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페델리우스가 잠시 나간 사이 아콰가 풀 하나를 뜯어왔다. 그리곤 주먹만 한 물방울을 만들더니 그 안에 하얀 꽃이 달린 풀을 집어넣는다.
푸른 빛이 어둑해진 방 안을 은은하게 밝혔다.
“아콰, 아까부터 뭐 하는 거야?”
<잠이 오는 물을 만들고 있답니다.>
아콰가 풀이 담긴 물방울을 이리저리 흔든다. 하얀 꽃에서 꽃가루가 떨어져 물과 뒤섞인다.
꽃가루라는데 물에 녹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이 꽃에서 나오는 가루는 잠이 오게 해준답니다. 주인님께서 말씀하신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예요!>
“진짜?”
<네!>
아콰가 물방울을 물잔에 담는다. 꽃가루를 탔는데도 맑은 물과 다르지 않다.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냄새도 안 나네?”
<물과 섞이면 무색이 되고, 냄새도 맛도 없으니까요!>
“고마워. 오면 권해봐야겠다.”
<헤헤헤, 아콰는 주인님이 제일 좋아요. 오늘 밤에도 또 둘이서 여행을 가는 건가요?>
아콰가 품에 안기며 묻는다. 작은 녀석이 그저 사랑스럽다. 손가락으로 아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일은 아니지만, 드물게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물론이지. 여행이라기엔 동기가 불순하고, 길지도 않지만 말이야.”
<그래도 좋아요! 저는 좋아요. 언제나 주인님과 함께하고 싶은걸요?>
“나도 그래. 고마워.”
아콰가 몇 번 더 얼굴에 볼을 비비적거리더니 손등으로 쏙 사라졌다.
마음이 초조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나저나 물을 어떻게 건네주지?’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문이 열리는 걸 보니 페델리우스다.
“이제 슬슬 주무실 준비를 하겠습니다.”
“페데리야!”
“네.”
“이거 줄게. 먹어.”
손을 쭉 내밀었다. 컵에 있는 물이 찰랑거린다. 내가 내민 물컵을 보며 페델리우스가 놀란 눈을 한다.
입이 조금 벌어졌다. 페델리우스의 손을 잡아 컵을 쥐여 줬다.
‘먹어라, 먹어.’
의심하진 않을까 걱정이 된다. 심장이 뛴다. 애써 모른 척 해사하게 웃었다.
“제게 주시는 겁니까?”
“응! 네 거야!”
널 위해 만들었어. 차마 뒷말은 하지 못했다.
솔직히 조금 양심에 찔리긴 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여기에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페델리우스도 이 집도 메리도 너무 좋지만, 아직은 아니다.
“감사합니다.”
페델리우스가 작게 웃으며 컵을 받아든다. 미소 띤 얼굴이 기뻐 보인다. 페델리우스가 컵을 쥔 채 몸을 숙인다.
“으응.”
시선을 피했다.
이미 줘버린 것을 뺏어올 수도 없지만, 속이 불편하다. 페델리우스가 컵에 담긴 물을 한 번에 마셨다.
의심조차 하지 않고, 기분 나쁜 기색도 없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애써 웃었다. 누군가 심장을 바늘로 쿡쿡 찔러대는 기분이다.
“창문을 닫을 테니 누우십시오. 내일 함께 왕궁에 가려면 일찍 주무셔야 합니다.”
“응.”
순순히 누웠다. 페델리우스가 문을 닫고 내게 왔다.
평소와 같이 침대 옆에 의자를 놓고 앉는다. 페델리우스는 늘 내가 잠들 때까지 저러고 있다.
대개는 나보다 페델리우스가 먼저 자는 편이다. 자는 척하는 건 내게는 간단한 일이다. 내가 자는 척을 하고 있으면 페델리우스는 소파에 가서 눕는다.
‘다음엔 옆에서 자라고 할까?’
매번 침대를 두고 소파에서 자는 것이 미안하다. 눈을 감았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페델리우스가 몸을 숙여 이불을 고쳐주며 속삭였다.
“응, 안녕.”
내 인사에 페델리우스가 “네.” 하고 대답했다. 그 뒤는 간단하다. 숨을 고르게 내쉬고, 자는 척을 하는 거다. 눈꺼풀만 깜빡이지 않으면 잠든 척하는 것은 간단하다.
눈을 감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델리우스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소파로 가서 눕는 듯했다.
‘평소보다 훨씬 빠르네.’
평소에는 삼십 분에서 한 시간은 옆에 앉아있는데, 오늘은 이십 분도 채 되지 않았다. 아콰가 준 물의 효과가 있는 듯했다.
‘조금만 더 누워있자.’
이십 분 정도 지나니 페델리우스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서 슬쩍 눈만 떴다. 눈동자만 굴려 아래를 내려다봤다. 페델리우스가 자고 있다.
조심히 일어났다. 침대에 앉아 가만히 멀찍이 떨어진 페델리우스를 바라봤다.
“아콰.”
<네, 주인님.>
“가자.”
<저는 언제나 준비가 완벽하답니다.>
작은 목소리로 아콰가 속삭인다. 물소리 사이로 들리는 듣기 좋은 목소리다.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밑에 맨발을 디뎠다.
부드러운 카펫이 발에 닿았다. 저번 것보다 훨씬 더 두툼하고 부드러운 것이다.
한 번 넘어질 뻔했던 뒤로 페델리우스가 바꿔놓았다.
‘하여튼 걱정도 많다니까.’
발소리가 나지 않아 다행이다. 바닥이 차갑지도 않다. 조심히 창문을 열었다. 페델리우스는 미동도 없다.
“미안해, 페델리우스.”
입 안이 쓰다. 순순히 받아 마셔줘서 더욱 그랬다. 차라리 의심했더라면 이것보다는 마음이 편했을 거다.
“다녀올게.”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날개를 만들며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아래쪽으로 경비병이 보인다. 조금 빠르게 날개를 파닥였다.
<뛰어내리셔도 괜찮아요!>
아콰의 말에 이제는 망설임 없이 수직으로 하강했다. 빠른 속력에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물속으로 빠져들었다. 안에는 또 새까만 구멍이 있다. 아콰가 들어가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이번엔 또 어디……. 푸흐, 으악, 이게 뭐야!”
<으음……. 물이 고여서 썩은 것 같아요.>
“윽, 냄새나.”
몸을 떨며 옷에 섞인 물을 빼냈다.
시커먼 물이 뭉쳐졌다. 그걸 도로 오크로 된 통 안에 집어넣었다. 옷에 코를 박았다.
“냄새가 다 안 빠졌어.”
물을 다 빼내도 이미 배어버린 냄새가 사라지진 않는 모양이다. 새로운 걸 배웠지만, 대가가 크다.
‘좀 있다가 물에 들어가서 다시 씻어야겠어.’
꼬릿꼬릿한 냄새가 몸의 온기에 섞여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창고, 인가?”
<네, 창고네요.>
아콰가 어깨에 앉으며 말했다.
“이렇게 대놓고 다녀도 돼?”
<주인님께서 신의 문양을 이어받은 사람이라는 걸 알리는 게 목적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응, 그렇긴 했지.”
<헤헤, 그러면 여기서 주인님이랑 같이 대화를 나눌래요.>
아콰의 뻔뻔해진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로브를 챙기지 않았다. 오늘은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여긴 어디야?”
<트럼프 제국의 국경 바로 근처에 있는 마을이에요. 지도상으론 제국 옆에 있는 쿠스 왕국의 마을이랍니다.>
도착지 설정은 제대로 된 듯했다. 문제는 외모가 눈에 띈다는 거다. 창고 안에는 식료품과 물, 그리고 잡화들이 있다.
아콰를 촛불 대신으로 삼아 창고 안을 이곳저곳 살폈다. 로브로 쓸 만한 게 없는지 찾기 위해서다. 다행히 창고에는 이런저런 물건이 많았다.
“이 옷 편하겠다.”
<옷도 갈아입으시려고요?>
“아니, 그냥 편할 것 같다고. 로브는 이거면 되려나? 이거 도둑질인가?”
<인간들이 보기엔 그렇지 않을까요?>
아콰의 수긍에 신음이 새어나왔다.
돈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도 하나 가져올 걸 그랬다. 옷에도 그 흔한 장신구 하나 없다.
“어쩌지?”
<이걸 두고 갈까요? 인간들 사이에선 꽤 비싼 보석이랍니다. 바다에서 나는 보석인데 진주라고 해요.>
아콰가 새하얗고 둥근 보석을 내게 내밀었다. 딱 보기에도 반들반들한 게 비싸 보였다.
“고마워.”
<천만에요.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그런 것쯤 수천 개도 구해다 드릴 수 있답니다.>
아콰가 콧김을 훅 내뿜으며 대답했다. 허리춤에 올라간 두 손이 앙증맞다.
로브가 있던 자리에 진주를 올려뒀다. 로브를 두르고 날개를 만들어 창고 창문으로 빠져나왔다.
창문이 크지 않아서 한참 동안 낑낑거렸다. 조금만 더 살집이 있었어도 분명히 제대로 끼었을 거다.
‘역시 더 찌면 안 될 것 같은데.’
언제 어느 때 창문으로 도망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좀 더 많이 드시고, 가지고 싶은 거나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당신이 누려야 했던 걸 누리십시오.>
갑자기 페델리우스의 말이 떠오른다.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면 달콤한 거나 만들어달라고 해볼까?’
힘을 주며 창문에서 벗어나 아래로 뛰어내렸다. 땅에 닿기 전에 날개를 파닥여 착지는 아프지 않았다.
“으아, 죽는 줄 알았다. 나 다른 나라는 처음 와봐. 여기는 아직 오후라 다행이다. 조금 구경하다 갈까?”
<네, 주인님!>
아콰가 한껏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 역시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목적은 있지만, 다른 나라는 처음이다.
사실 제국에서도, 자르딘 왕국에서도 바깥 구경을 제대로 해본 적은 없다. 자르딘에서도 기껏해야 수도가 전부였다. 제국에선 끔찍한 것만 봤다.
“와아, 맛있겠다.”
<저게 뭔가요? 무척 맛있어 보여요!>
아콰가 입을 한껏 벌리며 소리쳤다.
아콰도 사주고 나도 먹고 싶다. 하지만 돈이 없다. 그렇다고 진주를 뿌리고 다녔다간 분명히 일이 커질 거다.
“돈을 좀 가져올 걸 그랬어.”
뒤늦게 입맛을 다셨다.
[보석 삽니다.]
활기찬 길거리를 걷는 도중 눈에 들어온 간판에 걸음을 멈췄다.
보석을 산다고? 아콰에게 시선을 돌리니 아콰도 나를 보고 있다. 동시에 허공에서 눈이 맞았다.
“아콰, 아까 그거 혹시 하나 더 있니?”
<네. 그럼요.>
아콰가 작은 진주를 또 하나 꺼냈다. 손에 쥐고 보석을 산다는 상점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가게 안은 무척 화려하고 번쩍번쩍했다. 각종 보석들이 휘황찬란하게 진열되어있었다.
“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반갑게 맞이하던 상인의 기색이 변했다. 나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건 나를 꺼림칙해 하는 시선이다.
오랜만에 깊게 가라앉았던 기억이 모습을 드러낸다.
“보석 좀 팔고 싶은데.”
“보석이요? 어떤 보석인지…….”
“이거. 진주인데.”
손에 쥐고 있던 진주를 펼쳐 보였다. 상인의 눈이 크게 뜨인다. 나를 보는 시선이 또 변했다. 이번엔 꺼림칙하게 여기는 시선은 아니다.
“살펴보겠습니다.”
상인이 두 손을 조심스럽게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