒤엔 믿기 시작하는 사람도 분명 생겨날 테니까.”
내가 한 번씩 트럼프 제국 주변의 다른 나라, 다른 마을에 나타나 비를 내릴 테니까 말이다.
그때까진 바로 의심을 사지 않도록, 이곳에서 숨을 죽일 필요가 있었다. 아직 내겐 천치인 오시리아 황녀가 필요했다.
‘결국, 그 집에서 탈출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네.’
황녀와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존재가 신의 문양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들도 이리나의 말이 단순한 헛소리가 아니라는 걸 믿게 될 거다.
“만나서 아주 거지 같았고, 남은 한 달 보람차게 살길 바랄게.”
말과 동시에 창문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날개를 파닥거리자 몸이 금세, 붕 떠오른다.
창문 밖에서 이리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커다랗게 눈을 뜨고 있었다.
“당신은 미쳤, 미쳤어……. 미쳤다고……. 신께서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요!”
소리치는 이리나를 보고도 모른 척 웃으며 허공에서 손을 흔들어줬다.
“안녕, 이리나.”
천천히 손을 내렸다.
“이건 선물.”
덧붙이며 손가락으로 이리나를 가리키자 아콰가 모아놨던 물 덩어리를 전부 이리나의 머리 위에서 떨어뜨렸다.
촤아악, 촤악! 갑작스럽게 물을 뒤집어쓴 이리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목을 앞으로 숙였다.
쫄딱 젖은 꼴이 물에 빠진 생쥐 같다.
“와, 드디어 어울리는 꼴이 됐네.”
산뜻한 얼굴로 마저 인사했다.
그리곤 미련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날개를 파닥거리며 움직이니 바람을 가르는 느낌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속도가 그렇게 빠르진 않지만,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사실만으로도 쾌감이 들었다.
“직접 때리지 못한 게 한이네. 역시 한 대 때릴 걸 그랬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페델리우스의 저택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다행히 저택은 여전히 쥐죽은 듯 조용했다. 대충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이불 속에 몸을 뉘었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상쾌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