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99)

* * *

연무장에는 금세 도착했다.

평소 같으면 흙먼지가 풀풀 날려야 하는데 어쩐지 오늘은 잠잠하다. 훈련하는 소리도 없다. 분위기가 이상해서 조심스레 얼굴만 빼꼼히 내밀었다.

“……카울란?”

“예! 황녀 전하!”

갑옷을 껴입은 덩치 큰 기사들이 연무장 바닥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있다. 카울란이 내 물음에 오른손을 번쩍 들며 대답했다.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상황이야?’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연무장에 가득했던 땀 냄새가 오늘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수염도 없고, 뭔가 다들 반짝반짝한데?’

저번처럼 갑옷이 더럽지도 않다. 은빛으로 반짝반짝 잘도 빛나고 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안으로 들어가길 망설였다.

“황녀 전하!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여기 자리를 마련해놨습니다.”

카울란이 연무장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손수건 여러 장이 옹기종기 깔려있다. 아마 앉으라고 해놓은 듯하다. 주변에는 먹을 게 조금 있었다.

“으음……. 응.”

고민하다가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무릎을 꿇고 뚫어져라 나를 보는 시선들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내가 들어가자 카울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작은 나무그늘 밑에 깔아둔 자리에 앉혔다.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응, 안녕! 오랜만.”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흐윽. 이렇게 뵐 수 있게 돼서 다행이지 말입니다. 단장님께서 어찌나 보여주질 않으려고 하시는지…….”

카울란이 주먹 쥔 손등을 눈에 대고 억지 울음을 흘렸다. 뒤쪽에 앉아있던 기사들은 어느새 몸을 돌린 채다. 바닥에 깐 손수건 하나를 손에 쥐었다.

“카울란.”

카울란의 어깨를 손으로 톡톡 치며 그를 불렀다.

“예, 황녀 전하.”

“자, 여기. 울지 마.”

바닥에서 주운 손수건을 카울란의 손에 쥐여 줬다. 흙먼지를 털어내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묻어있긴 하다.

“헉. 저 주시는 겁니까?”

“응, 울지 마.”

보기가 조금 그렇다. 나보다 덩치가 두 배는 더 큰 남자가 훌쩍이는 모습이라니. 카울란이 내가 준 손수건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흑, 이 카울란 감동했습니다.”

“으응.”

“이 감동 평생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손수건을 가보로 삼겠어요!”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하고많은 것 중에 왜 손수건을 가보로 삼아?! 그것도 내가 준비한 게 아니라 바닥에 깔린 걸 준 거다.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손수건이 분명하다.

“……카울란, 왜 그래? 이상해.”

“헉, 저는 이상하지도 무섭지도 괴물 같지도 않습니다!”

‘아니, 아무도 거기까지 얘기하진 않았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연무장에서 이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훈련 구경하고 싶어서 왔는데 오늘은 훈련하지 않나? 조금 아쉽다.

“카울란, 페데리는?”

“페데리요? 아, 단장님 말씀이십니까?”

“응.”

“무슨 살인사건 때문에 현장 검증하러 가셨습니다. 엘레나 재상 각하가 시킨 일이라면 아마 금방 끝내진 못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카울란이 내게 설명했다. 말하는 내내 시선을 피하고 볼을 긁적이는 걸 보니 분명 숨기는 게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 중에 듣지 못한 건 하나뿐이다.

‘그들 출신이 트럼프 제국이라는 얘기만 못 들었네.’

아마 제국의 황녀였던 나를 배려해주는 것이 분명했다. 페델리우스도, 카울란도, 심지어 엘레나도 나를 생각해서 내가 있는 곳에서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상관없는데.’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 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이미 알고 있지만, 새삼 누군가에게 들었다고 해도 그건 내게 충격적인 일이 되지 못한다.

악의든 살의든 다락방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느껴왔다. 이제 와서 그 감정이 뒤바뀌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카울란! 칼싸움 안 해?”

“아, 대련이 보고 싶으십니까?”

“응.”

“합니다. 지금 당장 하겠습니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카울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검을 뽑아 들었다.

날이 바짝 서있는 진검이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기사들이 너도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그들이 하나둘 검을 뽑아 들기 시작했다. 연무장은 어느샌가 검을 든 기사들로 가득 찼다. 꽉꽉 들어차서 그런지 답답하게 보였다.

‘많지 않아?’

일말의 신호도 없이 검들이 맞부딪쳤다. 챙! 채앵! 끊임없이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문제는…….

“어지러워…….”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너무 크고 많았다. 게다가 기사들이 너무 많이 움직인다. 화려한 건 좋은데 덕분에 이리저리 부딪히고 난리가 났다.

대련이 멋있다기보다는 처절하다. 없어 보인다. 그리고 너무 많이 겹쳐서 어지럽다.

‘이게 바로 난장판이라는 거구나.’

속이 메스껍다. 멀미가 난 것처럼 요동쳐서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저런 걸 기대했던 건 아니다. 카울란이랑 페델리우스가 했던 그런 대련을 원했던 건데.

‘이게 뭐야.’

뒷골목 양아치들의 패싸움을 닮았다.

“헉, 황녀 전하. 괜찮으십니까?”

“응……. 이제 됐어. 안 볼래. 뱅글뱅글 돌아.”

“죄송합니다. 어지러우셨군요.”

카울란이 연무장을 한번 둘러본다.

“으음…….”

그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아마 그가 봐도 난장판일 거다. 날리는 거라곤 흙먼지와 모래바람뿐이다.

“황녀 전하. 저랑 포커라는 카드게임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앉아서 할 수 있고, 그리 어렵지도 않으니 제가!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카울란이 검을 집어넣으며 제안했다. 어쩐지 ‘제가’라는 단어를 몹시 강조한 것 같다.

하지만 뭘 하든 이 어지러운 난장판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응, 좋아.”

카울란이 손짓을 하더니 기사 하나를 시켜 카드를 가져오게 했다. 사라지는 기사의 뒷모습을 보다가 카울란을 돌아봤다.

“카울란, 오늘 반짝반짝해.”

“앗, 알아보시겠습니까? 아까 황녀 전하가 오신다는 얘기를 듣고 단체로 씻고 나왔습니다. 흠흠, 수염도 깎았는데 어떤가요?”

카울란이 반들반들해진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예뻐!”

“감사합니다! 제가 한 예쁨 하지 않습니까. 황녀 전하께 칭찬을 받다니 영광입니다.”

카울란이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말했다. 근육 사이로 보이는 분홍빛 홍조가 매우 안 어울린다. 내 얼굴 근육이 절로 오그라들었다.

“부단장님! 양심 생존해 계십니까?!”

“아까부터 부단장님만 너무 대화를 나누시는 거 아닙니까?”

“저희한테도 기회를 좀 주십쇼!”

“옳소! 옳소! 단장님이 없는 이런 기회 흔치 않단 말입니다.”

뒤에 곱게 앉아있던 기사들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한 명이 물꼬를 터뜨리자 항의라도 하듯 모두가 불만을 내뱉기 시작했다.

카울란이 인상을 구겼다.

“시끄럽다! 단장님이 없으면 내가 다음 권력자라는 거 모르냐?!”

“허억, 너무하십니다!”

“맞습니다! 계급 갖고 이러기 있습니까?!”

“억울하면 출세해라. 아니면 내가 계급이 강등되기를 기다리든가.”

카울란이 비식, 비웃음을 흘리며 대답한다. 얼굴 근육이 이리저리 놀림으로 뒤틀려있다. 정말 비웃는 데 특화된 얼굴이다.

‘짜증 나게 생겼어.’

카울란의 표정이 너무 얄미워서 나도 울컥, 짜증이 솟아오를 것 같았다. 그만큼 정말 샐쭉하게 구겨진 근육이나 내민 혀가 당황스러웠다.

“카드 가지고 왔습니다!”

카울란의 명령을 받았던 기사가 저 멀리서 달려온다.

해맑은 얼굴이 이곳 상황을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다. 카드케이스를 받아든 카울란이 히죽 웃는다.

“너는 여기로 와. 황녀 전하와 카드게임을 할 거다.”

“헉! 감사합니다!”

카드를 가지러 다녀왔던 기사가 방방 뛰며 내 옆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여기서 가장 어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젊어 보이는 기사다. 몸집도 크지 않다.

“안녕하십니까, 황녀 전하. 저는 엘이라고 합니다. 뵙게 돼서 무척 영광입니다. 으아아, 정말 떨려요!”

“안녕! 엘!”

“흐아아아, 황녀 전하가 내 이름을 불러주셨어. 정말 아름다우세요. 단장님께서 맨날 맨날 황녀 전하 자랑을 엄청 해서 꼭 뵙고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엘의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페델리우스라면 어쩐지 그럴 것 같기도 하다. 매일 그려오는 그림에는 연무장의 모습도 있었다.

“응!”

“목소리도 사랑스러우십니다.”

엘이 내 손등을 잡더니 입을 맞추며 말했다. 샛노란 머리카락이 그의 밝은 성격과 닮은 것 같다. 엘도 볼에 홍조가 떠있었는데 어쩐지 카울란처럼 징그럽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엘! 저놈 진짜! 너 그러기 있기냐?!”

“선배님들, 여기 진짜 천국입니다. 향기부터가 다른 것 같습니다.”

“으어어어! 나도!”

옹기종기 모인 무리 속에서 절규가 들렸다.

엘이 보란 듯이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카울란이 고개를 끄덕이곤 군주라도 된 것처럼 옹기종기 꿇어앉은 이들을 훑어본다.

“자, 카드게임이 몇 명이 함께 하는 건지는 잘 알고 있겠지?”

“네 명입니다, 부단장님!!”

“야, 이 배신자! 그렇게 혼자 치고 나가기냐?! 네 명 아니겠습니까!”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잦아들고 네 명이라는 절규만이 들려온다. 앉아있는 기사단의 수는 꽤 된다. 하지만 네 명이라는 말은…….

‘한 명 남았네? 나랑 엘이랑 카울란은 당연히 할 테니까.’

기사단의 기세가 무섭다. 어쩐지 저기만 불을 확 지핀 것처럼 뜨겁기까지 하다. 엘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그 사태를 구경하며 종종 내게 말을 걸어왔다.

“황녀 전하께서는 좋아하시는 음식이 있으신가요?”

“으음……. 난 다 좋아! 아, 단 거도 좋아!”

“앗, 그러시구나. 그러면 다음에 제가 아주 유명한 디저트 가게에서 맛있는 과자를 사다 드릴게요.”

엘이 조곤조곤 내게 말해왔다. 덩치가 크고 목소리 큰 다른 사람들에 비해 엘은 제법 분위기가 다르다.

몸도 호리호리하고, 이래서 기사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도 걱정됐다.

“자, 이제 자리가 몇 개 남았지?”

카울란은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히죽거리는 입가가 퍽 즐거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키득거리게 됐다.

“한 개요!”

“한 개입니다!”

“한 개이지 말입니다!”

“단연코 한 개가 아니겠습니까!”

“부단장님, 한 개가 아니라 한 자리라고 해야 맞습니다!”

“응, 너 탈락.”

카울란을 지적했던 기사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절규하며 바닥으로 쓰러지는 그 모습을 본 다른 기사들이 그를 옹기종기 모인 무리 밖으로 밀어냈다.

“흑.”

기사가 몸을 웅크리며 훌쩍인다. 음, 어쩐지 애처롭다.

“자, 여기 카드가 있다! 알록달록한 조커를 뽑은 사람이 승자다!”

카울란이 카드 몇십 장을 손바닥에 쫙 펼치며 말했다. 눈치를 보던 기사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카드를 한 장씩 조심히 품에 끌어안았다.

연무장에는 긴장감만이 흘러넘쳤다.

“조커는 누구냐!”

카울란이 외쳤다. 여기저기서 탄식의 목소리가 흐른다. 여기저기서 카드를 조심스럽게 뒤집어 본다.

품에 끌어안은 카드를 혼자만 보려는 듯 조심스럽다.

‘대체 카드게임이 뭐라고…….’

전장에 나가는 기사들이 할 법한 비장한 얼굴이다. 키득거리며 작게 웃었다.

페델리우스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유쾌하다. 어둡거나 꺼림칙한 기운이 없고, 청량하고 깨끗하다.

“안 돼!!”

“틀렸어.”

“내 인생은 끝이야!”

기사들이 어두운 기운을 내뿜으며 하나둘 쓰러져간다.

바닥에 털썩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격렬했다. 저러다 무릎이 깨지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아싸아!!”

기사 하나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조커! 부대장님! 조커에 당첨됐습니다!”

“오. 축하하네, 테일. 자, 나머지는 거기 앉아서 구경하는 걸로 하고.”

키가 큰 남자다. 어찌나 큰지 한껏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플 지경이다. 페델리우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다.

내가 놀란 눈을 하자 키 큰 기사 테일이 훌쩍 몸을 낮춘다.

‘불편해 보이는데.’

단순히 허리를 굽히거나 무릎을 꿇어도 테일과 시선이 맞지 않는다. 테일이 아예 주저앉아 무릎을 감싸 안고 몸을 한껏 낮춘다.

몸을 공처럼 말더니 무릎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민다.

“안녕하십니까, 황녀 전하. 테일 호른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아까 비명 치듯 소리 질렀던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테일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긴 몸만큼이나 가느다란 목소리다.

“응! 호르니!”

“테일……이 이름이지만……. 흡, 감격입니다. 사실은요, 황녀 전하. 단장님께서 매일매일 황녀 전하께서 애칭을 지어줬다고 얼마나 자랑을 하고 다니는지 아십니까? 휴, 저도 참. 하루도 빠짐없이 단장님의 황녀 전하를 향한 찬사를 듣고 있자니 참을 수가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사단의 목표는 말이죠, 황녀 전하께 애칭을 하나씩 받는 거예요. 다행히 제가 그 두 번째가 된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은 이름으로 부르셨는데 호르니라는 귀여운 애칭이라니……. 아, 더 바랄 게 없어요. 앞으로도 종종 단장님을 졸라서 방문해주시겠어요? 아, 황녀 전하께서 피곤하지 않으실 때만이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조금 더 많이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요. 솔직히 황녀 전하 너무 귀여우신 것 같습니다. 말씀하시는 것도 사랑스럽고, 하…….”

‘……얘 제정신 아니구나.’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단어들의 나열에 머릿속이 어지럽다. 슬쩍 엉덩이를 움직여 뒤로 물러났다. 가느다란 목소리에 수다스럽기까지 하다.

“카우란!”

“예, 황녀 전하.”

카울란이 테일 호른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저 멀리 던져버린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조커 카드를 도로 회수하기까지 한다. 테일이 커다란 눈망울을 한층 더 크게 뜬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부단장님!”

“어허, 어디 할 짓이 없어서 황녀 전하께 겁을 줘. 넌 탈락이야, 탈락. 카드게임은 셋이 할 거야. 너희는 전부 구경이야.”

“아, 그런 게 어딨습니까! 너무합니다!”

“테일이 안 된다면 저라도 시켜주십시오!”

“접니다, 저요!”

난장판이 됐다. 이래선 카드게임을 언제 시작할는지 모르겠다. 옆에는 엘이 얌전히 앉아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본다. 보기 좋은 웃음에 나도 마주 웃었다.

“다들 조용.”

카울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가 검을 뽑아 땅에 내리꽂았다. 아무리 흙바닥이라도 단단할 거다. 그런 땅에 검이 반쯤 꽂혀버렸다.

“승패와 결과에는?”

“반드시 승복한다!”

모든 이들이 한순간에 우렁차게 대답했다. 떼쓰던 어린아이들이 순식간에 잘 훈련된 기사로 돌아왔다. 그들이 정좌하며 자리에 앉는다.

“좋아.”

카울란이 반쯤 꽂힌 검을 다시 한 손으로 빼낸다. 그가 검을 다시 검집에 넣고 내 앞에 앉았다.

“자, 알려드리겠습니다.”

카울란이 설명을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몇 번이고 고개를 기울이곤 했다.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규칙이었다. 결국은 포커 대신에 도둑 잡기라는 간단한 게임을 하게 됐다.

“으음…….”

그리고 지금 나는 매우 깊은 고민에 빠져있다. 엘이 지고 카울란과 나만 남았다. 둘 중 하나는 도둑, 즉 조커다. 잘 뽑으면 내가 이기고, 잘못 뽑으면 내가 진다.

‘근데 왜 카드가 유독 튀어나와 있지?’

카울란이 펼친 두 개의 카드 중 하나의 머리가 높다. 명백히 뽑으라고 해둔 것이 분명하다.

‘속임수겠지?’

게임에 속임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엘이 몰래 귀띔해줬다.

저렇게 대놓고 나와 있는 것은 조커일 확률이 높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을 뻗었다.

‘나도 속여야지.’

카울란을 놀려주기 위해 그가 뽑으라고 높게 빼놓은 카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카울란의 입가가 씰룩인다. 조금만 건드리면 쭉 찢어진 입으로 커다랗게 웃을 것처럼 보였다.

“이거!”

“헉!”

카울란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머리 높은 카드 대신에 그 옆의 것을 낚아챘기 때문이다.

카울란의 입이 벌어졌다. 낭패감이 엿보인다.

히죽히죽 웃으며 카드를 뒤집었다.

“아…….”

조커다. 카울란의 호의를 너무 꼬아서 생각했다. 이게 다 엘 때문이야!

‘아니면 고도의 심리전이었나?’

이유야 어찌 되었든 매우 울적하다. 여태 여러 판을 했지만, 한 판도 이기질 못했다.

‘빼놓으면, 카울란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른 거 뽑겠지.’

카울란과 같은 수법을 쓰기로 했다. 카드를 보이지 않게 잘 섞은 다음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리고 일반 카드를 위로 쭉 올렸다. 카드가 볼록 튀어나왔다.

카울란이 나처럼 생각해서 옆에 있는 조커 카드를 뽑을 테니까! 생각하며 일반 카드를 조금 더 높게 올렸다.

카울란이 카드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든다. 그리곤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본다. 그가 돌연 히죽, 웃었다.

카울란의 표정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카울란이 손을 뻗는다. 내가 높이 올려놓은 카드를 뽑았다.

“아…….”

“헙…….”

나는 탄식했고, 카울란이 숨을 들이켜며 입을 가렸다. 그가 짝이 맞은 카드를 내려놓질 못한다. 울적하다.

“또 졌어.”

내가 잘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페델리우스는 싸움도 잘하고, 머리도 좋고, 그림도 잘 그리고, 돈도 많고, 지위도 높다. 나는 도둑 잡기도 못한다.

“아, 아닙니다! 다시 한 판 할까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열 판이나 하니 질린다. 열 판 모두 깔끔하게 패배하니 더 질렸고.

“카우란, 페데리 언제 와?”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다. 짙은 노을빛이 새어 들어온다. 연무장에 있는 것도 질리고, 피곤하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나무에 몸을 기댔다.

“그러게요. 생각보다 늦으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페데리우스한테 갈래.”

내 말에 뭐든 들어줄 것처럼 굴던 카울란이 굳은 미소를 지었다. 손톱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그가 고개를 젓는다.

“죄송합니다. 명령이 없으면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일단 쉬실 곳을 마련해드릴 테니 그쪽으로 가시겠습니까?”

페델리우스가 보고 싶다. 카울란은 재밌지만 편하진 않았다. 엘도 친절하고 착하지만 페델리우스가 웃는 게 더 보기 좋다.

“페데리우스 보고 싶어.”

생각했던 것보다 날도 쌀쌀하고, 배도 고프다. 페델리우스의 온기가 그리웠다.

카울란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추위에 몸을 살짝 웅크렸다.

“다녀왔습니다. 황녀 전하.”

목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페데리야!”

“예, 늦어서 죄송합니다.”

페델리우스가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훌쩍 뛰어내리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연무장까지 들어온 말이 투레질한다. 기사 하나가 페델리우스의 말을 붙잡고 진정시켰다.

페델리우스가 내 앞에 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를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계속 밖에 계셨습니까?”

“응.”

“……언제부터 말입니까?”

“아까! 뜨거울 때부터!”

페델리우스가 나를 보며 다정하게 웃는다.

“그러셨습니까?”

“응.”

그가 내 몸을 살피곤 느릿하게 고개를 든다. 평소완 다르게 스산함이 느껴지는 움직임이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기사들의 얼굴에서 하나같이 땀이 흘러내리고 있다.

하지만 그런 데 신경 쓰기에는 너무 지쳤다.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이 무겁다. 이상하게 눈앞이 흐릿한 것 같기도 하다.

페델리우스에게 양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페데리야.”

“예, 황녀 전하.”

페델리우스가 내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그에게 아예 매달리며 눈을 감았다.

“나 졸려. 집에 가자.”

“알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뭘 하고 노셨습니까?”

“나무 그늘 밑에 앉아서 카드놀이. 도둑을 잡는 게임인데, 전부 졌어.”

페델리우스가 내 이야기를 들으며 나를 그대로 들어 올려 일어났다. 다리 밑을 한 손으로 받친 그는 무겁지도 않은 모양이다.

“금방 가겠습니다.”

“응.”

“너희는 내일 보자.”

페델리우스가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감해진 피부 사이로 한층 낮아진 온도가 느껴진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눈을 슬쩍 뜨니 기사단원들 얼굴이 전부 새하얗게 질린 채다. 마치 몸속의 피가 전부 빠져나간 것처럼.

“황녀 전하, 어디 이상한 곳은 없으십니까?”

페델리우스가 나를 말 위에 앉히며 말했다. 흐느적거리는 몸이 뒤로 무너지기 전에 그가 나를 단단히 받쳤다. 안심하고 그의 몸에 기댔다.

“음, 춥고, 근데 뜨거워! 음……. 페데리가 좋고, 음…… 잘 모르겠어.”

아? 혀가 풀렸다. 이상하게 발음이 잘 되지 않는다.

이리저리 꼬이는 혀에 아아, 아아, 몇 번이고 목을 풀어도 발음은 여전하다.

“제 생각엔 황녀 전하께서 열이 나시는 것 같습니다. 조금 속도를 높일 테니 몸을 편하게 기대십시오.”

“응응!”

몸이 들썩거린다. 내가 흔들릴 때마다 페델리우스가 허리춤을 단단히 붙잡아온다.

눈에 담기는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페델리우스의 가슴에 몸을 기댄 채 몽롱한 시선으로 구경했다.

‘이게 페델리우스가 보는 풍경이구나.’

빠르게 지나가서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주변인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한다.

“페데리야.”

“예, 황녀 전하.”

“너, 좋아.”

뒷머리를 페델리우스에게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다정하고, 상냥하고, 내게는 아까울 만큼 올곧다.

‘너도 사람을 죽여봤어?’

묻고 싶은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렇다면 어떤 기분이었는지 묻고 싶다. 내게도 적당한 해결책을 알려줬으면 좋겠다.

“예, 저도 좋아합니다. 황녀 전하.”

대답 따윈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의 울음소리에 겹쳐진 페델리우스의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또렷하게 귓가에 틀어박혔다.

분명히 별 감정 없이 호응하듯 말해주는 것이 뻔했다. 페델리우스는 그만큼 다정하다. 지금이라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응.”

다행이다. 동정심에 가까운 감정이라도, 앞으로 페델리우스가 나를 경멸하지만 않는다면 계속 이곳에 있고 싶었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몸이 물을 한껏 먹은 듯 무겁다. 물속에 빠졌다 나온 솜이 된 것 같다. 뜨거운 쇠를 담금질하듯 몸이 자꾸 물속에 잠긴다.

멍한 정신에 나는 이러다 물속에 잠겨서 죽는 건 아닌가를 고민해야 했다.

“그냥 일반적인 몸살일세. 관리만 잘 해주면 나을 거야. 하지만 생각보다 길게 가긴 하는군.”

“멀쩡하셨는데 갑자기 왜…….”

“지쳐있었는데 바깥바람을 많이 쐬었든가 몸에 무리가 온 거지. 따뜻한 거 많이 먹이고, 목이 많이 부을 테니 넘기기 쉬운 음식으로 식사를 내면 되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메디르 님.”

시야는 어두운데 청각은 또렷하다. 누가 몸살 걸렸어? 묻고 싶지만, 손가락이 까딱도 하질 않는다.

그저 멍하니 눈을 감은 채 페델리우스의 목소리를 감상했다.

“그건 그렇고, 황녀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이래 봬도 내가 왕궁의 필두의라네.”

“하지만, 메디르 님만큼 뛰어난 명의를 제가 알고 있지 않습니다.”

“단순한 몸살은 뛰어나지 않은 의원이라도 충분히 진단과 처방을 할 수 있지.”

몸살에 필두의라니. 페델리우스가 통도 참 크다는 생각이 든다. 몸은 물먹은 듯 피곤한데 정신도 몽롱했다. 하지만, 잠이 쉽게 오질 않는다.

“아, 부르지 말라는 건 아니야. 자네의 집에 오면 맛있는 차를 마실 수 있으니까.”

“얼마든지 오십시오. 종종 황녀 전하를 살펴주시면 더 감사하겠습니다.”

페델리우스의 목소리가 결연한 의지를 띄고 있다.

아, 지금 내 얘기를 하는구나. 한참 만에 그것을 깨달았다. 그가 황녀 전하, 황녀 전하, 하고 지칭하는 건 나를 부르는 말이었다.

“허허, 자네가 얼마만큼 황녀를 걱정하는지 알 것 같구먼. 그래서 황녀께선 어찌 이렇게 된 건가?”

“어제 트럼프 제국의 첩자들이 죽은 채 발견됐다는 보고가 들어왔더군요. 재상 각하께서 부탁하시기에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그 사이 기사단원들에게 황녀 전하를 맡겨뒀는데…….”

페델리우스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들 것처럼 위험한 기세였다.

“그것들이 황녀 전하를 몇 시간이나 밖에 내버려뒀더군요.”

‘아니, 그건 아니야.’

밖에 있긴 했지만, 카울란과 기사단이 놀아줬다. 절대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생각하게 된 거야?

“그래서 요 사흘간 연무장에서 곡소리가 끊이질 않았구먼.”

‘사흘?’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렸다.

사흘이란 말이야? 눈꺼풀에 납이라도 단 것처럼 무겁다. 하지만 눈을 떠야 할 것 같았다. 사흘이나 누워있었다니 말도 안 돼.

“페데……흡.”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목이 아팠다. 누운 채 반사적으로 목을 붙잡으며 몸을 웅크렸다.

“황녀 전하!”

페델리우스가 급히 다가왔는지 내 손을 붙잡았다. 페델리우스의 손이 차갑다.

“시원해.”

눈앞이 몽롱하고, 정신이 붕 뜬 것 같다. 몸의 감각이 둔하다. 저릿저릿한 것 같기도 하고, 피부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황녀 전하,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목……아…….”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서 마지막엔 뻐끔거리기만 했다.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젓는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그가 손에 종이와 펜을 쥐여 준다. 불안한 예감이 든다. 누운 채로 들게 된 펜과 종이도 당황스럽다.

내가 버둥거리자 그가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일으켜줬다.

페델리우스가 뒤쪽에 푹신한 베개를 여러 개 쌓는다. 덕분에 허리가 아프진 않다.

축 늘어진 몸을 기대고 나니 메디르라는 의원이 불쑥 얼굴을 내민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너무 아파서 대답할 수가 없다. 침이 넘어가는 것조차 고통스럽다.

“황녀께선 지금 몸살이 나셨습니다. 목이 많이 부었으니 말을 하지 않으시는 게 좋아요. 식사는 꼬박꼬박 하시고, 약을 드리고 갈 테니 약도 식후에 꼭 챙겨 드십시오.”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지 말라고 하니, 더 말을 하기 싫어졌다. 몸에서 자연적인 열이 발생하는지 후끈거린다.

천천히 눈꺼풀을 깜빡였다.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면 여기에.”

‘글은 못 쓰는데.’

눈으론 읽을 수 있지만, 글자가 예쁘게 써지질 않아서 포기했다. 애초에 펜을 잡는 것조차 내겐 어색하다.

“그림을 그리시면 됩니다.”

‘…….’

저번에 그 그림을 보고도 페델리우스는 이런 말이 나오나 보다. 아니면 까먹었든가, 그의 머릿속에서 내 그림이 미화된 거다.

한껏 가라앉은 눈으로 페델리우스를 쳐다봤다.

바보라는 말은 대체 어떻게 그리면 되는 거지?

바들거리는 손으로 펜을 꽉 붙잡았다. 잡은 손이 퍽 어색하다.

‘바보.’

글자는 안다. 페델리우스가 요즘 하나하나 알려주고 있었다. 물론 아콰에게 배운 것도 있기는 하다.

그림을 그리느니 차라리 글자를 쓸 테다. 아콰에게 배운 건 숨겨야 하지만 페델리우스가 요즘 하나하나 알려주고 있는 단어들은 써도 괜찮으니까.

그중에 바보라는 단어도 있었다.

‘이건 기사단 중 누군가가 멍청한 짓을 할 때 큰소리로 외치면 되는 말입니다.’

그렇게 설명해줬지.

‘페델리우스도 기사단 중의 한 명이니까.’

대장이라도 기사단에 속해있는 건 맞지 않겠는가. 마치 그림을 그리듯 글자를 써내려갔다. 글자가 삐뚤빼뚤한 걸 넘어서 크기도 무척 컸다.

“으응…….”

목에서 발음이 되지 못한 울림이 새어나갔다. 작지 않은 종이에 쓴 글자가 흘러넘치기 직전이다.

결국, 글자들이 겹치기까지 했다.

‘페델리우스는 대체 어떻게 여기다 그림도 그리고 글자도 여러 개 쓰는 거야?’

글씨를 쓰느라 숙였던 고개를 드니 페델리우스가 뿌듯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메디르는 어색한 웃음을 입가에 띠고 있었다.

페델리우스에게 종이를 넘겼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메디르가 까치발을 떼 종이를 슬쩍 보더니 웃으며 나를 본다.

“글자는 자네가 가르쳤나?”

메디르가 웃음을 삼키는 것이 뻔한 표정으로 페델리우스에게 물었다. 페델리우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자네에게 바보라고 쓴 모양인데.”

“……바보입니까?”

페델리우스가 종이를 코앞까지 가져다 대고 눈을 가늘게 뜬다. 그가 고개를 젓는다.

“설마. 아닐 겁니다. 바지라든가, 바구니라든가, 그런 게 아닐까요?”

“아픈 황녀가 왜 바지와 바구니가 필요한가?”

“……그 부분은 지금부터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아니, 별로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건 바보라고 쓰인 것 같네. 내 의원 인생을 걸고 맹세하지.”

메디르가 페델리우스의 심장에 제대로 주먹을 날렸다. 쿵, 어쩐지 페델리우스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자네가 알려준 단어 아닌가?”

메디르의 느긋한 말투에 페델리우스의 입이 꼭 다물렸다. 페델리우스가 한층 심각해진 얼굴로 종이를 내려다본다. 그가 한 글자, 한 글자 눈에 담는 것이 보였다.

“제가 가르쳐드렸습니다.”

“근데 왜 아니라고 하는 겐가.”

“일전에 기사단 중의 누군가가 멍청한 짓을 할 때 큰소리로 외치라고 가르쳐드렸습니다. 혹시 그놈들이 황녀 전하를 귀찮게 할까 봐 걱정됐으니까요.”

메디르가 허리를 주먹으로 툭툭 두드리며 웃음을 삼켰다.

그가 나를 보더니 생긋 웃는다. 연륜이 담긴 눈동자가 내 장난기를 간파한 듯싶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자네도 기사단 중의 한 명이니까.”

“…….”

메디르가 사실을 짚어서 말했다. 페델리우스가 말이 없어졌다. 페델리우스를 슬쩍 보다가 베개 하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배고파.’

페델리우스는 어지간히 충격이 큰지 종이에서 시선을 안 뗀다. 주섬주섬 다른 종이를 꺼내 펜을 들었다.

‘밥……을 어떻게 그리지?’

펜을 주먹 사이에 쥔 채 종이를 노려봤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진수성찬인 식사인데, 도저히 그걸 종이에 그려 담을 자신은 없다.

‘모르겠다.’

여전히 머리는 반쯤 몽롱하다.

펜을 들어 선을 쫙 그었다. 그리고 옆으로 긋고 다시 위로 또 그었다. 그다음 삐뚤빼뚤 물결치는 모양을 만들어 위를 막았다.

그 옆에 둥근 수저를 그리기 위해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밑에 선을 쭉 그렸다.

수저 옆에는 직선 세 개를 짧게 그리고 가로로 세 개의 선을 이었다. 그리고 손잡이를 만들어 포크를 그렸다.

그림을 보는 내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알 수 없는 게 완성됐다. 수저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은 차라리 사과에 막대기를 꽂아놓은 것과 비슷했다.

포크는 형체를 알 수 없는 곡괭이 같은 모습이다.

‘으음…….’

보는 것조차 끔찍해서 눈이 절로 가느스름해졌다.

힐끔, 메디르를 보니 그도 고개를 기울이고 있다. 고민에 빠진 모양새는 그가 의학자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시켜줬다.

손을 뻗어 페델리우스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모르면 말해야지, 뭐.’

목이 아프지만, 배고파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근데 목이 아파서 음식이 넘어갈 것 같진 않았다.

“예, 황녀 전하.”

페델리우스가 간신히 바보라고 써준 종이에서 시선을 뗀다. 화가 난 것 같지도 않고, 기분이 상한 것 같지도 않다.

‘화낼 줄 알았는데.’

내겐 장난이었지만, 그는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으니까. 서운한 기색이라도 표현할 줄 알았다.

페델리우스에게 종이를 쥔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가 종이를 받아든다. 그리곤 대충 훑더니 나를 본다.

“배고프십니까?”

‘오, 알아봤어.’

“자네는 그 그림이 이해 가는 겐가? 나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어.”

페델리우스가 문 앞에 있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명령한다. 그가 다시 문을 닫고 들어오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예, 식사와 수저와 포크를 그리셨으니 배가 고프신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음. 자네 말을 들으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메디르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말했다. 물론 내가 보기엔 전혀 이해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예.”

“나는 그것보단 글자가 더 알아보기 쉬웠는데……. 자넨 글자는 못 알아보면서 그건 어떻게 알아봤나?”

“제가 잘 알아본 게 아니라 황녀 전하께서 알기 쉽게 설명해주셨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메디르가 페델리우스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페델리우스가 내 앞에 몸을 숙이며 손을 뻗어온다.

커다란 손이다. 내 얼굴을 다 뒤덮고도 남을 손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자 페델리우스의 손이 닿는다. 내 몸이 뜨거워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그의 손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아직도 열이 떨어지질 않으셨습니다.”

“식후에 약을 먹이면 되네. 아마 많이 주무실 걸세. 주무시는 만큼 계속 재우면 돼.”

“알겠습니다.”

메디르가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나를 쳐다본다.

“또 아프신 곳이 있으시면 그에게 말씀하십시오. 아마 한달음에 제게 보고가 들어올 겁니다.”

또박또박한 음성에 담긴 배려에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메디르가 웃는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다정한 미소다.

‘이 나라의 왕은 좋은 나라를 가지고 있구나.’

아마도 왕이 통치를 잘했음이 분명했다. 이 나라를 보다 보면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비옥한 토지와 주기적으로 내리는 비. 사람들은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죠.>

만약 그 남자가 말했던 것처럼 내 아비가 성군이거나 현명한 사람이었다면 제국의 결말은 조금 달라졌을까?

나도 내 나라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이제는 쓸데없어진 생각이지만, 그랬으면 좋았겠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안녕!’

입 모양으로 인사를 건네며 손을 흔들었다. 메디르가 마주 웃어준다. 페델리우스가 나와 메디르 사이로 들어왔다. 시야가 가려졌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에잉, 됐네. 손발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마차에 올라타면 되는 것을. 여기서 황녀나 돌보게.”

“그럼 사양 않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두 번 권하지 않았다.

“인사도 못 하게 하다니. 자네도 중증이구먼!”

메디르가 몸을 돌려 나갈 때까지도 페델리우스는 꼼짝하지 않고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탁, 문이 닫히고 방에는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메디르가 나가자 몸에 기운이 완전히 빠졌다. 힘을 빼고 베개에 기대자 페델리우스가 조금 더 안정적으로 베개를 쌓는다.

‘베개 쌓기 신공인가?’

몽롱한 정신에 페델리우스가 두 명으로 나뉘어 보인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숨결이 내게도 느껴질 지경이다. 인간 난로가 된 것 같다.

손을 뻗어 페델리우스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아파.’

입술을 움직이자 페델리우스가 굳은 표정으로 일어난다.

“메디르 님을 다시 모셔오겠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

다급히 페델리우스를 붙잡고 고개를 좌우로 거세게 저었다. 눈앞이 핑글 돌았다.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것을 페델리우스가 놀란 얼굴로 붙잡았다.

‘아니야.’

입 모양을 움직여 페델리우스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아무리 아파도 방금 간 사람을 다시 데려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니 애초에 그럴 마음도 아니었다.

그냥 아프다고 말해보고 싶었다. 줄곧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때는 아콰도 작은 빛무리여서 내 옆을 뱅글뱅글 도는 것밖에 해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온기가 있다. 손을 뻗으면 페델리우스를 붙잡을 수가 있었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으응.”

고개를 저었다. 그냥 팔을 뻗어 페델리우스의 손을 붙잡았다.

단지 사람의 온기 하나가 이리도 따뜻하고 기분 좋다.

“아,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선물을 주신 것 같던데 열어보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있었지.’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뭔지는 몰라도 작은 상자 속에서 뭔가 덜그럭거렸던 것이 기억난다.

페델리우스가 구석에 놓여있던 것을 들어서 내게 가져다줬다. 심심하면 이걸 가지고 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그 왕이 멀쩡한 걸 줬을 것 같진 않은데.’

멀쩡한 걸 줬어도 왕이 줬다는 시점에서 이미 꺼림칙한 물건이다.

어느 쪽이든 도로 돌려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한껏 인상 쓴 표정으로 상자에 손을 뻗었다.

눈은 가늘게 뜬 채 상자 뚜껑을 열었다. 뭐가 튀어나와도 표정관리를 하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상자 안에는 이상한 것들이 세 갠가 들어있었다.

‘이게 뭐야?’

눈이 절로 가늘게 떠졌다. 뭔지 모를 장난감이다. 나무로 깎은 이상하게 생긴 인형이 세 개나 있다.

“태엽 인형이군요.”

‘태엽 인형?’

입만 뻐끔거려 페델리우스에게 물었다. 내 입술 모양을 유심히 보던 페델리우스가 묵묵히 고개를 주억이며 몸을 숙였다.

‘그게 뭐야?’

내가 묻는 것과 동시에 페델리우스가 인형 하나를 집는다. 인형 뒤쪽에 이상하게 생긴 것이 있다.

페델리우스가 그걸 사정없이 여러 번 돌렸다.

저게 태엽이라는 것인 모양이다.

드륵. 드르륵. 돌아가는 소리가 거슬리는 소음을 낸다.

시선이 절로 그것에 고정됐다. 페델리우스가 침대 위에 인형을 내려놨다.

인형이 따닥, 따닥, 따닥 소리를 내며 걷기 시작한다. 아무도 만지지 않는데 혼자서 앞으로 걸어간다.

침대가 푹신해 결국 앞으로 고꾸라졌지만, 분명히 걸었다.

‘와아’

입이 절로 벌어져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물론 목이 아파서 목소리가 되진 않았다. 상자에 있는 다른 장난감도 들었다.

그건 희한하게도 머리에 태엽이 있었다.

‘아까 페델리우스가 돌린 건 등에 있었는데.’

페델리우스를 따라 나도 손에 힘을 줬다. 돌리려고 손가락에 힘을 주는데 득, 소리를 한 번 내더니 더는 돌아가지 않는다.

‘뭐야?’

미간을 구기며 인형을 노려보자 페델리우스가 내 손에서 부드럽게 인형을 빼갔다. 인형을 따라 내 시선도 움직였다.

“이건 좀 뻑뻑하군요.”

드륵, 드르륵, 드르륵. 페델리우스의 약한 소리와는 다르게 태엽은 한 바퀴를 훌쩍 넘게 돌아갔다. 손쉽게 돌아가는 태엽이 허망해 넋을 놓고 그것을 쳐다봤다.

‘잘 돌아가네.’

나는 내 손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내 손은 벌게져서 아직도 저릿한데, 겨우 득, 소리 한 번 나게 돌린 것뿐이다.

그에 비해 페델리우스의 굳은살 진 손은 멀쩡하다.

“얘는 걷지 않네?”

페델리우스가 내려놨지만, 인형은 걷지 않았다. 못생긴 나무인형은 내려놓아도 움직임이 없었다.

고개가 기울어지려는 순간 딱! 나무인형이 움직였다.

딱, 딱, 따다다닥! 딱!

‘으……. 이건 뭐야?’

나무인형은 걷지도 손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움직인 건 입이었다. 몸이 절로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기분 나쁘다. 페델리우스를 보니 그가 아, 하고 짧은 탄성을 흘린다.

“이게 최근 나왔다는 그 장난감인 모양입니다. 여기에 단단한 물체를 넣으면 깨준다고 합니다.”

‘단단한 거?’

입 모양을 움직이니 페델리우스가 미간에 힘을 주며 내 입 모양을 살핀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는 건지,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 모르겠다.

“호두 같은 단단한 견과류 종류를 많이 넣는다고 했습니다.”

‘으음…….’

그래도 움직이는 입이 괴기스럽다.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인형이 멈췄다. 태엽이 다 돌아간 모양이었다.

‘마지막 건 뭐야?’

역시나 소리 없이 묻자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그가 마지막 남은 인형을 들어 올렸다. 이것도 역시 나무로 된 태엽 장난감이다.

“이건 동물인 것 같습니다.”

다리가 네 개 달린 생물이라는 건 알겠다. 귀가 있고, 발톱이 있다. 고양이를 닮았다. 페델리우스가 등에 있는 태엽을 감았다.

그가 나무 동물을 내려놓자 천천히 앞발을 들더니 다시 내린다.

‘응?’

고개를 기울이는 순간 짐승의 입에서 뭔가가 나왔다가 쏙 들어갔다.

“…….”

‘뭐지?’

짐승이 또다시 한 발을 들어 올리고 입에서 뭔가를 내민다. 둥그런 무언가다.

‘혀?’

짐승의 혀가 미친 것처럼 나왔다 들어가길 반복했다. 흔히 ‘메롱’ 하고 놀리는 동작과 닮았다.

처음에는 신기함에 들떴던 마음이 순식간에 푸시식 꺼진다.

“메롱……인 것 같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

머리로 생각하며 멍하니 메롱 인형을 바라봤다. 뒤로 몸을 기댔다. 몸에 열이 더 오르는 것 같다. 왕을 한 대 때려줄 걸 그랬다.

‘이런 유치한 짓을 할 줄이야.’

사실 그는 왕이 아니라 왕의 탈을 쓴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인형들을 모아 다시 상자에 집어 던졌다. 상자 뚜껑을 닫고 페델리우스의 품에 밀어줬다.

‘버려.’

“폐하께서 주신 선물을 버리는 건 어렵습니다.”

페델리우스가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페델리우스의 눈빛도 싸늘하다.

‘창고는?’

잠시 고민하다 페델리우스에게 물었다. 그가 내 제안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도 쓰지 않는 창고의 가장 구석에 처박아두겠습니다.”

그리곤 답지 않게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방금 처박는다고 했어.’

황제가 준 물건을. 뒷말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삼킨 채 상자를 들고 방구석으로 걸어가는 페델리우스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도 어지간히 짜증스러웠던 모양이다.

페델리우스는 내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친히 상자를 방구석에 치워놓고 돌아왔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있던 페델리우스가 문을 열었다.

“주인님, 황녀님은 괜찮으신가요?”

문밖에서 메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정신을 차리셨다. 식사하고 약을 드시고 다시 주무실 예정이야.”

“네에……. 식사 맛있게 하세요.”

메리가 인사만 하고 쏙 사라졌다.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데, 얼굴도 보이지 않고 가는 게 이상했다.

‘메리, 왜?’

“혹시 옮을 수도 있으니 들어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본인은 무척 보고 싶어 하지만, 아무래도 일에 지장이 생기니까요.”

입을 뻐끔거리며 묻자 페델리우스가 문을 닫으며 대답했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고소한 냄새가 방을 가득 채웠다.

‘뭐야?’

“수프입니다. 건더기는 최대한 잘게 갈아 넣었습니다.”

‘음…….’

내가 말없이 쟁반에 놓인 수프를 바라보자 페델리우스가 다급히 입술을 달싹인다.

“아무래도 갈아 넣어서 그런지 보기엔 조금 그렇지만, 목 넘김은 좋습니다.”

김이 풀풀 나는 것이 꽤 뜨거워 보였다.

꼬르르륵, 배에서 우렁찬 울림이 들렸다. 페델리우스의 몸이 움찔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배려라는 건 알지만…….

‘얼굴에 놀란 게 다 티 나.’

필사적으로 숙인 고개가 애처로울 정도다.

꼬르륵, 배에서 또 한 번 울림통이 울렸다. 고소한 냄새가 코에 들어오니 뱃속이 아우성친다.

두 번은 나도 참기 힘들어 고개를 숙였다.

“황녀 전하, 드십시오.”

페델리우스가 수저로 뜬 수프를 입술 가까이 가져다 댔다. 순순히 입을 벌려 수저를 텁 물었다.

고소한 풍미가 입 안 가득 퍼졌다. 늘 먹는 음식인데 유독 맛있게 느껴진다.

“으…….”

신음이 흘러나왔다. 목이 아픈 건 여전하다.

“괜찮으십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아프십니까?”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였다. 페델리우스의 표정에 난처함이 서린다. 그가 수프를 내려다보고, 나를 보더니 단단해진 눈빛으로 수프를 뜬다.

“아프셔도 드셔야 합니다. 조금만 먹고, 약 먹고, 또 푹 주무십시오.”

배에선 꾸륵꾸륵 소리를 내는데 목에선 묽은 수프조차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그가 곤란해 하는 건 싫으니 억지로 고개는 끄덕였지만…….

‘아파.’

갑자기 입맛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게 눈 감추듯 먹었을 음식이다.

그럼에도 허기진 배는 끊임없이 꼬르륵거리며 울린다.

“조금만 더 드십시오.”

나도 먹고는 싶은데……. 다가오는 수저를 노려보듯 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입을 텁 다물자 수저가 또 빠져나간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맛있어.’

삼키기가 싫을 뿐이다.

몇 번의 공방 끝에 수프는 결국 바닥을 보였다. 한두 번 먹을 때는 아파서 울상이 된 표정을 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몇 번 더 먹다 보니 괜찮아졌다.

오히려 따뜻한 수프에 목이 좀 가라앉은 느낌도 든다. 물론 그렇다고 아프지 않단 말은 아니고 날카로운 통증이 조금 무뎌진 것뿐이지만.

“이제 약을 드시고 주무시면 됩니다.”

‘약?’

“네. 탕약입니다.”

그러고 보니 수프 옆에 그릇이 하나 더 있었던 게 떠올랐다. 분명히 페델리우스가 따로 협탁에 빼두었다.

그가 협탁에 있던 그릇을 가지고 왔다.

‘헙.’

쓰디쓴 냄새에 숨이 절로 막혔다. 입을 딱 다물었다. 새까만 액체는 누가 봐도 세상에서 제일 쓴 약처럼 보인다. 해골을 그린 경고 푯말을 옆에 세워놓아야 할 것 같다.

“이것도 적당히 식었으니 한 번에 들이켜십시오. 그래야 조금 덜 씁니다.”

‘안 먹어, 잘래.’

고개를 저었다. 쓴 건 싫다. 딱딱한 빵보다도 싫었다.

오죽하면 다락방에서도 탄 부분은 입도 대지 않았다. 물론 음식 전체에 숯덩이가 붙어있으면 어쩔 수 없었지만.

“약을 잘 드시면 유명 제과점에서 사 온 사탕을 드리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결연한 표정을 했다. 그의 손엔 알록달록한 사탕이 담긴 투명한 유리병이 있었다.

“두 개나요.”

그가 손가락 두 개를 쫙 펴며 덧붙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