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99)

다락방 황녀님 3권

눈을 뜨니 마차가 멈춰있었다.

“깨어나셨습니까?”

“으응……. 어디야?”

“아직 길입니다. 잠깐 쉬고 다시 출발할 겁니다. 오늘 저녁에는 도착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속은 괜찮으십니까?”

“응.”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오는 내내 잠만 잤으니 속이 울렁거리는 걸 느낄 시간도 없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일이다. 이상하게 푹 잠이 들었다.

“밥은 드실 수 있겠습니까?”

페델리우스가 밥 먹는 시늉을 해 보이며 물었다.

잠의 여파인지 대답하기가 싫어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아직 눈앞이 흐릿하고 정신이 몽롱하다.

‘몸이 아직 덜 나았나?’

요 일주일간 자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 아마도 몸이 아파서 잠이 많아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눈 뜨면 훌쩍 지나간 시간이 아쉽기도 했다.

“그럼 일단 식사부터 준비하겠습니다. 밖으로 나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여기 계시면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나갈래.”

마차 안의 공기가 텁텁하다. 따뜻하긴 한데 그것 때문에 더 정신이 들지 않는 듯했다. 내 말에 페델리우스가 군말 없이 마차 문을 열었다.

시원한 공기가 순식간에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페델리우스가 먼저 내려가 내 어깨 사이를 붙잡고 나를 들어 내렸다.

덜렁 들어 올려지는 몸이 이제는 민망하다.

마차 밖은 이미 고소한 냄새로 가득했다. 들짐승이 몰려들지 않을까 걱정까지 될 정도다.

“엇, 나오셨습니까? 각하. 오, 그쪽이…….”

“황녀 전하시다.”

“와, 처음 뵙습니다. 맨날 조리장에 처박혀 살다 보니까 얼굴을 뵙지 못했네요. 저 루덴이라고 합니다. 요리사를 하고 있죠.”

멍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거친 말투가 인상적이다.

그는 한 손엔 무쇠로 된 프라이팬을 쥐고 있었다. 한창 달궈졌는지 팬에서 나는 열기가 강하다. 기름이 지글지글 끓고 있다.

단정하게 생긴 루덴은 통통 튀는 노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

같은 색의 눈동자가 장난기로 번들거린다.

기억 저편에서 페델리우스가 그려줬던 그림이 떠올랐다. 요리사 복장을 하고 있던, 짓궂은 웃음이 인상 깊은 남자였다.

“안녕.”

생각을 끝내고 한참 만에 그의 인사를 받았다.

“오오, 말을 할 줄 아시네요? 이야, 문제가 있다기에 대화도 어려운 줄 알았는데.”

“루덴.”

페델리우스가 그를 불렀다. 루덴이 아차 싶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인다.

“죄송해요. 제가 좀 흥분하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말이 튀어나와서.”

“응.”

상관없다. 악의가 있는 말도 아니고, 내 연기 때문에 오해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사과하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매일 하시는 식사는 입맛에 맞나요? 맨날 신경 써서 요리하곤 있는데 정작 전하의 의견을 들어본 적이 없네요.”

‘전하…….’

그러고 보니 페델리우스도 각하라고 부른다. 별로 내키지 않는 별칭이다.

페델리우스가 황녀 전하라고 부르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오시리아야.”

“네?”

“오시리아야. 이름.”

“아하. 하긴 전하는 어감이 좀 별로네요. 그럼 오시리아 님으로. 아, 이름이 기네요. 시리 님으로 해요. 시리 님, 식사는 괜찮으세요?”

그의 입술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재잘거리는 목소리에 기가 질릴 것 같다. 잠이 확 달아났다.

말똥거리는 눈으로 루덴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야호! 기쁘네요, 감사해요. 점심은 밖에서 먹어야 해서 많은 건 못 했어요. 수프랑, 간단히 고기를 구워봤는데 어때요?”

“좋아.”

“제가 특별히 고기를 잘라서 가져다 드릴게요. 아무 데나 앉아 계세요.”

루덴이 정말 아무 곳이나 가리켰다. 있는 거라곤 허허벌판 위의 흙바닥뿐이다. 주저앉는 건 문제가 안 되는데, 옷이 더러워질까 봐 걱정이다

.

“흐흥~”

루덴이 노래를 부르며 요리 삼매경에 빠졌다. 페델리우스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페데리야?”

“네. 이쪽에 천을 깔아두었으니 이쪽으로 오십시오.”

“응.”

페델리우스를 따라가니 메리가 자리를 펴놓고 앉아있다. 무릎을 꿇은 모습이 상당히 불편해 보인다.

“황녀님!”

“안녕, 메리.”

“네! 메리가 자리 펴놓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응. 착해.”

손을 뻗어 머리를 톡톡 두드려주니 메리의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이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 종종 해줄 때가 있다. 메리가 헤실헤실 웃는다.

“몸은 괜찮으세요? 어디 아픈 덴 없으시고요?”

“잠잤어.”

정말 오는 내내 잠만 잤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페델리우스가 내 옆에 자리 잡았다.

‘응?’

맞은편에 사람이 앉아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은 허벅지에 올린 채다.

옆에는 커다란 가위가 놓여있었다. 보통 가위보다 날이 길고 손잡이는 더 길어서 봉처럼 보인다.

일반적인 가위가 날이 더 길다면 이건 봉이 훨씬 길었다. 사람의 팔만큼이나 길다.

“아.”

페델리우스가 내 시선을 눈치챈 모양이다.

“그녀는 정원사인 실비아입니다.”

햇빛에 반사되어 잘게 부서지는 은빛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있다. 아름다운 외모에 순간 넋을 잃을 뻔했다. 새하얀 피부와 얼음을 닮은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주인께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나는 당신을 주인마님이라고 부르면 되나?”

“……응?”

선홍빛 입술이 달싹거리는 건 보았는데,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연기하다가 정말 바보가 됐나?’

순간 그런 고민도 해버렸다. 내 머리가 나빠서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닐까 싶다. 한참을 말없이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은 실비아를 바라봤다.

“실비아, 그녀는 내가 모시는 황녀 전하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를 가르는 붉은 실이 보이오, 주인. 어차피 나중에 부르게 될 거라면 그냥 처음부터 부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소.”

“……일전에 말했다시피 독특한 사람입니다. 황녀 전하.”

페델리우스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더 정정하지 않는 것을 보니 꽤 당한 게 많은 모양이다. 정말 독특하고 이상한 사람이다.

“특이하게 생겼어.”

외모와 말투, 분위기가 모두 낯설다. 이국적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법했다.

“실비아는 저 멀리 동대륙에서 넘어왔습니다. 이쪽 대륙과는 거의 교류도 없고 알려진 것도 없는 곳이죠. 그저 존재한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너무 멀어서 항해하다가 사고가 나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음. 갔다가 돌아오는 경우도 거의 없지. 항해 기간만 일 년 가까이 걸린다. 항로가 확실하지 않아서 헤매는 경우도 많지.”

“일 년?”

“나도 죽을 뻔했다. 원정 나온 주인께 거둬지지 않았으면 분명 어딘가에서 해골만 발견됐겠지.”

“괜찮아?”

나는 가다가 속만 게워내다가 바짝 말라서 죽을 게 분명했다. 배도, 마차도 정말 싫다.

오늘은 그나마 자면서 왔으니 멀쩡했지만, 일 년의 항해라니. 생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지금은 괜찮다.”

“동대는 어떤 곳이야?”

“주인마님. 동대가 아니라 동대륙이네.”

내 물음에 실비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숙인다. 그리곤 내 단어를 정정하더니 생각에 잠겼다.

말투가 정말 특이하다. 허리를 곧게 편 모습이 한 점 흐트러짐이 없다. 대단하다고 손뼉을 쳐주고 싶을 지경이다.

그녀의 얇은 입술을 다시 달싹였다.

“동대륙엔 정령이 아주 많아. 그리고 평화롭고, 여기보단 문명이 뒤떨어졌지. 이곳에는 정령이란 게 신화 속 존재라고 해서 아주 놀랐던 기억이 있지. 실제로 정령은 보지 못했네.”

“정령?”

“그래, 정령. 주인마님은 정령을 본 적 있는가? 그들은 아주 작고 귀엽다네. 그리고 성인 남성만큼 커다란 정령도 있지. 자연에는 반드시 정령이 깃들어있다네.”

아콰 말고도 다른 정령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다. 물론 아콰가 있으니까 있기야 하겠지만…….

“어쨌든, 다시 돌아가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네.”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별생각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초에 일 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상상하기를 멈춰버렸다.

“사실 이곳 서대륙도 재밌긴 해서 문제는 없다네. 그러고 보니 주인마님에게서는 친숙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아.”

‘…….’

“마치 정령을 닮았네. 굳이 따지면, 음……. 그래. 물의 정령과 기운이 아주 닮았어.”

눈동자가 크기를 키웠다. 감이 예민한 것인지 그녀의 말은 매섭도록 날카로웠다. 분명 외모만 특이한 사람은 아니었다.

“물은 자유자재로 어디든 스며들 수 있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지. 쉽게 무너지지도, 더럽혀지지도 않아. 물의 기운을 지닌 사람은 대개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있어.”

“으응…….”

“나는 주인마님과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군.”

실비아가 무뚝뚝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내가 너랑 못 친해질 것 같아…….’

꿀꺽. 뒷말은 삼켰다.

게다가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등줄기가 오싹해질 정도로 소름이 돋는다. 그녀의 미소는 꿈에 나타날까 봐 무서운 미소였다.

“실비아, 그쯤 해둬라. 황녀 전하가 피곤해하지 않나.”

“아, 실례했소. 소문으로만 듣던 주인마님을 직접 만나 뵈어 영광이오.”

실비아가 손을 뻗었다. 악수하자는 모양새다. 오른손을 내밀면 아콰의 존재를 눈치챌까 두려워 왼손을 뻗었다.

“……응. 잘, 부탁해.”

실비아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쪽 손을 들어 악수했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게만 생긴 사람인데 손은 거칠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있습니까? 식사 다 됐어요.”

루덴이 접시를 가져와 하나둘씩 내려놨다. 음식을 가운데 두고 모두가 둥글게 둘러앉았다. 멍하니 그것을 보다가 작게 웃었다.

‘예전에 아콰가 말했던 소풍을 온 것 같아.’

언젠가 물거울을 통해 봤던 가족끼리의 소풍은 즐거워 보였다. 그래서 언젠가 아콰에게 둘이서 같이 가자고 했던 기억이 난다.

“잘 먹게씁니다!”

그걸, 다른 누군가와 즐기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아, 시리 님! 시리 님 건 이거! 제가 하나하나 예쁘게 썰어왔어요. 포크로 찍어 드시기만 하면 됩니다.”

“루, 루덴! 시리 님이 뭐예요? 시리 님이!”

“아, 시리 님께 허락받았어. 뭐야, 메리 너 부럽구나?”

“황녀니임…….”

메리가 울먹이며 내 팔에 매달렸다. 곤란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정도 되는 사람이 모이니 역시 왁자지껄하군요. 음료를 내어왔습니다.”

페드로까지 전부 모였다. 정말 정신없긴 하다. 페델리우스가 음료를 내 앞에 놓아줬다. 새콤달콤한 냄새가 풍기는 오렌지 주스다.

“저것들은 그냥 두시고 식사하십시오, 황녀 전하.”

“응.”

포크를 들어 고기를 푹 찍었다. 살코기가 가득한 고기는 입 안 가득 육즙을 터뜨렸다.

“……그런데, 내 거엔 왜 비계뿐인 것 같지? 루덴 공.”

실비아가 제 접시에 쌓인 비계의 산을 보며 물었다. 그녀의 옆에 놓인 이상하게 생긴 가위가 반짝거렸다.

“그야 뭐, 시리 님께 살코기를 몰아주고 나니까 남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겠죠?”

루덴이 살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만 비계인 이유를 설명해보라는 말일세.”

실비아가 표정을 불쾌하게 물들인 채 말했다. 그녀의 눈이 다른 사람들의 접시를 훑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확실히.’

나처럼 살코기만 가득한 사람은 없지만, 대개 그 비율이 반반이었다.

하지만 실비아의 접시만 유독 새하얗다. 그녀는 비계가 담긴 접시를 통째로 갈아버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루덴이 갑작스럽게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돌렸다.

포크를 들고 내 접시에 담긴 고기를 푹 찍었다. 그리고 실비아의 접시로 두세 개 옮겨줬다. 실비아가 나를 멀뚱히 쳐다본다.

“줄게, 먹어.”

“주인마님은 착하시군. 절대 저런 망나니같이 뇌도 없는 어른이 되어서는 안 되네. 저건 사회의 악일세.”

실비아가 손가락도 아니고 포크로 루덴을 가리켰다. 차분해 보이던 눈에 경멸이 섞여있다.

루덴은 익숙하다는 듯 짓궂게 웃으며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황녀 전하 좀 그만들 괴롭혀라. 식사 끝날 때까지 아무도 말 걸지 말도록.”

“맞아요! 메리랑만 얘기해요, 황녀님!”

“너도 예외 없다.”

“헙, 너무해요…….”

왁자지껄 시끄러운 가운데 멀쩡한 것은 페드로뿐이다. 페드로만이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있다. 마치 저기만 다른 세상인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포크를 들고, 고기를 입에 넣었다.

적당히 식은 고기가 입에서 살살 녹아내린다. 불향이 확 느껴져서 한층 더 맛있었다.

“마이쪄.”

포크를 입에 문 채 오물오물 먹으며 말했다. 식사하던 시선이 모두 내게 몰렸다. 눈을 깜빡이자 그제야 다들 식사를 다시 시작한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황녀 전하.”

“응!”

“얼마나 더 가?”

“저녁 전에는 도착할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걱정은 하지 않는데 중간에 가다가 잠에서 깰까 봐 그렇지.

많이 먹고 또 잘 생각을 했다. 마차를 이기는 방법은 잠이라는 걸 새삼 깨달은 탓이다.

“아, 그래도 시리 님 덕분에 이렇게 여행도 와보고 행복하네요.”

“주인마님께서 아파서 가는 여행을 행복하다고 표현하는 게 어딨는가!”

“그러는 실비아 님도 바리바리 짐 싸 들고 온 거 압니다. 짐마차의 반이 실비아 님의 짐인 것 같던데.”

루덴이 높아진 목소리 톤으로 연기하듯 말했다. 놀리는 것이 뻔한 목소리에 실비아의 관자놀이가 불룩 튀어나왔다. 힘줄이 솟아났다.

“내 짐은 아주 적네! 간단히 챙겼단 말일세!”

“아, 그 커다란 보따리 두 개가 실비아 씨 거였군요.”

메리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실비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짐을 적게 챙겨온 건 아니었구나. 루덴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뭐야, 뭐야~ 역시 실비아 님 아닌 척하면서도 기대 많이 하셨네요.”

왁자지껄 떠드는 동안에도 음식은 사라지고 있다. 나도 열심히 포크를 움직였다.

이렇게 떠들썩한 식사자리는 처음이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다.

투닥거리면서도 서로에게 악의는 없다. 악의 없는 다툼이 있다는 것은 평생 처음 알게 됐다.

이런 식으로 다투면서도 서로 미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꺼져라, 루덴 공.”

실비아가 비곗덩어리를 찍어 먹으면서 으르렁거렸다. 버릴 줄 알았더니 의외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나를 쳐다봤다.

“할 말이라도 있나? 주인마님.”

주인마님 아니라니까…….

페델리우스는 아예 한숨 쉬는 것조차 그만둔 모양이다. 그저 내 주스 잔이 비면 채워주고, 포크에 고기가 비면 꽂아주기 바쁘다.

“그거 먹어?”

“음식은 남기면 벌을 받습니다. 죽으면 천상계에 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의외로 그런 종류의 미신을 믿는 타입이었구나.’

어정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느끼하기만 한 기름 덩어리를 얼굴 구겨가면서 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식재료가 요리사를 잘못 만났을 뿐이에요. 어쩌다 저런 되먹지도 못한 인간에게 주어져서는…….”

쯧, 실비아가 혀를 찬다. 일그러진 표정 위로 경멸이 다시 떠올랐다. 루덴은 익숙하다는 듯 여전히 생글거리며 먹기 바쁘다.

순간, 코끝에 비 냄새가 느껴졌다.

공기가 바뀌었다. 하늘은 여전히 새파랗지만, 곧 비가 올 것 같다. 느릿하게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깜빡였다.

“황녀 전하? 어디 불편하십니까?”

“비.”

“예?”

“비가 올 거 같아.”

하늘이 울고 있다. 저 멀리서부터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평소라면 알 수 없었을 것이 지금은 이상하게도 예민하게 느껴졌다.

피부가 긴장하고, 한결 날카로워진 후각이 예리하게 비 냄새를 잡아냈다.

‘이상해.’

이런 느낌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비가 내릴 거란 말씀입니까?”

“응.”

내 말을 들은 페델리우스가 하늘을 쳐다본다. 그리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비가 온다기에는 매우 새파란 하늘이다. 하늘을 보던 고개를 내렸다.

‘응?’

모두가 하늘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다. 목을 뒤로 한껏 젖힌 모습이다. 모두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무도 내 말을 헛소리라고 무시하지 않았다. 그 사실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 슬슬 식사도 다 했으니 정리하고 출발하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몸을 일으켰다.

“으아, 또다시 마차행이구나. 시리 님은 좋겠다, 마차 넓죠?”

“메리는 황녀님이랑 가고 싶어요, 흐엉.”

“다들 그만 떠들고 정리부터 하시죠.”

아무도 군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비아도 가위를 챙겨 일어난다. 주저앉아있는 것은 나뿐이었다.

그 행동에 내 눈이 절로 커졌다.

“가?”

“네, 황녀 전하께서 비가 올 것 같다고 하셨으니 이만 출발할까 합니다.”

“……그걸 믿어?”

상식적으로 먹구름이 낀 것도 아닌 하늘을 보고 비가 올 거라고 하는 사람이 더 이상한 거다. 말은 했지만, 믿어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페델리우스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비가 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응.”

“제게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아니…….”

고개를 저었다. 페델리우스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호를 그린다. 그가 몸을 굽혀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예, 그러면 제가 제대로 된 길에 발을 디딘 게 맞습니다. 저는 당신을 믿는 겁니다. 황녀 전하.”

페델리우스의 묵묵한 한마디에 숨이 멎었다.

가슴 한쪽이 콱 틀어막힌 것 같다. 숨이 안 쉬어져서 호흡을 깊게 하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흩어지는 내 숨결에 페델리우스가 옅은 웃음을 그렸다. 말없이 그를 보며 마주 웃었다. 페델리우스가 웃어주는 건 좋다.

“우와! 각하께서 웃으셨어. 이런 건 영구 소장해야 하는데!”

“아, 루덴 씨는 처음 보시겠네요. 주인님은 황녀님 앞에선 잘 웃으세요.”

“호오, 주인마님께서도 웃는군.”

“주인님께서 웃으시면 황녀님도 항상 마주 웃어주시거든요.”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 들린다고! 저런 얼굴 붉어질 법한 소리는 안 들리는 곳에서 해줬으면 좋겠다.

“먼저 마차에 돌아가 계십시오. 정리하는 것만 보고 들어가겠습니다.”

“응.”

페델리우스가 나를 마차 앞까지 데려다줬다. 그리곤 아까와 마찬가지로 나를 덜렁 들어 마차에 올려줬다. 몇 번을 당해도 덜렁거리는 이건 익숙해지질 않았다.

마차에 앉았다. 다행히 출발하지 않은 마차는 멀미를 유발하지 않는다.

<예, 그러면 제가 제대로 된 길에 발을 디딘 게 맞습니다. 저는 당신을 믿는 겁니다. 황녀 전하.>

머릿속을 맴도는 목소리가 다정하다. 분명히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악의는 없으니 무시당해도 괜찮을 터였다.

조금 실망했겠지만, 그렇다고 페델리우스가 밉거나 싫진 않았을 거다.

그는 내게 물의 정령인 아콰가 붙어있다는 걸 모른다. 그 여파인지 이상하게도 물과 친한 나 역시 페델리우스는 모른다.

그런데도 내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해온 거짓말들도 그는 다 믿었다.

‘미안해.’

그건 아주 큰 거짓말이라 아마 들키지 않는 한 평생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너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깨어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이것은 이기적이고 욕심 가득한 욕망이다.

달칵, 문이 열렸다. 어둡던 마차 안에 순식간에 새 공기가 유입됐다.

숨쉬기가 편안해졌다. 페델리우스가 마차 안으로 올라왔다.

“뭘 하고 계셨습니까?”

“아무것도.”

“옆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응. 누울래.”

“예, 알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마차 문을 닫고 내 옆에 앉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숙여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페데리야.”

“예, 황녀 전하.”

“이름 불러줘.”

일전에 그가 이름을 불러줬을 때 느꼈던 감각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뱃속이 간질간질하고 몽글몽글하면서 속이 더부룩할 정도로 뭔가가 가득 찼던 그때.

페델리우스는 말이 없다. 가만히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자 그의 입술이 느릿하게 벌어졌다.

“오시리아.”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렸다. 낮고, 올바른 발음이다. 페델리우스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자, 그가 내 손에 깍지를 껴왔다.

“한 번 더.”

“오시리아.”

“응.”

여전히 기분 좋은 감각이다. 속이 간지러울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였다. 덜그럭거리며 마차가 출발했다.

그의 손을 꽉 붙들고 눈을 감았다.

문득 머리 위로 손길이 느껴졌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굳은살 박인 손은 부드러웠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이 행복한 시간에, 언제까지고 갇히면 얼마나 좋을까.

출발하는 마차가 무섭지 않다. 움직이는 마차는 멀미를 일으키는 무서운 것이었다.

하지만 페델리우스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도 멀쩡하다.

지금도 잠을 자지 않는데도 토할 것 같진 않다. 물론 속이 울렁거리는 것까진 어쩔 수 없겠지만.

“페델리우스.”

보답하듯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느릿하게 눈을 뜨자 페델리우스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석상처럼 굳어진 몸이 뻣뻣하다.

“……예.”

그가 뒤늦게 대답했다. 나는 말없이 웃었다. 손을 뻗어 그의 볼에 가져다 댔다.

“미안해.”

나중에는 하지 못할 테니까, 미리 해두기로 했다. 솔직히 밝히고 싶은 마음은 없다. 만약 할 수 있다면, 나는 페델리우스에게 끝까지 이 비밀을 숨길 거다.

그러니까,

“정말 미안해.”

이게 내가 페델리우스에게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사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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