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휴가 허락받고 왔습니다.”
내가 자는 도중에 훌쩍 떠났다가 돌아온 페델리우스가 말했다. 벌써 해가 져서 어둑해진 저녁이었다.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글썽이고 있는 메리였다. 열이 난다고, 괜찮으냐고 울먹이는 메리를 달래느라 진이 빠졌다.
메리도 나를 침대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눈썰미가 좋아서 내가 입 모양을 천천히 하지 않아도 원하는 걸 금세 눈치챘다.
‘응.’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는 다시 쫓겨났다. 페델리우스가 일을 하라며 쫓아 보낸 것이다. 다리에 매달려있던 메리도 주인인 페델리우스의 말을 거부하진 못했다.
“그럼 당장 내일이라도 떠나시겠습니까?”
“외람된 말씀이오나 주인님, 서류정리가 아직 덜 됐습니다.”
“……페드로, 여긴 어떻게 들어왔나?”
“문으로 들어오지 어떻게 들어오겠습니까? 저녁 식사 준비가 거의 다 되어가서 식사를 올려도 괜찮을지 여쭤보러 왔습니다.”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서있는 페드로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특히나 방에 갇힌 뒤로는 코빼기도 보질 못했다. 페드로가 옅게 웃으며 내게 시선을 돌린다.
“안녕하십니까, 황녀 전하.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응, 안녕! 페드로.’
입을 뻐끔거리니 페드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인사 감사합니다.”
자세히 본 것 같지도 않은데 페드로는 내 입 모양을 금세 읽었다.
메리도 처음에는 조금 고생했었는데 말이다. 조금 놀란 눈으로 보고 있으니 페드로가 한층 더 부드럽게 웃는다.
“페드로, 내가 기척 죽이고 다니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죄송합니다. 버릇이 되어버려서.”
페드로가 깊게 허리를 숙였다. 팔짱을 낀 페델리우스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온천에 가실 예정이시라면 앞으로 나흘 정도는 서류에 파묻혀 계셔야 합니다. 물론 저희에게도 그 정도 준비 기간은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페드로가 짙은 웃음을 흘렸다.
페델리우스가 말이 없다.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꼬리를 휘며 웃고 있던 페드로가 느릿하게 눈을 뜬다. 가늘어진 눈동자가 질책을 담고 있다.
“설마, 내일 당장 가신다고 해서 준비가 다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리라고 믿습니다.”
푹, 누군가의 마음에 비수가 꽂히는 소리가 났다.
“주인님께서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시진 않겠지요.”
푹푹, 이번엔 두 번 꽂혔다.
“무려 황실 기사단장까지 맡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까.”
푹푹푹, 쉴 새 없이 날카로운 비수가 꽂힌다.
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깊이 박히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페델리우스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기가 무섭다.
“황녀 전하의 약도 추가로 더 조제해야 하고, 아무리 주인님께서 안전하게 돌보고 계시다고 하더라도 언제 위험에 처하실지 모르니 호위할 사병들도 정해야지요. 준비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설마 그러실 일은 없으시겠죠.”
콰직, 이번엔 뭔가가 부서졌다. 비수가 꽂히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페드로는 여전히 페델리우스를 바라본 채 웃고 있다.
‘앞으로 페드로의 말은 잘 들어야겠어.’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했다.
페델리우스보다 더 강한 사람이 이 집안에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같은 집에 있으면서 얼굴을 보기도 힘들던 페드로일 줄은 더욱 몰랐다.
“소규모로 갔다 올 예정이었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시면 어쩌려고 하십니까? 듣자 하니 일이 터진 것 같던데.”
페드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돌린다.
“게다가 황녀 전하께서는 병이 아직 낫지 않으셨습니다. 가는 길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어느 정도 치유된 후에 가는 게 좋습니다.”
“아플 때 가야 얼른 낫지 않는가?”
“그러다 더 아파지시면 다시 돌아오실 겁니까? 그러시면 아주 즐거운 여행이 될 것도 같습니다.”
페드로가 이제 거리낌 없이 페델리우스를 질책했다. 질책보다는 비꼼에 가깝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리진 않는다. 내가 가다가 더 아플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근데 내가 무슨 물에 담그면 찢어지는 종이도 아니고.’
가만 보면 나도 심심하면 몸이 아픈 것 같다. 페델리우스에게 말이 없자 페드로가 다시 입을 연다.
“지키고 싶으시면 귀찮더라도 조금 더 신중해지십시오. 제 한 몸 보호할 수 있는 주인님과는 달리 황녀 전하께서는 평범한 민간인보다 더 약하신 분입니다.”
페드로의 말에 페델리우스가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사실은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아콰만 있다면 나도 내 한 몸 지키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라도 걱정을 덜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것도 안다. 속았다는 걸 알게 되면 이 따뜻하고 행복한 관계는 끝을 맞이한다.
“그래서 준비는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입니다. 솔직히 일주일도 빠듯할 것 같습니다.”
“……일주일 뒤에 출발하도록 하겠다.”
“사려 깊은 결정 감사드립니다. 그럼 식사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페드로가 경쾌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뒤를 돌아 방을 나갔다.
페델리우스는 어쩐지 탈곡기로 탈탈 털린 밀 같은 표정이다. 그답지 않게 흐느적거리는 몸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다.
팔을 뻗어 페델리우스의 옷깃을 잡았다. 느릿하게 잡아당겼다.
“예, 황녀 전하.”
‘괜찮아?’
“네, 페드로는 충직합니다. 나쁜 의도도 없다는 걸 알죠. 다만 한 번씩 저렇게 배배 꽈서 혼을 내곤 합니다.”
‘페데리가 주인님인데 혼나?’
페델리우스가 달싹이는 내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더니 작게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주억인다.
그가 볼을 긁적이며 내 앞에 몸을 숙인다.
“옆에 앉아도 괜찮겠습니까?”
‘응!’
허락을 받은 페델리우스가 내 옆에 앉는다.
“잘못하면 혼이 나는 건 맞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던 겁니다. 여행은 다음 주에 가게 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감사합니다.”
페델리우스가 웃었다. 가만히 보다가 나도 마주 웃었다. 페델리우스가 손을 맞잡아온다. 깍지를 껴오는 손에 나도 힘을 줬다.
‘여행이라.’
누군가와 함께 가는 여행이라니 꿈도 꿔본 적이 없다.
언젠가 아콰와 둘이서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했을 뿐이다. 어깨에 앉은 아콰와 발길 닿는 곳으로 떠나는 거다. 다리가 아프면 어디든 쉬어가고, 아콰와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는 거다.
좁은 다락방 안에서 그런 꿈을 꾼 적은 있다.
“페데리야.”
목소리가 잔뜩 잠긴 채 나왔다. 다급히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갑작스럽게 낸 소리에 나보다 페델리우스가 더 놀란 듯했다.
“황녀 전하, 아직 말을 하시면…….”
“얼른 가고 싶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내 말에 페델리우스의 입이 텁 닫혔다.
그는 나를 혼내지도 않았고, 어떤 말을 덧붙이지도 않았다. 그저 한참 만에 입을 열어,
“저도 그렇습니다.”
억눌린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