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99)

* * *

“나는 나가보라고 했어.”

“……알겠습니다.”

명백한 축객령에 더 말을 붙여선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황녀가 신경 쓰였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폐하의 명령을 거스를 순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탁,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폐하께서 그렇게 잔인하신 분은 아니지만, 혹시 황녀 전하가 그분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연무장에 가야겠군.”

폐하의 말대로 챙기지 못한 이들이 제법 된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한 번 더 생각에 잠기며 무거워진 발을 애써 지면에서 뗐다.

평소보다 조금 더 느린 발걸음으로 연무장에 도착했다. 대체로 훈련을 지휘하는 것은 부기사단장이 하는 일이었고, 내가 하는 일은 한 번씩 상황을 살피는 정도다.

그것도 최근에는 폐하를 옆에서 보좌하느라 꽤 오랜 시간 오지 못했다.

연무장에 걸음을 옮기자 부기사단장인 카울란이 나를 가장 먼저 발견했다. 카울란이 나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오셨습니까! 단장님!”

“안녕하십니까! 단장님!”

카울란을 따라 단원들이 허리를 굽혔다. 익숙한 풍경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카울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래, 훈련 중이었나?”

“네! 맞습니다.”

“남은 훈련 다 하고 쉬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다들, 연무장 서른 바퀴다!”

“예, 알겠습니다!”

덩치 큰 남자들이 땀 냄새를 풍기며 우르르 뛰어나갔다. 열을 맞춰 뛰는 것을 잠시 보다가 챙겨온 종이와 펜을 꺼냈다.

맨 첫 장을 펼쳤다. 미완성의 그림이 보였다. 포크로 고기를 찍어 입에 가져가 오물거리는 모습이 보기 좋아 그림으로 그리다가, 들켰다.

어떻게든 무마하긴 했지만, 어쩐지 눈초리가 제법 뚱했던 것 같기도 하다. 펜을 들어 스케치 부분을 따라 선을 따기 시작했다.

흑백으로 명암을 줘가며 그려가니 제법 태가 난다.

“단장님, 그분은 누구십니까?”

“……훈련은 다 끝냈나?”

“예, 방금 끝냈습니다.”

벌써 이놈들이 서른 바퀴를 다 돌 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건가? 그림에 너무 집중했던 모양이다. 뒤에서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실책이군.’

이마를 짚으며 펜을 내려놨다.

“그래서 그분은 누구십니까? 엄청 아름다우십니다.”

카울란의 질문에 말없이 종이 뭉치 사이에 그림을 끼워 넣었다.

칭찬에 기분이 좋아야 마땅하건만 어째 기분이 좋지 않다. 내키지 않은 시선으로 카울란을 보다 종이를 정리했다.

‘폐하께 황녀 전하를 맡겨놓고 와서 그런가…….’

불안해서 그럴 수도 있다. 폐하는 장난기가 심하신 분이고, 황녀 전하는 작은 장난에도 놀라며 겁먹으시는 분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부분에 대해 폐하께 미리 말씀을 드려놨으면 좋았을 텐데.’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돌아가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손을 들어 머리를 휘젓다가 이내 새로운 종이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낱말 카드를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누군지 말씀해주십시오. 헉! 설마 드디어 단장님께서 교제하시는 분이 생기신 겁니까?!”

“예? 단장님이 말입니까?”

“헉, 부단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땀을 식히고 있던 단원들이 우르르 코앞까지 몰려왔다.

덩치 큰 놈들이 코앞에 쪼그리고 앉아 눈을 빛내는 모습이 식겁할 정도로 징그럽다. 몸에서는 열이 풀풀 풍겼다. 순식간에 여름이 온 줄 알았다.

‘게다가 땀 냄새…….’

코가 썩을 것 같아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에 비해 황녀께는 묘하게 달콤한 향이 났다. 따로 쓰는 향수도 없다고 들었는데도 말이다. 생각하니 절로 뒤로 더 물러나게 됐다.

“……꺼져.”

“그런 말씀 마시고 알려주십시오~”

카울란이 옆에 들러붙으며 말했다. 소름이 돋아 종이 뭉치를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꺼지라고 했다. 연무장 서른 바퀴로는 부족했나 보지?”

종이뭉치를 탐내는 손길들에 그것을 뒤로 숨겼다. 으르렁거리며 윽박지르려는 순간,

“페데……리우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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