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99)

* * *

‘미안해, 페델리우스.’

꿈속에서 문득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느릿하지도, 발음이 이상하지도 않은 말투였다.

뭐가 미안하다는 겁니까? 되묻고 싶은 마음과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다녀올게.’

어디를? 생각했지만, 묻지는 못했다. 몸이 무겁고, 머리가 무겁다.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호수 바닥에 가라앉듯 심연의 밑바닥까지 당겨진다.

벌꿀을 담은 눈동자를 가진 황녀는 종종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눈을 하곤 했다.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표정을 한다.

나는 그 모든 것이 조심스럽다. 살짝 치기만 해도 바스러져 자취를 감춰버릴 것처럼 그녀는 언제나 위태로웠으니까.

“페델리우스.”

목소리가 좀 더 선명해졌다. 손가락을 움직였다. 다행히 이번엔 감촉이 있다.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시야에 눈부시지 않은 빛이 들어오고, 가라앉았던 생각은 호수의 수면으로 떠오른다.

“황녀, 전하?”

벌꿀색 눈동자에 공포가 서려있다. 조금 다급하게 눈을 떴다. 갑작스럽게 뜨인 눈이 뻑뻑함을 호소했다. 잡힌 손을 타고 그녀의 떨림이 느껴졌다.

“안, 아줘.”

떨리는 목소리를 감춘 황녀가 내게 말했다. 다급히 일어나 앉았다. 손이 불편하게 잡힌 채라 몸이 기이하게 꺾였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허리를 숙여 바닥에 앉아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황녀는 고개를 젓는다.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폈다. 인기척도 없고, 창문도 닫혀있다. 다친 곳도 없다.

“안아줘.”

조금 더 확실한 음색으로 그녀가 의사를 전해왔다. 바닥에 앉아있는 황녀를 조심히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침대.”

그녀가 침대를 가리켰다. 조심스럽게 갓난아기를 안듯 마주 본 채 품에 안았다.

황녀가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내 목을 휘감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에 조심히 내려놓으니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곤 한쪽 이불을 열어 나를 끌어당겼다. 허리가 어정쩡한 자세로 반쯤 숙여졌다.

“황녀 전하?”

“페데리야.”

“예.”

“같이 자자.”

그녀가 팔을 끌어당겼다. 소맷자락을 잡은 손이 떨린다. 이대로 안 된다고 했다간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아니, 지금도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붙잡은 힘이 억세다. 뿌리치라고 한다면 할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옆으로 조금만 가주시겠습니까?”

그녀가 대답 없이 뒤로 물러난다.

꼬물거리는 것이 애벌레 같았다. 열린 이불을 대신 붙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녀가 품에 바싹 붙어왔다.

“황녀 전하.”

“안아줘.”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얇은 비단 천 위로 느껴지는 황녀의 손이 차다. 눈치채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로 온도가 낮았다. 황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가 작아진다.

차가운 손이었지만, 온기를 거부하진 않는다.

“무서운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응.”

시원찮은 대답이다. 공포에 젖었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녀의 눈동자에 있던 건 공포심이었다.

“무슨 꿈을 꾸셨습니까?”

내 물음에 황녀가 손을 뻗는다. 짧은 팔로 내 등을 끌어안았다. 차가운 냉기를 담은 손이 닿았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닿은 곳이 뜨겁게 느껴졌다.

“페데리가,”

“예?”

“너랑 메리가 죽었어. 이 집이, 죽는 꿈.”

힘껏 끌어안은 팔이 필사적이다.

어디서 이런 힘이 튀어나왔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만큼 공포감을 느꼈다는 거다.

자신과 이 집이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

“무서웠어.”

떨리는 목소리가 담담한 고백을 한다. 황녀가 눈을 질끈 감는다. 가쁜 호흡부터가 그녀가 불안정한 것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조금 더 세게 품에 끌어안았다.

“괜찮습니다.”

“응.”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응.”

“반드시 지켜드릴 테니, 무서워하지 마시고 주무십시오. 계속 곁에 있겠습니다.”

“응. 나도.”

황녀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올곧고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눈빛이다.

“나도 지켜줄게.”

황녀가 손을 뻗는다. 등에 닿았던 작은 손이 볼에 닿았다.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닿은 손은 어느새 미지근하지만, 온기를 품고 있었다.

“……예, 감사합니다.”

뒤늦게 나온 대답에 그녀가 웃었다. 말갛게 웃는 웃음이 그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다.

“응!”

황녀가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다. 마치 짐승의 새끼가 어미 품에 파고들듯이.

“아직 밤이 한창입니다. 조금 더 주무십시오.”

“잘 자.”

“예. 안녕히 주무십시오.”

말은 했지만, 눈을 감은 황녀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거나 몇 차례 더 몸을 떨기를 반복했다.

한 시간이 더 지나서야 황녀의 숨이 고르게 퍼졌다. 색색거리며 잠을 자면서도 그녀는 몸을 떨었다.

간헐적으로 몸이 떨릴 때마다 등을 쓰다듬었다.

“쉬이, 괜찮습니다.”

귓가에 목소리를 속삭여주니 다행히 떨림이 잦아든다. 손가락을 깍지 껴 붙잡았다.

내 손바닥보다 훨씬 작다. 굳은살도 없는 손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손이었다.

“오시리아.”

평소에는 함부로 부르지 못할 이름을 조심스럽게 입에 담았다.

상황이 어떻든 그녀는 황녀고, 나는 기사다. 신분이 달랐다. 그녀가 제국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든 간에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제국에서 당연히 받아야 할 것들을 그녀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존경, 사랑, 지지, 숭배. 그 어떤 것도 손에 쥐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녀가 내게서라도 자신의 존귀함을 느끼길 바랐다. 그것을 스스로 깨달아서, 누구보다 고귀하고 당당한 존재가 되기를.

“황녀 전하.”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가 그녀의 이름을 처음 입에 올렸을 때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저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히 듣지 못하고, 닿지 않을 목소리다. 조심스럽게 황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부드러운 살결에 따뜻한 온기가 섞여 입술에 닿는다.

‘흡.’

다급히 입술을 뗐다.

얼굴에 열이 오른다. 갑작스럽게 더워졌지만, 끌어안은 그녀 때문에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이불을 차는 것도 불가능하다.

“윽…….”

온몸이 간지러울 정도로 부끄러워서 고개를 돌려 얼굴을 이불에 세게 박았다.

나는 대체 혼자서 뭘 하는 건지!

스스로의 행동에 얼굴이 붉어졌다. 고개를 좌우로 털며 잡생각을 떨쳐냈다.

“으응…….”

황녀가 꿈틀거렸다. 반사적으로 몸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죄송합니다.”

작게 중얼거리며 등을 토닥이자 뒤척임이 잦아들었다.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곤 끌어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그러다 가만히 시선을 내려 황녀를 쳐다봤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동정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동정에 이상한 감정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그것은, 점점 크기를 키워나간다. 예민한 청각에 작은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감상하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잘 자.’

작은 인사말이 여전히 귓가를 맴돈다. 들리는 심장 소리와 함께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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