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99)

* * *

“다녀오겠습니다.”

아직 잠을 자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미동조차 없다. 편안한 모습이다.

손을 뻗어 조심히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지나갔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뗐다.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밖에는 메리가 있었다. 어젯밤에 오늘부터 다시 황녀를 돌보라고 했더니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얼굴이 잔뜩 풀어진 것이 어지간히 기분 좋은 모양이다.

‘요 며칠 얼굴도 보지 못하게 했으니…….’

온종일 축 처져있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주인님, 지금 나가시나요?”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황녀 전하를 잘 돌봐주도록 해.”

내 말에 메리가 목이 아프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목이 떨어지진 않을까 싶을 정도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준비는 언제나 완벽합니다!”

메리가 다양한 장난감과 붓과 펜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바구니 안에 든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다.

“그럼 다녀오마.”

“네! 다녀오세요.”

메리가 허리를 반쯤 굽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대답도 듣기 전에 게걸음으로 황녀의 방에 쏙 들어간다. 미련 없이 닫히는 문이 어쩐지 조급하게 보였다.

‘누가 막는다고.’

요 며칠 막은 것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했던 거다. 메리가 들어간 방문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얼른 다녀와야겠어.’

어제 일찍 온다고 약속했으니까. 생각하며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왕성에 들어가기 전, 출입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보인다. 다른 기사단의 단원인 듯했다. 내가 지나가니 그들이 몸을 떤다. 흘끗 바라보니 숨을 들이켜며 한껏 몸을 긴장시켰다.

‘사람을 괴물이라도 보는 것처럼…….’

괘씸함에 눈이 가늘어졌다. 한마디 할까 했지만, 참았다. 저들이 저러는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오늘로 일주일째 계속되는 훈련 때문일 거다.

“그러게 왜 명령을 불이행해?”

잘 돌봐주라고 했지 밖에서 카드게임 하면서 몸살을 앓게 하라고 한 적은 없다.

그것도 일주일째 다 낫지 않고 있다.

폐하께 먼저 가려던 걸음을 돌렸다. 생각하니 또 괘씸하다. 연무장으로 발을 옮겼다.

연무장으로 들어가니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래도 농땡이를 부리는 이들은 없던 모양이다. 모두가 늘어진 채 바닥을 뒹굴고 있다.

“오셨습니까? 단장님!”

카울란이 제일 먼저 일어나 경례했다. 흙바닥에 쓰러져있던 다른 녀석들도 다급히 일어나 경례한다.

일주일 전 명령을 내린 후 아예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내가 명령을 거두지 않는 이상 훈련은 끝나지 않는다. 반짝거리는 간절한 눈동자가 부담스럽다.

“황녀 전하는 깨어나셨습니까?”

“그래. 사흘 전에 간신히 눈을 뜨셨다.”

“아, 다행입니다.”

카울란이 풀린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첫날 이야기를 전했을 때 가장 후회한 게 그였다. 제법 죄책감을 느낀 모양이다.

부단장이면서 기사단의 훈련에 같이 참여했다고 들었다.

‘단장이 없을 땐 부단장이 제일 높은 지위인데.’

안 해도 될 일을 굳이 한 거다. 아닌 척해도 카울란 역시 우직한 종류의 사람이다.

“2일.”

손가락 두 개를 펴며 말했다. 기사단이 동시에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정말 못 볼 꼴이다.

“쓰읍.”

눈을 매섭게 뜨니 모두 차렷 자세로 돌아간다.

“휴가 2일씩 내놔.”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짧은 세 마디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만큼 멍청한 녀석들은 아니다. 기사에게 주어지는 휴가는 일 년에 30일이다.

매년 겨우 삼십일 밖에 없는 휴가라는 얘기다.

“다, 단장님?”

“아니면 앞으로 한 달 계속 같은 훈련 반복하든가.”

나로선 아쉬울 것이 없었다.

개인 휴가를 빼서 황녀와 온천에 가도 상관없다. 어깨를 으쓱였다. 들어 올렸던 손가락을 내리고 팔짱을 꼈다.

“황녀 전하를 데리고 온천에 갈까 해.”

기사단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을 덧붙이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도 목이 부어서 말도 못 하시고.”

정확히는 더 악화할까 봐 내가 하지 말라고 했지만.

“열도 아직 40도를 넘나드신다.”

사실은 미열이다. 그래도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볼 때면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시지.”

일어나면 자꾸 나가려고 해서 내가 못 하게 했다. 물론 뒷말을 굳이 입 밖으로 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진 않았다.

“주기 싫으면 안 줘도 돼. 몸도 약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황녀 전하께 문제가 생기면 나랑 싸울 각오는 해야겠지만.”

어깨를 으쓱이자 너도나도 손을 들기 시작했다.

“드리겠습니다…….”

“저도요!”

“제 휴가도 가지고 가십쇼!”

“기쁜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

너도나도 손을 홱홱 들어 올린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40일 남짓의 휴가였다.

아무래도 전부 몰아서 쓸 순 없겠지만, 앞으론 종종 쉴 수 있겠다.

‘나으시면 이곳저곳 데리고 다녀야겠어.’

매일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모습이 어찌나 안쓰러운지 모른다. 그래도 혹시나 몸 상태가 악화할까 매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훈련은 오늘부터 다시 자율적으로 돌입하도록 해.”

“예, 감사합니다!”

“단, 한 번 더 같은 일이 있었다간 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이를 드러내며 말하자 기사단이 커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군기가 바짝 들어가 있다.

카울란도 봐주는 것 없이 훈련한 모양이다.

“오늘은 각자 일찍 돌아가서 쉬도록 해.”

“예,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단장님.”

카울란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뒤로 돌렸다.

훈련은 풀어주었지만 아직은 괘씸하다. 몸 약한 황녀 전하를 몇 시간이나 밖에 앉혀둘 생각을 하다니. 다시 생각해도 황당하기 그지없다.

최근에야 조금 보기 좋아졌지만, 그 전에는 바짝 말라서 살아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처음엔 잘 웃지도 않으셨지.’

말도 잘 하지 않았다. 손만 올려도 몸을 떨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정말 많이 달라진 거다.

예전에도 웃었지만 그건 어쩐지 억지로 짓는 미소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마음이 따뜻해진다. 내가 웃으면, 따라 웃어주는 것이 좋다. 덕분에 최근 굳어있던 얼굴 근육을 움직이느라 바빴다.

똑똑. 문을 두드렸다.

“폐하, 페델리우스입니다.”

“들어와.”

방 안으로 들어가니 드물게도 잉크 냄새가 풍겼다. 방 안에는 널브러진 서류들이 보였다. 집무실 책상에도 종이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자칫하면 폐하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 왔는가. 페델리우스.”

“재상 각하. 계셨습니까?”

“그래. 또 뺀질, 아니 일하지 않으시고 요리조리 도망을 다니셔서 붙잡아놨네.”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손수 몸을 굽혀 줍는다. 긴 머리카락은 하나로 질끈 묶여있다.

눈 밑에 그늘이 내려온 게 퍽 피곤해 보였다.

“좋아! 페델리우스도 왔으니, 일단 휴식시간을 갖도록 하지. 어때? 재상.”

폐하께서 재상에게 텅 빈 잉크병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다 주운 재상도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예. 그럼 차 한 잔씩 내오겠습니다.”

“아, 됐어. 시녀들을 어디다 쓰라고.”

재상께 손을 휘휘 저어 보인 폐하가 손수 문을 열고 나간다.

“어이, 거기 너.”

“예, 예! 폐하!”

“잉크병을 새로 채워오고, 차 석 잔이랑 다과를 내오너라.”

“예! 알겠습니다.”

밖에 지나가던 시녀 한 명을 붙잡았는지 폐하께서 명령을 내렸다. 그리곤 지쳤다는 듯 소파에 가서 앉는다.

“둘 다 앉아.”

맞은편을 가리키는 폐하의 턱짓에 묵묵히 자리에 앉았다. 재상께서도 내 옆으로 다가온다. 다가오는 재상을 폐하께서 붙잡았다.

“넌 여기.”

재상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진다.

‘저 정도로 싫어하는 티 내기도 쉽지 않은데.’

무려 왕의 앞에서 저렇게 인상을 쓰는 이는 재상이 유일했다. 재상이 무례하거나 제멋대로인 사람은 결코 아니다. 한결같이 엄격하고 책임감이 투철하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모두가 꺼리는 일도 항상 재상께서 먼저 칼을 뽑으시지.’

그런 재상이 폐하께서 옆에 앉으라고만 해도 질색하다니, 대체 얼마나 짓궂게 굴었던 걸까?

그래도 확실한 것은 그녀가 누구보다 폐하를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폐하의 곁에 끝까지 머무를 최후의 기사는 아마 내가 아니라 그녀가 아닐까 종종 생각할 정도로.

“싫습니다.”

“명령이야.”

“……젠장.”

재상이 거친 언사를 내뱉었다. 폐하가 눈썹을 쓱 치켜들자 그녀가 입을 꾹 닫고 폐하의 옆에 앉는다. 늘 져주는 건 재상이다. 상하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티가 팍팍 나지만, 폐하의 기행을 다 받아주기는 한다.

‘그러고 보면 재상께서도 대단하시지.’

재상이 폐하와 멀찍이 떨어져 앉는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폐하가 돌연 소파에 드러누웠다.

정확히는 재상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지금 뭐 하십니까?”

“휴식.”

“누우실 거면 제가 페델리우스 경의 옆자리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베개가 없어지지 않겠나. 아쉽게도 베개가 없으면 잠을 못 자는 사람이라서.”

“…….”

재상의 얼굴이 점점 야차처럼 일그러진다. 불룩 튀어나온 핏줄이 그녀의 심기를 고스란히 대변해준다.

그도 그럴 게 재상께서도 알고는 있을 거다. 폐하가 매일 아무것도 없는 소파에서 잠을 자는 게 일상이라는 것을. 이제 와서 베개가 없어서 못 잔다고 하면…….

‘나도 황당하군.’

폐하께선 아무래도 재상을 놀리는 데 재미를 붙이신 모양이다. 재상이 그를 모른 척하며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일전의 그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처음 보고한 놈들은 네 구의 사체를 봤다고 해. 여러 명이 같은 증언을 했으니 틀림없다.”

“……그렇습니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트럼프 제국에서 회수해간 것인지, 만약 회수했다면 왜 그 시체 하나만? 자네가 꿈을 꾸고 보고서를 적었을 확률은 얼마나 되나?”

재상의 말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불쾌한 티를 숨기지 않으니 그녀가 어깨를 으쓱인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하는 말이야. 나도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니까.”

재상이 설명을 덧붙인다. 그만큼 그녀로서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인 것은 분명하다.

그 뒤로 이것저것 둘러봐도 마땅히 증거가 될 만한 건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그대로 묻히게 될 일이다.

“아, 재상 각하. 열흘쯤 휴가를 좀 받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얼마 전에 일주일 휴가를 받지 않았나?”

“네. 황녀께서 아직 낫지 않으셔서 온천에 한번 다녀올까 합니다.”

내 설명을 들은 재상이 팔짱을 낀다. 미간에 진 주름이 그녀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누워있던 폐하가 돌연 팔을 뻗어 검지로 재상의 미간 사이를 꾹 눌렀다. 깊게 새겨진 주름이 자취를 감췄다.

“뭡니까?”

“인상 좀 펴. 예쁜 얼굴이 매번 오래된 사과처럼 쭈글쭈글해지잖아. 그러다 한순간에 늙는다?”

“제가 빨리 늙어 죽게 되면 그건 폐하 때문이라고 유서에 반드시 적고 가겠습니다.”

폐하가 모호한 미소를 띤다.

“……안 돼. 오래 살아달라고, 재상. 날 감당할 수 있는 게 재상 말고 몇이나 된다고.”

“그러면 일 좀 열심히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폐하께 제가 찾아올 일도 없을 텐데요.”

재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폐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그게 문제야.”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시녀의 인사말과 폐하의 혼잣말이 겹쳐버렸다. 재상이 되묻자 폐하께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자, 차나 들지.”

폐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찻잔을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