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 황녀님 2권
Ⅲ
“예, 다녀오겠습니다.”
달칵, 문을 닫고 나와 주먹을 꽉 쥐었다. 간신히 유지하던 표정이 결국 일그러졌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친 상처는 명백히 방 안에서 다친 것이 아니다.
학대의 흔적이라기엔 너무도 최근의 상처였다.
‘어제 그게 침대에서 내려오던 게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군.’
그제야 다른 방면으로 생각을 틀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침대 위로 올라가려던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진다.
어디서 다쳤는지는 감도 잡히지 않고, 어떻게 다쳤는지는 더 모르겠다.
“또 밖에 나가신 건가.”
일전에는 창문에서 떨어졌고, 이번엔 밖에 나갔다 왔다.
그쪽에 초점이 맞춰지니 아예 문 앞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걸음을 옮기며 생각에 잠겼다.
이럴 때는 폐하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이 좋다는 걸 알지만, 매번 그 대가가 혹독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짓궂은 장난을 칠지 벌써부터 두렵다.
‘제법 깊게 파였었지.’
피도 상당히 흘렸을 거다. 상처가 굳은 정도를 보면 어젯밤에 다친 것이 분명했다.
상처는 보는 내가 더 아파질 정도였다. 게다가 굵직한 가시도 제법 박혀있었다.
아무래도 메디르 님께 말씀을 드려 약이라도 받아와야 할 듯했다.
그녀는 제법 아파 보이는데도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어젯밤이라도 약간 눈치를 줬다면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저 무심하게 상처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무감정했다. 그건 명백히 통증에 익숙해져 있는 눈이었다.
통증에 익숙하다는 것은 그만큼 아픔을 받는 일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후우.”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단지 순수한 그녀를 그만큼 길들인 뭔가가 있었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폐하께선 뭘 알고 계시는 눈치였는데.”
내가 묻는다고 순순히 대답해주지 않을 걸 안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또 당해야 한다 생각하니 속이 답답했다. 하지만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면 나도 알아야 했다.
아니면, 오늘처럼 지켜줄 수가 없으니까.
눈앞에서 누군가가 다치는 건 질색인 일이다. 피를 보는 건 더욱 싫다. 하물며 그게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르니 답답할 뿐이다.
‘……도대체 소리 하나 없이 어떻게 나간 거지?’
소리가 조금이라도 났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다.
어린 나이에 전쟁 통에서도 제법 구른 몸이니 작은 움직임이라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답답함을 삭이기 위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느새 왕궁에 도착해 있었다. 오늘도 폐하의 일용할 장난감이 될 생각을 하니 위가 아팠다.
똑똑.
“들어와.”
노크를 하자마자 안에서 허락의 말이 들렸다.
“실례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늘도 소파에 드러누워 나를 맞이하는 폐하가 있었다.
의욕이란 의욕은 다 집어던진 것 같은 표정이다. 이제는 익숙한 풍경에 말없이 폐하의 곁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간밤에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묵직한 걸음으로 다가가 늘 하는 인사를 건넸다.
“잠? 아니, 한숨도 못 잤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 있었지. 있었어.”
폐하가 머리 아픈 듯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잘 자랄 때까지 믿음직한 사육사에게 목줄을 맡겨둔 맹수 한 마리가 있었는데, 어젯밤에 갑자기 탈출해서 사고치고 왔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심각해.”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으로 바닥 청소하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말입니다.
튀어나올 것 같은 말을 꾹 눌러 담으며 머리카락을 정돈해 소파 위로 올려줬다.
아무래도 그는 심기가 제법 불편해 보인다.
‘맹수 같은 걸 키우셨던가.’
자신이 알기로 이 왕궁 내에 그런 생물은 없다. 그럼 이건 평소와 같은 말장난일 확률이 높았다.
아무것도 모르니 적당한 반응을 해줄 수 없지만 말이다.
소파 옆에 한쪽 무릎을 굽히며 앉았다. 나른함을 담은 피곤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황녀는 어떤가.”
“……밤사이에 알 수 없는 상처를 달고 오셨습니다.”
고민 끝에 솔직히 대답했다. 숨길 만한 사안도 아니고, 나로선 정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내 대답에 늘 고운 폐하의 미간에 시름이 자리 잡았다. 심각한 표정에 말없이 폐하를 바라봤다.
“페델리우스 경.”
“네, 폐하.”
“아무래도 황녀를 만나봐야겠네. 내일 데려와 보도록 해.”
“하지만…….”
내 말에 폐하가 입매를 꾹 다물며 나를 말없이 쳐다봤다.
이런 표정을 하는 폐하는 물러나지 않는다. 쓸데없는 일을 하시는 분은 아니다. 반박을 내뱉던 입을 닫았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래, 졌으니 대가를 치러야지 않겠나.”
짓궂게 웃은 폐하가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인상은 찌푸려졌지만 어쩐지 오늘만큼은 울컥하는 기분이 들질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그림을 그릴 생각인가?”
집무실 책상에 앉은 폐하가 내게 물었다. 여전히 서류에 시선을 둔 채다.
“예, 생각보다 말을 빨리 알아들으시는 것 같아 글자와 단어를 가르쳐드릴까 해서요.”
폐하의 옆에 서며 질문에 묵묵히 대답했다.
최근에는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 그림으로 그리는 중이었다. 그 밑에 글자를 적고, 어느 정도 모이면 황녀에게 글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눈에 보이는 걸 전부 종이에 그려보는 건 나로서도 처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제법 재밌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하는 중이다.
“아주 정성이야.”
심드렁한 목소리는 불만을 품고 있었다. 무엇이 불만인지는 모르겠으나 반응하진 않았다.
대답했다간 밑도 끝도 없이 끌려다닐 테니까 말이다.
말없이 펜과 종이를 꺼내 들었다.
“쳇.”
동시에 폐하 쪽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 뜬금없는 소리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린애도 아니시면서…….’
내가 쳐다본 순간 폐하는 마치 그런 적 없다는 듯 여상한 표정으로 서류에 도장을 찍거나 사인을 하고 있었다.
나도 다시 종이로 시선을 옮겼다.
“황녀는 너무 어려.”
뜬금없이 폐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또 황녀 이야기다. 모든 일을 한 번에 해결하고 잊는 폐하가 저 정도로 오래 입에 담는다는 건 그만큼 황녀가 시야에 자꾸 잡힌다는 이야기였다.
“예, 하지만 배우시는 건 제법 빠릅니다. 가르쳐주는 것도 곧잘 따라 하십니다.”
“그게 아냐.”
톡톡, 망설임 없이 서류에 사인하던 펜이 한곳에 멈춘 채 종이를 몇 번이고 두드렸다.
폐하의 미간은 찌푸려진 채 근심이 가득 담겨 있다. 적어도 집무실에서만큼은 장난스러운 폐하다.
게다가 저렇게 표정을 다 드러내는 일은 흔하지 않기에 걱정이 됐다.
사실 폐하도 걱정되지만, 혹시나 황녀에게 불똥이 튀는 건 아닐까 신경 이 쓰인 거지만.
“폐하, 황녀와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너무 미숙해.”
“황녀의 교육이라면 제가 계속 맡아 하겠습니다.”
앞뒤 다 잘린 말이지만, 어쨌든 황녀께서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힌 건 알겠다. 혹시나 폐하가 말을 번복하진 않을까 싶어 급히 대답했다.
“알고 있지. 내 아들이 좋은 자극제가 되어주고 있다는 건.”
‘아들이라니…….’
뒷골이 띵해지는 호칭이다. 폐하는 매번 애 취급을 할 때면 한 번씩 저런 호칭을 사용하곤 했다.
그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데다 나와 나이 차이도 그리 많이 나지 않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왕의 자식이라니, 누군가 잘못 들으면 큰일 날 소리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에 이마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 호칭에 주의를 해주십시오.”
“아들을 아들이라고 부른다는데 무슨 불만이 많아? 나는 이 나라의 왕이고, 이 나라 백성은 모두 내 자식 같은 거지.”
턱을 괸 채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그 박애주의적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왕이 그렇다고 하는데, 신하 된 자로서 말을 덧붙이는 것도 이상하다.
게다가 어차피 말싸움에선 이기지 못한다. 물론 검을 맞댄다고 이길 확률이 높은 것도 아니다.
폐하와 함께 있을 땐 조용히 있는 것이 차라리 승리하는 길이었다.
“황녀께 뭔가 숨겨진 힘이라도 있는 겁니까?”
결국, 참던 궁금증을 입 밖에 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폐하가 웃으며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같은 방에서 취침했는데 제가 황녀께서 나가시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게 이상합니다.”
고민하다 찌푸려진 미간을 엄지로 눌러 펴며 대답했다.
스스로를 칭찬할 생각은 아니지만 나는 제법 어린 나이에 기사단장에 올랐다.
크고 작은 분쟁만도 여러 차례 겪었다. 개중엔 일주일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소리나 기척에 민감하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질 않는 현상이었다.
도대체 어떤 수를 써야 산전수전 다 겪은 기사를 피해갈 수 있을까.
“글쎄, 과연 어떨까.”
말끝을 늘인 폐하가 입을 닫았다.
항상 이런 식이다. 궁금증을 극한까지 끌어내놓고, 중요한 부분에선 입을 싹 닫아버린다.
알고 있었지만, 매번 당하는 내가 싫어질 지경이다.
그래서 오늘은 마지막까지 참자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했다. 이쯤 되면 당하는 것에도 조금 짜증이 난다.
“아, 오늘 기사단 훈련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민 끝에 평소와 다름없이 입을 열었다.
“뭐? 경 밑의 부기사단장에게 맡기면 되지 않나.”
“매번 그럴 수야 없죠. 제가 옆에 있어 드리지 못하는 대신 엘레나 재상 각하를 모셔오겠습니다.”
무덤덤하게 종이와 펜을 챙겨 들며 말했다. 폐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어쩐지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다. 엘레나 재상은 폐하가 가장 내켜 하지 않는 상대 중의 한 명이었다.
그녀의 이름만 나오면 폐하는 언제나 얌전해진다. 아마 이 왕궁 내에서 유일하게 폐하를 얌전하게 만드는 사람일 것이다.
‘워낙 폐하를 대하는 데 거리낌이 없으신 분이니까.’
현 폐하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궁의 진입 구도는 제법 바뀌었다.
무조건 세습을 하거나 연줄이 있어야만 들어올 수 있었던 왕궁이 실력 위주의 등용으로 뒤바뀐 거다.
현 폐하는 제도 자체를 개혁했다. 평민, 귀족 할 것 없이 왕궁에서 일하기 위해선 시험을 쳐 실력을 증명해야 했다.
입시에는 남자 여자의 성별 차별도, 나이의 차별도 없다. 오로지 필요한 것은 순수한 실력뿐이었다.
반대가 제법 많았던,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우여곡절도 제법 있었다고 들었다.
어쨌든 바뀐 왕궁의 제도를 이용해 입시를 가장 먼저 뚫고 들어온 것이 현 재상인 엘레나 님이었다.
나 역시 엘레나 님과 같은 시기에 시험을 치러 합격했지만, 서로 지원한 부가 달랐다.
엘레나 님께서 지원한 곳은 재상부였고, 내가 지원한 곳은 황실 기사단이었으니까.
우리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아마도 폐하의 눈에 들어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그때도 대화를 나눠보지는 못했지만, 나름 동지애 같은 것을 느꼈던 적도 있다.
엘레나 님은 평민인 데다 여자이면서 15살의 어린 나이에 입시를 무려 수석으로 통과했다.
자르딘 왕국의 기준으론 정말 이례적인 분이셨으며, 현 폐하가 만든 제도의 혜택이란 혜택은 다 받으신 분이었다.
그런 데다 지금은 무려 재상의 직위에까지 스스로 올랐다.
당연하지만, 처음에는 반발이 상당히 심했다. 여자에 어린 나이, 거기에 더해 평민이기까지 했으니 예정된 수순이었다.
콧대 높은 박힌 돌에 재상은 분명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대단히 뛰어난 지략가에 수완도 좋았다. 게다가 자유분방한 폐하를 유일하게 휘어잡을 수 있는 분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지금은 엘레나 님이 재상이 된 것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거의 없어졌다.
물론 그런 점에서는 나 역시 그녀를 매우 존경하고 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페델리우스 경, 이러는 건 너무 치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예, 흔쾌히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오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열심히 키워놨더니 이제 다 컸다고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군.”
뒤에서 들리는 불만스러운 목소리에도 말없이 고개를 숙이곤 집무실을 벗어났다.
솔직히 일이 있는 건 사실이다. 요새 훈련병들의 상태를 봐주지 못했다. 일을 마치면 저택에 돌아가기 바빴고, 폐하가 쉽게 놓아주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폐하께서 계속 재상 각하를 피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덕분에 엘레나 재상의 심기가 요 며칠 제법 불편하다고 들었다.
‘이런, 정말 오셨군.’
말하기가 무섭게 눈을 날카롭게 치켜뜬 엘레나 님이 복도 너머에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넘실거리는 기운이 그녀의 불쾌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재상은 늘 차분하지만, 폐하가 연관되면 언제나 맹수 같은 표정을 한다.
루비 같은 붉은 눈동자와 주홍빛 머리카락은 폐하와 대비되는 색이다.
그녀가 폐하의 옆에 서면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색채의 대비가 늘 눈을 사로잡는다.
기회가 된다면 정말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을 정도로.
“페델리우스 경.”
엘레나 님도 나를 발견한 듯 내 앞까지 다가와 걸음을 멈췄다. 눈 밑에 내려온 짙은 그늘은 그녀를 훨씬 지쳐 보이게 만들었다.
“예, 엘레나 재상 각하.”
“아, 쓸데없이 딱딱한 호칭은 됐어. 폐하는 집무실에 계신가?”
“예, 마침 재상 각하를 부르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녀가 알 만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시기에 왕궁에 들어와 둘 다 폐하에게 얼마나 굴려졌는지 모른다.
덕분에 눈만 마주쳐도 대충 말이 통할 정도가 되었다.
서로의 고충을 눈빛만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해야 할까.
다만, 요령 좋은 그녀는 자신과 다르게 훨씬 예전에 폐하를 다루는 법을 터득한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훈련 가는 중인가?”
재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아, 페델리우스 경이 제국의 황녀를 맡고 있다지?”
“예, 들으셨군요.”
“어때?”
어떠냐니, 폐하와 마찬가지로 뜬금없는 물음이다. 하지만 무엇을 묻는지 모르진 않는다.
“순수, 하십니다. 착하시고, 곧잘 웃기도 합니다. 일전에는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혼자 물컵을 잡고 물을 드셨습니다. 알려드리는 걸 스펀지처럼 쓱쓱 흡수하시기도 하죠.”
내 대답에 재상의 표정이 점점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구겨진 미간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이다. 도리어 왜 그런 표정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엘레나 재상이 나를 빤히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쉰다.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자네도 생각보다 팔불출이구나 싶어서.”
그녀가 인상을 찡그린 채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리곤 곧바로 말을 덧붙이듯 다시 입술을 뗐다.
“어쨌든 한동안 폐하는 내가 맡을 테니 페델리우스 경은 군사들 쪽에 집중하도록 해. 아무래도 슬슬 준비해야 할 것 같으니까.”
굳이 무엇이냐고 묻지는 않았다. 군사력에 집중하라는 명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있었다.
재상이 입을 열었으니 거의 확정된 일이다.
그녀는 제국의 사절단을 보았을 때 이미 승기를 잡은 것이 분명했다.
“폐하께서 일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아, 물론.”
환하게 웃는 재상의 얼굴 위로 순간 악마가 강림한 듯했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분명히 웃는 얼굴인데 피부로 느껴지는 것은 싸늘한 한기였다.
“일을 다 끝낼 때까지 폐하께선 집무실 밖으로 나가지 못할 거야.”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매서운 기운이 더해졌다.
“그럼 조심히 가게.”
말을 덧붙이며 그녀가 다시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향해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왕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버렸다.
폐하께 말 없는 애도를 표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폐하는 재상께 약하니까.’
그래서 그런지 저 둘이 왕궁에서 술래잡기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제법 많았다.
‘그래도 재상 덕분에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볼 수 있겠어.’
가는 김에 뭘 사 가는 게 좋을까? 아침에는 메리가 인형을 준 것 같으니 인형을 피해서 뭔가를 사가면 좋겠다 싶었다. 기왕이면 공부가 될 수 있는 것으로.
‘내일은 왕궁에 모셔야 하니 일찍 재워야겠군.’
생각에 잠긴 채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