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99)

상인에게 피부가 닿지 않게 진주를 위에서 떨어뜨렸다. 상인이 돋보기를 꺼낸다.

“최상등급이군요. 흠집 하나도 없는 완벽한 진주입니다. 얼마 정도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얼마까지 가능한데?”

“금화 95개면 어떻습니까?”

“흠.”

“그럼 105개까지 쳐 드리겠습니다.”

“으음…….”

도대체 금화 한 개가 얼마의 값어치가 있는 거지? 아콰에게 기본적인 돈 계산법은 배웠지만 제법 오래된 일이다.

“금화 113개!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금화 113개라…….”

계속 올리는 걸 보니 값을 낮게 부르고 있는 모양이다.

“120개.”

“118개는 어떻습니까.”

“그래, 그렇게 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은 돈은 아니다.

“네, 알겠습니다!”

상인이 빠른 속도로 보석을 챙겨 넣었다.

“돈을 챙겨드리겠습니다. 백 금화 한 개와 금화 18개면 괜찮을까요?”

“2개는 잔돈으로 줘.”

내 말에 그가 자물쇠로 잠긴 상자를 열어 주머니에 돈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 혹시 요즘 뭐 소문 도는 거 없어?”

돌고 있는 소문이 없나 싶어 상인에게 물었다.

돈을 챙기고 있던 상인이 도리어 “소문이요?” 하고 되묻는다.

로브 끝자락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소문을 말씀하시는지…….”

“아, 트럼프 제국에 관해서라든가.”

“제국이요? 글쎄요, 별다른 소문은 못 들은 것 같은데요.”

그사이 돈을 다 챙긴 상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돈입니다. 이쪽은 금화고 이쪽은 바로 쓸 수 있는 잔돈으로 바꿔드렸습니다. 확인해보세요.”

상인이 낡은 천 주머니 두 개를 내 앞으로 밀며 말했다.

천 주머니 하나를 받아 열었다. 금화가 가득 들었다. 반대쪽에는 은화와 동화가 섞여있다.

“응, 확인했어. 고마워.”

“앞으로도 좋은 물건 있으면 꼭 이용해주세요! 값은 오늘처럼 잘 쳐서 드리겠습니다.”

“금화 118개를 95개부터 부른 사람의 말은 신빙성이 없는데.”

주머니를 품 안에 챙겨 넣으며 말했다. 망설이지 않았으면 무려 금화 서른 개 정도를 못 받을 뻔했다. 내 말에 상인이 뒷머리를 긁적인다.

“흥정은 상인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뭐, 또 들르게 된다면.”

이 정도 돈이 있으면 굳이 다시 올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뒷말을 삼키곤 주머니 하나는 왼쪽 품에, 다른 하나는 오른쪽 품에 챙겨 넣었다.

“아, 그러고 보니 트럼프 제국 위험하다곤 하더라고요.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질 않는 데다가 어느 마을에 전염병까지 발발했는지 사람이 매일같이 죽어 나가고 있다던데…….”

“죽어 나가?”

“그래요, 그것도 제국 수도 바로 옆이라고 하던데요. 뭐라더라, 리첼이었나?”

벌어졌던 입이 오므라들었다. 리첼. 일전에 갔던 마을이다. 죽어가는 아이와 남성을 본 곳이기도 했다.

<물, 제발 물을…….>

<무, 무우…….>

떠오른 목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완전히 잊고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가슴 부근의 옷자락을 쥐었다.

“병사들이건 뭐건 전부 죽어나고 있어서 마을 폐쇄령까지 내려졌다더라고요.”

“마을 폐쇄령?”

“네, 거기에 쉬쉬하는 소문인데.”

상인이 갑작스럽게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연다. 한껏 몸을 바싹 끌어당겨 숙이기에 나도 절로 몸을 숙였다.

“아, 글쎄 이번에 제국에서 황녀를 자르딘 왕국에 볼모로 떠넘겼잖아요?”

“응, 그 얘긴 들었어.”

내 목소리도 똑같이 작아졌다. 내 대답에 상인이 고개를 끄덕이곤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댄다.

“거기 갔다 온 시녀 중의 한 명이 죽었대요. 어딜 다친 것인지 뭔지 나뭇가지마냥 바짝 말라서는 그렇게 물만 찾아댔더랍니다.”

“흐음…….”

“그러다 황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길거리 한복판에서 황녀를 데리고 와야 한다면서 소리쳤대요. 아, 물론 나야 못 봤지만. 어쨌든 그러는 바람에 소문이 꽤나 퍼졌어요.”

생각보다 이리나가 일을 더 크게 벌여준 모양이다.

나로선 좋은 일이었다. 말로가 제법 비참했지만, 그야말로 지나간 일이다. 지금 내가 걱정하고 후회한다고 바뀌는 건 없다.

‘그래도 그건 정말 예상하지 못했어.’

인간이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 걸까? 가

슴에 바위라도 얹은 것 같다. 속이 무겁고 답답했다. 주먹으로 가슴을 몇 번이고 꾹꾹 눌렀다.

“황녀를 왜 데리고 와?”

“아, 저야 모르죠. 손님들이 물어다 주는 소문 귀동냥한 것뿐이고. 근데 비가 내리지 않는 게 황녀의 저주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얼씨구, 입매가 단단해졌다.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주받은 황녀라며 팔아넘기고서도, 그들은 또 내 탓을 한다.

물론 사실 여부를 따지자면 내가 한 일이 맞긴 하지만.

‘내가 아니었더라도 내 탓이라고 했겠지.’

입 안에서 쓴맛이 느껴진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말을 찾지 못하고 다시 닫았다. 고개를 돌렸다.

“저주?”

“네, 뭐. 그 제국에서 황녀한테 몹쓸 짓을 했잖아요. 가엾게도. 갓 태어난 아이가 뭘 안다고 가둬버리는지. 솔직히 나라도 매일 밤낮으로 저주할 것 같네요.”

“넌 황녀가 가여워?”

내 질문에 상인이 장식장 위에 팔을 올리고 손에 턱을 괴었다. 표정은 미미하게 찌푸려진 채다.

반쯤 내려앉은 눈꺼풀이 그가 생각에 잠겨 있다는 걸 알게 해준다.

“가엾죠. 트럼프 제국의 황녀 이야기는 유명해요. 집시를 공개 처형하고, 집시가 낳은 아이를 성 꼭대기에 가둬버렸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죠. 대개는 황녀를 가엾게 여겨요.”

“제국 사람들은 아냐.”

“아, 저도 원래는 트럼프 제국 사람이에요. 살기가 팍팍해서 어쩔 수 없이 이쪽으로 넘어와 사는 거고요.”

상인의 말에 눈이 절로 커졌다. 벌어지는 입을 애써 막으며 고개를 들었다. 설마 트럼프 제국 사람일 줄 생각지도 못했다. 주먹이 쥐어진다.

“지금이야 워낙 살기가 힘드니 황녀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처음엔 아니었어요. 황녀를 동정하는 이들도 많았죠.”

“동정?”

“예, 뭐.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공교롭게도 비가 적게 내리기 시작한 시기가 맞물렸지만, 그렇다고 아예 비가 내리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비가 내렸어?”

“황녀가 태어나고도 몇 차례는 내렸어요. 음, 황녀께서 태어난 한 후 6~7년쯤 흘렀을 때는 횟수가 대놓고 확 줄어들었지만 그걸 황녀의 탓이라고 하기는 좀…….”

상인이 말끝을 늘인다.

볼을 긁적이는 것이 꺼림칙한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하는 걸 들어보기는 처음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는 더더욱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랬구나.”

“그렇죠. 솔직히 저는 황녀께서 볼모로 간 게 낫지 않을까 멋대로 생각하고 있어요. 듣기에 자르딘 왕국의 왕은 아주 성군에 국민들 생활수준도 높다고 하니까요.”

“그건 그렇지.”

자르딘 왕국의 수도를 다닐 때면 어두운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슬픔이나 절망이 가득한 눈도 없었다. 그저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제국을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트럼프 제국의 황제는 사치와 향락을 너무 즐겼어요. 아마 지금은 그의 명성도 땅에 떨어졌을걸요.”

상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가 천을 꺼내 지문이 묻은 장식장을 조심스럽게 닦으며 다시 입을 연다.

“저도 조만간 가족들을 데리고 자르딘 왕국에 정착해볼까 생각 중이에요. 어느 정도 자금이 모였거든요.”

“그래, 자르딘 왕국은 살기 좋아. 기회가 된다면 꼭 가길 추천할게. 그런데 이곳은 비가 잘 내려?”

“아뇨, 여기도 가뭄이죠. 그래도 제국보다야 낫긴 하지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큰비가 내려주면 소원이 없겠네요.”

상인이 말한다. 상인과 대화를 나누느라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 개인적으론 조금 더 구경하고 싶었는데.

“아콰, 음식은 나중에 사줘도 괜찮을까?”

“네?”

<물론이죠!>

어깨에 가만히 앉아있던 아콰가 뱅글 날아오르며 말했다.

상인의 눈이 주먹만 하게 커졌다. 떡 벌어진 턱이 장식장에 닿을 기세다.

“이, 인형이, 말을……. 말을…….”

상인이 손가락으로 아콰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콰가 허리에 손을 얹고 불퉁한 표정을 한다.

<인형이라니! 나는 엄연한 정령이다. 인형 따위가 아니야, 인간!>

“아콰, 근데 너 음식 먹지 않는 거 아니었어?”

<먹지 않아도 죽지는 않지만, 맛있는 건 정령도 좋아한답니다.>

“아하.”

그런 건 또 몰랐다. 내가 먹을 때마다 ‘인간 음식은 안 좋아해요.’ 하고 늘 말했던 아콰다. 결국은 음식이 맛없어서 먹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만 돌아갈 건가요? 주인님.>

딱딱, 이를 부딪치는 소리에 상인을 내려다봤다.

쓰고 있던 로브를 천천히 벗었다. 로브에 가려져 있던 진홍색 머리카락이 귀 옆으로 흘러내렸다.

상인의 입이 한층 더 커진다.

‘황녀의 얼굴은 모르겠지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먼지 구덩이 다락방에 갇혀 나올 수 없었다. 내 얼굴을 알지는 못할 거다.

“오늘을 기점으로 앞으로 2주에 한 번씩 이 마을엔 비가 내릴 거야. 좋은 이야기를 들려준 대가야.”

아콰를 손바닥에 올렸다. 푸른 빛을 내는 아콰에게 이마를 맞대곤 입을 열었다.

“부탁할게, 아콰.”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면 뭐든지.>

아콰가 내 볼에 작게 입을 맞추고 하늘을 날아올랐다. 천장에서 두어 번 뱅글뱅글 돈다. 푸른 빛무리가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우르릉, 우르릉! 쿠궁!

속을 긁어내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짐승이 우는 것처럼 하늘에 울려 퍼지는 소리에 상인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놀란 입은 여전히 다물어질 기색이 없다.

“이봐, 괜찮아?”

“다, 당신 뭐야?”

“음……. 글쎄, 나를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겁에 질린 표정이 내키지 않는다. 방금까지는 꽤 다정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정했다기보단 이런저런 정보를 흔쾌히 가르쳐준 사람?

툭, 투둑.

물방울이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상인의 눈이 한층 더 커졌다. 허공에 양손을 뻗자 아콰가 내 손바닥 위에 폭 안겨 왔다.

“비……?”

쏴아아아.

상인의 말과 동시에 물방울이 빗줄기가 되어 쏟아진다.

상인이 다급히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쳐다봤다. 밖에선 환호의 소리가 울린다.

상인이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본다. 하늘이 먹구름으로 덮여 가게도 어두워졌다.

그 안에서 빛나는 건 언제나 은은한 푸른빛을 흘리는 아콰와 내 손등에 새겨진 문양뿐이다.

“……신의 문양?”

상인이 믿기지 않는 눈으로 말했다.

두려움으로 가득하던 눈은 어느새 열기를 담고 있다. 상인이 무릎을 꿇었다.

“신에게 선택받은 자, 이십니까?”

상인이 두 손을 모으며 묻는다. 트럼프 제국을 나와서 더는 모실 필요가 없는 신의 문양을 보고, 그는 거리낌 없이 무릎을 꿇었다.

“진주 사줘서 고마웠어.”

“아니, 아닙니다. 저야말로 들려주셔서 영광입니다! 트, 트럼프 제국으로 가시는 건가요?”

“아니. 거긴 가지 않아.”

내 단호한 대답에 상인이 두 눈을 크게 뜬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조금 새로운 걸 알게 됐다.

내 작은 세계에선 제국 사람들 모두가 나를 원망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사람도 있었다. 그건 처음 알게 된 사실임과 동시에 내게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제, 제국엔 비를 내리지 않으실 건가요?”

“응.”

“어째서? 수많은 사람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20년 전부터 줄곧 말입니다.”

“제국이 날 버렸어. 내가 먼저 놓아버릴 수 없었던 손을 그쪽이 흔쾌히 놓아줬지. 나는 지켜야 할 대상을 버릴 수 없었어.”

내 힘은 오직 트럼프 제국을 위해 주어졌기에 내가 먼저 제국을 버릴 순 없었다.

내게 그런 선택지는 없다. 하지만 아콰가 말해줬다.

인간들이 신을 놓아버리면,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내겐 선택지가 없었지만 그들에겐 있었고, 이건 그들이 선택한 거야.”

“당신은 설마…….”

“잡담은 여기까지. 얼른 돌아가지 않으면 혼이 나겠어.”

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내 인사에 그가 급히 몸을 숙여 절을 한다. 그리곤 허리를 세워 나를 멍한 표정으로 봤다.

“황…….”

“거기까지. 내 욕심에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게.”

가게를 나섰다. 다들 물을 받느라 여념이 없다. 몸을 씻을 필요도 없이 냄새가 비에 씻겨 나간다.

가게 뒤쪽으로 돌아가 날개를 만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 우물이 있다. 이제는 익숙하게 그곳으로 향한다.

“돌아가자, 아콰.”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

풍덩, 물이 출렁이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는 익숙하게 연못에서 기어올랐다. 들키지 않도록 나무 뒤로 숨었다. 반쯤 반사적인 행동이다. 저번에 페델리우스에게 들킨 것은 나로서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다 했다.”

푹 젖은 옷도 완전히 말렸다.

‘문제는 이 돈인데.’

돈주머니가 너무 크다. 이걸 들고 들어갔다가는 분명히 들킬 거다. 그렇다고 숨겨놓을 곳도 없다. 숨겨놓더라도 매일 청소하는 메리나 눈치 빠른 페델리우스가 금세 눈치챌 거다.

“으음, 아콰. 이걸 어디다 숨기지? 너 공간 주머니, 이런 건 없어?”

<네에……. 그런 것까진 정령이 만들 수 없답니다.>

아콰가 축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탓하려던 게 아니었다. 다급히 괜찮다고 말을 덧붙이자 아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지.”

주변을 둘러봐도 마땅히 숨길 곳이 없다. 고개를 숙이니 흙이 보인다. 내가 기대고 있는 곳은 나무 뒤다. 이곳은 사람이 잘 찾지 않는다.

정답을 찾았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무뿌리 근처의 흙을 파내려고 손을 땅에 박았다.

<앗! 주인님, 이걸 쓰세요.>

“어, 고마워.”

아콰가 물로 된 모종삽을 만들어줬다. 신기하게도 돌만큼이나 단단해 땅을 파는 건 금세였다.

깊게 판 구덩이 안에 돈이 든 주머니 두 개를 넣었다.

“완벽해.”

흙을 덮고, 발로 눌러주니 감쪽같다. 그 옆에 돌탑을 조금 쌓아뒀다. 나중에 찾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내가 생각했지만 똑똑한 것 같다.’

응응! 만족스러움에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몸을 돌리려는 찰나 기분 나쁜 시선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빠르게 몸을 돌렸다. 무언가가 나뭇가지 위에서 담벼락 너머로 몸을 날렸다.

“아콰, 잡아!”

크지는 않지만, 아콰에게 들릴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콰가 먼저 물을 만들며 날아간다. 나도 날개를 만들어 그 뒤를 쫓았다.

담벼락에서 조금 먼 곳에 아콰의 푸른 불빛이 보인다.

‘벌써 저기까지 간 거야?’

쫓아간 아콰도 대단하지만, 도망친 인간도 대단하다.

‘아, 정말 이것도 기력소모가 심하네.’

날갯짓은 마치 두 팔을 쉬지 않고 파닥거리는 듯한 느낌이다. 오래 나는 건 힘들 것 같았다. 아콰처럼 그냥 날아다닐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쉬움에 절로 입맛을 다셨다.

<주인님! 붙잡았어요!>

“수풀로 들어가자.”

<네!>

아콰를 따라 수풀 안에 발을 들였다. 나무와 높게 자란 잡초들로 인해 시야가 차단된다.

“한 명이 아니네?”

<네, 인간이 총 넷이었어요. 전부 잡았답니다.>

눈앞에는 검은 복면을 한 남자들 네 명이 있었다.

전부 아콰에게 물로 몸이 꽁꽁 묶인 채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다. 전부 입도 가려진 채다.

“너희 뭐야?”

내 말에 남자들이 눈을 크게 뜬다. 아콰에게 손짓했다. 입을 막고 있는 걸 떼라는 신호였다. 아콰는 입을 쭉 내밀었지만, 군말 없이 입을 막은 물을 풀었다.

“뭐냐니까?”

“네가 정말 오시리아 황녀인가?”

“얘들이 사태파악을 못 하네. 내가 먼저 물었잖아.”

얼굴도 모르는 놈들에게 이름을 들으니 불쾌하기 짝이 없다.

대답이 없다.

얼굴을 구긴 채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을 보니 달빛이 세상을 점령한 지 오래다.

“아콰, 쟤들 복면 좀 뜯어봐.”

<예, 주인님.>

아콰가 손수 움직인다. 뽈뽈거리며 날아간 아콰가 복면을 하나씩 떼어낸다.

‘저건 물로 안 빼는구나.’

하나하나 손으로 벗기는 모습을 보니 조금 미안해졌다. 복면을 전부 뜯어낸 아콰가 다시 내 어깨에 앉는다.

고개를 숙인 채 그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얼굴을 하나씩 뜯어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가운데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사라졌다.

넷 중 하나는 눈에 익은 사람이다. 종종 바깥세상을 훔쳐볼 때 아비, 아니 트럼프의 황제 솔루스와 함께 있던 자다.

“그림자 기사단.”

떠오른 답을 바로 입 밖으로 냈다. 내 부름에 넷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간다. 눈에 익은 남자는 한층 더 놀란 듯했다.

그림자 기사단. 황실 기사단이 그 위용을 몸소 드러내며 황제를 지킨다면, 저들은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한다.

황제가 대놓고 하기 힘든 일들을 뒤에서 처리하는 거다.

‘암살이나 정찰, 보통은 그런 쪽의 일이었지.’

이미 볼모로 버린 나를 찾아올 이유가 뭐가 있지?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내려다봤다.

“좋아, 누군지는 내가 맞혔으니까 왜 왔는지 말해.”

<주인님, 쟤들이 저걸 끊으려고 하나 봐요. 뒤에서 자꾸 꼼지락거려요.>

아콰가 귓가에 속삭이며 고자질을 했다. 그들이 아콰를 노려본다. 아콰가 혀를 쭉 내밀더니 내 어깨에 앉은 채 발을 구른다.

“소용없어. 물은 끊어도 원래대로 돌아가고, 아콰의 물은 돌보다 단단하거든.”

까득,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대놓고 싫어한다. 저번에 느꼈던 시선도 아마 이들인 것이 분명하다. 기분 나쁘고, 꺼림칙하고, 끈적한 시선.

적의가 흘러넘쳐서 새까만 시선이다.

“우리를 속였구나, 오시리아 황녀! 백치 따위가 아니었어!”

“아냐, 백치였어. 다섯 살 때까지는.”

어깨를 으쓱이곤 대답했다. 아콰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그 작은 다락방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끝을 맺었을 거다.

“그건 그렇고, 내 말에 얼른 대답해주지 않을래? 또 빠져나왔다는 걸 들켰다간 정말 혼이 날 거란 말이야.”

“그 계집에게 저주를 건 것도 당신이 한 일인가?”

그나마 눈에 익은 남자는 겉으로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다.

담담한 물음이다. 다른 놈들보단 저 남자가 훨씬 대화하기가 편할 것 같다. 아예 오른쪽 끝에 있는 그에게 몸을 돌렸다.

“응. 이리나 말하는 거지? 내가 했어.”

“역시. 그것 때문에 수도에 소문이 돌고 있다. 황녀가 저주를 건 것이 아니냐는 소문과 동시에…… 황녀가 사실은 신에게 선택받은 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소문이지.”

“왜?”

“신벌이라고 두려워하는 거다.”

순순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리나가 길 한복판에서 그러는 건 계획에 없었다. 일이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이상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직접 확인한 결과는?”

쪼그려 앉았다. 눈앞에 남자가 보인다. 그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헛된 소문이 아닌,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좋아. 솔직해서 좋네. 그래서 뭘 할 생각이었는데?”

“당신을 데리고 가거나, 혹은…….”

“날 죽일 생각이었구나.”

신에게 선택받은 자가 죽으면, 다음 대 신의 문양을 받은 자가 태어난다. 이 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 않는다.

그림자 기사단은 오로지 황제를 위해 움직인다. 황제만의 명령을 받고, 황제를 위해 목숨조차 내려놓을 수 있는 조직이다.

‘그 사람은 끝까지 달라지질 않네.’

그리 나쁘지 않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호수 가장 깊은 곳까지 가라앉는다.

‘아직 황제가 알아선 안 돼.’

이들을 살려 보낼 순 없다. 계획이 틀어질 거다.

황제가 이들에게서 내 정체를 들으면 암살 시도를 계속 해올 테니. 나뿐만이 아니라 페델리우스나 메리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아직은 이곳에 머물고 싶다. 안식처를 내 손으로 망가뜨릴 순 없다.

“황제는 내 이야기를 소문으로만 들어야 해. 제국에는 가뭄이 계속되고 제국 인근 마을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황제의 입지가 좁아질 대로 좁아졌을 때, 내 소문을 듣는 거야.”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남자의 시선이 나를 따라 높아진다. 다른 이들은 아콰가 눈치 빠르게 입을 틀어막은 후였다.

“네가 직접 입으로 전해주면 안 돼. 안 될 일이야, 그건. 그 사람은 모든 걸 알게 되면 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될 테고, 원망만 하게 될 테니까. 천천히 깨달아주지 않으면 곤란한걸.”

여기서 말라 비틀어 죽였다간 모두가 수상하게 여길 거다.

왕은 분명히 알아챌 테고, 제국에서 떠도는 소문을 페델리우스가 듣게 될 수도 있다.

페델리우스는 대부분의 일에선 눈치가 빠르다.

내가 여기서 이들을 말려 죽이면, 나중에 이리나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를 의심할 수도 있다.

‘그건 싫은걸.’

쓴웃음을 흘렸다.

페델리우스에게 미움을 사거나, 의심스러운 눈길을 받고 싶진 않다.

메리도, 페델리우스도 줄곧 그냥 그 자리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나를 향한 시선에 이들과 같은 새까만 감정이 섞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콰, 검을 부탁해. 날카롭고, 사람의 몸을 꿰뚫을 수 있을 만큼 깊은 거로.”

<알겠습니다, 주인님.>

아콰가 모종삽을 만들었듯이 검을 만든다. 일반 단검보다는 길고, 페델리우스가 차고 다니는 검보다는 짧다. 사람의 몸을 꿰뚫을 수 있는 길이다.

“우리를 죽이는 겁니까?”

“본의는 아냐. 조금만 늦게 왔어도 괜찮았을지도.”

아니, 아니다.

“어떻게든 죽었으려나.”

자조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에 익은 남자를 힐긋 보고, 옆에 있는 남자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손이 뒤로 묶인 남자가 몸을 비튼다.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공포가 엿보인다.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해주면 고맙겠는데. 그럴 린 없겠지만.”

물로 된 푸른 검의 끝이 날카롭다. 심장 소리가 들리는 남자의 가슴 위에 검 끝을 댔다.

“으으어어으윽!”

입이 막혀 비명도 뭣도 아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를 악물었다. 두 손으로 붙잡은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공포 섞인 눈동자다.

“커헉……!”

힘껏 내리찍으려는 순간, 남자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남자가 눈을 뜬 채 호흡을 멈췄다.

툭, 투둑. 옆에 있던 두 사람도 피를 토하며 죽었다. 피가 묻을 것 같아서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독입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느새 아콰가 만든 물로 된 끈이 풀어져 있다. 그가 죽어버린 시체 하나를 발로 차 뒤집었다.

“제가 죽였죠. 그림자 기사단인 주제에 죽는 걸 두려워하다니, 언어도단이니까요.”

“그걸 어떻게 푼 거야?”

“신의 문양, 당신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닙니다.”

남자가 옷자락을 잡아당겨 쇄골을 보여줬다. 보라색 빛이 옅게 흐르고 있다.

다급하게 손등을 들어 올렸다.

내 손등에도 푸른 빛을 뿜고 있는 문양이 있다. 하지만 그것과 비교하면 남자의 쇄골에 새겨진 신의 문양은 빛이 상당히 약했다.

“당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신에게 선택받은 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선택받은 자, 중의 한 명?”

“네. 정확히 말하자면 만들어진 선택받은 자겠지만요.”

이해가 되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는 그저 담담히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강한 문양을 가진 자가 신전에 들어가 ‘진짜’인 대신관을 모시는 신관이 됩니다.”

여러 명이라는 이야기는 못 들었다.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드러냈던 쇄골을 다시 가리며 내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그리고 신관이 되지 못한 자는 그림자 기사단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습니다.”

“왜?”

“신이 선택한 자가 여러 명이라면, 너무 없어 보인다는 이유입니다.”

그가 복면을 주워 뒷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보통 신의 문양을 가진 ‘진짜’가 태어나는 건 한 세대의 주기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삼십년 주기로 나타났죠.”

“뭐?”

“개중에는 만들어진 이들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만들어져?”

“대신관이 신의 문양을 주어진 신의 힘을 이용해 신의 문양을 흉내 내서 만드는 겁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함이죠.”

그가 덧붙였다.

“원래 다음 세대의 신의 사자가 태어나기 위해선 시간이 좀 필요했습니다. 현 대신관은 아직 젊었고 힘을 잃기엔 너무 이른 나이죠.”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이 절로 동그래졌다.

“그러나 그는 생각보다 빠르게 힘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태어났죠.”

이런 얘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이미 생기 따윈 잃은 눈동자로 마치 기계처럼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

“당신은 다음 세대가 태어나기엔 너무 빠르게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당신 이후에는 더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빨리 태어났다고? 들었던 이야기를 잠시 고민했다. 백 년 주기라면 이상하긴 하다.

“대신관은 가짜 신의 문양을 만들 힘까지도 너무 빨리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진짜를 찾기 위해 찾아 헤맨 거고, 여태까지 찾지 못했죠.”

“그거야…….”

“당신이 마지막이기 때문이겠죠.”

“저는 당신 이전에 ‘만들어진’ 신의 문양을 받은 두 사람 중 한 명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삼십 년쯤 전의 이야기네요.”

“만들어졌다는 건…?”

“보시다시피 이건 흔적만 남아있고, 힘을 쓸 수 없습니다. 하지만 흉내는 낼 수 있었습니다. 고작 더러운 물을 깨끗하게 하는 정도였지만요.”

“…….”

“왜 황제 폐하께서 당신을 저주받은 아이라 의심하고 가뒀는지 아십니까?”

“알고 싶지 않은걸.”

“당신이 태어남과 동시에 희미하게나마 힘을 쓸 수 있었던 저를 포함해 대신관이 완전히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무표정한 남자가 담담하게 대답한다. 감정이란 감정은 전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는 무기질적인 표정이다.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잃어버렸다고?”

“당신이 태어나던 그날, 힘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런 힘으로 아콰가 만든 줄을 끊을 수 있어?”

“아뇨? 순전히 제 힘입니다. 신의 힘은 쓸 수 없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방금은 신의 문양을 나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라면서.”

“네. 아닙니다. 아, 어떻게 풀었냐고 물으셨군요. 조금 놀라서……. 단검으로 잘랐습니다.”

남자가 바닥에 떨어진 금이 간 강철 단검을 주워서 보여주며 말했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림자 기사단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가끔 아콰가 설명해주기도 했고, 황제 앞에 사람들의 목을 내려놓는 것을 보기도 했었으니까.

‘강철만큼 단단하다며?’

강철을 자른 저 남자는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페델리우스도 저 정도는 할 수 있는 건가? 입이 딱 닫혔다.

“우습지만, 방금 당신의 힘을 보고 확신했습니다. 당신이 마지막입니다. 눈을 씻고 찾아도 신의 문양이 보이지 않던 이유는 당신이 마지막이기 때문이었군요.”

“…….”

물로 된 검을 굳게 쥐었다. 죽여야 한다. 저 남자만큼은 살려 보내선 안 된다. 심장이 귀에 박힌 것처럼 거칠게 울어 젖힌다.

‘살려 보내면, 메리도 페델리우스도 위험해져.’

그림자 기사단이 전부 움직이면 페델리우스라도 당해낼 수 없다. 위험하다.

“하아, 하아.”

호흡이 가빠졌다. 두 손으로 검을 붙잡으며 검 끝을 남자에게 겨눴다.

“아콰. 붙잡아.”

<네, 주인님.>

아콰가 만든 단단하고 굵은 밧줄이 남자를 옭아맨다.

“역사서에도 당신만큼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다니. 그야말로 신의 축복 그 자체군요.”

남자는 반항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반항하지 않았다. 내가 검 끝을 남자에게 향한 채 걸어가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죽이십시오.”

발만은 자유로운 남자다. 그가 직접 걸어와 내가 든 검 끝을 제 심장이 있는 곳에 대며 말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다. 하지만, 남자는 마치 물거울로 봤던 이리나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건 삶을 포기한 자의 눈이었다.

“죽여달라고?”

스스로 목숨을 내놓는다는 말에 조금 허탈해졌다. 검을 쥔 손에서 힘이 풀렸다.

“네, 여기서 절 죽이지 않으시면 전 폐하께 모든 사실을 말할 겁니다.”

남자가 말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콰가 쥐여 준 검은 무겁진 않았지만, 차갑고 시리다. 그리고 날카로웠다.

“황녀. 누군가를 직접 죽여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있어, 이리나는 내가 죽였어.”

“손으로 말입니다. 황녀께서 가진 힘은 앞으로 수많은 다툼을 불러올 겁니다. 그러니 이참에 사람을 죽이는 법을 배우십시오.”

남자가 검 끝이 닿은 곳에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검 끝에서 느껴지는 살을 조금 파고든 감각이 손가락 끝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적나라하다. 분명히 두 뼘 이상의 거리가 있을 거다. 직접 손을 넣어 심장을 꺼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촉감이 생생하다.

“폐하께서 지금은 제국 내에서 신의 문양을 찾기 바쁘지만, 당신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자신을 위해서라도 신의 문양인 당신을 되찾으려 할 겁니다.”

풀어졌던 손에 힘이 다시 들어갔다. 죽여야 한다. 특히나 메리는 전투라곤 할 줄 모르는 시녀다. 암살의 프로들을 이길 리가 없다.

남자의 입가는 여전히 미동도 없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제가 신전에서 교육을 받았을 무렵에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꿈에는 트럼프 제국이 나왔습니다. 비옥한 토지와 주기적으로 내리는 비. 사람들은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죠.”

검 끝이 조금 파고든 남자의 가슴에 시선을 집중했다.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 같다.

“문헌에 따르면 신의 문양을 가진 자는 종종 예지의 힘을 갖기도 한다고 합니다. 물론, 만들어진 것뿐이었지만.”

그가 조소했다.

“저는 그게 폐하께서 만드실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냥 꿈이었던 겁니다. ”

마치 유언이라도 내뱉듯, 남자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책을 읽듯이 입을 연다. 그에게도 사정이 있던 거다.

“생각해보면 가짜 문양에 그런 힘이 있을 리가 없죠.”

남자가 자조적으로 말한다. 그가 어느샌가 또 풀어낸 밧줄을 뒤로하고 검날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투둑, 살이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손에서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무능한 황제 밑에서 일하는 건 이제 질렸습니다.”

남자가 말한다.

“죽여달라고 하니, 다행이네. 지키고 싶은 게 생겨서 널 놓아줄 수가 없거든.”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다잡으며 대답했다. 머릿속으론 페델리우스와 메리를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평범한 삶이란 걸 모릅니다. 황녀께서 자비를 베풀어 놓아줘도 다시 폐하께 돌아갈 겁니다. 그러니 마음 놓고 죽이십시오.”

그가 검날에 힘을 줘 끌어당긴다. 턱, 끌려가던 몸이 멈췄다. 살을 파고드는 느낌을 참지 못했다. 내가 힘을 준 거다.

내가 반대쪽으로 힘을 주자 그의 눈썹이 한껏 올라갔다. 그가 입을 벌린다.

“제국에 반란분자가 들끓고 있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선 신의 문양을 찾지 못하면 어차피 파멸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계시죠.”

“하아, 하아.”

호흡이 가빠졌다.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하길 반복한다. 귀에 잡음이 낀다. 눈앞이 어지러워 숨을 쉬는 것도 바쁘다.

바닥으로 쉴 새 없이 피가 흐르는데도 남자는 멀쩡히 서있다.

“힘껏 밀어야 합니다.”

남자가 서서히 칼날을 잡은 손을 뗀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있는 그 집은 불바다가 될 테니까요. 암살이든, 전쟁이든, 어느 쪽이든요.”

‘안 돼.’

머릿속이 잡음으로 가득 찼다.

푹, 잡음 속에 선명하고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눈앞엔 남자가 있다. 검을 가슴 한가운데 박은 채 무너지고 있다.

앞으로 무너지는 남자를 붙잡은 채, 나도 같이 주저앉았다.

살을 꿰뚫고, 뼈를 부러뜨리며 파고드는 그 한순간의 감촉이 몇 번이고 손가락 끝에서 느릿하게 재생을 반복한다.

순식간에 세상이 핏빛으로 휩싸였다.

검이 긴 탓인지 손에 피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가 앞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옷에 피가 묻었다.

심장을 정확히 꿰뚫린 듯 남자가 느릿하게 눈을 감는다.

무표정한 남자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흐으…….”

무너진 남자를 밀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기듯이 물러난 덕분에 무릎이 엉망이다. 잡고 있던 검을 던져버렸다. 거부당한 검이 순식간에 물이 되어 땅에 스며든다.

“아콰, 아콰.”

<네, 주인님. 괜찮으세요?>

“아니, 돌아가자. 돌아갈래.”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동 없는 남자의 몸에선 피가 새어나와 바닥을 적신다.

흙바닥으로 스며드는 핏물에 뒷걸음질을 쳤다.

<일단, 몸을 깨끗하게 해드릴게요.>

아콰에게서 빠져나온 푸른 빛무리가 몸을 휘감는다. 몸에 묻은 피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남자의 위에 덮어줬다.

빛무리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날개를 움직여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돌아가야 해.’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창문틀에 올라탔다. 다행히 방 안은 조용하다. 창문 밑으로 내려오며 날개를 없앴다. 아콰도 손등으로 들어갔다.

손가락 끝이 차다. 온몸의 피가 전부 빠져나간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죽여야 했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끝낼 수 있는 선을 넘어버린다. 암살이니 전쟁이니, 내가 생각할 것들이 아니다. 끼어들어선 안 되는 일이다.

소파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척거리는 다리에는 힘이 풀린 지 오래다. 소파에는 페델리우스가 고른 숨을 내쉬며 잠에 빠져있다.

소파에 누워있는 그에게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굳은살 박인 커다란 손을 꽉 붙잡았다. 페델리우스가 꿈틀거렸다. 머리를 숙여 페델리우스의 팔에 이마를 기댔다.

“페델리우스.”

“황녀, 전하?”

페델리우스가 눈을 뜬다. 어두움이라곤 한 점 비춰 보이지 않는 밤하늘 같은 군청색 눈동자가 보였다.

“안, 아줘.”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페델리우스를 붙잡은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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