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대체 저 여자는 뭐야?”
집무실에서 조금 멀어져서야 빠르게 걷던 걸음을 늦췄다.
지금껏 봤던 어떤 얼굴들보다 무서웠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적의는 아닌 감정이 적나라하게 몸집을 부풀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 결국 누군지 제대로 못 물어봤네.”
뒷머리를 긁적이며 왕이 알려준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연무장은 생각보다 가깝지 않았다.
왕의 설명으로는 이 근처일 것 같더니, 한참이나 걸어야 했으니까 말이다.
‘결국, 왕이 한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복수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라는 것도 아니다.
<복수가 나쁘다는 게 아니야. 다만 그 방법 중에 누군가를 죽이는 방법은 가장 권유하고 싶지 않다. 특히나,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할 때는.>
다시 고민해봤지만 역시나 의미 모를 말이었다. 점점 느려지던 걸음이 뚝 멈췄다.
고개를 숙이니 반짝반짝한 새 신발의 신코가 보였다. 얼마 전 메리가 준 여러 켤레의 신발 중 하나였다.
‘아, 모르겠다.’
메리가 정돈해준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뱅뱅 감아올리며 생각하길 포기했다.
지금 당장 생각해도 내가 이해할 법한 일은 아니다. 왕의 말대로 언젠가 알게 될지도 모르지.
“아직 이리나는 배 위에 있으려나.”
다시 멈췄던 발을 떼며 페델리우스가 있을 곳을 향해 걸었다.
이리나가 떠난 지 이제 일주일 남짓 되었다. 먹고 자는 것이 내 일상의 대부분이라 시간 감각이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 그쯤 되었다고 생각한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응? 뭐가?”
<그게……. 혼나셨잖아요.>
“그게 혼난 거야?”
미간을 찌푸렸다. 혼이 났다는 감각은 딱히 없다. 아콰처럼 내게 발을 동동 구르며 그게 아니라고 설명한 것도 아니고, 왜 그러냐고 책망한 것도 아니다.
그저 물 흐르듯 이어진 짧은 대화였다고 생각한다.
“그게 혼난 거였구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콰에게 듣기 전까진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왕이 우위에 있었던 대화라고는 생각한다.
“제대로 이해하질 못해서, 아무런 느낌도 없어.”
혼났다는 느낌도 없고, 그렇다고 뭔가 설득당한 기분도 아니다. 그냥 대화라고 생각했다.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오른쪽으로 코너를 돌았다.
“하나둘, 하나둘, 하나둘.”
꽤 긴 복도를 걸어가니 햇빛이 비치는 태양 아래로 나갈 수 있었다.
거기서 조금 더 걸으니 우렁찬 구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박자에 맞춰 울리는 목소리는 상당히 커서 땅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런 말씀 마시고 알려주십시오~”
어느 순간, 구호 소리가 멎었다. 그 대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다 도착했나 싶어 조금 뛰다시피 걸었다. 얼른 어디든 주저앉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흙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페델리우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 손에 들고 있는 종이 뭉치를 보니 페델리우스가 분명했다.
다리가 아팠던 터라 반가워서 곧바로 입을 열었다.
“페……!”
“꺼지라고 했다. 연무장 서른 바퀴로는 부족했나 보지?”
‘응……?’
으르렁거리는 낮은 음성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페데……리우스……?”
내 부름에 페델리우스가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한층 커졌다.
물론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린 것은 페델리우스만이 아니었다.
아마도 다른 기사들로 보이는 남자들도 우르르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맹렬한 기세에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저건 또 뭐야……?’
방금 성질 낸 건 페델리우스가 맞지? 매번 부드럽고 안정된 목소리로 존댓말을 쓰는 페델리우스였다.
그랬기에 날이 선 말투가 제법 당황스러웠다.
페델리우스가 옆에서 깐족거리는 목소리를 내던 남자를 한 손으로 밀치곤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표정 위로 낭패감이 엿보였다.
‘곤란한 건가.’
하긴. 천치인 데다 적국의 포로로 맡고 있는 황녀다. 실제로 그렇지 않다고 해도 대외적인 내 이미지가 썩 좋진 않을 거다.
그냥 왕에게 누군가 사람이라도 한 명 붙여달라고 할 걸 그랬다.
“황녀 전하.”
“응.”
페델리우스가 순식간에 내 코앞까지 다가와 살짝 몸을 굽혀 나와 시선을 맞췄다.
곤란해 보이는 표정에 어쩐지 가슴 한편이 술렁인다. 쿵, 쿵, 쿵. 심장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손을 들어 가슴께를 꾹 누르며 페델리우스의 눈을 피했다.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혼자 오셨습니까?”
페델리우스의 물음에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쪽에서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페델리우스의 뒤에 진을 친 기사들의 눈빛에 한 걸음 뒤로 더 물러났다.
‘대체 뭐야?’
히죽거리는 웃음을 한두 명도 아니고 십수 명이 짓고 있으니 무섭다.
이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이렇게 대놓고 말이다.
‘여기 처음 왔을 땐 고개라도 숙이고 있었지…….’
정면으로 마주한 시선들이 위험해 보인다. 페델리우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꾹 주먹을 쥐며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차라리 왕궁 내부를 좀 더 구경해볼 것을…….
뒤늦은 후회가 머릿속을 잠식한다.
“앗, 아까 그림 속의 그분이시군요.”
“……그림?”
페델리우스에게 깝죽거리고 있던 남자의 말 중에 거슬리는 것을 끄집어냈다.
페델리우스가 다급히 남자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리곤 그를 끌어당겨 귓가에 무언갈 속삭였다.
“페데리우스?”
“예, 황녀 전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수상한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기엔 페델리우스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그가 이럴 땐 필연적으로 뭔가 뒤가 구린 게 있거나 말하기 껄끄러운 게 있는 거다.
“그나저나 정말 혼자 오셨습니까?”
“응!”
“별일은 없으셨습니까?”
별일이 있었던가. 껄끄러운 이야기를 듣고, 소중한 가족을 눈앞에서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았지만, 그뿐이다. 생각보다 무섭게 굴지도 않았다.
아콰를 죽이겠다는 협박을 제외하면 말이다.
마지막엔 멋대로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지만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아콰를 죽이겠다는 협박만 아니었으면 말이다.
“응! 주긴댔어!”
“……예?”
“주긴다고 해써!”
“죽인다고 했다는 말씀입니까? 폐하께서요? 황녀 전하께요?”
페델리우스가 커다랗게 뜬 눈으로 내게 되물었다. 황급히 되묻는 목소리에는 초조함도 섞여 있었다.
“응.”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왕이 나를 죽이겠다고 한 건 아니지만, 죽인다고 말하긴 했다. 아콰를 손에 쥐고 내게 말이다.
페델리우스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뻔히 보였지만, 모른 척했다.
이 정도는 일러바쳐도 괜찮겠지.
“그랬습니까.”
페델리우스가 어두워진 표정으로 작게 읊조렸다. 생각보다 별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역시 그에게 왕은 맹목적으로 지켜야 할 대상이구나 싶었다.
“단장님, 저희도 소개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분이 이번에 제국에서 온 황녀십니까?”
“아! 단장님께서 최근 돌보고 계시는 분이 그분이시군요!”
“아까 그림에서도 예뻤는데 실제로도 대단히 아름다우십니다.”
와글와글 모여있는 남자들은 생각보다 악의가 없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으니 하나둘 쪼그려 앉더니 그 자세로 뒤뚱거리며 코앞까지 다가왔다.
“황녀 전하, 저희는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일전에 페델리우스에게 당했던 것보다 훨씬, 훨씬, 훨씬 더 소름이 돋았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은 페델리우스보다 덩치가 더 컸다.
아니나 다를까, 슬쩍 시선을 돌려 바라본 페델리우스가 커다란 손으로 제 눈을 가리고 있었다.
“…….”
저런다고 내가 겁을 먹지 않는다고 생각한 건가. 아니, 물론 확실히 위압적인 덩치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보단 훨씬 나은 것 같지만…….
“페데리우스, 무서워.”
결국, 페델리우스의 옷자락 끝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제야 다가오고 있던 기사 무리가 뚝, 걸음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봤다.
이건 이것대로 무섭다. 한두 사람이면 그렇다고 생각하겠지만, 저 덩치들이 똑같이 몸을 쪼그리고 앉아 뒤뚱거리며 다가오는 것도 당황스럽다.
심지어 얼굴은 쭉 째지게 웃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내가 오기 전까지 뭘 했는지는 몰라도, 그리 덥지 않은 날씨에도 이들은 땀범벅이 되어있다.
‘아콰에게 물 좀 뿌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계속 뒤로 물러나는 나를 보다 못해 페델리우스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연무장 오십 바퀴 추가.”
“예? 단장님, 저희 방금 훈련을 막 마쳤습니다.”
“그 상태 그대로 오십 바퀴.”
나서서 반문하는 남자의 말에 페델리우스가 손가락으로 모래바람 휘날리는 연무장을 가리켰다. 페델리우스의 어깨 너머로 울상 짓는 기사들이 보였다.
‘권력이란 좋은 거구나.’
기사들이 축 처진 어깨로 몸을 돌렸다. 모두들 쪼그려 앉은 모양새 그대로 연무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눈앞을 가로막던 거대한 벽이 사라졌다.
“제가 저들의 훈련이 끝날 때까진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연무장을 돌기 시작한 기사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햇볕이 뜨거우니 안에 들어가 계십시오.”
“싫어.”
고개를 저었다. 물론 페델리우스에겐 여전히 시선을 두지 않은 채였다. 이렇게 멀리서 보니 저것도 그다지 무섭지 않다.
‘아까는 바퀴벌레 같았어.’
떼로 몰려오는 바퀴벌레는 종종 다락방에 나타나곤 했다. 그 징그러운 자태에 비명을 지르면 늘 아콰가 그것들을 없애주곤 했다.
말라비틀어지다 종국엔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그 새까만 것은 세상에 다시없을 징그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종종 날아다닐 때면 이불 속에 얼굴을 묻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황녀 전하.”
페델리우스가 내 시선을 가로막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페델리우스의 미간이 좁혀진 채다. 말없이 손을 뻗어 페델리우스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리 힘을 주지 않았는데, 주름이 금세 모습을 감췄다.
“응?”
“그럼 저기 그늘 밑에 앉아 계십시오.”
“응.”
아까 페델리우스가 있던 곳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니 페델리우스가 자연스레 내 손을 잡아 왔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나도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오늘 저녁엔 이리나에게 가볼까.’
물론 머릿속으론 다른 생각을 했지만 말이다.
그녀와 헤어진 지 시간이 제법 지났다.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매우 궁금하다.
죽음의 앞에서 자기가 한 일을 후회하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 유모처럼 누군가의 피라도 뺏어 먹으려고 할까.
이리나는 내 복수의 시발점이다.
그러니까 그 기이한 모습으로 모두의 앞에서 죽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이리나가 비명을 지르며 내가 범인이라고 외칠 그 목소리를 최대한 많은 사람이 들어야 했다.
“황녀 전하?”
“응.”
“그림이라도 그리고 계시겠습니까?”
페델리우스가 내게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뚱한 표정으로 종이와 펜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내게 재능이 없다는 건 잘 알았다. 턱을 괸 채 연무장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여기서 보니까 제법…….
“멋지다.”
구령을 붙여가며 한 명도 포기하지 않고 일렬로 움직인다. 나 같으면 저거 한 바퀴도 돌지 못했을 거다. 아까와는 다르게 히죽거리지 않는 얼굴은 정말 제법 멋있었다.
모두의 눈동자가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다. 페델리우스가 내린 명령을 이행하는 거다.
그들은 단지 페델리우스의 한마디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대단하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보단 훈련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흥미로웠다.
사각사각. 옆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한 귀로 듣고 흘릴 정도로 작은 소리였기 때문에 신경 쓰이지 않아서 계속 연무장만 바라봤지만 말이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연무장을 쪼그려 돌던 이들이 바닥에 하나둘 쓰러져 갔다. 그중에 한 명이 페델리우스에게 달려왔다.
“방금 훈련 모두 끝냈습니다.”
“그래, 쉬도록 해.”
어느새 뭔가를 그리고 있었는지 페델리우스가 종이 뭉치를 정돈하며 대답했다.
“아오, 덥다. 비라도 확 내렸으면 좋겠네.”
“오늘따라 유독 덥네.”
“그거야 평소보다 훈련이 많았으니까 그렇지.”
연무장이 떠내려갈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로 기사들이 대화를 나눴다. 사람이 저렇게 많이 모여서 단체로 유쾌하게 대화하는 건 처음 본다.
‘비라…….’
아콰라면 내릴 수 있을 텐데…….
하늘을 쳐다보니 새파랗다. 구름이 한 점도 없어서 비가 내릴 낌새는 없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나도 뭔가 하나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하늘을 쳐다보는 내 시야에 그림자가 졌다. 느릿하게 고개를 내리니, 페델리우스에게 보고하던 아까 깝죽거리던 남자다.
“안녕하십니까, 황녀 전하. 제1기사단의 부단장 카울란이라고 합니다.”
볼에 긴 상처가 나 있는 남자가 웃는 얼굴로 내게 자신을 소개했다.
히죽거리던 다른 기사들과는 다르게 제법 페델리우스와 닮은 웃음을 짓는 남자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멀뚱히 쳐다보자 카울란이 상처 난 제 볼을 긁적인다.
“……안녕?”
한참 만에 떠올린 건 이리나에게 했었던, 그 웃음기 어린 인사 정도였다.
카울란의 얼굴이 확 밝아지는 순간, 무언가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페델리우스의 널찍한 등에 가려 카울란이 사라졌다.
카울란이 옆으로 고개를 쭉 빼 나를 바라보는 것과 거의 동시에 페델리우스가 그쪽으로 한 걸음 옮겼다. 카울란의 얼굴이 다시 사라졌다.
카울란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잡아 빼니 페델리우스가 이번엔 옆으로 두 걸음을 옮겼다.
발끝을 든 카울란이 페델리우스의 어깨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페델리우스가 똑같이 까치발을 든다.
무슨 두더지라는 생물도 아니고, 카울란은 페델리우스의 여기저기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것을 페델리우스가 보이는 족족 막아냈다.
뭔진 모르겠지만, 모양새가 우스워서 눈을 떼지 않고 구경했다.
“오오…….”
“부단장님 힘내십쇼!!”
우렁찬 목소리들이 카울란을 응원한다. 원래 저렇게 소리치는 건가?
앉은 채 멀뚱히 바라보고 있으니 카울란이 페델리우스의 어깨 너머로 날 바라보며 입을 연다.
물론 그나마도 금세 페델리우스에게 가려져 사라졌지만 말이다.
“단장님, 이건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제 인사를 받아주셨단 말입니다.”
“오늘은 이만 해산.”
카울란의 항의에도 페델리우스가 그를 뒤로 밀며 말했다. 카울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카울란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페델리우스에게 밀리긴 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페델리우스의 말에 말없이 복종했던 것과는 제법 다른 모습이다. 신기해서 계속 쳐다보고 있으니 카울란이 나를 보며 손을 흔든다.
멀뚱히 바라보다 나도 똑같이 손을 흔들어주니 페델리우스가 이번엔 내 앞을 가로막았다.
“카울란, 당장 황녀 전하의 앞에서 그 얼굴 치워라.”
페델리우스가 카울란의 귓가에 가까이 대고 말했다. 잇새를 깨물며 내뱉은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들을 수 없겠지만, 다락방에서 단련된 내겐 제법 쉬운 일이었다.
‘……페델리우스도 연기 중인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공포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했다.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다.
화가 나지 않았는데 무서운 목소리라니, 어쩐지 불균형해서 이상하게 느껴진다.
‘못 들은 척해야지.’
카울란의 불만스러운 표정을 뒤로한 페델리우스가 내게로 몸을 돌렸다.
카울란의 입술이 한층 더 삐죽 튀어나왔다. 볼에 커다란 상처를 달고 있는 남자가 짓는 표정치고는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기사들이나 병사들이 짓는 표정이라곤 늘 무표정이거나 비웃음 어린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업신여김이 가득한 표정을 볼 때면 늘 기분이 더러웠다. 그래서 기사나 병사는 좋아하지 않는다.
‘뭔가 느낌이 다르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왕국의 사람들은 느낌이 다르다. 끈적하고 기분 나쁘고 축 처진 느낌이 없다.
제국에 있는 사람들이 습기 가득하고 더운 날씨 같다면, 이곳 자르딘 왕국 사람들은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기분 좋은 날씨와 닮았다.
“황녀 전하, 이만 가시죠.”
카울란을 쫓아낸 페델리우스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으며 말했다.
“빈틈 발견!”
카울란이 페델리우스를 밀쳤다. 옆에서 갑작스럽게 떠밀린 페델리우스가 모랫바닥에 주저앉았다.
‘어…….’
카울란은 내 앞에 페델리우스와 똑같이 한쪽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마주했다. 카울란보단 넘어진 채 꼼짝도 하지 않는 페델리우스가 더 신경 쓰인다.
“그림보다 훨씬 아름다우십니다, 황녀 전하.”
카울란이 두 손으로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카울란에게서 후끈거리는 열기가 풍겼다. 여태 훈련을 했기 때문인 듯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페델리우스를 좀 보라고!’
넘어진 페델리우스가 한참 만에 어두운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카울란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눈앞에서 생글거리며 조잘거리고 있다.
눈앞에 카울란이 있으나마나 페델리우스가 신경 쓰여서 그쪽 힐끔거리기 바빴다.
덕분에 카울란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카우란……?”
“헉, 예! 말씀하십시오.”
카울란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내 손을 조금 더 세게 쥔다.
근데, 너 지금 나한테 대답할 때가 아니야.
“페데리우스…….”
손가락으로 페델리우스를 가리켰다. 페델리우스의 손이 하나는 검집에, 하나는 검 손잡이에 가있다.
그제야 카울란이 사태를 파악했는지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장님?”
“그러고 보니 최근에 검을 맞대본 적이 없었지? 카울란.”
“예! 하지만 괜찮을 것 같습니다!”
카울란이 우렁차게 대답하며 페델리우스의 말에 대답했다.
“검을 뽑아라, 오랜만에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봐주마.”
스릉, 페델리우스의 허리춤에 있는 검이 먼저 꺼내졌다.
기세에 눌린 듯 카울란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쪼그려 앉아 옹기종기 모여있던 다른 기사단원들이 차렷 자세로 서있었다.
눈치 하나는 매우 빠른 모양이다.
카울란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다 이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동시에 페델리우스가 땅을 박차고 카울란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채앵! 날카로운 금속음이 났다. 검이 맞부딪치며 은색의 빛을 발산한다.
챙, 챙. 몇 번이고 울려 퍼지는 금속음을 들으며 가만히 턱을 괴었다.
내리쬐는 태양이 꽤 뜨겁다. 햇볕에 열기를 가득 머금은 모래알은 손가락을 대면 후끈거리기까지 하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체력이 대단하게만 느껴졌다.
페델리우스가 우위에 있다는 건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다.
여유로운 페델리우스에 비해 카울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막는 데 급급해 보였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 듯,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기사단원들도 조용했다.
그들은 장난스러운 기색이라곤 전부 지운 채 경건한 자세로 대련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도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딴짓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아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혹시나 빛이 날까 싶어서 왼손으로 오른쪽 손등을 덮었다.
<네, 주인님.>
시선은 페델리우스에게 고정한 채 머릿속으로 아콰에게 말을 걸었다.
<비를 내려줄 수 있을까?>
<물론이죠.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등에서 푸른 빛이 새어 나온다. 다급히 손을 뒤로 돌리고 왼손으로 손등을 꾹 눌렀다.
쿠릉, 쿠르릉,
하늘이 짐승의 울음과 닮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새파랗기만 했던 하늘에 새까만 구름이 몰려든다. 새파란 하늘은 구름에 뒤덮였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려는 하늘을 보는 건 처음이라서, 고개를 든 채 그대로 굳어있었다. 단지 시선을 빼앗겼다.
어쩌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르지만, 신비로웠다.
툭, 투명한 것이 한 방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이 시발점이 된 듯, 순식간에 비가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에 대련은 중지됐다.
말이 중지지, 내 눈엔 카울란이 이미 너덜너덜해진 것으로만 보였다.
비가 점점 더 거세진다.
아무것도 없는 하늘에서 투명한 물이 흘러내린다.
마치 본 적도 없는 마법 같아서,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황녀 전하!”
멈춘 시간 사이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얼굴이 흠뻑 젖었는데도, 끈적거리거나 기분 나쁜 느낌이 없어서 마치 아콰가 온몸을 감싸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기분 좋은 감각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황녀 전하?”
“응.”
두 번째 부름을 듣고서야 간신히 하늘을 바라보던 고개를 내렸다. 이렇게 간단하게 내릴 수 있는 비를, 제국은 그렇게도 원하고 있다.
손을 뻗어 손바닥을 펼치니 손바닥 위에 빗물이 고인다.
<물, 제발 물을…….>
<무, 무우…….>
한 번씩 머릿속을 스치는 그들의 표정이 어땠더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서 그런지 표정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그 상황만이 한 번씩 기억의 문을 두드릴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해봤다. 만약,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나는 이런 복수를 꿈꾸진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만약 그랬다면, 아마도 나는 조금 다른 걸 바랐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를 편하게 해드리기 위해 제국에게 기꺼이 이용당한다거나, 혹은 이 능력을 그들을 위해 썼을지도 몰랐다.
“얼른 들어가시죠, 금방 그칠 것 같은 비입니다. 저택엔 비가 그치면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대신 나는 메리와 페델리우스를 만나지 못했겠지.
물론 그 모든 건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말이다.
“응.”
페델리우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페델리우스가 내 손을 잡고 왕궁 안으로 걸어갔다. 그는 조금 다급한 모양이지만, 나로선 이 비를 조금 더 맞고 있어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 하는 걸 알면 화내겠지.’
페델리우스는 이상한 데에서 걱정이 많으니까 말이다.
“부단장님, 어쩐지 기분 좋은 비 아닙니까?”
“그러게. 덕분에 땀이 식었어. 고마운 비야.”
“어째 비가 필요할 때 딱 맞춰 내려준답니까. 헛, 혹시 저한테 비를 내릴 수 있는 능력이……억! 왜 때려!”
“할 줄 아는 건 우어어어! 소리 지르는 것밖에 없는 고릴라한테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뒤따라오는 기사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말하는 것이 재밌어 그쪽으로 귀가 쫑긋해졌다.
왠지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기분에 가슴 한편이 간질거리기까지 하다.
가슴께를 몇 번 만지작거리다 페델리우스가 안내해주는 방을 따라 들어갔다.
“너희들은 여기까지다.”
“예? 저희는 어디서 쉽니까!”
“오늘은 퇴근해. 제1 기사단이 비번도 아니니 일찍들 들어가.”
“비 오는데 쫓아내시는 건가요!”
“안에서 쉴 거면 내일 연무장 이백 바퀴다.”
“이백 받겠습니다. 황녀 전……컥.”
“천 바퀴.”
페델리우스가 달려드는 카울란의 목을 뒤에서 붙잡으며 말했다. 무슨 연극이라도 보는 것 같은 유쾌함에 결국 지켜보다 웃음이 터졌다.
“아하하하!”
참을 새도 없이 꺄르르르 웃어젖히니 갑자기 기사단원들이 조용해졌다.
페델리우스가 눈을 크게 뜨곤 카울란을 발로 차 밖으로 밀어낸다.
쾅! 거세게 문을 닫은 페델리우스가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단장님! 이러시기 있습니까!”
“너무하십니다!”
쾅쾅거리며 기사단원들이 문을 두드린다.
페델리우스가 나를 보고 웃으며 몸을 돌리더니 쾅! 주먹으로 거세게 문을 내려쳤다.
내리친 곳이 움푹 파였다. 바깥도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졸졸거리며 쫓아오던 기사단원들은 결국 페델리우스에게 완패하여 쫓겨났다.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머가?”
반쯤은 습관이 된 혀 짧은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페델리우스가 어디선가 수건을 가지고 와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주며 입술을 달싹였다.
“덩치 큰 놈들이 다가와서 무섭지 않으셨습니까?”
처음에야 조금 무서웠지만, 나중에는 별로 무섭진 않았다. 게다가 권력의 정점인 페델리우스가 지켜주고 있는데 내게 해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대련하는 걸 보니 더더욱 그가 강하다는 걸 알게 됐다.
“응.”
“……무서우셨죠?”
페델리우스가 다시 대답을 요구한다. 못 들었나 싶어 고개까지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무서우셨군요. 다음에는 절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나는 괜찮다고 한 것 같은데, 페델리우스는 혼자서 대화를 이어나간다. 뭔가 싶어서 올려다보니 페델리우스의 평평한 미간에 또 주름이 잡혀있다.
구겨진 인상과는 반대로 페델리우스는 부드러운 손길로 물기를 털어냈다.
비는 오래 내리지 않았다.
페델리우스의 말대로 비는 삼십 분 정도 내리다 금세 그쳤는데, 덕분에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말을 탈 수 있었다.
부드러운 털과 들썩거림에 조금 맛 들일 것 같기도 했다.
“으아, 지쳤다.”
푹신한 침대 위에 엎어진 채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저택으로 돌아와 메리의 잔소리와 함께 욕조에 몸을 담갔다. 물론 잔소리의 대상은 내가 아니라 거의 페델리우스 쪽이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내가 제법 걱정됐던 모양인지 돌아온 나를 보는 순간 환하게 웃었다.
물론 물에 쫄딱 젖은 옷을 보고는 금세 눈을 세모꼴로 쭉 찢었지만.
“아콰, 이제 나와도 돼.”
오자마자 페델리우스와 식사를 하고,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메리는 일을 한다고 나를 여기에 데려다주고 필요하면 꼭 부르라고 말하며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페델리우스도 페델리우스대로 할 일이 있는지 나중에 찾아온다고 말하곤 사라졌고 말이다.
덕분에 시간이 비었다.
<주인님!>
아콰가 손등에서 빠져나오더니 내 얼굴에 몸을 비벼댔다.
손을 펼치니 아콰는 금세 내 손바닥 위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아콰, 나 이리나를 보러 가고 싶은데.”
<이리나요?>
아콰가 마치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응, 내가 저번에 찾아가서 처음으로 능력 썼던 여자.”
<아, 그 인간 여자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거라면 주인님께서 낙인을 찍어놨으니, 그 인간 여자에게 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물에 뛰어드시면, 물이 통로를 만들어줄 거예요.>
아콰가 손짓 발짓을 커다랗게 해가며 내게 설명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구나. 좋아, 오늘 저녁에 가자.”
<그 인간 남자는 어쩌시게요?>
“페델리우스? 그러게. 페델리우스는 눈치가 너무 빨라.”
눈치가 빨라도 너무 빠르다. 이전의 일로 아마 경계심이 더 높아졌을지도 모른다.
이마를 긁적이다 한숨을 폭 내쉬었다.
“오늘은 혼자 자겠다고 해보려고. 이곳의 왕도 그에게 해가 가는 건 원하지 않는 것 같았고.”
왕이 페델리우스를 아끼고 있다는 건, 대화 중에 여실히 드러났다. 그뿐만이 아니라 오늘 만난 기사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안에서 붕 떠 있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있잖아, 아콰.”
<네, 주인님!>
“……아니, 아니야.”
입 밖으로 내려던 말을 목 뒤로 삼켰다. 어릴 때를 제외하곤 해본 적이 없는 말이다.
아콰는 내가 이 말을 할 때면 언제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오늘 저녁에도 몰래 빠져나가자. 저택에 있는 모두가 잠들면 말해줘.”
<네! 알겠습니다!>
아콰가 파이팅 자세를 취하며 의지를 내보였다. 아콰를 끌어안고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뭔가 싸늘하다. 가슴 한편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에 와서 가족이나 친구가 가지고 싶다는 건 우스운 일이지.’
묘한 느낌에 아콰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곧 원하는 건 손에 떨어진다. 지금껏 기다려온 시간에 비해선 아주 조금이다.
아주 조금만 더 참으면 이 싸늘하고 어딘가 텅 빈 것 같은 기분도 분명히 사라지겠지.
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아, 아콰. 페델리우스 오나 보다. 그럼 부탁할게.”
<네, 주인님!>
작은 발걸음 소리에 급히 아콰와 인사를 나눴다.
아콰가 허공에서 한 바퀴 돌고는 손등 위로 쏙 사라졌다. 손등에 있던 푸른빛의 문양이 모습을 감췄다.
똑똑.
달칵.
타이밍 좋게 페델리우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무것도 모른 척 눈을 깜빡이며 방으로 들어오는 페델리우스를 바라봤다.
그가 곧장 내게로 온다.
‘어떻게 쫓아낸담.’
오늘만큼은 쓸데없이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다. 가슴이 휑한 게 분명 불안해서 그런 거다. 눈동자를 슬쩍 굴리고 있으니 페델리우스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낱말 카드를 만들었습니다.”
‘뭐?’
“자기 전에 조금 공부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공부?”
모른 척 고개를 기울였다.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앞에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종이뭉치에는 그림과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그림의 수준이 너무 높다.
낱말 카드를 본 적은 없지만, 이건 어디 미술관에나 전시해야 할 법한 그림이다. 멋들어진 그림 아래에 적힌 글씨라…….
‘그림이 아깝네.’
“그러니까, 이걸 배우는 겁니다.”
페델리우스가 꼬불꼬불한 글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실 다 아는 글자다. 아콰에게 거의 주입식으로 배웠으니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덕분에 쓸 일은 없었지만, 글은 다 안다.
“왜?”
“이걸 배우면 편지도 쓸 수 있고…….”
“편지이?”
“네. 아, 편지는 종이에다 하고 싶은 말을 적어서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겁니다.”
아콰에게 설명을 들을 때도 이해가 안 됐지만, 굳이 뭐 하러 종이에다 글을 써서 전해야 하는 걸까.
보통 거리가 먼 경우에 사용한다곤 들었지만…….
‘그럼 나는 딱히 쓸 데가 없는데.’
배울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고민 끝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를 받아주고, 한 가지를 요구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으니까.
“응! 오늘, 나, 혼자 자!”
“예……?”
“혼자 자!”
“혼자 주무신다고요?”
“응.”
페델리우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배우고, 빨리 쫓아내야겠다.
가르쳐달라고 하기 위해 낱말 카드로 손을 뻗는데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응?”
“혼자 주무시는 건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얼굴을 구겼다. 페델리우스의 표정도 전에 없을 만큼 단호하다. 이리나의 상태도 확인하고 싶고, 상황도 좀 알고 싶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일전에 왕 만났을 때 팔찌 같은 거 채우지 말라고 한다면서 깜빡했네.’
결국, 그의 페이스에 휘말려버려 나는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다음에 가면 반드시 말해야겠다. 생각하며 페델리우스와 눈을 마주쳤다.
“위험, 안 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페델리우스가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다. 그러라고 허락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안 된다고 말하지도 않는 것이 그도 나름대로 고민을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황녀 전하. 혼자서 주무시면 밤에 괴물이 잡아갈 수도 있습니다.”
“…….”
얘가 지금 뭐래? 입을 열었다가 결국 목소리가 나가지 않아 꾹 닫았다.
황당함에 화를 내려고 해도, 지금 처지를 생각하면 그게 불가능하다.
원래대로 돌아가면 꼭 해줘야지.
“흠흠, 괴물이 아니더라도 유령 정도는…….”
차라리 정령이 나타난다고 했다면 고개를 끄덕였겠다.
괴물에 유령이라. 할 말이 없어졌다.
입을 꾹 닫으니 페델리우스가 시선을 옆으로 스윽 피한다.
“페데리우스.”
“예, 황녀 전하.”
“하루!”
“하루만 말입니까?”
“응.”
페델리우스는 신기하다.
그는 이상하게도 내 말을 척척 알아들었다. 다른 이들은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말을, 페델리우스와 메리는 마치 평범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척척 알아듣는다.
페델리우스와 메리는 대단하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럼 공부는 내일부터 하기로 하고, 이만 누우십시오. 잠드시는 걸 보고 나가겠습니다.”
이게 페델리우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인 듯했다.
더 말싸움하기는 지치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페델리우스가 낱말 카드를 정리하며 나를 올려다봤다.
“정말 하루만입니다……?”
“응!”
“정말, 정말, 정말 하루만입니다.”
페델리우스가 다시 한번 말했다.
“응.”
내 대답에 페델리우스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결국, 페델리우스는 내가 한참이나 자는 척 눈을 감고 있고 난 뒤에야 방을 나섰다.
“벌써 사춘기가 오신 건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서.
‘사춘기가 뭐지?’
의문을 품었지만, 금세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진짜 잘 뻔했어…….”
계속 눈을 감고 있으니 졸음이 문턱까지 몰려왔다. 조금만 더 늦게 나갔어도 분명히 잠에 빠져들었을 거다.
“아콰.”
눈을 비비며 아콰를 작게 불렀다.
<네, 주인님.>
“다들 잠들면 말해줘.”
<네!>
아콰에게 부탁하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이 정적의 시간에는 늘 잠이 쏟아진다. 주변은 조용하고, 들리는 소리는 현저히 적다.
이 적막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나는 늘 밤하늘을 바라봤다. 다락방 안에서는 작은 틈새로, 지금은 널따란 창문으로.
한참 시간이 지나도록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콰도 내 손바닥 위에서 가만히 앉아있다. 깜빡이는 시야 위로 눈꺼풀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는다.
<주인님, 인간 남자의 호흡이 고르게 바뀌었어요.>
아콰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며 다시 눈을 비볐다. 눈꺼풀이 감겼다가 떠오르길 반복한다.
“아, 졸려 죽는 줄 알았어. 얼른 가자.”
휘청이는 몸을 일으키자 고여있던 공기가 조금 색달라졌다. 숨을 크게 들이쉬니 잠이 조금 깼다.
이제는 익숙하게 날개를 만들어 연못으로 향했다.
‘이리나를 떠올리랬지.’
머릿속으로 이리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아콰와 함께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작은 소리와 함께 나는 또 어떤 새까만 통로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은 자연스럽게 감겼다. 다시 눈을 뜬 것은 물의 온도가 바뀐 것을 느끼면서였다.
‘아무것도 안 보여.’
물속이라고 추정되는 주변은 온통 새까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끝없는 어둠은, 어쩐지 넓고 넓게 펼쳐져 있는 것 같아서 순간 새까맣고 거대한 공간에 압도당했다.
몇 차례 눈을 끔뻑거리다 날개를 만들어 날아올랐다. 아마 배는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배 위에 올라섰다.
이렇게 보니 거대한 배다. 움직이는 것조차 신기한 배였다.
이렇게 거대한 물건이 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걸까? 작은 의문을 품은 채 이리나가 있을 법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 배는 싫네.’
울렁거리는 느낌이 싫다. 아콰의 안내를 받지 않아도 어쩐지 이리나가 있을 만한 곳은 알 것 같다.
배 위는 조용했다. 여기도 아직은 밤인 모양이다.
까득, 까드득, 까득.
방을 하나하나 둘러보고 있는 도중에 들린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삐걱거리는 바닥과 흔들리는 등잔불의 불안정함, 덕분에 그림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까득, 쾅!
“여기야? 아콰.”
<네, 그런 것 같아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상한 소리가 나는 문을 쳐다봤다. 이리나의 방이라기보단 유령의 방 같은 느낌이다.
차라리 바닥이 좀 덜 삐걱거렸으면 그런 기분이 안 들었을 텐데.
<문이 잠겨있으니 제가 열어드릴게요!>
아콰가 물을 움직여 열쇠 구멍에 집어넣었다. 철컥. 잠겨있던 문이 순식간에 풀렸다.
까득, 까득,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여전했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무언가가 훅, 튀어나와 내 다리를 붙잡았다.
“으악!”
“무, 물…….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아.”
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내리니, 발에 매달린 것은 이리나였다.
그녀는 연신 바닥과 문을 긁어댄 모양이었다. 손가락 끝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손톱 밑에는 날카로운 나뭇조각들이 이리저리 박혀있었다. 바닥과 나무에는 긁은 흔적이 가득했다.
징그러운 모습의 이리나를 안으로 밀어 넣으며, 문을 닫았다.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아콰가 물로 장막을 쳤다.
어두운 방 아래로 바싹 마른 이리나가 보였다. 앙상하게 말라서 그때 그 살집 있던 여자와 동일 인물이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등잔불 아래로 드러난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딱, 딱, 손톱을 물어뜯던 이리나가 고개를 든다. 그녀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살려, 살려주세요.”
이리나가 손톱을 물어뜯다 말고 급히 내게 다시 매달렸다. 일어설 힘도 없는지, 거의 기어 다니는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가 이렇게 했지만, 역시 눈앞에서 보는 건 영 찝찝하다. 일전에 아콰가 보여줬던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바싹 메마른 모습이 기이했다.
상처투성이가 된 몸에는 딱지가 군데군데 생겨 있었다.
“제가 잘못, 잘못했……. 황녀, 황녀 전하…….”
딱, 딱, 딱, 손톱을 물어뜯어서 그런지 남아있는 손톱이 없다. 거기에 어쩐지 불안증세까지 있었다.
상황을 보니 감당이 안 되는 이리나를 가둬둔 모양이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는 모습에 기분이 가라앉는다.
언제까지고 콧대 높은 모습으로 소리칠 것 같던 여자가 나보다 훨씬 작아진 모습으로 발밑에 꿇어앉아 바들바들 떨고 있다.
‘옷은 또 왜 다 벗고 있는 거지……?’
갈증 난다고 옷까지 씹어 먹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온몸에는 새하얀 액체가 말라 비틀어져 묻어 있는 것으로 가득했고 다리 사이는 상처투성이였다. 입꼬리는 찢어져 있었으며 불안증세가 엿보였다. 악취도 상당했다.
주변을 쉬지 않고 살피며 손톱을 물어뜯어 나오는 피를 반사적으로 쪽쪽 빨아먹는다. 물 대신 살기 위해 먹으려는 듯했다.
떨리는 상처투성이의 몸. 맞기도 제법 맞은 모양인지 곳곳에 시퍼런 멍도 들어있었다.
“물을, 아니 살려주, 제발, 제발…….”
“이대로 뒀다간 육지에 닿기도 전에 죽겠는데…….”
이리나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그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이런 곳에서 죽어 봐야 시체가 바다에 던져지는 것 외에 다른 효과는 없을 테니까.
딱, 딱, 까득, 끼이익.
이리나는 정신없이 손톱을 깨물고 피를 빨아먹고, 바닥을 긁기를 반복한다. 그녀는 정말 정신을 반쯤 놓은 듯했다. 벗겨진 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왜 저런 모습인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지만.
<음, 괜찮을 것 같아요. 필요한 만큼은 물을 받고 있는 것 같고요.>
아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찮겠지.
“이리나.”
“네네, 황녀, 황녀 전하.”
“내가 나쁜 게 아니야.”
이런 일이 된 건, 내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그녀가 나를 그리 학대하지 않았으면 벌어지지도 않았을 일일 테니까.
“이건 네 업보야.”
“히끅, 잠, 히끅, 살려주세, 끅.”
그녀는 끅끅거리면서도 눈물이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수분이 없어서 눈물조차 메말라버린 것인지, 아니면 이것조차 진심이 들어가 있지 않아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나쁘지 않아.”
분명히 이건 타당한 일일 것이다. 모든 일이 끝나면 나는 비로소 진심으로 웃을 수 있겠지.
손바닥을 펼쳐 공기 중의 수분을 모았다. 아콰에게 배운 것을 다시 응용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얼굴만 한 크기의 물 덩어리가 만들어졌다. 몸을 쪼그려 앉아 그것을 이리나에게 내밀었다.
“물이야.”
이리나가 급히 그것을 가져가 게걸스럽게 빨아먹기 시작했다.
그런 이리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제 몇 번의 해가 더 뜨고 지기를 반복하다가 이 배는 육지에 닿겠지.
그러면 막이 오르는 거다. 소문이 퍼지고 퍼지길, 그저 기다리면 된다. 한 번씩 비를 내려주면서 말이다.
“많이 먹고, 부디 오래오래 살아줘.”
기껏해야 한 달 정도의 짧은 기간이겠지만 말이다.
“흐윽, 끄으흑, 살려주, 세요…….”
양손에 물 덩어리를 꼭 쥔 채 마른 울음을 내지르는 이리나를 쳐다봤다.
“싫어.”
단호하게 잘라냈다. 나는 그녀가 싫다. 아픈 게 싫은 나를 수없이 손찌검해대며 무릎 꿇렸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애처롭다고는 생각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이란, 이토록 처절하고 처참하다.
손톱이 뜯겨나가고, 날카로운 나뭇조각들이 손톱 밑에 파고들어 아플 텐데도 불구하고 그저 살기 위해 물을 갈구한다.
“사실 저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상태 확인하러 오느라 또 만나버렸네.”
몸을 일으키며 한숨을 삼켰다.
이리나가 내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앙상한 뼈마디가 느껴져 기분이 나쁘다. 출렁이는 배도 가히 기분이 좋진 않다.
“물도 줬으니까 제국에 도착할 때까지 죽으면 안 돼.”
달래듯 말을 하곤 문손잡이를 잡았다. 희열이 느껴지기보단 어쩐지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지만, 그렇다고 멈출 순 없다.
멈추기엔 이미 시작해버린 일이다.
동정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주먹을 쥐었다 펴며 문손잡이를 돌렸다.
이리나가 입을 벌린 채 나를 쳐다본다. 말랐다고 생각한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고, 아콰는 다시 문을 잠갔다.
“이봐! 거기 누구야?”
“이런.”
경비로 보이는 이와 정면으로 눈이 맞았다. 그렇게 오래 있지도 않았는데……!
‘배에도 경비가 있었어?’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날개를 만들어 빠르게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봐!”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바닷속에 뛰어든 후였다.
눈을 감았다 뜨니, 물의 온도가 바뀌어있다. 물의 색도 새까만 어둠에서 은은한 빛이 비치는 짙은 남빛으로 바뀐다.
“후아.”
연못에는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몸을 일으켜 연못 밖으로 기어 올라갔다.
온몸이 축축하다. 옷을 말리기 위해 옷자락을 붙잡고 머리를 털며 고개를 들었다.
“황녀 전하……?”
널브러진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경악한 표정의 페델리우스가 보였다.
‘망했다.’
동시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나도, 페델리우스도 얼굴을 마주본 채 한참을 굳어있었다.
꿀꺽, 긴장을 삼키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말없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다.
“페데리우쓰!”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삑사리가 났다. 해맑게 웃으며 페델리우스를 향해 양팔을 활짝 펼쳤다.
웃는 얼굴의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린다. 페델리우스가 그런 날 조금 멍한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대체 여기서 뭘…….”
그의 입이 간신히 벌어졌다.
“처, 첨벙첨벙!”
멍청한 오시리아! 생각한 답이 겨우 저거라니, 물에 얼굴을 파묻고 싶을 지경이다.
차라리 물속에 계속 있을 걸 그랬다. 그랬다면 적어도 들키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 연못이었지.’
위에서 보면 다 비쳐 보인다. 수심이 낮으니까. 어느 쪽이든 답이 없었던 건가. 우울함이 치솟았다.
성큼성큼 걸어온 페델리우스가 걸치고 있던 옷을 벗어 내 어깨에 둘러줬다. 그러면서도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 어지간히 충격인 듯했다.
‘아콰! 자고 있다며?!’
<부, 분명히 잠이 든 것 같았어요. 호흡에 기복이 없어서…….>
아콰의 목소리가 점점 움츠러든다.
페델리우스가 물에 젖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안아 올렸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발길엔 전에 없던 거친 느낌이 있었다.
화가 났나 싶어 몸을 움츠리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너무 안일했어.’
조금 더 안심할 수 있을 때까지 참을 걸 그랬다. 이리나가 당장 죽을 위기도 아니었으니 며칠 후에 갔어도 문제는 없었을 거다.
뭣보다 페델리우스가 말이 없는 게 더 무섭다. 평소 같으면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할 텐데.
표정이 단단하게 굳어있는 벽을 닮았다. 그가 2층으로 가지 않고 1층 어딘가로 걸어갔다.
똑똑. 페델리우스가 문을 두드렸다.
안에선 대답이 없었다. 똑똑. 페델리우스가 이번에는 조금 더 세게 문을 두드린다.
“네에…….”
‘메리…….’
잠에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척 보기에도 단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메리까지 부를 필요는 없는데!
조금만 늦게 왔어도 물에 빠진 모습은 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달칵, 문이 열렸다.
“누구……. 황녀님?”
눈을 비비며 메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간 도망이라도 가고 싶어졌다. 물은 바닥으로 쉴 새 없이 뚝뚝 흘러내리고, 머리카락은 엉망진창이다.
거기에 페델리우스에게 안긴 채였다.
‘정말 화난 것 같은데…….’
어색하게 웃으며 메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페델리우스가 내 행동에 나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놨다.
물이 더 빠른 속도로 바닥으로 떨어진다.
“황녀 전하를 씻겨드리고, 방으로 데려오도록 해.”
“네에, 근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나도 모른다.”
그가 짧게 대답했다. 페델리우스가 나를 한번 보더니 몸을 돌렸다.
평소와는 확실히 다르다. 싸늘한 기운이 온몸을 오싹하게 한다. 그래도 악의적인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황녀님,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메리가 페델리우스의 뒷모습을 잠깐 보다가 나를 끌어당겼다. 지은 죄가 있기에 순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메리의 방은 내 방보다 작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살던 다락방보다 열악했다는 건 아니다.
화려하지도, 열악하지도 않은 그냥 조금 아늑한 느낌이 드는 방이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방은 메리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게다가 여기저기 놓여있는 인형들이 아기자기했다.
“옷부터 벗겨드릴게요.”
욕실에 들어가 욕조에 물을 받아놓은 메리가 내 옷을 붙잡았다. 조심스럽게 끈을 풀고, 내 옷을 하나둘 풀어낸다.
나 때문에 잠에서 깼을 텐데 짜증 한 번 내지 않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드러난 피부에 시선을 내리니, 여기저기 상처가 남아있다. 이건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을 종류의 상처여서 때때로 보기 싫을 때가 많다.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있잖아요, 황녀님.”
“응?”
“음, 주인님이 화가 이만큼 나셨던데,”
메리는 언제나처럼 나를 배려해 천천히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하려는 듯 손가락으로 뿔을 만들더니 귀 옆에 대며 말했다.
그 배려심 넘치는 행동에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메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한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전적으로 내가 잘못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망설이듯 시선을 피하고 있으니 메리가 방긋 웃었다.
밤에도 반짝거리는 미소다. 내가 짓는 상당히 어색한 웃음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일단, 추우실 테니까 얼른 욕조에 들어가요. 메리가 물을 따뜻하게 데워놨답니다.”
부드럽게 끌어당기는 메리에 이끌려 욕조에 발을 디뎠다. 온도를 어찌나 잘 맞췄는지 뜨겁지도 않았다.
조금 서늘했던 몸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으음…….”
기분이 좋아서 물에 몸을 푹 담그니 이상한 소리가 났다. 조금 민망해져서 고개를 돌리니 메리는 이런저런 물품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잠옷 차림의 모습에 괜히 미안해졌다.
‘조금 더 참다가 나가볼걸.’
이런저런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물론 후회는 잠깐이었다. 욕조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 너무 좋았으니까.
“황녀님, 여기 앉아보시겠어요? 비누칠해드릴게요.”
“응.”
순순히 대답하며 메리가 가져다준 의자에 앉았다. 부드러운 거품이 몸을 천천히 닦아낸다. 굳은살 박인 메리의 손길이 부드러워서 몸에 힘이 다 빠졌다.
“있잖아요, 황녀님. 음…….”
메리가 드물게 말을 끌었다.
“응, 메리.”
일부러 고개를 끄덕이며 이름까지 불러줬다. 메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설핏 웃고는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주근깨 박힌 모습이 더없이 순수해 보인다.
“전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