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황녀님. 아, 하세요.”
메리가 포크로 고기를 찍어 내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포크질 정도는 할 수 있다. 밥 정돈 혼자 먹을 수 있다.
손과 발은 문제가 없으니까!
몇 번인가 내가 하겠다고 입을 열었지만, 메리는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오늘 음식은 뜨거운 게 많다는 이유였다. 거기다 대고 또박또박 따지고 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뚱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똑똑. 타이밍 좋게 노크와 함께 달칵, 문이 열렸다.
“하읍.”
마침 음식을 받아먹는 아주 좋은 타이밍이었다.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아, 망했어.’
눈을 질끈 감고, 음식을 씹어 먹었다. 페델리우스가 내 쪽으로 묵직한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는 찾아오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내 앞에 와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춘 페델리우스가 말했다. 그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여주기 싫은 장면을 보여준 것이 속에 불을 붙일 뿐이다.
입 안에 음식이 있어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우물거리며 최대한 빠르게 음식을 삼켰다.
페델리우스의 얼굴이 꽤 어둡다.
아콰가 어제 분위기가 사납다더니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응!”
“식사 중이셨습니까?”
“식싸? 밥?”
“예, 맞습니다.”
내 말에 페델리우스의 눈동자가 한층 더 크게 떠졌다.
“응!” 덧붙여 대답하자,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무표정한데도 무서운 느낌은 전혀 없다.
생긴 것과 다르게 상당히 요령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버려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나마 안 들킨 게 다행이려나.’
친절한 이들을 보면 양심에 찔리지만, 원하는 것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멀뚱히 앉아있다가 슬쩍 몸을 돌렸다.
배는 고픈데, 이 사람 앞에서 먹을 자신은 없다.
도대체 왜 이 남자 앞에선 민망함이 한층 배가되는지 모를 일이다.
‘남자라서 그런가.’
여태 상대한 사람은 여자밖에 없었으니 그 가능성에도 무게가 실리긴 했다.
메리가 또 음식을 내 앞에 내밀었다. 코끝을 자극하는 고기 냄새가 매우 입맛을 돋운다.
“안 해! 배부러!”
혀 짧은 소리로 고개를 저어가며 대답했다. 음식을 많이 먹진 않았다. 그 때문인지 메리가 가져온 쟁반에는 음식이 거의 고스란히 남아있다.
“벌써요? 아직 이만큼이나 남았는데…….”
“배부러!”
내가 직접 먹게 해줬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럼 남기기는커녕 싹싹 긁어 먹을 자신도 있다.
불만스럽게 쟁반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보면 볼수록 먹고 싶어지는 게 음식이다.
“입이 짧으시군.”
페델리우스가 미간을 설핏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메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 없이 맞장구를 친다.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내가 먹게 해줬으면 해결됐을 일이긴 하다.
“생각보다 말이 빨리 느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죠?! 가르쳐드리면 곧잘 따라 하신답니다!”
메리가 눈을 빛내며 페델리우스의 말에 대답했다. 내가 열심히 단어를 말하는 것이 그리 쓸모없는 일만은 아닌 모양이다.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메디르 님께서도 말을 많이 걸어주라고 하셨다. 너라면 걱정 없겠지.”
“네! 쉬지 않고 말하고 있어요.”
메리가 주근깨 새겨진 얼굴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얼마나 밝게 웃는지 후광이 비쳐 보일 것 같다.
부담스러움에 시선을 슬쩍 돌리며 컵을 두 손으로 잡아 입에 가져다 댔다.
꿀꺽.
물 한 모금을 목으로 넘기는 순간 시선이 느껴졌다. 눈동자만 굴려 앞을 보니 메리와 페델리우스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메리의 입은 한껏 벌어져 턱과 얼굴이 분리라도 될 것 같았다.
“……?”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자 메리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물도 혼자 드실 수 있으셨군요!”
“대단하십니다, 황녀 전하.”
메리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페델리우스도 거들며 말했다. 순간 눈앞이 멍해졌다.
……얘네는 대체 날 뭐로 보고 있는 걸까?
감동한 기색이 물씬 느껴지는 시선에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나를 정신연령 몇 살로 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말없이 물컵을 내려놨다.
물론 내 탓도 있지만… 손발이 있는데 물 정도는 먹겠지.
‘얘들 앞에선 물도 못 먹겠어.’
포크라도 쥐었다간 졸도할 기세다. 내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쩔 수 없다곤 생각하지만, 이런 식의 칭찬은 평생 받아본 기억이 없었으니까.
‘칭찬인데 칭찬받은 것 같지도 않고.’
저 진지한 표정만 아니었다면 분명히 비꼬는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이 둘을 상대하다간 내가 지칠 것 같다.
“황녀 전하.”
“우응?”
“혹시 이게 뭔지 아십니까?”
그렇게 말한 페델리우스가 잘린 과일을 가리키며 물었다.
말없이 페델리우스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껍질도 다 깎여서 새하얀 속살만 드러난 과일이었다.
미간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응?”
고개를 기울였다.
절대! 모르는 게 아니라, 그냥 연기하는 것뿐이다. 과일이야 껍질을 깎아놓으면 다 그 모양이 그 모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속살이 하얀 과일이야 한두 개가 아니다. 씹으면 아삭할 것 같은 모양새지만 기억을 뒤져도 정답이라고 할 만한 것이 확 튀어나오질 않는다.
“주인님, 황녀님께 단어를 가르치는 편이 좋을까요?”
“그래.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대화를 많이 해주도록.”
“물론이죠! 맡겨만 주세요.”
메리가 포크로 새하얀 속살을 가진 과일을 찍어 입에 넣어줬다. 한 입 깨물자마자 새콤달콤한 과즙이 툭 튀어나왔다.
아삭거리는 식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씹히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제야 머리를 번뜩이는 단어가 있었다.
‘사과였구나.’
먹는 건 처음이지만, 빨간 사과를 본 적은 많다. 누군가가 그것을 먹을 때 나는 소리도 귀에 익은 것이었다.
이렇게 단면이 예쁘게 깎인 사과는 본 적이 없어서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아삭거리는 소리가 물거울을 통해 듣던 것보다 훨씬 생생했다. 새콤달콤한 과즙이 입 안 가득 맴돌았다.
난생처음 느껴본 달콤함에 절로 사과에 손이 갔다. 사과 옆에 놓인 포크를 잡고 사과를 찍었다.
그걸 그대로 입에 넣었다. 그건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아, 제발.’
오물오물 사과를 씹어 먹는 도중에 나를 향한 적나라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러다 정말 몸 어딘가에 커다란 구멍이 뚫릴 것 같다. 아삭. 그 와중에도 사과는 맛있었다.
포크에 찍은 사과를 다 먹자, 눈앞에 접시가 쭉 내밀어졌다. 사과가 담긴 접시였다. 작고 가늘지만 험한 일을 제법 한 거친 손이다.
귀여운 얼굴과는 다르게 손은 굳은살이 박여있었다.
뻑뻑한 고개를 들었다. 메리가 웃으며 사과가 담긴 접시를 내밀고 있었다. 페델리우스는 일어날 생각도 안 하고 나를 쳐다본다.
쿡. 포크로 찍은 순간 메리가 나를 끌어안았다.
“와아, 정말 배우는 게 빠르신 것 같아요. 황녀님은 천재가 분명해요!”
‘아니, 이건 천재가 아니지.’
메리의 망상을 막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페델리우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는 제자리에서 방방 뛰는 메리의 말에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찌나 진지한 표정인지 무슨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마음은 고스란히 사라졌다.
“주인님, 곧 나가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 잠깐 뭘 좀 주러 왔다.”
그렇게 말한 페델리우스가 들고 있던 천 주머니를 열어 뭔가를 내 손에 쥐여 줬다. 황금빛이 나는 그것은 고급스러운 문양을 새긴 금막대기였다.
나로선 난생처음 보는 물건이다.
딸랑. 한 번 흔들었더니 소리가 났다. 어쩐지 예감이 싸했다. 흔들 때마다 안에서 방울 소리 같은 게 계속해서 난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건을 쥔 채 고개를 들었다.
“그…….”
페델리우스가 드물게도 내 시선을 피하더니 굳은살 박인 손으로 마른세수까지 한다.
“하아.”
한숨까지 쉬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확실한 건 그로서도 그다지 내켜 보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를 어떻게 봐도 어린아이가 좋아할 법한 물건이었다.
‘장난감, 인 것 같은데.’
내 나이에 가지고 놀 만한 건 절대 아니다. 페델리우스를 쳐다보던 눈에 힘이 들어갔다. 페델리우스가 두어 번 한숨을 더 내쉬곤 나를 올려다봤다.
“왕, 그러니까 폐하께서 황녀 전하께 선물로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폐하?”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지만, 목소리는 높이 올라가지 않았다.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다행히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왕이 내게 주라고 했다고?’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왕은 내 정체를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내게 이런 걸 주다니. 말 그대로 놀리는 행위였다. 장난이라도 하자는 건가.
“네. 그리고……. 음.”
페델리우스가 말을 하다 말고 또다시 고개를 숙인다. 답답함에 그의 옷자락을 끌어당기자 그제야 페델리우스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제가, 어제 폐하와 대련을 했는데 졌습니다.”
“대려언?”
“네. 그러니까……. 음.”
페델리우스가 단어를 고르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꾹 담으며 페델리우스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싸웠, 아니 다퉜……. 음…….”
페델리우스가 손으로 얼굴을 한 번 더 쓸어내렸다.
“네, 싸웠는데 졌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주먹을 쥐고 뭔가를 때리는 시늉을 하며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설명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특이했다. 기분 나빴던 이유가 이거였던 모양이다.
“져씁미다!”
페델리우스의 말을 따라 힘껏 소리치니 그가 벌려진 입술을 조가비처럼 꾹 닫으며 다문다. 밤하늘을 닮은 군청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가 나를 쳐다봤다.
“……다음엔 제가 이기겠습니다.”
‘아니, 상관없는데.’
져도, 이겨도 내게 피해가 오는 것은 아니니 상관없다. 게다가 잠시 본 것뿐이었지만 그 왕은 강해 보였다. 적어도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닌 것이 뻔히 보일 정도다.
“폐하께서 황녀 전하를 한번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얘 이거, 내가 이해할 거라 생각하고 말하는 건가? 말도 어찌나 정중한지 단어 하나하나가 부드럽지 않은 것이 없다.
어휘들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으응?”
“아. 그러니까…….”
페델리우스가 말끝을 늘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러더니 주변에 있던 펜 하나를 잡았다. 그리곤 그것을 내 앞에 보여줬다. 일련의 상황이 제법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게 폐하입니다.”
“폐하아?”
‘이게?’ 속으로는 코웃음을 흘렸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펜이다. 펜 이외에는 아무것도 될 수가 없다.
저게 펜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페델리우스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이건 펜인데, 지금만 폐하인 겁니다. 그러니까 조금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비유를 드는 겁니다.”
얘가 지금 뭐라니? 떨떠름한 시선이 한층 더 떨떠름해졌다. 페델리우스가 나를 보며 다시 입술을 열더니 펜을 다시 원래 자리에 내려뒀다.
“제가 다음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어쩐지 진중한 얼굴이 된 페델리우스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겠습니다, 황녀 전하.”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다 고개를 손을 들었다.
“안녕!”
붕붕 손을 흔들자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곤 몸을 돌렸다. 먹은 게 벌써 다 소화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딸랑.
방울 소리가 나를 비웃듯 또랑또랑 울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왕 역시 정상은 아닌 듯하다.
‘아니면 나를 놀리고 싶은 거든가.’
쥐고 있던 장난감을 침대 위에 던지듯 내려놨다. 딸랑거리는 것이 참 시끄럽다. 아침부터 왕을 보겠다고 사라진 아콰가 또다시 그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