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별일은 아닌데 많은 일이 있어 보였다.
매번 먹고, 자고, 일어나서, 아콰와 대화하다가 또 자기를 반복했던 일상과는 달랐다는 이야기다.
일단 하루에 해야 하는 일과가 정해졌다. 대체로 나는 조금 늦은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는다.
그리고 메리와 놀다가 그녀가 일을 하러 가면 아콰와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페델리우스가 돌아오고,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페델리우스는 내게 공부를 가르쳐줬다. 그에게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면, 매일매일 내게 일과를 보고한다는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다.
<오늘은 기사단 전체 훈련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페델리우스가 평소와 다르게 일찍 일을 마친 듯한 날이었다. 그는 갑자기 오자마자 내게 그가 오늘 한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퇴근길에 시장에서 사과도 사 왔습니다. 아, 사과는 이렇게 생긴 나무에서 생기는 열매입니다. 이건 빨간색 사과입니다.>
내 머리 위로 떠오르는 수많은 물음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그는 언제 준비했는지 어린아이에게 보여줄 법한 그림을 한 손에 들고 그것을 내게 들이밀었다.
그것도 갑옷도 벗지 않은 채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말이다.
아, 그림은 아마도 페델리우스가 그린 것으로 보였다. 그가 그려준 낱말 카드와 그림이 제법 닮아있었으니까.
어쨌든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림을 든 반대쪽 손에는 먹음직스러운 빨간 사과를 들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것들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친절하게.
<이 사과나무는 이런 하얀 꽃을 피웁니다. 여기서 이런 열매가 생깁니다. 그리고 이게 일정이상 자라면 저희가 아삭아삭 씹어 먹는 사과가 되는 거죠. 아, 이 색은 빨간색입니다.>
장황한 설명에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신뢰를 최대한 빨리 되찾고 싶었으니 말이다.
사과가 빨간색이지 다른 색도 있던가.
물론, 머릿속은 이미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마주한 페델리우스의 무표정한 눈빛에 뿌듯함이 엿보여서 더더욱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껏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과 그가 쥐여 준 사과를 황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정도였다.
아무래도 그는 나를 가르치는 것이 보람찬 모양이었다.
“황녀님! 뭐 하고 계세요?”
생각에 잠긴 나를 현실로 끄집어낸 것은 메리였다. 메리는 그날 이후로 내게 어두운 기색을 보이거나 과거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그 감정의 소용돌이만큼은 잊히질 않아서 지금도 가끔 그녀를 볼 때면 떠오르곤 했다.
“색칠.”
짤막하게 대답하곤 페델리우스의 그림 위에 색을 칠했다. 단순히 붓으로 색을 칠하는 것인데도 의외로 재미있다.
덕분에 요즘은 페델리우스 그림에 색을 칠하며 심심한 시간을 보낸다.
“드디어 다음 주엔 여행을 가게 됐어요!”
“메리, 그거 말했어.”
“어라? 그랬던가요?”
한 달 동안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면, 내가 나름대로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됐다는 거다.
얼마 전부터 더는 못 참겠어서 조금씩 말을 늘려가던 참이다. 다행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도리어 처음 문장을 두세 번 제대로 말한 날에는 흔히 말하는 생일상에 버금가는 진수성찬을 선물 받았다. 물론 메리와 페델리우스에게도 각각 선물을 받았다.
메리는 목이 덜렁거리지 않는 새 인형을, 페델리우스는 내게 이 붓과 그림을 선물했다.
물론 메리의 인형은 사지가 여전히 덜렁거렸다. 그래도 목만큼은 발전했으니 다행이었지만.
“다 했다!”
종이를 들어 탁자에 올려뒀다. 색칠을 다 하고 나면 왠지 내가 그린 것 같아서 뿌듯하다. 여기저기 비죽비죽 튀어나온 곳은 많았지만.
“메리, 나 정원 갈 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물감을 정리하다 말고 메리가 다급히 내 뒤를 쫓아온다.
한 달 전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페델리우스는 내가 잘 때까지 옆에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덕분에 이 한 달간은 거의 얌전히 집에만 있었다. 정말 온몸에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심심했다.
그나마 작은 위안이 페델리우스의 정원이다. 이름 모를 찻잎들과 꽃잎이 엄청 많다.
그것들은 내가 정말 모르는 거라서 요즘은 꽃과 찻잎의 이름을 외우는 데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여행이라…….’
“엇, 조심히 내려가세요! 위험해요!”
메리를 힐끗, 돌아보곤 속도를 늦췄다. 내가 넘어지는 게 아니라 메리가 넘어질 것 같다.
사실 메리는 여행이라고 말했지만, 나들이 같은 거다.
한 달 전에 약속했던 그 첨벙첨벙…….
차마 말로 내뱉기 힘든 그걸 아직 가지 못했다.
페델리우스가 제법 일이 바쁜지 쉽게 시간을 내지 못했던 탓이다. 그러면서도 저녁에는 꼬박꼬박 집에 들어왔다. 야근이라는 게 없는 모양이다.
이 집에서는 소문이나 정보도 안 들어오고, 아콰와 느긋하게 대화할 시간도 없었다. 덕분에 제국의 상태를 살피지 못한 지 한 달째다.
이리나가 있는 사절단이 제국에 도착하고도 1~2주는 더 지났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이번 일이 끝나면 조금 괜찮아지려나.’
최근 페델리우스의 경계도 조금씩 풀려가는 게 보이고 말이다. 이대로라면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멀쩡히 말을 해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꼬인 관계도 좀 풀리려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정원 밖으로 발을 디뎠다.
동시에 무언가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꺼림칙하고, 기분 나쁜 시선이 말이다.
‘뭐지?’
표정이 절로 구겨졌다. 자리에 멈춰서 좌우를 살폈다. 꺼림칙한 느낌이다. 등줄기가 오싹해질 정도로 기분 나쁘고 끈적거린다.
“황녀님?”
“응.”
메리의 부름에 다시 발걸음을 뗐다.
기분 나쁜 느낌은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끈적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양손으로 팔을 쓸어내렸다.
“메리! 여기 누가 올 수 있지?”
“여기에 누가 오냐고요?”
“아니! 누가 들어와?”
“아, 누가 들어올 수 있냐고요?”
“응.”
정원 바닥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바닥이라곤 해도 커다란 나무 밑이다. 햇볕도 들어오지 않고, 큼지막한 그늘도 있다.
“앗!”
메리가 놀란 표정으로 내 앞에 달려온다.
“황녀님, 여기 이거 깔고 앉으세요. 바닥에 그냥 앉으시면 안 된답니다.”
“응, 알았어!”
메리가 더 잔소리하기 전에 얼른 일어났다. 그녀가 바닥에 큰 수건 같은 것을 깔아준다. 그 위에 다시 앉았다. 메리도 그 앞에 몸을 굽히고 앉는다.
“아, 이 저택은 경비가 꼼꼼한 편이예요. 담장에는 가시덤불이 있고, 꾸준히 삼엄하게 경계도 하고 있어요. 입구는 당연히 24시간 철통 감시 중이고요.”
메리가 뿌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빠져나간 것 때문에 내부 경비도 강화됐어.’
한 달이 지났어도 페델리우스는 경계를 풀지 않는다. 자유 시간이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다. 곤란해졌다. 어떻게든 제국으로 넘어가고 싶다.
“혹시 누가 있었나요?”
“응? 아니~ 그냥.”
기시감으로 넘기기엔 기분 나쁜 감각이었다. 메리를 슬쩍 보고 나무에 기대 눈을 감았다.
<아콰, 있어?>
<그럼요, 주인님!>
아콰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잔잔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아콰와 마음대로 대화를 하려면 집중을 좀 해야 한다. 덕분에 눈을 감지 않으면 대화가 어렵다.
<아까 저쪽에 뭔가 있었니? 이상한 시선을 느꼈거든.>
<기분 나쁜 느낌이라면 저도 느꼈답니다. 근데 금방 사라져서 그게 뭔지는 파악하지 못했어요.>
<내 착각은 아니라는 거지?>
<네. 주인님께서는 아주 민감하고, 노련하게 눈치채신 거랍니다.>
아콰의 칭찬에 얼른 눈을 떴다. 뒷목을 매만지고, 볼을 긁적이다가 손을 내렸다. 칭찬은 정말 익숙하지 않다.
게다가 민감하고 노련한 게 아니다.
익숙했던 느낌이기에 쉽게 눈치챈 거다. 트럼프 제국에서 줄곧 받던 시선과 방금 그 시선은 다를 것이 없었다.
‘살기가 조금 더 강한 걸 제외하면.’
살기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때 느껴지는 기운이다. 나는 살면서 그런 느낌도 많이 받아왔다.
타인을 죽이고 싶어 할 때 느껴지는 기운은 내게도 아주 익숙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가 자르딘 왕국이라는 거야.’
자르딘 왕국은 나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없다. 아예 없진 않겠지만, 제국에 비해선 훨씬 적다.
굳이 여기까지 들어와서 내게 살기를 내뿜을 만큼 증오에 찬 사람이 있던가?
“황녀님?”
‘도대체 누구지?’
근처에 물이 있었다면 아콰가 알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아콰는 말이 없었다. 그건 근처에 물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황녀님!”
“어?! 응? 메리?”
메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메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인다.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응? 아…….”
“네?”
“처, 첨벙첨벙!”
이런, 젠장!
제발 내게도 순발력이라는 게 생겼으면 좋겠다.
메리가 “아~” 하고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주억인다. 완전히 이해한 표정이다.
‘대체 뭘 이해한 거야.’
이럴 때 한 번이라도 딴죽을 걸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속아주지 않은 것에 씁쓸하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마음은 편할지 모른다.
“첨벙첨벙 여행은 다음 주예요. 날짜가 정확히 정해지면 말씀드릴게요!”
“응!”
조금 기대되긴 한다. 어딘가를 놀러 간다는 행위를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다만, 나를 아무 데도 못 가게 할 것 같아서 조금 두렵다. 도르륵 굴린 눈동자를 바닥으로 떨궜다.
“황녀님 덕분에 주인님께서 많이 밝아지셨어요.”
“밝아져?”
“네! 원래는 야근하는 날도 많으셨거든요. 아! 야근은 늦게 온다는 말이에요. 밖이 깜깜해졌을 때 집에 오는 거죠!”
메리가 길게 설명했다.
페델리우스나 메리나 단어 설명은 질리지 않는 모양이다.
단어장으로 제법 많은 단어도 배우게 됐다. 그래도 일상생활에서 배우는 단어가 훨씬 많다.
“응!”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힘껏 대답해주는 것뿐이다.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를 내는 건 정말 어렵다. 메리가 돌연 웃는다.
“근데, 주인님께서 이제 일찍 들어오게 됐어요. 집에도 일찍 오시고, 매번 이것저것 선물도 사오시고.”
‘동화책이나 과일이나 인형 같은 거 말이지.’
“거기에 매번 저녁 식사는 함께하려고 노력하시고요.”
‘페델리우스와 메리의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그 식사를 말하는 모양이다.’
둘은 나를 떠먹이지 못해 안달이 난다. 꼭 뜨거운 음식이나 칼을 써야 하는 음식엔 절대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혼자서 먹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줘도 그 점은 변하질 않았다.
그리고 둘은 싸운다. 대놓고 싸우지는 않는데 신경전이라는 게 벌어진다.
그리고 어떻게든 둘 다 내 입에 음식을 한 번씩은 넣고 만다.
“게다가 황녀님이랑 같은 방에서 동침도 하시잖아요! 주인님은 언제나 친절하시지만 늘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 같았거든요. 근데 황녀님이랑 있을 땐 안 그러세요.”
“응!”
메리의 말에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맨날 하나부터 열까지 돌봐주는 메리의 말이다. 끄덕여주지 않을 게 뭐가 있을까.
솔직히 속이고 있는 것에 대해 조금 미안한 감정도 있었다.
“그러니까 메리는 지금이 너무너무 좋아요. 앞으로도 계속, 줄곧, 이렇게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메리가 내 손을 잡아 오며 말했다. 양손으로 꼭 잡은 손을 내려다보며 마주 웃어줬다.
눈을 휘고,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린다. 내 미소에 메리가 나를 끌어안았다.
“황녀님 너무 좋아요!”
“나도 메리 좋아!”
메리를 마주 끌어안아주는 순간, 메리의 어깨너머로 다리가 보였다. 익숙하고, 길쭉하고, 단단해 보이는 다리다. 갑옷을 입고 있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망했어.’
페델리우스가 황망한 표정으로 나와 메리를 보고 있었다. 페델리우스가 곧바로 이쪽으로 걸어온다.
“페데리우스!”
황급히 끌어안은 메리에게서 팔을 뺐다. 내 부름에 메리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메리가 고개를 숙였다. 페델리우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앉은 채 그냥 두 사람을 올려다봤다. 페델리우스의 입매가 직선처럼 쭉 굳어있다.
“일찍 왔어!”
“네. 오늘은 훈련도 없고, 폐하를 경호할 일도 없어서 일찍 돌아왔습니다. 싫으십니까?”
“아니! 좋아!”
페델리우스가 내 앞에 몸을 숙이고 앉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는 것은 이제 그의 일과처럼 느껴진다.
“실례하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나를 들어 올렸다. 졸지에 그의 품에 안기게 됐다. 아마도 이런 것에 맛을 들인 모양이다.
그는 자신이 오기 전에 내가 밖에 있으면 굳이 나를 품에 안아 들고 들어간다.
‘그래서 맨날 오기 전에는 방에 들어가 있었는데.’
오늘은 예상 밖의 시간에 도착했다. 속으로 혀를 차며 몸에 힘을 뺐다. 몇 번 반항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황녀 전하,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니. 페데리는?”
이젠 어느 정도 평범하게 대화하게 돼도 여전히 애처럼 취급하기에 나도 복수를 시작했다.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 그를 불러대는 거다.
“아직 먹지 않았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별로 기분 나빠 보이지 않는 게 흠이지만.’
내가 저 이름을 부를 때면 페델리우스는 늘 웃는다.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지도 않는다. 미간이 좁아지지도, 인상이 구겨지지도 않는다.
결국, 혼자만의 기분전환이 됐다.
‘이름도 길었으니까 마침 잘됐지.’
혼자 위로도 해보지만, 효과가 없다는 건 역시 뼈아픈 일이다.
“드시고 싶은 음식은 없으십니까?”
“응! 다 좋아.”
음식을 가릴 처지도 아니었기 때문에 편식은 없다. 뭐든 주면 고마운 음식인 거다.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기특하다는 표정이다.
“아, 휴가 날짜가 나왔습니다.”
“휴가?”
“네. 휴가요. 음, 첨벙첨벙을 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놈의 첨벙첨벙!
이러다 첨벙첨벙 노이로제가 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놀이라고 해도 충분히 알아듣는다고!
“어디에 가?”
“호수와 강, 계곡 중에 어디가 좋으십니까?”
“호수? 강? 계곡?”
흠. 아콰가 보여줬던 이미지를 떠올렸다. 호수도 나쁘지 않고, 강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계곡은…….’
머리가 절로 기울어졌다. 툭, 페델리우스의 가슴팍에 머리가 닿았다. 계곡의 이미지는 본 적이 없다. 강은 커다랬고, 호수도 넓었다.
‘계곡은 어떻지?’
고민하는 와중에 어느샌가 내 방문 앞에 도착했다.
페델리우스가 나를 한 손에 안으며 빠르게 문을 열었다.
‘요령도 좋아.’
흐트러짐이라곤 조금도 없다. 사람 한 명을 안았으면서도 힘든 기색도 없다. 체력은 정말 좋았다.
“제가 그려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응.”
함께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페델리우스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거다. 보통 잘 그리는 게 아니다. 매우 잘 그린다.
페델리우스가 협탁에 놓여있던 연필과 종이를 집어 든다. 그리곤 연필로 그림을 쓱쓱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던 백지 위에 선이 그려진다. 그것이 곧 바위가 되고, 물줄기가 되고, 풀이 된다.
단순한 선에 윤곽이 생기고, 질감이 살아나고, 명암이 새겨진다.
멍하니 턱을 괸 채 페델리우스가 그려가는 세상을 바라봤다. 페델리우스는 원하는 그림을 금세 그려낸다.
나는 늘 그걸 볼 때마다 놀라움을 숨기지 못한다.
‘이만큼 많은 걸 봐온 거겠지?’
흑백의 선이지만, 그 위로 푸른색이 덧씌워진다.
‘부럽다.’
나도 조금 더 많은 걸 보고 싶다. 몰래 숨어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게 아니라 페델리우스처럼 걸어서 말이다.
“다 그렸습니다.”
“벌써?”
“네, 조금 급하게 그려서 엉망입니다.”
페델리우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그가 내 앞에 그림을 보여준다.
“이게 호수입니다. 이렇게 넓은 곳에 물이 고여있죠. 뱃놀이나 낚시를 하기에 적합합니다.”
푸른 초원 사이에 있는 널따란 호수를 살폈다.
“응.”
“그리고, 이게 강입니다.”
페델리우스가 또 다른 그림을 꺼내 보여준다.
이번엔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는 모습이다. 끝없이 이어진 물줄기는 당장에라도 흘러내릴 것 같다.
“유속이 느린 곳이라 뱃놀이가 적당한 곳입니다. 아, 유속은 물의 빠르기입니다.”
“응.”
“그리고 이게 계곡입니다. 제 생각엔 여기가 제일 적합할 것 같아요. 숲 깊은 곳에 있어서 한적하고, 깊지 않아서 놀기에 적당합니다.”
조곤조곤 설명하는 페델리우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계곡을 그린 그림에만 힘이 들어간 것 같다. 다른 건 대충 선을 그렸다면, 이건…… 한 번 더 신경을 쓴 느낌이다.
‘계곡으로 가고 싶은가 보구나.’
페델리우스도 참 알기 쉬운 사람이다.
“어디가 좋으십니까?”
페델리우스가 종이 세 장을 나열해놓은 채 물었다.
“음…….”
손을 일부러 강 쪽으로 향했다. 꿀꺽, 페델리우스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허벅지를 꼬집었다.
“계곡!”
“네. 알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다급히 종이들을 전부 치운다. 마치 내가 말을 번복하는 걸 원치 않는다는 듯이.
“아하하하!”
페델리우스답지 않은 다급한 모습에 결국, 꾹 참던 웃음이 터져버렸다.
“황녀 전하?”
“으응?”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떨며 대답했다.
아, 정말 귀엽다. 아콰만큼 덩치가 작은 것도 아닌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신기하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그럼 좋은 곳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응! 페데리야, 페데리야.”
“예.”
“오늘 왜 일찍 와? 훈련 왜 없어?”
최근엔 내가 페델리우스에게 말을 거는 일도 늘었다. 열심히 말을 배운다는 티를 내기 위해서다.
사실 페델리우스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제법 재밌다.
“아. 최근 엘레나 재상께서 폐하를 꽉 붙잡고 계십니다. 집무실 밖으로도 나오질 못해서 경비병으로 충분합니다. 재상께서 필요 없다고 딱 잘라 내치셨습니다.”
“엘레나 재상?”
“네. 일전에 폐하를 만나러 가셨을 때 날카롭게 생긴 여자를 못 보셨습니까? 아마 눈이 쭉 올라가 있었을 텐데요.”
페델리우스가 눈꼬리를 손가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당연히 알지. 페델리우스가 해 보인 눈이 그때 봤던 엘레나와 똑 닮았다.
“알아. 무서운 여자.”
“저만큼이나 폐하께 당한 게 많긴 합니다만, 친절하신 분입니다. 일에는 엄하지만 대개 폐하 한정입니다. 덕분에 최근 일찍 들어오고 있습니다.”
“폐하가 엘레나한테 져?”
짧게 되묻자 페델리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리곤 곤란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인다. 평소라면 들려왔을 대답이 없다. 고개를 기울이자 그제야 페델리우스가 입을 뗀다.
“무력, 그러니까 힘으로 따지면 당연히 폐하께서 이깁니다. 하지만 대개는 엘레나 재상이 이깁니다. 자꾸 도망가는 폐하 때문에 한 번 눈이 뒤집혀서 폐하의 멱살을 잡았던 적이 있거든요.”
“멱, 살?”
눈을 깜빡였다.
저 멱살이 내가 아는 멱살이 맞겠지? 페델리우스가 자신의 목덜미를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를 이렇게 붙잡는 걸 멱살이라고 합니다.”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돼.’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켰다. 언젠가 조금 더 말을 하게 된다면 반드시 하나하나 설명하지 말라고 말할 거다.
“살았어?”
“네. 엘레나 재상께서도 참다 참다 폭발하신 거였습니다.”
‘뺀질거리게 생기긴 했더라.’
오죽 이리저리 튀었으면 신하가 멱살까지 잡을까?
“아무래도 그 일로 폐하께서도 제법 놀라셨던 모양입니다. 엘레나 재상도 감정에 북받쳐서……. 음, 드문 모습을 봤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말끝을 흐렸다.
사실 나는 그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는 사실이 더 신기했다.
“엘레나 재상께서는 제 몸보단 나라를 더 사랑하는 분입니다. 저도 존경하고 있죠.”
“응!”
“어쨌든 그 뒤로 폐하께서 미뤄둔 일을 전부 처리하시고, 엘레나 재상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피해? 왜? 싫어서?”
내 질문에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젓는다. 미간에 주름이 잡힌 것이 퍽 곤란해 보인다. 나는 가만히 페델리우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쪽 무릎을 꿇은 모습이 불편해 보인다.
“페데리. 여기 와. 옆에.”
페델리우스를 끌어당겼다. 왜 맨날 침대 옆자리 두고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있는지 모르겠다.
“감사합니다.”
페델리우스가 조금 놀란 눈을 하더니 순순히 내 손에 끌려왔다. 슬슬 이렇게 경계심 좀 풀어주면 좋겠다. 매일 밤 초조함에 잠이 쉽게 오질 않는다.
‘뭘 하든지 일단 제국으로 가야 하는데.’
무슨 소문이 도는지도 궁금하다. 비도 내려야 하는데, 지금 그것도 못 하고 있다. 페델리우스를 때려눕히고 갈 수도 없고.
‘수면제 같은 거 없을까?’
이제는 쓸데없는 방법까지 떠오른다.
음……. 수면제? 제법 괜찮은 방법 같다. 말없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슬쩍 페델리우스를 보니 그는 날 쳐다보고 있다.
“어……. 왜 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왜 피했어?”
내가 다시 본론을 물었다. 궁금했던 건 그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왕은 평범한 왕이 아니다. 여자를 못 이겼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처럼 능력을 숨기고 있나?’
그러고 보니 특별한 능력을 쓴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페델리우스가 나를 보곤 웃었다.
“아마도 싫은 게 아니라 곤란해서라고 생각합니다. 폐하께선 엘레나 재상을 제법 귀히 여기시니까 말입니다.”
“……잘 모르겠어.”
“아마 그때 너무 당황해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못 잡으신 것 같습니다. 거기에 일은 여전히 내팽개치고 다니시니…….”
저쪽도 좀 복잡한 모양이다. 왕이라고 다 편한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게 싫다면.
“폐하가 일하면 되잖아.”
“예?”
“폐하가 일 다 하면 엘레나 안 오잖아.”
내 말에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시원스럽지 못한 애매한 미소를 띤 채다.
페델리우스를 붙잡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도 잡고 있었네.’
페델리우스를 끌어당긴다고 손을 붙잡았었다. 페델리우스가 맞잡아줘서 빼질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도 페델리우스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렇죠. 정말 만나는 게 껄끄럽다면 엘레나 재상이 찾아오기 전에 일을 다 할 텐데 말입니다.”
“응!”
페델리우스가 어깨를 으쓱인다. 똑똑, 시기 좋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그래.”
메리의 목소리다. 페델리우스의 허락에 문이 열렸다. 페델리우스는 언제쯤 손을 놓아주려나.
멍하니 생각하며 메리가 들어오는 것을 바라봤다.
“식사 준비가 다 됐습니다.”
“곧 내려가지.”
“네, 알겠습니다.”
메리가 고개를 숙이곤 나간다. 종종 페델리우스와 기 싸움을 하는 것 같은데, 이럴 때 보면 또 확실한 주종관계다.
슬쩍 고개를 기울이자 페델리우스가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뺐다. 후끈한 열기 사이로 시원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식사하러 가시겠습니까?”
“응.”
페델리우스가 뻗는 손바닥 위에 손을 올렸다. 이래선 아까와 별로 다를 게 없다. 그가 내 손을 조심스레 그러쥐곤 방을 나선다.
“페데리야.”
“예?”
“내 집 어때?”
내 물음에 페델리우스가 걸음을 멈췄다.
“무슨 집 말입니까?”
“제국.”
내가 짧게 물었다. 솔직히 이걸 묻는다고 순순히 대답해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소문이든 뭐든 알고 있는 게 있다면 알고 싶다.
밤에는 페델리우스, 낮에는 메리 때문에 아콰에게 뭘 알려달라 하지도 못하는 중이다. 페델리우스가 눈을 크게 떴다.
‘어린애처럼 물었으니, 대충 이해해주지 않으려나.’
“……일단, 식당으로 가도 괜찮겠습니까?”
“응.”
순순히 대답했다. 페델리우스가 내 손을 좀 더 꽉 잡아 왔다. 표정이 어둡다. 뭔가 곤란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입술을 오물거리다 페델리우스의 눈치를 슬쩍 봤다.
‘정말 무슨 일이 생겼나?’
아, 답답해! 페델리우스를 따라가는 내내 속이 꽉 막힌 것 같았다. 답답하다고 소리라도 치고 싶다.
“페데리야?”
“예.”
“화났어?”
“아뇨, 화나지 않았습니다! 화난 게 아니라 잠깐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일단 앉으십시오.”
페델리우스가 의자를 꺼내준다.
슬쩍 눈치를 보다가 그 앞에 앉았다. 페델리우스가 의자를 밀어 넣어주곤 자기도 자리에 가서 앉는다.
“트럼프 제국으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아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정말 진심이다.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금 생활은 충분히 만족스럽고, 그 다락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냥 궁금해서.”
손끝이 떨리려는 것을 애써 부여잡았다. 나는 힘이 있고, 더는 떨지 않아도 된다. 알면서도 각인된 공포는 쉽게 사그라들진 않는다.
‘맞지 않아도 돼.’
나는 더 이상 아픈 척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
이리나는 죽었다. 아콰가 어느 날 그렇게 알려왔다. 어떤 몰골이었는지는 아직 보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처참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조금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일?”
“네, 황녀 전하께 피해는 없도록 노력하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면 더 신경 쓰이지. 더 캐물어도 우직한 기사가 대답해줄 것 같진 않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백치라도 나는 적국의 황녀다.
‘쓸모라곤 조금도 없지만.’
아마 볼모로서의 가치는 더 없을 거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페델리우스가 나를 보며 옅게 웃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거짓말쟁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든 왕이 명령을 내리기만 하면 페델리우스의 검 끝이 나를 향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페델리우스는 그걸 알면서도 내게 거짓말을 하는 걸까?
‘그렇다면 좀 실망이네.’
어쨌든 나는 볼모의 위치다. 상황이 급박해지면 언제든 이용당할 수 있다. 그리고 제국은 결코 날 위해서 뭔가를 하지 않을 거다.
내가 있는 곳은 절벽 끝에 세워진 집이다. 안전해 보이지만, 집 밖으로 한 걸음이라도 나가면 발밑은 낭떠러지다.
살기 위해서 믿어야 하는 건 페델리우스도, 메리도 아니다.
‘아콰도 위험해졌어.’
왕이 아콰의 뭔가를 틀어쥐었다. 믿을 건 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무력하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원하는 걸 손에 쥘 수 있을까.
“배고파!”
“아, 식었겠군요. 다시 데워오라고 하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고개를 저으며 포크를 들었다.
뜨거운 건 잘 못 먹으니 적당히 식은 게 좋다. 아예 잘려 나온 고기를 찍어 입에 넣었다.
‘음, 살살 녹아.’
최근 들어 고기를 너무 먹는 것 같다. 몸이 좀 무거워진 것 같기도 하고. 설마…….
“페데리야.”
“예, 황녀 전하.”
“나 살쪘어?”
페델리우스가 말이 없다.
미친, 아닐 거야. 아니 근데 요즘 먹고 자고 뒹구는 것밖에 한 일이 없다.
밖에도 허락 없이 못 나가지, 방에서 하는 일이라곤 엎드려 색칠하는 것이 전부다.
“쪘어……?”
페델리우스가 입만 뻐끔거린다. 아무런 말을 내뱉지 못한다.
‘저 거짓말 못하는 놈!’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가 정답을 말해준다.
몸이 무거워지면 날개를 달아 날 때도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날아가다 무거워서 떨어지는 건 사양이다.
“쪘구나.”
“……그,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황녀 전하는 지금이 더 보기 좋습니다.”
“그러니까 쪘지?”
페델리우스의 웃는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툭, 떨궜다.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 줄 알았다. 애써 숨기려고 하니까 마음에 상처만 더 생겼다. 쓰라려…….
“안 먹어.”
포크를 내려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콰에게 몇 킬로까지 무게를 버틸 수 있냐고 물어볼 걸 그랬다.
‘하긴, 페델리우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날 안아댔으니.’
내가 살이 쪘는지 안 쪘는지 제일 먼저 알았을 거다.
“황녀 전하!”
“응?”
페델리우스가 돌연 내 손을 붙잡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멀뚱히 그를 쳐다봤다.
“저는 지금이 더 좋습니다. 황녀 전하는 조금 더 살을 찌우셔야 합니다. 평균 체중에 훨씬 미치지 않는다고 메디르 님께서 일전에 말씀하셨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나를 꽉 붙잡았다. 그가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좀 더 많이 드시고, 가지고 싶은 거나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당신이 누려야 했던 걸 누리십시오.”
“……페데리우스?”
“당신은, 이것보다 훨씬 더 사랑받아야 했던 사람입니다.”
페데리우스가 날 끌어안았다. 힘껏 끌어안아 숨이 막힐 정도였지만, 아프거나 괴롭거나 무섭지 않았다. 단지 가슴이 아팠다.
“죄송스럽지만, 저는 당신이 제가 있는 왕국으로 와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페델리우스의 말은 태어나 평생토록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으니까.
“페데리야.”
손이 잡힌 채 장난스럽게 그를 불렀다. 페델리우스가 “예.” 하고 우직하게 대답한다. 굳은살 박인 손이 꽤 따뜻했다.
“넌 내가 좋아?”
“예.”
망설임 없는 대답이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건 안다. 잘해주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렇기에 미안했다.
“저도 좋아하고, 메리도 당신을 좋아합니다. 이 집에서 당신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두려워 마십시오.”
“응. 먹을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뒤늦게 찾아온 복일지도 모른다.
페델리우스를 만난 건 아콰를 만난 것만큼이나 내게는 행운이었다. 고맙다고 생각한다.
‘빨리 모든 게 끝났으면.’
페델리우스도, 메리도 아무것도 모른 채 이대로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더는 연기를 할 필요가 없게 됐을 때 그들의 옆에 서있고 싶다.
‘수면제라도 써봐야겠어.’
조금 미안하지만, 그런 방법이라도 써야겠다. 조급해서 견딜 수가 없다. 갔다가 돌아올 짧은 시간 동안만 깨지 않으면 된다. 기왕이면 최대한 빠르게 일을 해결하고 싶다.
“맛있게 드십시오.”
“응!”
페델리우스가 손수 포크를 쥐여 준다. 평소 같으면 먹여주려고 안달일 텐데 오늘은 내가 먹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이다.
“페데리야.”
“예, 황녀 전하.”
“나도 너 좋아.”
“……예?”
“너도 좋고, 메리도 좋고, 여기도 좋아.”
“아……. 네.”
페델리우스가 조금 김빠진 얼굴로 대답했다. 기대 이하의 시원찮은 대답에 눈을 샐쭉하게 떴다.
페델리우스의 입술 끝이 슬쩍 올라갔다.
“다행입니다.”
덧붙이는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실망한 기색이다. 페델리우스가 나를 살피며 자기도 다시 식사를 시작한다.
“나 먼저 가!”
“황…….”
쾅! 페델리우스의 말이 들리기도 전에 뛰쳐나와 문을 닫았다. 아콰와 둘이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페델리우스랑 메리 때문에 아콰와 시간을 가지지 못한 지도 꽤 됐다.
“아콰.”
탁,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으며 아이를 불렀다.
아콰가 손등에서 푸른 빛무리를 내며 솟아올랐다. 찰랑거리는 물소리는 오랜만에 듣는 그리운 것이었다.
<주인님!>
아콰가 날아와 내 품에 안긴다. 평소라면 토라진 기색이라도 보일 아콰였다. 하지만, 아콰는 그저 품에 안길 뿐이다. 많이 외로웠던 모양이다.
“미안해, 많이 상대해주지 못했어.”
<보고 싶었어요. 히잉, 주인님이 제가 싫어진 줄 알았어요.>
“아냐, 절대 아냐. 너도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콰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아직은 안 된다. 아직은 능력을 들킬 수 없다. 하지만 일이 다 끝나면, 그때는 메리와 페델리우스에게는 알려주고 싶다.
<어쩐 일이세요?>
“오랜만에 너랑 대화를 하고 싶었어. 밥을 대충 먹고 왔지. 혹시 아콰, 너 수면제 같은 효과가 있는 물도 만들 수 있어?”
<수면……제 같은 효과가 있는 물이요?>
“응.”
내 물음에 아콰가 허공에서 뱅글뱅글 돌며 고개를 기울인다.
아콰가 턱을 매만지며 나를 본다. 쉽게 터져 나오지 않는 대답에 아콰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부르자 아이가 그제야 회전을 멈춘다.
<누군가를 죽일 건가요?>
“아니, 잠깐 재우려고! 트럼프에 갔다 와야 할 것 같아.”
<이리나는 죽었는데 또 가시는 건가요?>
“응,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리나는 어떻게 죽었어?”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콰가 확 밝아진 얼굴로 내 앞에 포르르 날아왔다. 그리곤 한껏 밝아진 얼굴로 입을 연다.
<보여드릴까요? 물 약간만 있으면 보여드릴 수 있답니다!>
아콰의 눈이 반짝인다. 아콰의 주변에 흐르는 물소리가 흥분으로 거세게 요동쳤다.
<물은 제가 만들어도 괜찮아요!>
꼭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팍팍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아콰는 예전부터 누군가를 공격하는 걸 즐겼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 부탁할게.”
<네, 주인님!>
아콰가 허공에 커다란 물거울을 만들어냈다. 얇고 투명한 물 위로 이미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서서히 수면으로 떠오르듯 형체가 분명해진다.
<황녀 전하를 데리고 와야 해요! 황녀를 데리고 와야 한다고! 그, 그분이, 그분이 신에게 선택받은 분이세요! 그분을……. 그분을…….>
<이보게, 이리나. 병에 걸려 환영을 보는 건 알겠지만 그런 미친 소리는 어디 가서 하질 말게! 어디서 그런 저주받은 자를 감히 신께서 선택하신 분으로 모는가!>
<손등을 봐! 황녀의 손등에 문양이 있다고!>
이리나가 소리친다. 배를 타고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인 모양이다. 이리나는 시간이 갈수록 서서히 말라 갔다.
전염병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그녀를 어둑한 배에 있는 좁은 방에 가둬버렸다. 이리나는 점점 미쳐갔다. 바닥을 긁고, 문을 긁고, 물을 구걸했다.
화면 속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어느새 이리나는 옷이 벗겨진 채다.
뱃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때리고, 물을 들고 이죽거린다.
‘인간이란…….’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잠깐, 아콰. 저거 뭐야?”
<아. 교미인 것 같아요.>
아콰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교미라니…….’
아콰의 단어 선택에 얼굴을 구겼다.
시선은 물거울에 고정된 채다. 물거울에 비치는 이리나는 물을 먹기 위해 필사적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이용했다.
끔찍한 장면에 입을 틀어막았다.
“아콰! 넘겨!”
비명을 치듯 소리쳤다.
<아, 네. 알겠습니다.>
장면이 빠르게 넘어간다. 속이 울렁거린다. 토할 것 같아 얼굴을 구겼다. 저건 나도 예상하지 못한 거다.
다음 장면은 바싹 마른 이리나였다. 그녀는 나무로 된 침대에 누워있었다.
숨만 겨우 쉬고 있는지 가슴이 미세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죽음에 가까운 모습이다.
예전에 아콰가 보여줬던 유모와 비슷한 상태다. 하지만 그때보다 더 처참하고, 그때보다 더 끔찍했다.
온몸은 멍과 상처투성이에 손가락은 나뭇가지처럼 말라 있다.
이리나는 반항심조차 없앤 것처럼 메마른 눈이었다. 예전의 유모는 살겠다는 발악이라도 했다. 살고 싶어 하는 눈이었다. 마지막까지 그랬다.
<황녀, 를, 데리고, 와야…….>
이리나의 마지막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은 힘을 잃고 툭, 떨어졌다. 물거울이 사라졌다.
“아콰, 누군가 아프면 간호해주지 않아?”
<네, 보통은 그렇지 않을까요?>
“난, 저기까진 생각 못 했어. 이리나는 마지막까지 표독스럽게 집착하며 죽었어야 했다고!”
주먹이 절로 굳게 쥐어졌다.
저런 비참한 죽음을 바란 게 아니다. 내가 아닌 다른 것에 꺾이길 바라지 않았다.
<주, 주인님?>
“응, 아콰.”
<화, 나셨어요?>
“응. 조금. 저걸 바란 게 아니었어. 내가 물렀어.”
인간은 인간을 가엾게 여기지 않는다. 처지에 따라 취급이 바뀐다.
그 병든 마을에서도 그랬다. 병사들은 살아있는 자를 망설임 없이 시쳇더미에 밀어 넣었다.
“오늘 밤, 제국에 가자. 제국에 속하진 않았지만, 제국과 가장 가까운 마을에 비를 내려줄 거야. 거기서 로브를 벗을게.”
<괜찮으시겠어요? 주인님.>
“응, 조금 더 일정을 앞당기자. 아무래도 불안해. 일전에 느껴졌던 시선부터 시작해서…….”
뭔가 이상하다. 제국이 벌써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 리는 없다.
하지만 사절단 중 누군가가 이리나의 말을 보고했다면. 사실일 가능성은 없는지 확인해보려고 할지도 모른다.
‘오늘 밤에 가자.’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아콰가 재빠르게 손등으로 다시 사라졌다. 문양이 모습을 감춘다. 나도 침대 위에 어정쩡하게 걸터앉았다.
달칵, 문이 열렸다.
“황녀 전하?”
“으응!”
“뭐 하고 계셨습니까?”
“아무것도!”
내가 고개를 저으니 페델리우스가 좌우를 살핀다. 당연히 아콰랑만 얘기하고 있었으니 아무것도 없다.
“혼자 계셨습니까?”
“응!”
“……그렇군요.”
페델리우스가 눈을 가늘게 뜨곤 방 안을 한 번 더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스러운 눈빛이다.
애써 모른 척 고개를 기울였다.
“페데리야!”
“예, 황녀 전하.”
“색칠!”
다급히 낮에 색칠해놨던 그림을 꺼냈다.
페델리우스가 그려준 그림이다. 채색하고 나니 깔끔하고 웅장했던 그림이 알록달록한 어린아이 그림이 됐다.
‘낮에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까 별로다. 뚱한 표정으로 그림을 내려다봤다. 페델리우스는 색도 잘 칠하던데, 옆에서 보고 배웠지만 나는 안 되더라.
“와아.”
페델리우스가 감탄사를 내뱉으며 그림을 살핀다.
그의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마치 칭찬할 거리를 찾아 종이 위를 헤매는 굶주린 짐승 같다.
정말 시선이 왼쪽 위부터 오른쪽 아래까지 천천히 움직였다.
“색칠을 하셨군요! 잘하셨습니다.”
“…….”
페델리우스, 너 목소리 정말 작위적이야.
아무래도 칭찬할 거리가 색칠한 것 자체밖에 없었나 보다. 두 장 정도 칠했는데 페델리우스는 두 장 모두 꼼꼼하게 살폈다.
“다음에 또 다른 그림도 그려드리겠습니다.”
“좋아.”
“물감은 남으셨습니까?”
“음……. 아니!”
좀 막 썼더니 물감이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너무 막 썼나 싶어서 페델리우스의 눈치를 살폈다.
페델리우스는 말없이 물감통을 열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사러 갈까요?”
“내일? 같이?”
“네. 내일은 일찍 끝납니다.”
“폐하 집 같이 가?”
“음…….”
내 질문에 페델리우스가 신음을 흘린다. 그가 고민에 빠진 듯 한참이나 말이 없다.
그사이 색칠해둔 그림을 돌돌 말아서 끈으로 대강 묶었다.
“가고 싶습니까?”
“몰라?”
왕만 만나지 않으면 상관없다. 솔직히 그 기사단도 웃겼다. 페델리우스가 방해해서 제대로 상대하진 못했지만.
“카울란 있어?”
페델리우스와 만났던 부기사단장을 떠올렸다. 유쾌하고 쾌활한 데다 페델리우스에게 깝죽거리기까지 하던 그 남자 말이다.
“카울란 말입니까?”
“응. 재밌는 애.”
페델리우스의 입이 꽉 닫혔다. 일자로 다문 입술이 열릴 기미가 없다.
카울란이 앞에 있을 때 페델리우스는 어린애 같은 모습이 보여서 재밌었다.
“카울란이 보고 싶습니까?”
‘보고 싶냐고 하면 그건 아니지만, 보기 싫으냐고 하면 그것도 아닌데.’
페델리우스의 질문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생각에 잠긴 채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아마도?”
“왜요?”
“페데리야?”
“예, 황녀 전하.”
페델리우스가 내 부름에 표정을 풀고 나를 본다.
눈꼬리를 휘어 웃는다. 한껏 휘어진 눈을 보다 손을 뻗었다.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페델리우스의 머리에 손을 툭 얹었다.
페델리우스의 동공이 커졌다.
“카울란보다 페데리가 좋아.”
“예?”
“페데리가 더 좋아.”
“……내일, 준비시키겠습니다.”
“응!”
페델리우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귓불이 붉어진 페델리우스가 어쩐지 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먼저 일어나주면 고맙겠는데.’
하지만, 페델리우스는 내가 손을 뗄 때까지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내 쓰다듬을 받고 있었다.
‘팔 아파.’
결국, 먼저 손을 내린 건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