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99)

* * *

결과적으로 그날 나는 탕약을 한 번에 마시고, 사탕 두 개를 받았다.

쓴 약과 먹어본 적 없는 사탕 사이에서 긴 고민을 했다. 그건 정말 긴 고민이었다.

“오늘도 탕약을 드셔야 합니다. 황녀 전하.”

쓰러진 지 6일째, 사탕을 맛본 지는 3일째였다. 탕약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나왔다.

‘줘.’

양손을 들이밀며 입을 뻐끔거렸다.

나는 사탕의 맛에 푹 빠졌다. 세상에 그렇게 달콤하고 입에서 굴려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을 줄이야!

아콰의 설명을 들었을 때와 직접 먹어본 것은 확연히 차이가 났다.

구슬같이 생겨서 아무런 맛도 없을 것 같았던 사탕은 무척 달콤했다. 탕약을 먹으면 두 개씩 굴러들어오는 사탕에 이제는 아예 탕약 시간을 기다릴 정도다.

‘메리가 있으면 몰래 좀 달라고 할 텐데.’

사실 메리를 못 본 지도 꽤 됐다. 페델리우스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는 접촉 금지명령을 내린 모양이다. 눈을 뜬 이후부터 매일같이 보이는 건 페델리우스뿐이다.

‘얜 출근 안 하나?’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요 며칠 동안 페델리우스는 어디도 가지 않고 붙어있다. 이쯤 되면 슬슬 그의 직장이 걱정될 정도였다.

‘이러다 잘리면 어떡해?’

길거리에 나앉게 되는 건가? 누워만 있으니 쓸데없는 걱정과 망상만 크기를 부풀려간다. 계속 누워만 있으니 등과 엉덩이에 종기가 날 지경이다.

목은 아직 아프지만, 힘을 주면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아콰도 조용하고,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다.

‘내가 아파서 그런가?’

그래도 페델리우스가 곁에 있으니 심심하진 않다. 벌써 두 번이나 앓아누운 건 어떨지 모르겠지만.

“황녀 전하.”

페델리우스가 나를 불렀다. 그러고 보니 그가 건네준 약을 아직 먹지 않았다. 두 손으로 붙잡은 약을 조심스럽게 입술에 댔다.

쓴 냄새가 확 올라왔다.

‘으.’

사탕을 생각해서 억지로 먹곤 있지만, 정말 지독히 쓰다. 쓰기만 한 게 아니라 꼬릿꼬릿한 생전 맡아본 적 없는 이상한 냄새도 난다.

‘읍.’

숨을 참으며 그대로 들이켰다. 꿀렁거리며 넘어가는 약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콜록콜록.”

쓴맛에 결국 기침을 토했다. 그 순간 입 안으로 뭔가가 쏙 들어왔다. 동그랗고 달콤한 것은 내가 그토록 기다린 것이다.

‘사탕!’

“오늘도 잘 드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페델리우스가 내게 사탕 두 개를 더 쥐여 주며 말했다.

부드럽게 가져가는 그릇에 페델리우스를 가만히 쳐다봤다. 뒷목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창문 밖으로 빽빽한 나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페데리야!

입을 뻐끔거리며 페델리우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릇을 정리하고 있던 페델리우스가 나를 돌아본다.

“예, 황녀 전하.”

‘언제 가?!’

“언제 가? 어딜 말씀이십니까?”

미간을 찌푸린 페델리우스가 내 입 모양을 따라 움직였다. 이해하지 못했는지 내게 되묻는다. 자연스럽게 양팔을 파닥거리려다가 행동을 멈췄다.

‘이러다 정말 어린애 같은 행동에 익숙해지겠어.’

이미 몸에 배어버린 것도 있지만, 이 이상 익숙해져선 안 된다. 들어 올렸던 손을 다시 천천히 내렸다.

‘물놀이!’

“아. 첨벙첨벙 말씀이시군요.”

“…….”

사람이 기껏 돌려 말했더니, 내 노력을 수포로 만든다. 오래 고민해서 생각해낸 적절한 단어가 한순간에 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허망하다.

‘어떻게 나보다 더 멀쩡해?’

다 큰 남자가! 그것도 어른이! 저런 단어를 말하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분명 예전에는 부끄러워했던 것 같은데…….

흐릿한 기억을 뒤져봤지만, 사실 떠오르는 게 없다. 처음부터 저렇게 묵묵했던 것 같다.

아마도. 뒷말은 기억 저편으로 넘겨버렸다.

“황녀 전하.”

‘응?’

페델리우스가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오른쪽 무릎을 굽힌다. 침대에 앉아있는 나와 페델리우스의 시선이 정면으로 맞았다.

그의 눈동자에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생각해보면 나는 페델리우스에게 이긴 적이 없는 것 같다. 대개 페델리우스가 하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종종 버틸 때가 있긴 하지만, 그 경우에도 페델리우스에게 진다.

페델리우스 생각보다 나를 잘 다루고, 회유도 잘 한다. 나도 모르는 부분을 아무렇지도 않게 훅훅 치고 들어온다.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으시니 차가운 물 말고 따뜻한 물에서 첨벙첨벙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따뜻한 물?’

“네. 목욕할 때 쓰시는 물 아시죠?”

페델리우스가 차근차근 설명하려는 듯 내게 묻는다. 나도 그 정돈 알고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물이 잔뜩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 데를 왜 가?’

혼자서 생각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뜨거운 물이 필요하다면 욕실에서 해도 된다.

페델리우스 집의 욕조는 크다. 내 방에 있는 것도 상당한 크기였다. 성인 네다섯 명이 들어가도 문제는 없다. 물론 비좁겠지만. 고민하던 고개가 앞으로 툭 떨궈졌다.

‘왜?’

번쩍 고개를 들어 입술을 달싹였다.

“예?”

‘뜨거운 물 왜 가? 욕조 있는데.’

손가락으로 욕실을 가리키며 입술을 달싹였다. 천천히 움직인 덕분인지 그는 이번엔 주름을 만들지 않고 금세 고개를 끄덕인다.

“일반적인 물이 아니라 땅에서 솟아나서 만들어진 물입니다. 신기한 냄새도 나고, 환자나 피부에도 좋다고 유명합니다.”

‘땅에서…… 물이……?’

시야가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런 현상도 있다고 아콰에게 들어본 것 같다.

하지만 졸았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아콰에겐 너무 방대한 것을 글과 말로만 배웠다.

종종 물거울로 보여주기도 했지만, 그때의 아콰에겐 한계가 있었다.

‘그거 좋아?’

“네. 아프시니 요양차 가시면 분명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으음…….’

페델리우스가 하는 말이니 틀리진 않을 거다. 아콰가 그랬듯 페델리우스가 내게 해주는 것에 악의는 없다.

만약 이게 연기라면 그는 정말 희대의 명배우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겠지만.

‘언제?’

“다만 이번 주를 통째로 휴가 냈었으니 시간이 좀 고민이군요.”

‘일주일? 통째로?’

입이 떡 벌어졌다. 페델리우스는 왕성의 기사다. 그것도 기사단장이라는 높은 위치를 지키고 있다. 왕의 신뢰도 많이 받는 것으로 안다.

그런 사람이 일주일이나 휴가를 낸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설마…….

‘잘렸어?’

입술을 달싹이며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페델리우스가 도리어 화들짝 놀란다. 그가 좌우로 고개를 젓는다.

“아니 이런 건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배운 건 아니고 기사단원들이 하는 거친 농담 중에 섞여 있었다. 시늉이 워낙 신기해서 한번 써볼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왜?’

“그냥, 누가 가르쳐줬는지 궁금해서 그럽니다.”

‘왜?’

“…….”

페델리우스가 대답이 없다.

“칭, 찬을 해주려고 합니다.”

한참 만에 그가 대답했다. 시선은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거짓말이라는 것이 뻔히 보인다.

‘카울란! 기사단도!’

“호오…….”

페델리우스의 안광이 번뜩였다. 순간 늦은 밤 어둠 속에서 먹이를 찾은 짐승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어느새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보기 좋은 미소에 나도 마주 웃어줬다. 페델리우스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 있다.

“황녀 전하, 생각해보니 이번 달이라면 언제든 괜찮을 것 같습니다.”

‘괜찮아? 왜?’

“생각해보니 부하들이 각자 휴가를 하루에서 이틀씩 절 위해 내어준다고 들었던 걸 깜빡했었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나를 똑바로 본 채 말한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다.

‘이건 거짓말이 아닌가?’

아무래도 수상해서 페델리우스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페델리우스는 내 눈을 피하지 않는다. 도리어 눈꼬리를 휘어 살살 웃는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마주 웃었다.

“아니면 그 근처에 별장이 있으니 그곳에 계속 있어도 괜찮습니다.”

그가 말하며 내 손을 붙잡았다.

‘응!’

물이라면 아콰도 분명 좋아할 거다.

‘거기 이름이 뭐야?’

“아, 온천이라고 합니다. 온천. 잠시만 기다려보십시오.”

페델리우스가 협탁에 붙은 서랍에서 종이와 펜을 꺼낸다. 내가 눈을 도르륵 굴리자 그가 내 옆에 와서 앉는다. 그리곤 그림이 잘 보이도록 돌려 앉았다.

페델리우스가 평평한 나무판을 깔고 그 위에 종이를 올린다.

연필이 자연스럽게 호를 그렸다. 슥슥- 몇 번 줄을 긋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호수 같은 것이 그려졌다.

‘언제 봐도 대단해.’

나처럼 선이 비뚤어지지도 않고, 원하는 방향으로 슥슥 나아간다. 언제 봐도 대단해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생긴 곳입니다.”

‘멋져! 잘했어!’

손뼉을 쳐주자 페델리우스가 얼굴을 확 붉힌다. 그의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뭔가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페데리야?’

“아, 네.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긴 곳입니다. 잘 꾸며진 정원 한가운데에 연못보다 더 커다란 온천이 있습니다.”

그림으로 봐도 충분히 웅장해 보인다.

그림은 마치 페델리우스의 기억 속에서 꺼내온 듯이 생생했다.

꽃과 나비가 날아다니고 나무에는 새들이 앉아있다. 그림 너머로도 뜨겁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수증기 같은 것도 있다.

‘갈래!’

삼 일째 대답 없는 아콰도 신경 쓰였다. 만약 내가 아파서 아콰도 아픈 것이라면 얼른 나아야 했다. 그러려면 뭐라도 해보는 것이 좋을 거다.

“그럼 내일은 왕성에 가서 허락을 받고 오겠습니다.”

‘기사단이 선물했잖아?’

“아.”

페델리우스가 말이 없다. 아주 짧은 공백이 생겼다. 하지만 그는 금세 입을 열었다.

“네, 하지만 폐하께는 말씀을 드리고 와야 합니다. 일주일만 쉰다고 했으니까요.”

‘아, 응. 알겠어.’

고개를 끄덕이자 페델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하지만 내일은 오전 중에 제가 없을 겁니다.”

‘괜찮아!’

“메리에게 말해둘 테니 종을 울리시면 메리가 올 겁니다.”

페델리우스가 협탁 옆의 손잡이가 달린 작은 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설명에 순순히 고개를 주억였다.

“왕성에 갔다가 최대한 빨리 오겠습니다.”

‘응. 페데리야.’

바깥이 참 따뜻해 보인다.

요 며칠 침대에서 움직이질 못했다. 페델리우스가 움직이지 못하게 했으니까. 오후로 들어서니 햇볕도 따사롭다.

손에 쥔 사탕 하나를 입에 넣으며 페델리우스를 향해 웃었다. 최대한 얼굴 근육을 풀어서 배시시 말이다.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답답해. 밖에 나갈래.’

손가락을 쫙 펴서 햇볕이 내리쬐는 창문 밖을 가리켰다.

물론 표정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안 됩니다.”

페델리우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열도 다 내리지 않으셨고, 목도 여전히 부어있습니다. 말씀하시면 아프시죠?”

‘아니.’

입술을 뻐끔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아프긴 하지만 처음보단 많이 나았다.

“최대한 빨리 휴가를 받아오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말머리를 돌려버렸다.

‘……쪼잔한 놈.’

속으로 생각했다.

“에취!”

페델리우스가 오한이 든 듯 어깨를 잘게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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