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황녀님.”
누군가 몸을 흔들었다. 귀찮음에 뒤척이며 이불 속에 파고들었다.
어젯밤 쓸데없는 생각에 몸을 뒤척이다가 결국 밤늦게 잠이 들었다. 덕분에 눈꺼풀이 어찌나 무거운지 모른다.
“황녀님, 곧 나가보셔야 해요!”
몽롱한 머릿속을 파고들어온 목소리에 다급함이 담겨 있다. 그제야 정신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으응…….”
대충 대답하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사실 대답이라기보단 칭얼거림에 더 가까운 것 같긴 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슬슬 잠에서 깰 때가 되긴 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아직 정신이 채 돌아온 것이 아니라 얼굴을 파묻은 채 가만히 있었다.
“아, 어쩌지.”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머릿속에 훤히 펼쳐졌다.
“황녀님!”
홱, 몸을 덮던 묵직한 것이 사라졌다. 휑해진 느낌에 꼬물꼬물 움직여 몸을 웅크렸다.
밝은 빛에 적응하며 눈을 천천히 뜨니 눈앞에 메리가 있었다. 무거운 이불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로.
“아, 깨어나셨다. 황녀님, 오늘 폐하를 알현하는 날이에요. 얼른 일어나세요.”
‘그러고 보니 어제 그런 얘기가 있었지.’
게슴츠레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을 만나야 하긴 했다.
언제까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괴롭힘에 장단 맞춰줄 순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장난이라기에는 위험하기도 하다.
“얼른 씻으셔야죠.”
“응…….”
대충 대답하며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메리가 눈을 반만 뜬 나를 데리고 욕실에 들어갔다.
발을 동동 구르는 메리의 얼굴이 퍽 다급해 보였다. 빨리 움직여주고 싶긴 한데 몸이 너무 무겁다.
“자, 세안하는 걸 도와드릴게요!”
“응…….”
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있으니 메리가 알아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나를 씻겼다. 아침부터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푹 담갔더니 온몸이 나른하게 늘어지는 기분이다.
메리가 골라준 옷은 쓸데없이 장신구가 가득 달린 레이스 풍성한 드레스가 아니었다.
도리어 간소한 드레스였다.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배를 꽉 조이는 것도 아니어서 충분히 참을 만했다.
어쨌든 메리 덕분에 나는 그저 멍하니 있는 것만으로 모든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시녀란 건 대단하네.’
늘 다락방에 찾아오던 시녀들과 이곳에 오기 전 한 달 동안 나를 돌봤던 시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메리는 신기했다. 혼자서 뭐든지 척척 해내고, 못하는 것이 없다.
음, 인형 만드는 것은 빼고 말이다.
“황녀 전하, 피곤해 보이십니다. 간밤에 잠자리가 불편했습니까?”
“졸려.”
짧게 대답하곤 식탁 앞 의자에 앉았다. 음식은 간단한 것들이었다. 빵과 빵 사이에 채소와 햄이 든 음식과 아마도 우유로 보이는 흰색 액체와 샐러드였다.
‘이건 무슨 음식이더라.’
아콰가 가르쳐준 것 중에 있었던 것 같긴 하다. 워낙 그림과 정보만 대입해서 배웠기 때문에 가끔 머릿속이 뒤죽박죽되는 일도 있다.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힐끗, 페델리우스가 먹는 것을 보며 나도 손을 뻗어 빵을 집었다. 한 입 베어 무니 향긋한 냄새가 훅 올라왔다.
뒤늦게 소스와 햄도 씹히긴 했지만 말이다. 아삭, 베어 물 때마다 소리가 났다.
먹다가 우유를 마시고, 샐러드도 먹고 과일도 집어 먹었다.
거의 고개를 숙인 채 먹고 있다가 배가 어느 정도 찰 때쯤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페델리우스와 메리와 페드로가 날 보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메리와 페드로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페델리우스만 나를 끝까지 쳐다보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뭔가 잘못 먹었나?’
샐러드만 빼면 다 손으로 집어 먹는 것 같기에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페데리우스?”
“아, 네. 죄송합니다. 식사 다 하셨습니까?”
“응, 배부러!”
페델리우스가 내게 다가와 옆에 있던 냅킨으로 손을 닦아줬다.
투박한 손길은 메리처럼 부드러운 맛이 없었지만, 그가 손에서 힘을 최대한 빼고 있다는 건 느껴졌다.
“이만 왕궁에 입궐할 시간입니다.”
“응.”
의자에서 내려오니 페델리우스가 내 손을 잡아 왔다. 어째 길 잃은 어린아이를 데려가는 듯한 모양새에 기분이 묘하다. 페델리우스를 따라 저택을 나섰다.
저택 앞에는 마차가 대기해 있었다.
뚝, 발걸음이 절로 멈췄다. 머릿속을 스쳐 가는 수많은 멀미의 기억에 마차에서 급히 시선을 돌렸다.
잘 훈련된 개도 아니고 마차만 보면 반사적으로 속이 울렁거리다니…….
‘평생 여행은 꿈도 못 꾸겠구나.’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 그렇다. 그런 식으로 무리한 일정에 배려 없는 여정만 아니었어도 이 정도까진 안 됐을지도 모른다. 타지도 않았는데 속이 울렁거려 입을 틀어막았다.
“역시 무리시군요.”
마치 예상했다는 듯한 말투에 입을 막은 채 페델리우스를 올려다봤다.
페델리우스가 손짓하니 뒤따라온 페드로가 마부와 함께 마차를 다른 쪽으로 보내버렸다.
원흉인 마차가 앞에서 사라지니 기분이 좀 괜찮아졌다.
“조금 오래 걸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말을 탈까요?”
길어진 말에 그저 고개를 기울였다. 모른 척 눈을 깜빡거리니 페델리우스가 말없이 이마를 긁적였다.
“황녀 전하, 말이 좋습니까? 제가 좋습니까?”
……아니 질문이 명백히 이상해졌잖아.
관리하지 못한 표정이 결국 밖으로 드러났다.
페델리우스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허리를 숙인 채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의 끈질김에 먼저 손을 든 것은 나였다.
“……말.”
대답을 기다리는 페델리우스에게 내가 할 수 있었던 말은 그 정도였다.
그렇다고, 네가 좋다는 대답을 하기엔 어쩐지 민망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쉽게 입 밖으로 단어가 나오질 않았다.
‘으, 이유를 모르겠네.’
그냥 걸어가는 편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결국은 페델리우스와 함께 말에 올라탔다.
그나마도 혼자는 탈 수가 없어서 페델리우스가 말 위로 올려줬다.
눈앞에는 방해되는 것 없이 탁 트인 전경이 보였다. 이렇게 지면과 떨어진 곳에서, 마치 땅에 발이 닿아있는 듯한 느낌으로 걸어본 적은 없다.
페델리우스가 날 앞에 앉혔기 때문에 시야는 높았고 마치 거대해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페델리우스가 뒤에서 단단히 받쳐주고 있기 때문인지 무섭지도 않았다.
“후아…….”
참았던 숨을 단번에 내뱉었다.
저번에도 페델리우스와 한 번 걸었던 거리가 오늘은 다르게 보였다. 물론 시간대가 달라서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냥 신기했다.
몸에서 힘을 빼고 등을 기대니 페델리우스가 내 허리를 조금 더 끌어당겨 편하게 만들어줬다.
힘을 뺀 나와는 다르게 그는 어쩐지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 같기도 하다.
뭣보다 말이 움직일 때마다 피부가 움직이고, 박동이 느껴져서 내가 타고 있는 것이 살아있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털도 부드럽고, 자세히 보니 다리 쪽에는 근육도 엄청나다.
이런저런 것들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때쯤, 말이 걸음을 멈췄다.
“다 도착했습니다, 황녀 전하.”
‘벌써?’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가만히 있으니 페델리우스가 말에서 먼저 훌쩍 뛰어내린다. 그 자연스럽고 안정된 자세에 눈을 빛냈다.
저렇게 뛰어내리면 뭔가 멋있을 것 같다.
해보고 싶어 바닥을 내려다보니 생각보다 높다. 다리가 부러지는 게 먼저일지도 모르겠다.
자랑할 건 아니지만, 근력이 없다 보니 사소한 일에도 쉽게 다치는 편이었으니까 말이다.
“황녀 전하, 이쪽으로.”
페델리우스가 양손을 뻗으며 내게 말했다. 혼자 내려가는 건 무리였기 때문에 말없이 그의 팔에 매달렸다.
순식간에 바닥에 발이 닿았다.
‘엉덩이 아파…….’
길지 않은 거리였지만, 그거 타고 온 것도 무리였나 보다. 다행히 멀미는 없었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서 멀미를 느낄 새도 없었지만 말이다.
왕궁에 제정신으로 발을 디딘 건 처음이다. 경비병들이 페델리우스에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한다.
새삼 그의 직위가 높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도대체 이 남자는 뭐가 아쉬워서 내 뒤치다꺼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페델리우스의 손을 붙잡고 그의 뒤를 열심히 쫓았다.
말이 쫓은 거지 걸음도 제법 느리게 걸어줘서 따라가는 데 문제는 없었다.
“이쪽입니다, 황녀 전하.”
“응.”
고개를 끄덕인 순간 페델리우스가 걸음을 멈췄다. 저번에 봤던 대전과는 확실히 다른 공간인 듯했다.
왕성 안에 있고, 문도 고급스럽지만, 그곳처럼 커다랗진 않다.
페델리우스가 문을 두드렸다.
“폐하, 페델리우스입니다. 황녀 전하를 모시고 왔습니다.”
“아, 들어와.”
저번의 위엄 있던 목소리와는 달리 가벼운 대답이다.
의아함에 눈을 찌푸리는 중에 페델리우스가 문고리를 잡고 힘주어 당겼다.
보기엔 꽤 무거워 보이는 문이 한 손으로 쉽게 열렸다.
생각보다 가벼운가 싶었지만 페델리우스의 손등 위에 솟은 힘줄을 보니 그건 또 아닌 듯했다.
열린 문 안으로 페델리우스가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무거워 보이는 문이 다시 닫혔다. 내 근력으로 열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무실 책상도 텅 비어있었다.
‘어디지?’
“왔나.”
생각한 순간 다른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넓은 집무실의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커다란 소파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시리도록 푸른 눈을 가진 남자는 없었다. 눈을 가늘게 떴다.
“……폐하.”
‘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야?’
페델리우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그가 소파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뒷모습을 바라보다 나도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니 바닥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보였다.
익숙한 물빛 머리카락. 페델리우스가 그 앞에 꿇어앉아 머리를 정돈해 소파에 올려준다.
움직이는 행동이 상당히 익숙해 보인다. 페델리우스의 뒤에서 어깨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소파에 늘어져 누워있는 것은 왕이었다. 그때 그 무서웠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왕은 소파에 드러누워 물먹은 솜처럼 축 처져 있었다.
누워있는 왕과 눈이 마주쳤다.
“아, 오랜만이야. 지내긴 좀 편한가? 황녀.”
왕이 한 손을 들며 가볍게 물어왔다. 저건 정말 같은 사람이 맞긴 한가?
“…….”
게다가 페델리우스가 옆에 있으니 대답할 수도 없었다. 말없이 멀뚱히 그를 쳐다보니 페델리우스가 안달이 나서 옆으로 다가왔다.
“황녀 전하, 그러니까, 폐하십니다. 음……. 저번에 보셨던 그분이에요.”
‘……그 정돈 알지.’
얼마나 특이한 인물이었는데 모를까. 왕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독특한 외모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첫 만남은 여태까지 잊히지 않는 장면 중 하나였다.
페델리우스를 한 번 보고 다시 왕을 쳐다봤다. 왕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미미하게 띤 미소에 웃음이 서려있다.
어쩐지 그게 나를 비웃는 것 같아 조금 울컥했다.
“페델리우스 경.”
왕이 내게서 시선을 돌려 페델리우스를 쳐다봤다.
“예.”
왕의 나지막한 부름에도 페델리우스는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약간의 틈도 없는 정말 빠른 대답이었다. 페델리우스의 대답에 왕이 눈을 가늘게 뜨며 누운 채 그를 쳐다봤다.
“어제는 잘도 날 버리고 갔어.”
“……재상께서 한동안 폐하는 자기에게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변명하듯 대답했다.
“엘레나 재상이?”
“예. 제게 슬슬 군사력에 집중하라는 조언도 하셨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나를 한번 힐끗 보더니 마저 덧붙였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그의 뒤에서 내 차례가 올 때를 기다렸다.
왕이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고, 내 상태를 그에게 일러바칠 생각이 아니라면 알아서 자리를 만들겠지 싶었다.
“그건 들었네, 알겠어. 일단, 자네는 이만 가보게.”
“황녀 전하는…….”
“황녀에겐 따로 해둘 말이 있어. 곧 엘레나 재상이 오면 경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라고 할 테니 그대는 어제 말한 기사단이나 돌보게.”
누운 채 손을 휘휘 젓는 모습은 매우 성의가 없어 보였다.
저번에 만났던 왕과 동일한 인물인지 의심까지 될 지경이다. 페델리우스가 맥을 못 추는 걸 보니 같은 사람 같긴 한데…….
“폐하.”
“페델리우스 경.”
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예.”
“나는 나가보라고 했어.”
“……알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도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더니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그는 물러설 때를 잘 아는 것 같다.
달칵. 문이 닫혔다.
왕이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그리곤 날 가만히 쳐다보며 맞은편 소파를 손으로 가리켰다.
“앉도록 해, 황녀.”
말없이 왕이 가리킨 자리를 바라보다 그쪽으로 걸어가 앉았다.
왕이 눈꼬리를 휘어 웃는다. 여전히 참 인간답지 않은 외모라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생각이지? 기껏 자리까지 만들어줬는데. 자, 아까의 질문에 대답해야지. 페델리우스의 집은 지내기 편한가?”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에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왕의 눈이 내 오른쪽 손등으로 향했다.문양이 있는 곳이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음, 보기 드문 인재긴 하지. 황녀, 내가 소중히 아끼는 아이를 내어줬으니 잘 대해줘.”
왕의 말에 내가 세운 가설이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페델리우스는 왕에게 버림받은 것도, 미움 받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신뢰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왜요?”
“뭐가?”
“왜 내게 저런 멍청하게 보일 정도로 착해빠진 사람을 붙여주었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뭐만 해도 전전긍긍, 위험한 건 하지도 못하게 하고 아무리 연기를 하고 있다고는 해도 몸은 성인인데 완전히 어린애 취급에 심지어 미련하기까지 해요.”
조금 빠른 속도로 말했다. 내가 말을 내뱉으면서도 단어가 입 밖으로 나갈 때마다 미간이 점점 찌푸려졌다.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차라리 더 괜찮고 정상적인 여자를 붙여줬으면 더 좋았을 거다. 그에게 도움이 되는 현명한 여자라면 얼마든지 있을 거다.
왜 천치인 척하는 나를 붙여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불만인가?”
이야기를 듣던 왕이 소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물었다. 왕의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혔다. 불만이냐고 하면 아니다.
다만, 단지…….
“나 같은 거한테 속고 있는 페델리우스가 불쌍해서 그래요.”
나는 그가 주는 애정에 돌려줄 것이 없다. 보답할 길도 없다.
받은 것이 있으면 돌려주어야 빚이 되지 않는 법이다. 빚을 지면 그것은 오래도록 무거운 짐이 된다고 아콰가 그랬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페델리우스에게 받은 다정함을 무엇으로 돌려줘야 할지 모르겠다.
“속으면 좀 어떤가. 나중에 네 입으로 밝힐 생각이라면 제대로 고개 숙여 사과하면 될 일을.”
“그걸로는 빚을 지울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빚?”
“네, 받은 것이 있으면 돌려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알고 있어요.”
허어, 왕이 탄식했다. 탄식의 이유를 알 수 없어 입을 다물고 있자 그가 미간을 구겼다.
팔걸이를 두드리는 손가락의 속도가 빨라졌다.
왕이 긴 한숨을 내쉬곤 입술을 달싹였다.
“황녀, 네가 여기에 이러고 있는 이유는 복수를 위해서인가?”
“네.”
“정말 그 나라 전체를 고립시킬 생각인 거고?”
이리나에게 했던 이야기를 이 남자가 어떻게 알고 있지? 의도를 파악하듯 말없이 미간을 구겼다.
‘하긴, 주변에 물이 많았으니까…….’
아콰와 같은 능력이 있다면 전부 보고 있었을 확률도 있다. 아콰가 만든 물 덩어리만 해도 거의 방 안에 한가득이었다. 이해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면요.”
“그 나라 사람의 대부분이 죽게 되는 거다. 너도 알 텐데. 물이 없어 물을 갈망하다 죽는 사람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지.”
“네.”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참한 걸 알기 때문에 그런 방법을 택하는 게 아닌가. 상대를 비참하게 만들지 않는 복수가 세상에 존재하기나 할까?
“이번에 제국에 갔다 온 뒤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나? 너도 마을의 참상을 보고 왔겠지?”
“네, 아콰가 그냥 둬도 죽을 것 같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냥 돌아왔고요.”
왕이 머리를 짚는다. 이유를 알 수 없어 가만히 기다렸다. 필요한 말이 있으면 그가 해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단순히 이곳에서 나다닐 수 있는 자유였다.
‘계속 그런 식으로 방해받을 수는 없으니까.’
생각하며 왕을 마주봤다.
“인간의 죽음은 그 무게가 아주 깊다. 네가 그걸 감당할 수 있겠냐고 묻고 있어.”
“……무슨 의민지 모르겠어요.”
“그 정령이 널 제대로 망쳐놨구나.”
왕이 미간을 좁히고 얼굴을 찡그리며 벌어졌던 입을 닫았다.
“그래, 이건 네가 인간과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으니 내가 당장 무슨 얘기를 해도 이해할 수 없겠지.”
긴 한숨을 쉰 왕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내게 말했다. 누군가의 말이 아예 이해되지 않았던 적은 없는데, 왕과의 대화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단어를 하나하나 분리해서 생각하면 그 뜻은 알겠지만, 그가 그런 말을 하는 의미를 모르겠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니 왕이 손을 내저었다.
“네게 내 아이를 붙여준 건 네게 가장 필요한 것을 내 아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충고 하나 하자면, 그 힘을 남용하지 말거라.”
왕이 피곤한 기색으로 내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눈은 제법 날카로워서, 나는 순간 숨이 멎었다.
말없이 그를 쳐다보다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네가 가진 정령의 힘은 본래 인간을 살리기 위한 힘이다. 대지를 풍족하게 하고, 메마른 땅에 단비가 될 힘이었다.”
“……당신도 내가 복수를 하는 게 나쁘다고 말하는 거예요? 인간이 같은 인간을 죽여선 안 된다고?”
이리나와 똑같이 말하려는 건가. 불쾌하다. 불쾌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다. 나는 받지 못한 배려를 왜 내게 강요하는지 모르겠다.
“복수가 나쁘다는 게 아니야. 다만 그 방법 중에 누군가를 죽이는 방법은 가장 권유하고 싶지 않다. 특히나,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할 때는.”
“미안하지만, 난 역시 모르겠어요.”
누군가를 죽인다는 게 왜 나쁜 건지 모르겠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지금도 여러 가지 이유로 같은 인간을 죽이는 사람이 많을 거다.
근데 왜 나만 그리해서는 안 된다는 건가.
“좋아, 나는 지금 네 정령을 죽일 거다.”
“……네?”
한참 만에 입을 연 왕이 말했다.
그렇게 말한 왕은 비스듬히 기울였던 몸을 세웠다. 그는 내 반문을 듣고도 손을 뻗어 내 오른손을 붙잡았다.
뒤늦게 몸을 비틀었지만, 갇혀있기만 했던 근력 없는 황녀 따위가 이길 만한 힘이 아니었다.
“네가 다수의 사람을 죽이는 것을 내켜 하지 않는 내가 네 정령을 죽인다고 했단다.”
내 손등에 손을 올린 왕이 푸른빛을 억지로 끄집어냈다. 손등이 몹시 아팠다.
“윽!”
무언가가 손등에서 완전히 빠져나갔다. 다급히 시선을 내려 손등을 살폈다.
아직 문양은 있지만, 아콰의 흔적이 없다.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한 손에 들어올 법한 아콰를 왕이 손에 쥐고 있었다. 아콰의 몸이 일그러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잠깐……. 무슨 짓을!”
“네가 그동안 가져왔던 논리대로라면, 나는 이 정령보다 강하니 죽여도 괜찮겠지.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왕의 무심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손이 아콰를 더욱 세게 움켜쥔다. 아콰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콰의 몸이 일그러져 뭉개진다.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왕을 쳐다봤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콰를 지켜야 한다. 하나뿐인 가족이 사라져……. 사지가 찢어지던 어머니와 똑같이, 이번엔 물거울도 아닌 눈앞에서 사라지려고 한다.
“싫어…….”
눈앞이 붉어지는 기분이다. 몸에서 짙푸른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아콰가 사라진다.
또, 손에서 빠져나간다. 소중하디소중한 것이…….
“싫다고…….”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던 건 내가 너무 어렸고,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꿈에서도 몇 번이고 보았던 그 장면에서 나는 몇 번이고, 내가 그 옆에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허, 이 망할 친구. 대체…….”
어지러운 시야 사이로 왕이 무언가 말을 했다.
흘러넘치는 푸른 기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왕이 손에 쥔 아콰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동시에 왕이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툭 밀쳤다. 끓어오르던 것이 순식간에 끊어지며 맥이 탁, 풀렸다.
멍한 얼굴로 왕을 쳐다봤다.
“정신 차려라, 황녀. 정령은 죽지 않았어.”
왕이 내 어깨 위에 푸른 빛무리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올려놨다. 곤란해 보이는 표정으로 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콰……?”
[네, 주인님. 전 괜찮아요. 아프지도 않았는걸요!]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아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시야가 또렷해졌다.
“아……. 다행이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주저앉으니 왕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마치 처치 곤란한 무언가를 보는 눈이었다.
다급히 아콰를 붙잡아 품에 끌어안았다. 아콰가 품 안에서 작게 웃는다.
“안 죽일 거다.”
“…….”
“황녀, 내 나라에서 소란은 사양이야.”
“……주의할게요.”
“그리고, 오늘 네가 느낀 기분을 잊지 말고 간직하거라. 언젠가 네게도 소중한 것이 하나둘 생기고 많아지다 보면 자연히 깨닫게 되겠지.”
왕이 팔걸이에 올린 손에 턱을 괴며 말했다. 피곤함에 지친 얼굴이다.
“이건 말로 설명한다고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니까.”
그리고 덧붙였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 내 나라는 어떤가.”
흐르는 적막 속에 왕이 뜬금없이 물었다.
조금은 뚱한 기분이었지만, 괜히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진 않았다. 순순히 입을 열었다.
“굉장히 풍요롭고, 사람들 얼굴은 밝고, 살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해요.”
“그럼 내 아들은?”
“아들이요?”
“아, 페델리우스 경.”
“……그가 당신의 아들이에요?”
“농담이 안 통하는군.”
왕이 돌연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농담이었나요?”
“……됐으니 대답이나 해봐라.”
농담을 모를 수도 있지, 저런 질린다는 표정은 너무한 것 아닌가.
마음이 상했지만, 괜히 덤벼 봐야 좋을 것 없는 상대라는 걸 알기에 말없이 입을 닫았다.
“제가 평생 만나왔던 사람 중에서 가장 저를 인간답게 대해주는 사람이에요.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고요. 좋은 사람 곁엔 좋은 사람이 모이나 봐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냥 그 남자에게 어울리는 건 멍청할 정도로 착한 남자라는 수식어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지도 않아. 그 아이의 곁에 있는 이들은 전부 페델리우스가 어디선가 주워온 이들이니까. 전쟁 한복판이든, 뒷골목의 슬럼이든, 쓰레기장 속이든, 전부 말이야.”
왕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 왕이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나를 쳐다봤다.
“황녀여, 처음부터 착한 사람은 없다. 페델리우스의 옛 모습을 본다면 그대는 뒷목 잡고 경악할지도 몰라.”
“네?”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 반문했다. 벌어졌다는 걸 깨닫고서야 급히 입을 닫으며 손으로 가렸지만, 왕은 별로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내가 네게 뭐라고 했다고 해서, 네가 틀렸거나 나쁘다는 이야긴 아니다.”
소파에 기대어 앉아있던 왕이 바짝 허리를 숙여 손을 뻗었다. 왕의 손이 내 머리 위에 얹혔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왕이 돌연 웃었다.
그건 비뚜름한 웃음도 아니었으며, 비웃음이나 어린애 같은 장난기 짙은 웃음도 아니었다.
단지, 그래, 왕은 언젠가 어머니가 갓난아기였던 내 이마에 입을 맞추던 때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는 네 나름대로 살길을 찾아온 거야. 그건 아주 잘한 일이지. 모르는 건 배워가면 되고, 잘못된 건 바로잡아가면 되는 거다.”
왕이 머리를 몇 번 쓰다듬더니 이내 뒤로 물러났다.
“많은 것을 알게 된 후에도 같은 선택을 한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어린 네가 한 선택이 가져올 무게를 미리 가르쳐주려는 것뿐이야.”
왕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나를 악의적으로 대하려는 건 아니라는 사실은 알 것 같다. 숙어진 고개 위로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니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느끼고, 성장하거라.”
다정한 목소리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다정한 목소리. 도대체 이 왕의 정체는 뭘까? 풀어지지 않는 궁금증에 숨이 멎을 것 같다.
“네 인간으로서의 성장이 곧 정령의 성장이다. 그 아이가 아직 작은 모습인 이유는 네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야.”
뭐?
“아콰는 이게 다 큰 모습이, 아니에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빛무리에서 인간의 형태가 되었기에 이게 원래 모습인 줄 알았다. 아콰를 쳐다보니 아콰가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
왕이 아콰를 한 번 보고, 나를 쳐다봤다.
“뭐야, 듣지 못했나? 정령은 인간 정도의 크기까지 자란다. 저 아이는 인간으로 따지면 갓난아기야. 신의 축복이란 게 겨우 비를 내리고 수분을 빼앗는 정도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솔직히 그거 말고도 다양한 힘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아콰는 왜 내게 말해주지 않은 거지?
눈동자를 굴려 어깨 위에 앉아있는 아콰에게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아콰는 내 시선이 닿기도 전에 마치 도망가듯 내 머리 꼭대기에 툭, 하고 자리 잡았다.
“있잖아요, 왕님.”
“……왕님?”
“그건 또 새로운 호칭이군.”
왕이 미간을 좁힌 채 덧붙여 말했다. 그가 말해보라는 듯 나를 쳐다본다.
“당신은 누구예요?”
줄곧 궁금해했던 것을 드디어 입에 담았다. 내 물음에 그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 눈을 찡그리며 시선을 피했다.
“글쎄, 지금은 멍청한 친구의 뒤처리를 해주고 있는 사람인 것 같군.”
“……네?”
“대화는 끝이다. 한 번씩 심심하면 부를 테니 다음번엔 즐거운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 슬슬 방해꾼이 끼어들 시간 같으니까.”
‘방해꾼이라니 무슨…….’
멋대로 끝내버리는 대화에 당황해 소파에서 일어나자 왕이 집무실 책상에 앉아 펜을 꺼내 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참고로 페델리우스 경을 찾으려면 오른쪽으로 쭉 가다가 모퉁이가 나오면 또 오른쪽, 그 길로 쭉 나가면 연무장이 있네.”
뭐가 저렇게 다급한 거야?
“아니 이렇게 끝나…….”
쾅! 커다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몸이 절로 파드득 떨리다 펄쩍 뛰었다. 목이 절로 짧아졌다.
몸을 움츠린 채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
나와 비슷하게 가냘파 보이는 손으로 저 무거워 보이는 문을 저렇게 세게 열 수 있는 건가.
“폐하……. 어제는 잘도 도망을 치셨더군요.”
“이런, 엘레나 재상. 도망을 친 게 아니라 길이 엇갈린 거네. 왜 그리 곡해하고 그러나.”
“폐하의 행동은 270도 정도 곡해해서 들어도 충분합니다.”
주홍빛 머리카락의 여자가 왕의 능글맞은 말을 단번에 끊어버렸다.
왕이 드물게도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서류에 묻는다. 그러다 문득 내가 생각났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대는 이만 가봐도 좋아.”
왕이 내게 축객령을 내렸다. 주홍빛 머리카락의 여자가 나를 쳐다본다. 둘이 같이 있으니 정말 색이 대비된다.
“당신은……. 트럼프의 황녀시군요.”
주홍빛 머리카락의 여자가 한 걸음 내게 다가왔다. 뭔지는 몰라도 이 사람이나 왕이나 위험하다. 잠시 망설이다 빠르게 문 쪽으로 달렸다.
“가, 갈래!”
어린애 같은 말투로 던지듯 말하곤 아직도 열린 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결국, 내가 얻은 것이라곤 이해할 수 없는 잔소리 정도였다.
‘페델리우스가 편한 거였어.’
새삼 가지고 있던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저 주홍빛의 여자는……
너무 무섭다. 등에 악귀라도 달린 줄 알았다. 그만큼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의 얼굴은 서릿발이라도 휘날리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