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까무룩 잠이 들었다. 멀미가 무서운 건지 마차에 타기만 하면 잠이 온다. 다시 눈을 뜨니 푹신푹신한 침대 위였다.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일어나셨습니까? 황녀 전하.”
“으응…. 어디야?”
“별장입니다. 오랫동안 오지 않았는데, 페드로가 미리 이야기해놓은 덕분에 당장 사용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깨끗합니다.”
페델리우스가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는 내 허리에 손을 얹었다. 단단한 팔이 내가 넘어지도록 받쳐준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앉았다.
투둑, 투둑, 투둑.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비와?”
“네. 마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응.”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아직 잠에 가라앉은 정신이 퍽 무겁다.
“황녀 전하.”
“응?”
“한 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물어?”
왕, 하고 깨무는 모양새를 해 보이자 페델리우스가 작게 웃는다. 무거웠던 공기가 한층 가벼워졌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질문입니다.”
“응.”
“비가 올 거라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페델리우스의 손가락이 비가 내리는 창밖을 가리킨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쓰게 웃었다. 마땅히 설명할 수 없다. 그날 이후 감각이 예민해진 건 알겠다.
“그냥.”
“그냥입니까?”
“응, 그냥. 잘 몰라.”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모른다. 아콰와 이야기를 해야 뭔가 알게 될 것 같은데 혼자만의 시간이 없다.
어느 정도 말을 하게 됐는데도 달라지는 게 없다.
‘평생 이러는 건 아니겠지?’
물론, 평생 여기에 있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날씨가 이러니 오늘은 방에서 하는 목욕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괜히 나갔다가 감기에 걸릴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응.”
“식사는 여기서 하시겠습니까?”
“응, 페데리가 갖다 줘.”
마침 좋은 기회다. 페델리우스가 별 의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긴 페데리우스가 방을 나갔다.
다급히 손등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아콰.”
<…….>
“아콰! 있어? 대답 좀 해봐.”
목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이불을 뒤집어쓴 채 큰 목소리로 아콰를 불렀다.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번 부르려고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손등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왔다.
“아콰?”
<주인……님……?>
희미하지만 분명 아콰의 목소리다. 아직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도 너무 반가워서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거렸다.
뒤늦게야 입을 열어, “응응.” 하고 대답을 덧붙였다.
<주인님!>
아콰가 빛을 뿜으며 손등에서 튕기듯 나왔다. 다급히 뒤집어쓴 이불을 벗었다. 허공에 푸른 빛을 뿜는 어린아이가 둥둥 떠 있다.
너무 오랜만이라 반갑다.
“아콰! 그동안 왜 대답이 없었어?”
<아! 성장통이었나 봐요. 몸이 축 늘어지고 무겁고, 뜨거워서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종종 주인님이 불렀던 건 기억이 난답니다.>
“아, 나도 그랬어. 내가 아파서 난 너도 아픈 줄 알았어.”
아콰에게 설명하자 아콰가 고개를 기울인다. 아콰의 눈빛이 의아하게 물든다.
<아마 반대가 아닐까요? 주인님!>
“반대?”
<네! 제가 성장통을 겪는 바람에 주인님께도 여파가 간 것 같답니다. 많이 아프셨나요? 죄송해요…….>
축 처진 목소리에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프긴 했지만, 괴롭지는 않았다.
일주일 내내 거의 잠만 잤고, 눈을 뜰 때마다 메리나 페델리우스가 곁에 있었다.
“아니, 괜찮았어.”
줄곧 아픈 건 싫기만 했다. 다락방에 있을 땐 조금만 아파도 울고 싶었기 때문이다. 울고 싶었다. 평소보다 더 눈물이 많아져서 익숙한 시종들의 냉대조차 서럽곤 했다.
“오히려 한 번 더 아프고 싶던걸?”
눈을 뜰 때마다 온기가 옆에 있었다. 멍한 정신 속에도 머리를 쓰다듬던 부드러운 손길도 있었다.
침대는 딱딱하지 않았고, 음식은 차갑지 않았으며, 눈을 뜰 때마다 몸이 나아가는 것을 느꼈다.
<안 돼요! 아프지 마세요, 주인님.>
“응,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네가 나오질 않아서 너무 놀랐어.”
<지금도 몸이 안 좋으신가요?>
“음……. 아니, 많이 괜찮아진 것 같아.”
고개를 젓자 아콰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툭 튀어나온 입술이 훨씬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콰가 뽈뽈거리며 날아오더니 내 다리에 앉는다. 여전히 무겁진 않다.
<능력이 훨씬 더 강해졌답니다. 이제 주인님께서 아프시면 언제든 낫게 해드릴 수 있어요.>
“치료가 가능해?”
<당연하죠! 인간의 몸이란 자고로 물이 한가득 담겨 있답니다. 피에도 물이 섞여있죠. 나쁜 병균은 제가 골라낼 수 있어요!>
아콰가 내 목을 끌어안은 채 말했다. 졸졸졸 흘러가는 물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손을 뻗어 아콰의 머리카락처럼 보이는 것을 쓰다듬었다.
‘물 같아.’
만지면 털실처럼 부드러울 것 같았던 머리카락의 촉감은 차갑고 미끈거린다. 생각했던 촉감과 달라서 기분이 묘하다.
“근데 왜 갑자기 성장을 한 거야?”
<일전에 자르딘의 왕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주인님께서 성장하는 만큼 정령도 성장한답니다. 그때 주인님께서 성장하신 게 아닐까요?>
품에 안긴 아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어쨌든 이곳에 있는 동안은 꼼짝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제국의 수도에 가봐야겠어.’
아콰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소문이 빨리 퍼졌다. 뭣보다 그런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황제 솔루스가 그림자 기사단을 보냈다. 황제는 웬만해선 그림자 기사단을 움직이지 않는다.
‘단순한 소문에 제 검과 방패를 보낸 건가?’
그렇게까지 멍청하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면, 확신이 있는 건가?
‘괜히 죽였나……?’
죽여달라고 했던 남자를 어떻게든 협박해야 했던 걸까? 황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보고를 하라고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당장 눈앞의 생각에 너무 사로잡혀있었다.
‘이런 머리 쓰는 일은 나랑 안 맞는다니까.’
아콰의 작디작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정리되지 않은 일들만 가득 쌓여있다. 상담을 나누고, 적절한 조언을 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콰.”
<네, 주인님.>
“난, 지금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게 맞을까?”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냥, 역시 혼자 하긴 뭔가 버거워서.”
모든 걸 혼자 해야 하니 당장 한 치 앞도 보이질 않는다. 나는 페델리우스의 눈치를 봐야 해서 움직이기도 쉽지 않다. 이래서야 언제 원하는 걸 이루겠나 싶다.
“아콰.”
<네, 주인님.>
“해일 같은 게 나라 하나를 쓸어버릴 수도 있을까?”
<음. 자르딘 왕국은 사방이 물로 가득해서 가능할 것 같아요. 하지만, 주인님께서 트럼프 제국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마 어려울 거예요.>
“그래?”
<하지만, 제가 지금보다 조금 더 자라면, 주인님만큼 자라면 가능하게 될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콰가 내 실망한 기색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콰의 마음은 알겠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아콰가 성장할 수 있는지 도저히 감이 오질 않는다.
‘솔직히 어떤 말이 아콰를 성장시켰는지도 모르겠고.’
정령을 기르는 법 같은 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정해진 길이 있다면 거길 걸어가면 되겠지만, 그런 게 보이질 않았다.
“아콰도 쑥쑥 자라야 하는데. 못난 주인 만나서 고생이 많네.”
<네에에?!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콰가 좌우로 고개를 젓는다. 얼마나 흔들어대는지 목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다급히 아콰의 볼을 양손으로 조심히 붙잡았다.
<제가 주인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주인님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님만은 지켜줄 거예요.>
“알고 있어.”
<만약, 정말 필요하다면 저는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르딘의 왕에게 거역해도 좋아요.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콰가 힘껏 내 목을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작은 아이가 필사적으로 몸에 매달려있다.
다행히 페델리우스는 식사가 만들어지는 걸 기다리고 있는지 들어올 기미는 없다. 조금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아콰의 등을 토닥였다.
“아무래도 불안해. 뭔가, 너무 불안해.”
<우리 주인님께선 무엇이 불안한가요?>
“전부. 내 계획은 허술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해. 아콰, 네 힘을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자유롭다곤 해도…… 황제가 너무 빨리 그림자 기사단을 내보낸 게 껄끄러워.”
황제의 행보가 아무래도 의심스럽다.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을 정도다. 뭣보다 첩자들이 아무도 돌아가지 않았으니 또다시 그림자 기사단을 보낼 확률도 있다.
더 강하고, 더 위험한 사람이 올 확률도 높았다.
‘그림자 기사단에도 대장이 있었는데.’
매번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남자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얼마나 강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제조차도 그를 두려워했다. 그는 오로지 트럼프의 황실을 섬기는 황제의 개다.
가끔 물거울을 통해 훔쳐볼 때도 그는 언제나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새까만 로브를 깊게 눌러쓰기도 했다. 그는 황제의 앞에서조차 절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혼자가 불안하시면 주인님을 돌봐주시는 남자에게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떠세요? 그는 분명히 주인님을 지켜줄 거예요.>
“알아.”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줄 테니까요. 오랜 시간 지켜봤지만, 그는 깨끗하고 청렴한 인간이랍니다. 저도 마음에 들 것 같아요. 분명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님의 검과 방패가 될 거예요.>
아콰가 내게 조언했다.
아콰의 말은 틀리지 않다. 페델리우스는 반드시 나를 지켜줄 거다. 그 충직함을 보아 제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알아.”
<그럼…….>
“그래서 안 돼, 아콰. 나는 그가 죽길 바라지 않아. 내 이런 모습을 몰랐으면 좋겠어. 가능하다면 앞으로 평생 말이야.”
줄곧 생각만 했던 말을 아콰에게 내뱉었다. 페델리우스가 몰랐으면 좋겠다. 내가 손에 피를 묻힌 것도, 그를 줄곧 속였다는 것도.
“미안해, 아콰.”
<무엇이 말인가요?>
“너만큼이나 페델리우스가 소중해졌어.”
지켜줄 것이 늘어났다. 그를 지켜주기 위해선 내가 하는 일을 모르는 것이 낫다. 그게 아니라면 페델리우스는 반드시 내 앞을 가로막고 설 테니까.
<…….>
“평생 내 세계엔 우리 둘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를 끌어안은 채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요, 주인님.>
아콰가 내 등을 토닥인다.
<당신이 행복하다면, 언젠가 저를 잊어도 저는 웃고 있을 테니까요.>
아콰의 주변에서 들리던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순간 잔잔해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