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노크 후에 바로 손잡이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페델리우스다. 문이 열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메리를 옆으로 밀어냈다.
메리의 입술이 툭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지만, 더는 시달리고 싶지 않다.
“페데리우스!”
문이 열리기도 전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늘만큼 페델리우스가 보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황녀 전하?”
내 부름을 들었는지 페델리우스가 들어오자마자 나를 불렀다.
“응!”
오죽하면 내가 이럴까.
나는 식사를 끝내고 메리가 만들어준 인형과 대화를 하는 치욕을 겪었다. 물론, 알고 있다. 내가 자초한 일이라는 것쯤은.
하지만,
<안녕하세요, 귀여운 토끼, 리리라고 해요!>
인형의 손을 좌우로 움직이며 말하는 메리의 거짓말을 계속 들어주는 건 힘겨웠다.
그러니까, 메리가 만들어준 너덜너덜한 분홍 토끼 인형의 이름은 리리였다.
리리는 팔다리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침대 위를 뒤뚱뒤뚱 걸어 다녔는데, 나는 그것을 보며 연신 웃음을 흘려야 했다.
물론 인형은 메리가 뒤에서 붙잡고 조종했을 뿐이었다.
‘차라리 팔이 떨어지길 바랐어…….’
하지만 내 생각보다 인형은 튼튼했고, 팔은 물론 다리도, 목도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메리가 평소보다 훨씬 더 기뻐했던 것도 문제였다.
그만둘까 생각할 때마다 상처를 계속 살피는 메리의 모습이 떠올라서 나는 쉬지 않고 메리의 인형 놀이에 어울려줘야 했다.
그것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게 된 거다. 방 안으로 들어온 페델리우스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자세히 보니 페델리우스의 품에도 뭔가 한가득 안겨 있다.
어째 귀찮은 혹 하나 떼자고 두 배는 더 큰 혹을 단 것 같다.
‘그냥 둘 다 필요 없을 것 같아…….’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싶어졌다.
어린아이의 지능을 가진 내가 차마 절망하는 표정을 보여줄 수는 없었기에 굳은 채 페델리우스를 바라봤다.
페델리우스가 나를 한 번 보고, 메리를 바라봤다.
“메리, 너는 나가서 일을 보고 오도록 해라.”
“네, 주인님.”
메리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페델리우스의 말에는 한 번도 말대꾸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메리가 방을 나서기 전에 몸을 돌려 내게 쪼르륵 다가왔다.
“황녀님! 메리가 자기 전에 다시 한번 들를게요!”
“응, 잘 가.”
혹시나 마음이 바뀔까 얼른 손을 흔들어줬다. 메리가 나가고, 페델리우스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대체 저 품에 가득 안고 있는 건 뭐야?’
전부 누런 종이봉투에 담겨 있어서 내부가 보이질 않는다.
내가 봉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니 페델리우스가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다가왔다.
“황녀 전하, 선물을 사 왔습니다.”
“선물?”
‘또 무슨 선물?’
덧붙여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예.”
페델리우스가 침대 위에 봉투를 올리곤 하나씩 뒤집어엎기 시작했다.
촤르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침대 위에 뭔가가 가득 쏟아졌다.
종이와 각종 붓, 펜과 물감이었다. 숯처럼 생긴 이상한 것도 있었고, 용도를 알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실까 봐 사 왔습니다.”
‘……그림 그리라고?’
생각외의 품목에 말없이 종이 뭉텅이에 손을 뻗었다.
생각해보니 그림은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는 것 같다.
일전에 페델리우스가 그렸다고 내게 보여준 것도 신기했다. 그림 도구가 이렇게 다양하게 있을 거라는 생각도 못 했다.
‘재밌겠네.’
나쁘지 않은 선물이다. 저번의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 나던 것에 비해서 훨씬 말이다.
“그리고…….”
“응?”
고개를 기울이며 페델리우스를 바라봤다. 오늘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 껄끄러운 일이 있는 듯했다. 또 무슨 일이기에…….
종이 한 장을 만지작거리며 페델리우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일 함께 왕궁에 가주시겠습니까?”
“왕구웅?”
“예. 폐하께서 황녀 전하를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페델리우스를 쳐다보다 고개를 기울였다.
왕이 보자고 한 이유는 아마도 어제 일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그 물로 만든 팔찌.
만약 그것이 아콰가 만든 것이 아니라면 그 팔찌의 주인은 왕일 확률이 높다.
‘잘도 그런 위험천만한 짓을…….’
인상이 저절로 구겨졌다. 다시 생각해보니 너무 무례한 짓이 아닌가.
도대체 왕의 뒤에 있는 게 무슨 존재인지는 몰라도, 조금만 더 늦었어도 손목에 화상을 입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픈 건 정말 질색이다. 더는 맞고 싶지도 않다.
“저도 함께 갈 겁니다.”
대답 없는 날 뭐라고 생각했는지 페델리우스가 말을 덧붙였다.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페델리우스의 올곧은 시선이 내게 일직선으로 닿는다.
때때로 페델리우스의 눈빛은 아콰와 닮아있었다. 믿고 뒤를 맡길 수 있는 그런 시선이었다.
“응. 갈래!”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니 페델리우스의 얼굴에서 그제야 긴장이 가셨다. 물론 여전히 무표정하다.
하지만, 내 눈에는 정말 알기 쉬운 사람이다. 감정이 눈으로 다 드러나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모르겠다는 거다.
내가 어떤 인물인지 알면서도 나를 받아들인 왕의 생각을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이 분명한 이 남자를 내게 붙여둔 이유도 궁금했다.
‘아콰가 안 알려주니 왕이 어떤 존재인지도 좀 알고 싶고.’
왕이 내게 알려줄 확률이라곤 지극히 제로에 가깝겠지만 말이다. 뭐든 도전해보는 게 나았다.
“감사합니다.”
페델리우스가 한층 안도한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묵묵히 그의 정수리를 바라봤다. 그는 늘 감사하고, 죄송하다고 한다. 무엇이 감사하고 죄송한지 모르겠다.
나는 어디까지나 그의 집에 얹혀사는 처지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 대충 설명만 하고 데려가도 아무런 불만을 토하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하나부터 열까지 마치 정상적인 인간처럼 대해준다.
물론 과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호의라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질 정도다.
‘정말 이상한 남자야.’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안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어떻게 보면 요령 나쁜 남자기도 했다.
“응!”
조금 뒤늦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이 솔직함이 싫지 않은 이유는, 줄곧 이렇게 솔직한 호의를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순수함.
그러니까 이 집은 싫지 않다. 이 집안의 모든 사람이 전부 이 답답하고 착해빠진 사내와 닮아있었으니까.
“그림 그리는 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쪽에 앉아보시겠습니까?”
페델리우스가 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 발을 내리려고 하니 페델리우스가 급히 한쪽 팔을 붙잡았다. 휘청이지도 않은 몸에 고정대가 생겼다.
“조심히 내려오십시오.”
‘침대에서 다리를 내리면 발이 닿는다는 건 알고 있는 거겠지……?’
알면서 그러는 거라면 조금 심각하다. 물론 저 행동에는 어느 정도 내 탓도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똑바로 걷지 못한 적은 없었는데…….
결국, 페델리우스에게 팔을 붙잡힌 채 탁자에 앉혀졌다.
의자에 앉으니 페델리우스가 의자를 안으로 밀어 넣어준다.
탁자 앞에 종이와 펜이 놓였다. 다행히 다친 곳은 자주 사용하지 않는 쪽 손이었다.
사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져서 두 손 다 사용해도 문제는 없었지만…….
‘메리가 아주 기겁을 했지.’
손을 움직일 때마다 토끼같이 커진 눈에 눈물이 맺혔다.
움직이지 말라고 몇 번을 애원하던 것을 보다 못해 결국 팔을 침대에서 붙인 채 떼어내지도 않았다.
물론, 메리와 한 일은 대화 정도였기 때문에 손을 쓸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자, 펜을 잡으셨으면 이렇게 옆으로 쭉 그어보십시오.”
페델리우스가 자기 앞에도 종이를 두고 펜으로 직선을 그었다. 나도 펜을 붙잡고 페델리우스를 따라 직선을 쭉 그었다.
일단 펜을 쥐긴 쥐었는데 페델리우스에 비해 어쩐지 쥐는 법이 엉성하다.
‘……어?’
어쩐지 삐뚤거리는 느낌에 밑에다 다시 직선을 그었다.
지익. 지익. 직. 여러 차례 직선 그리기를 반복했다. 페델리우스의 것은 조금도 비뚤어짐 없이 똑바로 나아갔다.
‘근데 왜 내 건 들쑥날쑥해?!’
열 줄을 넘게 그었는데 멀쩡한 게 하나 없다. 심지어 가면 갈수록 더 삐뚤빼뚤해지는 느낌마저 든다.
종이를 노려보다 옆에 있던 다른 새 종이를 가져왔다.
“황녀 전하?”
“…….”
페델리우스의 부름에도 대답하지 않고 다시 펜을 쥐고 직선을 그었다.
이번엔 대각선이 그려졌다. 펜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손가락에 힘이 제법 들어갔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왜 쟤는 한 번에 그린 게 나는 안 그려지냐는 말이다.
“황녀 전하, 직선은 그 정도면 됐습니다. 이번엔 이걸 그려보십시오.”
페델리우스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네모난 상자를 탁자 위에 놓으며 말했다.
손바닥만 한 작은 상자는 반듯한 정육면체로 되어있어서 그리기 쉬워 보였다.
페델리우스의 권유에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펜을 들어 육면체를 바라봤다. 여유롭게 움직이는 페델리우스의 손을 바라보다 나도 그를 따라 종이 위에 선을 그렸다.
“…….”
“…….”
그리고 그날, 나는 다시는 종이와 펜을 손에 들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황녀 전하, 괜찮습니다. 제가 보기엔 충분히 잘 그리셨습니다.”
“…….”
“그림에는 새로운 창조와 재해석도 필요한 법입니다. 이 네모의 직선이 스프링처럼 꼬불꼬불하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
“특히나 이 맞물리는 부분! 제가 보기엔 이건 감각적인 것 같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제법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페델리우스의 설명에 시선을 내 그림에 옮겼다. 맞물리는 부분. 감각적이라면 감각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걸 바로 죽음의 감각이라고 하는 건가.
맞물려야 할 부분이 어째서 서로를 뚫고 지나다 못해 곡선을 그리고 있는지는 나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그림을 노려보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세상에 이렇게 끔찍할 줄은 몰랐다.
“페데리우스…….”
“예, 황녀 전하.”
“이거, 상자.”
페델리우스의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뭐야?”
이번엔 내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내 질문에 페델리우스가 고스란히 굳어졌다.
입은 뻐끔거리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듯한 모양새다. 대답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가상하다.
지금껏 봐온 페델리우스는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어쩐지 대답을 듣지 않았는데도 다 들은 기분이 든다.
‘다시는 안 그려.’
펜을 내팽개치곤 침대 위로 올라가 드러누웠다. 내 예술 감각이 이렇게 형편없을 줄이야.
“황녀 전하, 그러니까 이 그림의 대단한 점이 어떤 부분이냐면…….”
침대까지 다가온 페델리우스가 내 그림을 든 채 당황한 표정으로 열심히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는 알까? 칭찬하기 위해 애쓰는 그 모습이 내 기분을 한층 더 저조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왜냐면 그의 입에서는 결국 ‘잘 그렸다.’는 등의 말은 한 번도 나오질 않았으니까 말이다.
‘아니, 거짓말 한 번이 그렇게 힘들어?!’
그는 느린 것으론 따라갈 자가 없다는 나무늘보라는 동물보다 더 답답한 남자였다.
이불 속에 파고든 나와 그런 나를 달래는 페델리우스의 공방은 제법 길게 이어졌다.
이쯤이면 포기할 법도 한데 페델리우스는 식사시간이 되어 메리가 데리러 올 때까지 나를 달래줬다.
물론, 그는 끝까지 내게 만족스러운 칭찬 한마디 해주지 않았다.
덕분에 함께 식사하러 내려올 때까지 나는 뚱한 얼굴을 풀지 않았다.
‘딱히 칭찬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가 하는 말들이 너무 가관이었다.
‘제가 처음부터 어려운 걸 권해드렸나 봅니다.’라든가.
‘이 부분은 저도 흉내 내지 못하는 기법입니다.’라며 잔뜩 휘어진 선을 가리질 않나.
마지막엔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그러니까, 저는 좋은 것 같습니다!’라고 소리쳤다.
물론, 내가 보기엔 조금도 신빙성이 없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는 말하는 내내 나와 시선 한 번을 마주치지 않았다.
어쨌든 그 결과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한층 더 굳게 마음먹었을 뿐이다.
사실 매번 눈을 마주치지 못해 안달인 남자가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재밌어서 조금 더 짓궂게 군 것도 있긴 하다.
“황녀 전하……?”
“…….”
페델리우스가 조심스레 나를 부른다.
늘 무표정한 얼굴 위에 떠오른 곤란함은 그가 매우 당황하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
페델리우스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에게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물론 거짓말 한마디 못하는 저 답답한 성격에는 아무리 나라도 할 말을 잃었지만 말이다.
물론 화는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괘씸한 건 괘씸한 거다. 페델리우스를 뚱하니 바라보다 옆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오늘도 식탁 위에 가득한 음식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예쁘게 꾸민 요리들은 보기만 해도 아까웠다.
‘며칠째 같이 먹네.’
아무래도 저녁은 항상 같이 먹는 것으로 굳어진 모양이다.
메리도 페델리우스가 올 때까진 저녁을 주지 않았고, 페델리우스도 일이 끝나면 곧바로 내 방으로 오곤 했다.
“식사하셔야죠. 자…….”
수프를 뜬 페델리우스가 내 입에 숟가락을 가져다 댔다.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음식 정도는 나 혼자 먹을 수 있다고!
몇 차례 혼자서 먹는 모습을 보여줬는데도, 왜 식사시간만 되면 떠 먹여주지 못해 안달하는 것일까.
“메리!”
뒤쪽에 서있는 메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네, 황녀님!”
메리가 쪼르르 내게 다가왔다. 어째 페델리우스를 살짝 옆으로 밀친 것 같기도 하다.
‘잘못 봤나……?’
몸통으로 살짝 밀친 것 같기도…….
눈을 가늘게 뜨니 메리가 코앞에서 생글거리고 있다. 메리에게 가려진 탓에 페델리우스의 표정이 보이질 않았다.
“메리가 먹여드릴까요?”
어느새 가지고 온 것인지 메리가 새 숟가락과 포크를 양손에 든 채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확실히 다르게 이해했다는 건 알겠다.
‘아니, 그건 아니고.’
속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메리가 입을 삐쭉 내밀며 실망스러운 기색을 엿보였다.
그 숨김없는 모습에 마주 웃어주며 손을 쭉 내밀었다.
“포크 줘!”
“네에…….”
메리가 날카롭지 않은 손잡이를 내게 넘겨주며 주의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제대로 쥐고만 있으면 다칠 일도 없는 포크인데 뭐가 저렇게 걱정인지 모르겠다.
이러다 나중에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와도 먹여주려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와도?’
내가 한 생각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는 그전에 나갈 생각이 아니었던가. 포크를 꽉 쥔 채 고개를 숙였다.
문득 든 생각에 소름이 돋은 것은 나도 모르게 이 집에 있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일을 다 끝내고, 문제가 없어졌을 때 만났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일이 끝나면 미련 없이 놓아버리기엔 페델리우스나 메리나 모두 친절했으니까.
“고기는 제가 썰어드리겠습니다.”
고기를 포크로 찍으려는데 페델리우스가 냉큼 접시를 가져갔다. 어느새 메리는 페델리우스의 뒤로 밀려나 있었다.
졸지에 허공에 포크를 든 채 헛손질을 했다. 불퉁한 표정으로 페델리우스의 손에서 썰어지는 고기를 쳐다봤다.
그냥 찍어서 뜯어먹어도 되는 걸 뭐 하러 귀찮은 짓을 하는 거지.
‘이런 걸 사치라고 하는 건가.’
아콰에게 배운 사치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다락방에선 그냥 주어지는 음식을 손으로 집어 뜯어먹거나 들이켜기 바빴다. 이렇게 느긋한 식사를 하게 된 건 이 저택에 와서부터다.
“드십시오. 그리고 페드로, 잠시만.”
페델리우스가 내게 접시를 밀어주곤 페드로를 불렀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포크를 들어 작게 썬 고기를 찍었다.
‘이거 평소보다 훨씬 작은 것 같은데.’
두세 개씩 한 번에 찍어 먹고 싶을 정도로 작다.
저번에 썰어준 건 그래도 한 입 베어 물면 씹는 느낌이 있어서 좋긴 했었는데.
포크 잡은 손이 너무 힘들다. 잘못 잡았나 싶지만, 제대로 된 걸 본 적이 없으니 감이 잡히질 않는다.
주먹으로 포크를 말아 쥔 채 찍힌 고기를 입에 넣었다.
몇 번 반복하니 포크를 주먹으로 꽉 쥐지 않아도 고기는 찍힌다는 걸 깨달았다. 꽉 쥐고 있던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팔랑. 사각사각.
‘맛있네.’
사각사각. 사각사각. 슥. 팔랑.
늘 생각하지만 여기 요리사는 음식을 참 맛있게 만드는 것 같다.
밖으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많은 음식을 먹어보진 않았지만, 맛있는 건 확실했다.
사각사각.
근데 아까부터 대체 이건 무슨 소리야? 포크로 고기를 찍어 입으로 넣으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엔 페델리우스가 있었다.
물론 당연한 일이다. 그의 자리는 내 앞자리였으니까.
문제는…….
“페데리우스, 뭐 해?”
“네? 아…….”
내 물음에 페델리우스가 어깨를 떨더니 시선을 옆으로 슬쩍 돌린다.
손에는 종이와 펜이 쥐어져 있다. 내가 가만히 노려보자 페델리우스가 종이를 조심스레 무릎에 엎어두곤 포크를 들었다.
대답하지 않는 모습에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나 대답하라는 재촉의 의미였다.
“……뭐 해?”
“식사하고 있습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페델리우스가 여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뻔뻔한 대답에 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조금 전까지 뭘 하고 있었냐고 묻는데, 대답은 현재형이다.
그것도 이제 막 포크를 잡았을 뿐이면서!
페델리우스의 무릎을 쳐다보니 페델리우스가 급히 종이를 페드로에게 넘겼다.
일어나서 뺏어올 수도 없는 노릇이라 페델리우스를 쳐다본 채 말없이 고기를 씹어 넘겼다.
어쩐지 뒤가 껄끄러운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