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죽이십시오.’
공허 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흐아악!”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눈을 떴다. 몸이 크게 떨렸다. 푹신한 침대가 손끝에 느껴졌다.
“황녀 전하?”
“페데리?”
“예, 괜찮습니까?”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밝다. 새파란 하늘과 구름이 보였다. 경직됐던 몸에 힘이 풀렸다. 차가웠던 몸이 따뜻하다 못해 열기를 담고 있다.
“응.”
페델리우스의 품에 파고드니 그가 나를 끌어안아준다. 완전히 멎은 떨림에 심장도 안정을 되찾았다.
“페데리야, 폐하한테 안 가?”
시간이 꽤 늦었다. 평소 같으면 벌써 왕궁에 들어갔을 시간이다.
“조금 늦게 가도 괜찮습니다. 물감도 사고 필요한 것도 사고, 둘이 식사도 하죠.”
“응.”
페델리우스의 품에 조금 더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잠은 푹 잤다. 무서운 꿈을 계속 꾼 것 같은데, 매번 따뜻한 온기가 나를 달랬다.
“메리는?”
“아까 왔기에 도로 돌려보냈습니다. 제가 다시 불러오겠습니다.”
“응.”
페델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의 뒤를 따라 나도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준비하고 식당으로 내려오십시오. 저도 준비하고 오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문을 열고 손짓하고는 내게 말했다.
“응.”
“황녀님! 안녕히 주무셨나요?”
메리가 방으로 들어왔다. 페델리우스는 고개를 숙이곤 방을 빠져나갔다.
밥을 먹고, 페델리우스를 따라 왕궁에 왔다. 그 와중에 왜 늦게 가냐고 몇 번인가 물었지만, 페델리우스는 확실히 대답해주지 않았다.
왕궁 안으로 발을 디뎠다. 페델리우스가 있을 곳을 안내해주겠다며 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훈련하는 거 구경해도 괜찮은데.’
구경하겠다고 말했더니, 드물게도 매서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덧붙이는 핑계가 어찌나 많은지 내가 졌다.
어지간히 카울란과 나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고개를 숙인 채 페델리우스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페델리우스 경.”
귀에 익은 여자 목소리다. 페델리우스의 걸음이 멈춘다. 나도 그의 옆에 서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주홍색 머리카락과 새빨간 눈동자. 일전의 그 엘레나 재상이다. 오늘은 매서운 눈빛이 아니다. 기운이 넘실거리지도 않고, 날카롭지도 않다.
“재상 각하. 또 폐하를 찾으러 다니십니까?”
“아니, 자네를 만나러 왔어.”
“저를 말입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페델리우스가 엘레나에게 물었다. 페델리우스를 쳐다보던 엘레나가 돌연 내게 고개를 돌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래. 폐하께서 황녀를 보고자 하신다.”
“황녀 전하를 말입니까?”
걔는 또 나를 왜?! 좋지 않은 기억이 붕 떠올랐다. 순식간에 부유한 기억은 다시 그날의 일을 생생히 재현했다.
“그래, 그리고…….”
엘레나가 팔짱을 낀다. 그리곤 마저 입술을 달싹였다.
“살인사건의 보고가 들어왔는데 자네가 한번 확인해봤으면 하는데.”
엘레나의 말에 페델리우스가 표정을 구겼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평소엔 곱고 평평한 미간에 지금은 주름이 깊게 자리 잡았다.
“그건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네의 저택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어. 그리고…….”
말끝을 늘린 엘레나가 나를 본다. 그녀가 한숨을 쉬곤 팔짱을 풀었다. 페델리우스가 나를 한 번 본다.
‘뭐야, 말을 안 하고.’
“페데리야, 왜?”
“아무것도 아닙니다. 폐하께서 황녀 전하를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죄송하지만, 그쪽으로 먼저 가도 되겠습니까?”
페델리우스가 무릎을 굽혀 눈을 맞춘 채 물었다.
아주 미미하게 휘어진 눈동자에 호의가 엿보인다. 별것 아닌 것에도 전부 허락을 구하는 다정한 사람이다.
“응!”
그러니까 나는 네 다정함을 거절할 수가 없다. 황제를 만나는 건 껄끄럽지만, 그가 곤란해지는 것도 싫다.
“감사합니다.”
페델리우스가 안도한 듯 웃는다. 마주 웃어주니 그가 굽혔던 무릎을 폈다. 엘레나 재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듯한 표정이다.
“재상 각하, 일단 폐하께 먼저 가도 되겠습니까?”
“그, 그래. 그러도록 하게. 나도 같이 가지.”
“예.”
페델리우스가 내 손을 붙잡으며 대답했다. 나도 마주 맞잡아줬다.
페델리우스의 큼직한 손에 비해 내 손은 작다. 페델리우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 여자는 뭐가 불만인 거지?’
엘레나는 뒤쪽에서 쫓아왔는데, 등과 맞잡은 손이 매우 따가웠다. 힐끗 올려다본 페델리우스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
“폐하와의 독대가 끝나시면 연무장으로 오십시오.”
“돗대?”
“아. 죄송합니다.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돗대가 아니라 독대입니다. 독.대. 그러니까, 폐하와 이야기를 다 하면 저한테 오십시오.”
“페데리한테?”
“네. 카울란과 검으로 챙챙, 했던 곳 기억하십니까?”
‘챙챙…….’
늘 생각하지만, 메리와 페델리우스의 설명력은 대단하다.
소리만으로 표현하는 게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설명이 발전하지 않는 것을 대단하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응!”
“네. 혹시나 제가 없어도 문제없도록 카울란에게 말해두겠습니다.”
“페데리 어디 가?”
“만약의 일입니다.”
페델리우스는 웃었지만,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페델리우스의 저택 근처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무슨 이야기인지 짐작이 간다.
순식간에 납이라도 매단 듯 발이 무거워졌다. 해야 했던 일이라곤 생각한다. 후회하지도 않는다.
‘하지 않았으면, 페델리우스도 메리도 위험해졌을 거야.’
그 집은 이젠 내게도 함부로 하고 싶지 않은 곳이 됐다.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갈 거짓투성이로 가득한 집이라도 상관없다. 애초에 그들을 속이고 있는 건 나다.
‘왕이 나를 보자고 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겠지.’
그는 내게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경고했다. 소란까진 아니어도 귀찮은 일을 끌어들인 건 사실이다.
‘괜찮아, 떨지 말자.’
주먹을 쥐었다. 내가 한 일은 나를 위해서였다. 내가 살기 위해서, 당연히 해야 했던 일이다.
다만, 손에 남아 머릿속에 각인된 촉감만은 선연했다. 그 촉감이 잊히질 않아서, 도저히 어제의 일을 떨칠 수가 없다. 숨을 쉬던 사람의 온기가 점점 식어가는 것은 기이한 경험이었다.
“황녀 전하, 들어가시면 됩니다.”
“응! 안녕, 페데리야!”
“예,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재상이도 안녕!”
“……재, 재사, 재상……. 네, 들어, 가십시오. 황녀.”
지목된 엘레나가 말을 더듬거리더니 인사했다. 대답에 악의가 없고, 기분 나쁜 기색도 없다. 페델리우스가 열어주는 문 안으로 발을 디뎠다.
‘엘레나도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
첫 만남이 너무 강렬했던 모양이다. 생각보다 그녀는 나를 향한 불쾌한 감정은 없었다. 다행인 일이다.
탁, 문이 닫혔다. 집무실엔 왕만이 있었다. 아콰를 닮은 물빛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동자가 나를 본다. 기세가 사납다. 그는 미간을 꾹 누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에 앉게.”
“네.”
간단히 대답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왕은 굉장히 골치가 아파 보였다. 아마 내가 친 사고가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사람을 죽였더군.”
“네.”
목소리가 제법 담담하게 나왔다. 그건 내가 해야 했던 일이다. 내 선에서 끝내려면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몇 번이고 자위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소란은 사양하겠다고 분명 말했던 것 같은데.”
“먼저 소란을 만든 건 저쪽이고, 저는 그것에 방어한 것뿐이에요.”
“내가 누군가를 죽이는 건 가장 권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황녀, 너는 누군가를 죽이고 그 위에 선 채 살아가는 방법을 택했나?”
그 흔한 안부 인사도 없이 시작한 질책이다. 그의 푸른 물빛 안에는 인간이라면 있을 기이한 열기가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시린 냉기가 그를 감쌌다.
“내 선택과 상관없이 필요하다면 해야만 하는 일 아닌가요? 나는 페데리랑 메, 아니.”
이마를 짚었다. 장난스럽게 붙인 별칭이 입에 붙어버렸다.
집게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며 다시 입을 열었다.
“페델리우스랑 메리가 있는 그 집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내 안위를 위해서 그들을 죽이는 게 필요했습니다. 죽이지 않으면, 황제에게 가서 모든 사실을 말한다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인간을 죽이니 마음이 가볍던가?”
왕이 묻는다. 말문이 턱 막혔다.
흔들림 없는 푸른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아콰처럼 부드럽지도, 상냥하지도 않은 눈빛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멸이 담겨 있지도 않았다.
“……후회는 없어요.”
막혔던 말문은 금세 뚫렸다. 물론 아마도 왕이 원하는 대답은 아니겠지만.
“생각엔 변함이 없나?”
“청소는 필요한 법이죠. 있죠, 저 제국에 다녀왔어요. 루첼이란 마을에 가서 처음으로 작은 다락방 창문으로 본 세계가 아닌 세상을 눈에 담았어요.”
갑작스럽게 시작한 내 이야기에 왕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했지만,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왕도 말없이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곳에서 본 인간의 잔상은 끔찍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어서, 그저 이대로 둬도 자연스럽게 망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독이 퍼진 물과 강한 사람은 얼마든지 약자를 짓밟고 있더라고요. 약자에겐 더욱 강해지고, 아픈 자에겐 가혹해지고.”
이리나의 일도, 물을 찾으며 바닥을 기어 다니던 아이와 남자도 전부 불합리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그래서 죄 없는 평민들도 모두 편하게 해주겠다는 건가?”
<하긴, 빨리 죽는 게 성공할 수 있는 길일지도 모르지.>
<푸하하, 저 꼬맹이도 죽어선 감사하다고 할 거야. 더는 이 더위에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왕의 목소리가 루첼에 있던 병사 두 명의 말과 겹친다. 비웃음 가득한 병사와 진중한 왕의 질문은 분명 큰 차이가 있을 텐데.
대답 없이 눈을 몇 차례 깜빡거렸다.
“잘 모르겠어요.”
사실, 보석을 판매한 상인의 이야기를 듣고, 조금 충격이었다.
나는 세상 사람들 모두 나를 미워하는 줄만 알았다. 제국의 모두가 날 저주한다고 생각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악의 속에서 살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고 상인은 말했다.
‘동정…….’
분명 달갑지 못한 단어지만, 내게는 그 단어조차 절실했던 때가 있다.
“확실한 건, 내가 당신 말처럼 아무도 죽이지 않는 길을 택하진 않을 거라는 거예요.”
그런 길은 애초에 없다.
오래전, 유모가 죽은 모습이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끓어오르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평화로운 해결책 따윈 찾을 수 없게 됐다.
“왕님. 나는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누군가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는 일을 망설이지 않을 거예요.”
간신히 손에 쥔 내 것을 잃는 것보단 낫다.
“이건 왕께도 해당하는 말이에요.”
“내게?”
“네. 그러니 아콰를 위협하지 말아주세요. 그때야말로 저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게 될 겁니다.”
담담하게 뱉어낸 말을 들은 왕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와 동시에 아콰가 가려주고 있는 신의 문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등에서 푸른 빛무리가 빠져나온다. 그것은 두둥실 하늘로 떠올랐다.
“아콰?”
평소보다 훨씬 강해진 문양의 빛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빛무리가 점차 크기를 키워간다.
“아콰.”
푸른 빛무리는 아콰가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게 다락방에 있던 아콰의 모습과 똑같았다. 하지만 크기는 지금이 훨씬 컸다.
‘아니, 점점 커지는데?’
빛무리가 점점 크기를 키워간다.
“……터무니없군.”
“당신 또!”
“내가 한 게 아니다, 황녀. 정령의 성장이야. 이걸로 확실해졌군. 황녀의 마음이 제대로 정해졌다는 게.”
왕이 혀를 차며 말했다.
“봐라,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니까.”
왕의 말에 다시 허공에 뜬 빛무리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공을 열 개쯤 붙여놓은 크기로 자란 빛무리가 빛을 터뜨렸다.
“읏.”
산란하듯 터져 나온 빛에 눈이 절로 질끈 감겼다.
눈을 다시 떴을 땐 빛무리는 사라진 후였다. 다만 그 앞에는 푸른빛을 띤 소년이 서있었다.
어린아이였다. 푸른 피부에 곱슬머리를 가진 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작은 소년.
“아콰?”
동글동글한 외모에 상냥한 눈동자. 그것은 아콰와 닮은 것이었다.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던 소년이 화악 밝아진 얼굴로 웃는다.
<주인님!>
아콰의 목소리다. 어린애 같은 목소리가 조금 자랐다. 아콰가 걸을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목소리는 동굴에 울리는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주변에는 물소리가 흐른다.
달려온 아콰가 몸을 날려 내 목을 휘감아 왔다.
<우와아, 주인님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됐어요!>
“네가 내 품에 안긴 것 같은데?”
품에 안긴 아콰는 무겁지 않았다. 무게는 아콰가 손바닥만 했을 때와 큰 차이가 없다.
몸 크기에 비해 전혀 무겁지 않아서 끌어안아 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헤헤, 너무 좋아요!>
아콰가 내 볼에 제 볼을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시원하고 말랑한 촉감이 볼에 맞닿았다. 갑자기 커져서 조금 당황스럽긴 하다.
“너 갑자기 너무 커진 거 아니야? 적어도 갓난아기를 거쳐서 소년이 되어주지 않을래?”
<주인님은 제가 큰 게 싫으세요?>
“아니, 그건 아니야!”
<아콰는 강해졌어요. 훨씬, 훨씬, 엄청나게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주인님을 조금 더 안전하게 지켜드릴 수 있을 거예요.>
“왕보다도?”
내 물음에 아콰가 애매한 웃음을 흘린다. 곤란한 것 같기도 하고, 대답하기 힘든 것도 같다. 너무 대놓고 물어봤나? 왕의 얼굴에 황당함이 물들어있다.
“나를 앞에 두고 잘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군.”
“당신이 먼저 아콰에게 위협을 가했어요. 그 일은 절대 안 잊을 거예요. 다만,”
“다만?”
“당신이 사절단에게 한 질문으로 내가 자유롭게 된 건 맞아요. 그것엔 감사하고 있어요.”
왕이 의자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다. 그의 얼굴은 설핏 구겨져 있다. 골칫거리라도 보듯이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아콰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아콰가 내 팔에 팔짱을 끼며 조심스럽게 머리를 기댄다.
휘어진 눈동자가 퍽 기뻐 보인다. 손으로 아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정령과 주인치고는 이상하게 가까워 보이는군.”
“아콰는 제 가족이에요. 당신한텐 정령과 주인으로만 보일지 모르겠지만, 제겐 특별한 아이예요.”
그래서 그때 눈앞이 새하얘졌다. 내게는 가족도, 친구도 없고 가진 것도 없지만 아콰만은 오롯이 내 것이었다.
아콰는 그런 존재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나를 지켜줄 아이.
“그 정도로 가까운 관계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하긴, 의지할 것이 그 아이밖에 없었을 테니.”
“어쨌든, 제가 제 일에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만 눈감아주세요.”
“그건 힘들겠군. 우리 애들이 전쟁준비를 하고 있어. 네가 먼저일지 내가 먼저일지는 모르겠지만.”
전쟁, 대충 예상했던 일이다. 그보다 내가 먼저 일을 치면 된다. 왕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까지 간섭할 마음은 없다.
그들이 치는 나라들이 다 멸망한다 해도 말이다.
“내 나라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더 말리진 않도록 하지.”
왕이 포기했다는 듯 말한다.
“네, 호의에 감사합니다.”
“다만, 황녀. 네가 지금껏 보고 들어온 것들을 잊지 마라. 네가 본 참상을 기억하고, 한 번 마음먹기까지 수없이 고민하도록 해.”
“무슨 의미인가요?”
“네가 종종 내 아이의 곁을 떠나서 이런저런 마을을 둘러보며 일을 벌이는 것을 막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다만, 그 마을에서 보고 들은 것을 함부로 흘려 넘기지 말도록 해.”
왕의 눈이 진중하다. 잔잔한 호수 같았던 눈은 마치 심해처럼 탁해져 있었다. 어두워진 눈동자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왕의 눈을 가만히 마주 볼 뿐이었다.
“죽는다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네 인생이 다시없을 하나뿐인 것인 것처럼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이의 인생도 단 하나뿐이야. 그 세계를 전부 부술 각오가 되어 있는지 묻는 거다.”
“죽이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가 말한 대로,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만 검을 들라는 이야기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피를 묻혀라.”
“……노력할게요.”
“손에 피가 묻으면 묻을수록 손은 제 색을 잃어가지. 다채로운 세계도 온통 핏빛으로 물든다. 그리고 그 세계가 당연해졌을 때쯤 너는 생명의 무게를 잃어버리고, 죽이는 것을 망설이지 않게 돼.”
왕의 말은 늘 어렵다. 그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짧게 말하면 될 것을 늘 몇 번이나 꼬고 또 꼬아서 말했다.
나는 그 말을 해석하기 위해 몇 번이고 왕의 말을 곱씹어야 한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왕은 또 어려운 이야기를 한다. 탓하지는 않으나 마치 내가 잘못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내가 네게 널 지킬 검을 줬다는 걸 잊지 말아라.”
검, 떠오르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이곳에 와서 왕이 내게 준 것은 딱 두 개였다. 페델리우스와 방울 소리가 나는 어린아이 장난감.
‘그 방울 소리 나는 장난감을 검이라고 칭하지 않는다면.’
남은 것은 하나다. 페델리우스. 왕은 처음부터 그를 검으로 지칭했다. 왕에게 가장 감사하는 건 내게 페델리우스를 붙여준 거다.
“그건, 고마워하고 있어요.”
“내 아이는 맘에 들지?”
“네, 무척이나. 고마워요.”
왕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내 순순한 대답이 영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게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이 나를 향했기 때문이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긴 하네.”
“할 얘기 다 했으면 가도 돼요?”
“아, 선물이 있으니 가져가도록 해.”
왕이 씩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해맑게 웃는 얼굴 뒤로 검은 기운이 넘실거린다. 음흉하다고 생각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다.
왕이 집무실 책상 밑에서 얼굴 두 개만 한 상자를 꺼냈다. 그리곤 손수 내 팔에 올려준다.
“연무장 가는 길은 알겠지?”
“네, 그렇긴 한데.”
“나는 일이 바쁘니 이만 가보도록 해.”
탁, 문이 닫혔다. 쫓겨났다. 정말 쫓겨났다는 단어가 어울렸다.
실컷 잔소리만 듣고 쫓겨났다. 머릿속에 열이 뻗친다. 상자는 그리 무겁지 않아서 근력 없는 나도 들기 버겁진 않았다.
‘대체 뭐야?’
보는 눈이 있어 소리 내 중얼거리지는 않았다. 아콰도 어느샌가 또 사라졌다. 어린아이 모습의 아콰가 손등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묘하다.
‘귀여웠지.’
손바닥만 하던 아콰는 자라도 모습이 거의 그대로였다. 동글동글한 외모도, 생김새도 변함이 없다.
‘이쪽이었나?’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며 열심히 발을 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