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99)

* * *

“이건…….”

벌어진 입을 닫았다. 순간, 숨이 멈춰버렸다.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다.

남자가 물을 찾아 헤매던 곳이 강가가 아니었던 이유가 눈앞에 있었다.

<주인님, 인간이 오고 있어요. 일단 위로 올라가요!>

“아, 응.”

아콰의 말대로 집중해 날개를 만들었다. 위로 올라가니 여기저기에 경비병들이 깔린 것이 한눈에 보였다.

그들을 피하듯 굵은 나뭇가지에 발을 디뎠다.

그리곤 고개를 내려 말없이 펼쳐진 풍경을 내려다봤다. 높은 곳에서 보니 훨씬 잘 보인다. 마치 종말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줄곧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봐왔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쁜 점만큼은 말이다.

‘난 우물 안의 개구리였구나.’

아콰가 가르쳐준 문장이 떠올랐다. 설마 그보다 더한 것이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잔혹하리만치 끔찍한 광경이다.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느리게 얼굴을 쓸어내리며 입을 앙다물었다.

코끝을 찌르는 냄새와 불합리한 광경과 메마른 땅이 한 공간에 어우러져 시야에 잡혔다. 그 광경에 현기증이 돌 것 같아 이마를 짚었다.

속이 이상하다.

강가의 한쪽에는 시체가 쌓여있고, 피가 낭자했다. 그곳을 지키는 병사들은 황실의 병사들이었다.

피인지 뭔지 모를 것들이 웅덩이를 만들고, 벌레가 들끓는다.

병사들은 내킬 때마다 물을 한두 모금씩 먹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무릎 꿇은 채 물을 구걸하며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썩은 내가 진동한다. 난생처음 맡아보는 악취였다.

높은 곳에 올라오니 그나마 강이 보인다. 저렇게 막아놓았으니, 아까 그 남자도 길거리를 헤매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어이, 슬슬 저거 태울 때가 되지 않았어?”

병사 하나가 시체를 가리키며 말한다. 쌓여있는 시체 더미가 마치 언덕처럼 봉긋하게 올라와 있었다. 저렇게 모아서 한 번에 태우는 모양이었다.

“어, 태워야지. 지금 할까?”

“그래, 기름 뿌려놔. 횃불 가지고 올 테니.”

‘……아니 저 사람들은 어떻게 멀쩡히 숨을 쉬지?’

악취에 손을 들어 코를 막았다. 강이 있어야 할 곳엔 가시덩굴로 감긴 울타리가 높게 쳐져 있다.

병사들이 지키는 문 앞이 유일하게 강에 다가갈 수 있는 입구인 듯했다.

이렇게까지 물을 통제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개중에 몇몇은 돈을 받고 물을 퍼다 주는 모습도 보였다.

썩은 건 귀족뿐만이 아니었다. 계급의 아래쪽에도 또 다른 계급이 존재했다.

병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시체를 한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개중엔 온몸에 가시가 박혀 구멍이 뚫린 시체도 있었다. 상처에서 진물이 흐르다 못해 시체가 썩어가고 있었다.

어린아이도, 노인도, 너 나 할 것 없이 이 불합리한 풍경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뭐야, 이건.”

“무, 무우…….”

손가락도 까딱할 힘이 없어 보이는 아이가 말했다.

아주 작디작은 목소리였으나, 소리에 민감한 내겐 충분히 들렸다. 입 모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뭐라고? 안 들려. 곧 죽겠구만.”

낄낄거리며 웃은 병사가 아이의 뒷덜미를 들어 올려 시체의 산 위로 던졌다.

그 무자비한 손길에 던져진 아이가 신음했다. 병사 하나가 그 위로 기름을 뿌린다. 많은 양도 아니었다.

“……아콰, 쟤 살아있는 거 아냐?”

<네. 아직은 살아있네요.>

눈도 떼지 못하고 물은 질문에 아콰가 담담히 대답했다. 나무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툭, 나무 가시가 손에 박혔다.

뒤늦게 느껴지는 둔탁한 통증에도 꿈틀거리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야, 쟨 살아있는데?”

병사 하나가 아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차피 오래 못 가. 나중에 시체 처리하는 것도 귀찮으니 이참에 한 번에 치우자고.”

“하긴, 빨리 죽는 게 행운일지도 모르지.”

“푸하하, 저 꼬맹이도 죽어선 감사하다고 할 거야. 더는 이 더위에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아이의 흐린 눈이 병사들을 향했다. 죽어버린 눈은 삶의 의지조차 상실한 듯 보였다.

어차피 죽는다. 아콰에게 들은 대로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당연한 거라고 했다.

‘죽어가는 것에 슬퍼할 필요는 없다고 했지.’

난생처음 든 의문이었지만, 정말일까?

나는 괴로웠다.

어머니가 죽어가는 모습을 봤을 때 나는 심장이 아팠다. 물거울을 통해 보는데도 그랬다.

어머니의 죽음도 당연한 것이라면 왜 그렇게 괴로웠을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콰의 말이 틀릴 리는 없으니까.’

툭, 병사들을 바라보던 아이의 목이 옆으로 꺾였다. 삶의 의지조차 없던 시선은 이내 생기조차 잃어버린 듯했다.

병사 하나가 횃불을 시쳇더미 위로 던졌다. 새빨간 화마가 순식간에 시체를 뒤덮는다.

“아…….”

그건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시커멓고 검붉게 굳어있던 것들이 붉은 해일에 휩싸인다.

천천히 퍼지는 듯 보였던 불은 순식간에 시쳇더미 전체에 옮겨붙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새까만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고, 악취 사이로 매캐한 냄새가 섞인다.

잿가루가 조금씩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말없이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봤다.

심장이 술렁인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심장이 거세게 박동하며 요동쳤다.

<아, 근데 자세히 보니 저 물은 더 못 쓰겠네요.>

시선을 아래에 고정한 내게 아콰가 말했다. 언제나와 같은 담담한 목소리다.

아콰의 목소리에 울렁거림이 차츰 가라앉았다.

“응? 왜?”

진정하자, 자신에게 말하며 시선을 아콰에게 옮겼다.

느릿하게 돌아간 시선은 마지막, 아이의 몸 위로 불이 옮겨붙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기뻐하세요, 주인님. 저들은 스스로 자멸할 거예요. 굳이 주인님께서 여기까지 걸음 할 필요도 없었네요. 저건 마르지 않게 그냥 두는 게 좋겠어요.>

아콰가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유를 물으려고 입을 연 순간 손목에 열기가 느껴졌다. 미간을 찡그리며 시선을 내려 손목을 쳐다봤다.

내 시선이 닿는 순간,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팔찌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열기를 뿜기 시작하는 물로 된 팔찌는 척 보기에도 위험해 보였다.

심지어 팔찌에서 수증기가 뿜어지기까지 했다.

“아, 아콰? 이거 이상한데? 잠깐, 이거 점점 따뜻해지는데? 아니 곧 뜨거워질 것 같은데?!”

<헉! 제한시간인가 봐요. 주, 주인님. 일단 저 강에 수직으로 뛰어드세요! 바로 통로를 만들 테니까요.>

아콰가 다급하게 하늘로 높이 오르며 내게 말했다.

아콰의 다급한 움직임에 생각할 시간도 없이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강줄기 바로 위까지 날아올랐다. 흐르는 물은 아직 새파랗다.

“들키면 어떡해?”

<저 물을 얼마나 마셨는지는 몰라도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에요.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아콰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술렁이는 심장을 달래듯 주먹으로 툭, 가슴을 내려쳤다. 그리고 그대로 강물에 수직으로 낙하했다.

솔직히 조금 무서워서 눈은 질끈 감은 채였다. 풍덩,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몸에 물이 닿았다.

천천히 눈을 뜨니 기분 나쁜 뭔가가 강 밑에 가라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려고 눈을 가늘게 뜨는 순간, 시야가 반전됐다.

캄캄한 어둠을 지나 몸이 튕겨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을 땐 이미 페델리우스의 저택이었다.

정확히는 뒤뜰에 있던 연못 말이다. 잔디밭이 피부로 느껴졌다.

“축축해…….”

그래도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다. 메마른 공기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고 밤새가 우는 곳이다. 어슴푸레했던 트럼프 제국과는 다르다. 공기도 메마르지 않다. 물이 충만하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찰박. 손목에 있던 팔찌가 물이 되어 사라졌다.

“올라가자.”

근데 너무 축축하다. 손을 옷에 대고 수분을 빨아들이는 상상을 했다.

옷에 스며들어있던 물이 순식간에 모여 덩어리가 되었다. 손바닥에 둥둥 떠다니는 그것을 연못에 던졌다.

<와아, 맞아요. 그렇게 하시면 돼요. 물 모으는 것 자체는 아주 쉽답니다.>

“그래, 가자.”

<네, 주인님!>

날개를 만들어 2층으로 날아올랐다.

젖었던 몸이 마르니 뽀송뽀송 부드러워졌다. 쓸데없이 편리한 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길게 하품을 하며 창틀에 올라섰다.

창문을 열지 않고 일단 유리창 사이로 안을 들여다봤다.

다행히 페델리우스는 아직 잠들어 있다. 소파에서 자는 것이 제법 불편해 보인다.

‘침대에서 안 자는 이유를 물어본다면서 깜빡했네.’

여전히 의아한 부분이다.

이곳은 페델리우스의 집이고, 나는 얹혀사는 신세다. 내가 소파에서 자면 모를까, 집주인인 그가 저렇게 잘 필요는 없지 않을까.

둥둥 떠다니는 의문을 뒤로한 채 조용히 날아 침대 바로 옆에 착지했다. 오늘 본 풍경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아콰에게 묻고 싶은 게 많다. 아콰가 했던 의미심장한 말에 대해 듣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다. 궁금증을 눌러 담으며 조심히 이불을 붙잡았다.

슥. 스윽.

이불이 스치는 소리가 생각보다 시끄럽다.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히 이불을 들쳤다. 심장이 벌렁거린다.

살아오면서 이것보다 더 긴장감 넘치는 일이 있었던가.

다리 한쪽을 올리고 몸을 이불 속에 집어넣었다.

‘이제 나머지 반만 넣으면…….’

“황녀 전하?”

“흡!”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몸이 파드득 떨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침대에 올라타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달래듯 가슴께로 손을 올렸다.

목이 고장 난 장난감처럼 삐거덕거린다. 돌아가지 않는 목을 애써 돌려 시선을 뒤로 옮겼다.

목을 꺾은 곳엔 눈을 가늘게 뜬 페델리우스가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는 멍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듯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 채 적막이 흘렀다.

나는 말없이 침대에 올렸던 다리를 내렸다. 눈동자는 안 봐도 떨리고 있을 거다.

꿀꺽. 긴장이 삼켜지는 소리가 적막 속에 흘렀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셨습니까?”

‘피…… 필요한 거?’

아니 없는데. 내 눈이 빠르게 방 안을 훑었다. 당장 급한 건 없다. 필요한 것도 없다. 뭣보다 머릿속이 반쯤 패닉에 빠졌다.

들키진 않았겠지? 페델리우스를 보니 알아챈 것 같진 않다.

‘뭐라도 대답해야 하는데.’

뭐가, 필요하지? 생각에 잠긴 채 눈동자만 열심히 굴렸다.

사실 필요할 만한 건 메리가 전부 협탁에 올려두고 갔다.

휴지부터 시작해서 수건, 물과 컵, 심지어 용도를 알 수 없는 번쩍거리는 세숫대야까지 말이다.

너무 꼼꼼해서 필요한 거라곤 있을 수도 없다. 게다가 협탁은 침대 바로 옆에 있다. 굳이 내려갈 필요 따위 없을 만큼 아주 가까이 말이다.

“화…….”

“예, 말씀하십시오.”

어느샌가 코앞까지 다가온 페델리우스가 몸을 굽히며 대답했다.

자다 말고 코앞까지 다가온 모습에 말문이 턱 막혔다. 게다가 머리도 새 둥지 수준으로 엉망이다.

“화장실…….”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웅얼거렸다.

단언하건대 아주 한심한 변명이었다.

내가 다 큰 남자 앞에서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야 했을까. 차라리 아콰에게 화병으로 뒤통수를 내리쳐달라고 한 것이 조금 더 현명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아!”

페델리우스가 깨달았다는 듯 감탄사까지 흘린다.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이자 그가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페델리우스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붙잡았다.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응.”

걷는 거 말고 뛰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일단 이 손을 뿌리치고 어디든 날아가고 싶은 마음이라는 건 확실하다. 페델리우스가 나를 조심스럽게 이끈다.

‘아니, 근데 도대체 방 안에 있는 화장실을 왜 같이 가?!’

그냥 다녀오라고 한마디 해주고 자도 될 일이다. 굳이 화장실까지 데려와 또 그 앞에 몸을 굽힌다.

여기서 민망한 건 분명 나뿐일 거다. 페델리우스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으니까.

물론 그에게 이게 당연한 일이라는 건 알지만.

“혼자서 괜찮겠습니까? 메리를 불러드릴까요?”

화장실 간다고 자는 애를 깨우라고? 그럴 필요성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혼자! 괜찮아!”

대답이 없으면 당장에라도 부를 기세라 다급히 대답했다.

메리를 부르는 것도 싫고, 페델리우스가 같이 들어오는 건 더 싫다.

뭣보다 사실 지금 별로 화장실을 가고 싶진 않았다. 물을 먹은 것도 아니고, 배가 아픈 것도 아니니까.

찬물에 얼굴을 담그고 싶다. 몰린 열이 홧홧하게 뜨거운 기운을 내뿜었다.

그렇다고 얼굴에 물을 뚝뚝 흘리고 나갔다간 잔소리를 할 게 뻔했다. 대충 화장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나왔다.

페델리우스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밤이 깁니다. 조금 더 주무십시오.”

“응!”

정말 피곤하니까 제발 재워줘. 하품하며 눈을 손등으로 비볐다. 오늘 본 풍경은 아마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를 눕혀준 페델리우스가 또다시 침대 한편에 앉았다. 시간을 되돌린 기분마저 든다.

이대로 잠들 때까지 이 남자는 여기서 움직이지 않을 거다.

“자!”

가서 자라는 것을 무언으로 항의하듯 손가락으로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페델리우스가 어쩐지 기분 좋은 미소를 입가에 띠며 내 손을 잡아 이불 속으로 조심히 넣었다.

“예, 안녕히 주무십시오.”

페델리우스가 목 밑까지 이불을 덮어줬다. 묵직한 이불까지 몸을 덮으니 한층 더 졸음이 쏟아진다. 모든 게 다 좋다.

다 좋은데…….

‘왜 안 가고 뿌듯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는 거야.’

또 어떤 부분이 그의 기분을 좋게 했는지 나로선 모를 일이다.

분명히 내 말뜻을 잘못 알아들은 게 뻔하다. 지적할 수도 없는 현실이 답답했다.

‘조금만 더 참자.’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지금은 불안한 요소가 너무 많다. 가장 불안한 건 자르딘의 왕이다.

자르딘의 왕이 도대체 무슨 존재인지, 왜 나를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는지,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왕과의 만남은 피할 수가 없는 사안이네.’

아콰가 말해줄 수 없다면 내가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 과연 부딪쳐서 뭔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아콰는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그곳의 장면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만약 자르딘의 왕에게 같은 능력이 있다면 이 물로 둘러싸인 나라에서 도망가는 건 무리다.

답답함에 눈이 다시 번뜩 뜨였다. 나를 계속 보고 있던 듯한 페델리우스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민망하다.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아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무심하게 눈을 감았다.

‘아이씨, 가서 좀 자라고!’

베개에 얼굴도 묻지 못하고, 몸은 뻣뻣하게 긴장한 채다. 이 상태로 퍽이나 잠이 오겠다. 움직임 하나도 신경 쓰일 정도였으니까.

“잠이 잘 오지 않으십니까?”

‘……너만 없으면 잘 올 것 같아.’

“다음엔 조금 더 공부를 해오겠습니다.”

‘너만 네 자리로 돌아가 주면 그런 귀찮은 일 할 필요 없다니까?’

맘 같아선 가라앉은 눈으로 노려봐주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눈을 뜨면 또 쓸데없이 말을 걸어올 거다.

아예 눈에 힘을 줘 질끈 감아버렸다.

“……자장가라도 배워야겠군.”

페델리우스가 조용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담담하고, 또 자신을 자책하는 어조에 눈감은 채 떡하니 입을 벌릴 뻔했다.

늘 생각하지만, 이 남자는 도대체 날 몇 살로 보고 있는 걸까?

물론! 내가 어린아이인 척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전에 내가 먼저 어린애에서 벗어날 거다.’

속으로 페델리우스의 말을 맞받아치며 슬쩍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하지만, 페델리우스가 곧 다시 내 어깨를 잡아 나를 바로 눕혔다.

“그렇게 자면 허리에 좋지 않습니다.”

이제는 말을 덧붙이기도 싫어 눈을 떴다. 눈에 힘을 주며 페델리우스를 노려봤지만, 그는 말없이 흐트러진 이불을 다시 한번 정리해줄 뿐이다.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남자야.’

쓸데없이 다정하고, 예의 바르고, 의심도 하지 않는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상대를 내버려 둘 생각은커녕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신경 써준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을 정도로.

“잠이 오지 않으면 따뜻한 물을 가져다 드릴까요?”

물? 따뜻한 물이라. 그걸 마시면 잠이 잘 올 것 같긴 하다. 아까 찬물에 들어간 탓인지 몸이 아직 뻣뻣하게 긴장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으니까.

[물, 제발 물을…….]

[무, 무우…….]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그대로 몸이 굳었다.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다.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황녀 전하?”

“응. 물 조아.”

한 박자 늦게나마 다치지 않은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내 말에 대답한 페델리우스가 곧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방에서 나갔다.

시선도 없이 조용해진 방에서 말없이 이불만 내려다보다 손톱으로 이마를 긁었다.

“아콰.”

<네, 주인님.>

아콰가 모습을 드러내며 내게 대답했다. 잔잔한 물소리가 기분 좋게 울린다. 푸른 빛이 거세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켜준다.

“내가 오늘 한 일 중에 혹시 잘못된 일이 있었어?”

<오늘요? 아뇨, 없었답니다.>

아콰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가만히 아콰를 바라봤지만 언제나 그렇듯 아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

<네, 그럼요.>

“그럼 피곤한 게 맞나 보네. 아까 본 그 시체의 산이 충격이었던 건가.”

손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한숨 쉬듯 말했다. 페델리우스가 가져다주는 따뜻한 물을 마시고 얼른 푹 자야겠다는 생각만 든다.

그렇게 많은 시체를 본 건 처음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수고했어, 아콰도. 얼른 쉬렴.”

<네, 내일 봬요!>

은은하게 비치던 푸른 빛이 사라졌다. 술렁이는 가슴은 여전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페델리우스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김이 풍기는 물이 담긴 잔이 있었다.

“뜨거우니 천천히 식혀서 드십시오.”

‘……응, 알겠으니까 컵 좀 줄래?’

속으로 페델리우스의 말에 태클을 걸며 물컵을 노려봤다.

사실 말이 식혀서 먹으라는 거지 페델리우스는 물을 숟가락으로 떠서 제 입으로 식히고 있었다.

컵을 주지도 않고 어떻게 식혀 먹으라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자. 아, 하십시오.”

‘……얘 분명히 뭔가 있어.’

다음에 메리가 페델리우스에게 도대체 뭘 가르치고 있는 건지 떠봐야겠다. 아마, 조금 뒤의 일이 되겠지만 말이다.

답답함과 가슴의 술렁거림에 결국 말없이 입을 벌렸다.

“잘하셨습니다!”

페델리우스는 매우, 아니 조금 심각하게 기뻐 보였다. 상당히 무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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