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페데리는 낚시 안 해?”
“저는 그림 도구를 가져왔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옆에 펜과 종이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뜻밖에 페델리우스는 그림 그리는 것에 제법 성실했다. 어딜 가든지 간에 펜과 종이는 항상 그의 옆에 있다.
“황녀님! 낚싯대 여기 있어요!”
“응!”
“이걸 이렇게 하셔서 이렇게 힘껏 물로 던지면 됩니다.”
메리가 가진 낚싯대에 달린 바늘이 멀찍이 날아갔다. 짧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양손으로 낚싯대를 붙잡았다. 그대로 힘껏 낚싯대를 던졌다.
풍덩.
“…….”
“…….”
“…….”
침묵이 길게 흘렀다. 한결 가벼워진 손을 천천히 내려다본다. 낚싯대가 있어야 할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풍덩 소리가 난 호수를 쳐다보니 저 멀리 낚싯대가 둥둥 떠 있다.
손을 뻗어 잡기에도 어중간한 곳까지 날아갔다. 저걸 잡으려면 배를 타고 나가거나 수영을 하는 수밖에 없다.
‘능력을 쓰면 저런 거 가져오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지만.’
여기서 낚싯대를 위해 능력을 쓸 순 없는 노릇이다.
“하, 하나 더 가져올까요?!”
“…….”
우울하다. 설마 낚싯대를 붙잡고 있을 악력조차 없을 줄이야. 운동이라도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다.
생각에 잠긴 채 메리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돌연 페델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데리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가 호숫가로 걸어가더니 곧바로 물속으로 몸을 날렸다.
“주인님!”
“주인!”
풍덩, 물이 튀고 소리가 난 후에야 시야에 페델리우스가 눈에 잡혔다.
유유히 물살을 가른 페델리우스가 낚싯대를 손에 쥐고 다시 돌아 나왔다.
“같이 던져드리겠습니다.”
내게 낚싯대를 손에 쥐여 주며 페델리우스가 말했다. 축축한 물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졌다.
“응.”
손등에 포개지는 페델리우스의 손은 커다랗고, 단단했다.
팔딱팔딱, 몇 마리째인지 모를 물고기가 낚시찌를 물고 튕겨 올랐다.
코끝에 스치는 건 비린내뿐이다.
찰박찰박, 파닥파닥, 팔딱팔딱, 온갖 의태어로 표현 가능한 소리를 내며 물고기들이 튀어 올랐다.
‘우와, 대단해요!’라든가, ‘주인님! 황녀님께선 낚시의 재능이 있으신 건 아닐까요?’라든가, ‘물고기가 황녀님을 알아보나 봐요!’라는 말을 쉴 새 없이 내뱉던 메리도 지쳐 떨어져 나갔다.
‘물고기 양식장이나 만들 걸 그랬어.’
멍하니 생각하며 낚시찌를 저가 물겠다고 싸우는 물고기들을 쳐다봤다.
물의 사랑을 받는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제 목숨을 내놓겠다고 덤벼드는 물고기에 결국 낚싯대를 물속에서 빼냈다.
“페데리야.”
“예, 황녀 전하.”
“쟤들 미쳤어.”
불퉁한 표정으로 쌈박질하는 물고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앉아있는 쪽으로 수십 마리가 몰려든 탓에 이젠 낚시가 아니라 손으로 잡아도 될 정도다.
“미쳤……. 대체 그 말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응, 폐하.”
자연스럽게 그의 탓으로 돌렸다.
페델리우스는 폐하라는 이름에 약하다. 얼마나 약하냐면 내가 왕의 이름을 들먹이면 입에 풀을 붙인 것처럼 조용해진다.
일전에 받은 장난감에 대해 소소한 보복은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태엽 인형…….’
그걸로 뭘 하라고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페델리우스가 창고에 처박지 않았다면 내가 직접 연못에 던졌을 거다.
“뒤쪽 계곡에 갈래.”
낚싯대를 대충 바닥에 두고 몸을 돌렸다. 물고기 떼가 내게만 몰려들어 옆에 있으면서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실비아와 메리의 표정이 어둡다.
반쯤은 자리를 비켜준 거다.
“황녀 전하, 그쪽은 위험합니다!”
페델리우스가 계곡으로 뛰어가려는 날 붙잡았다.
정확히는 붙잡으려고 뻗어왔던 손이 허리를 감쌌다. 어깨에도 손목에도 닿지 못한 채 말이다.
“위험해?”
“예.”
대답이 단호하다. 게다가 망설임 없이 대답이 흘러나왔다. 메리랑 한 번 갔었는데 위험한 것은 없었다.
그가 나를 뒤쪽에서 끌어안은 채 바닥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뭐가 위험해?”
“물이요.”
“저것도 물이야.”
호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대답에 페델리우스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그가 고개를 젓는다.
“거기엔 보이지 않는 자질구레한 생물이 많습니다. 보이지도 않아서 몸에 들어가면 찾을 수도 없습니다.”
‘마치 호수에는 없다는 듯 말한다?’
같은 물인데 호수엔 없고 계곡에만 있을 리는 없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목까지 차오른 말을 발로 꾹꾹 눌러 밟았다.
싫다고 하는데 어쩔 수 없지. 다행히 온천이 있는 이곳 근처엔 숲도 있었다. 발걸음을 옆으로 돌렸다.
“그럼 숲에 갈게.”
“그쪽엔 위험천만한 벌레가 많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가려는 날 붙잡았다. 사실 붙잡았다기보단 여전히 허리를 끌어안은 채 놓아주질 않았다.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애써 모르는 척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음, 어떤 거?”
“모기라든가 벌이라든가 풍뎅이 같은 것 말입니다.”
“페데리야, 그럼 난 뭐 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물었다.
페델리우스가 그제야 내 허리를 놓았다. 품을 뒤적이던 페델리우스가 양손 가득 뭔가를 꺼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대로 종이와 연필을 챙겨왔습니다.”
그의 품에서 나온 것은 내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비싼 종이 한 뭉텅이와 연필 수 자루. 페델리우스는 그것들을 당당하게 내 앞에 내밀었다.
‘이건 대체 언제 챙겨온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빈손인 것처럼 보였는데.
내려다보는 눈에서 불이 쏟아졌으면 했다. 백날 노려봤지만, 아쉽게도 종이는 불타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페델리우스를 바라봤다. 그의 무뚝뚝한 얼굴 위로 뿌듯함이 엿보였다.
“안 해.”
세상에 있는 종이와 연필을 전부 없애든가 해야지!
“하지만…….”
“싫어, 이 바보야!”
힘껏 소리치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힘껏 내달렸다. 페델리우스를 뒤로한 채로.
“황녀 전하!”
내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잠깐 멍하니 서있던 페델리우스가 뒤늦게 나를 불렀다. 물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날 좀 혼자 둬보라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달린 지 일 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사태에 눈앞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다. 뒤쪽에서 들리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는 페델리우스의 것이 분명했다.
“아콰!”
숨이 찼다. 작은 목소리로 소년을 불렀다. 신의 문양이 옅은 빛을 발산했다.
<네, 주인님.>
목소리가 들렸다. 숨이 턱턱 차오르는 시점인데 뒤에선 발소리가 점점 커진다. 뒤돌아보기도 무섭다.
“황녀 전하! 멈추십시오!”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페델리우스에게서 이런 식으로 도망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되는 게 대체 뭐야?!
“빨리 달릴 수, 허억, 없을까?”
<빨리……, 날개를 달아드릴까요?>
“쟤한테 안 들키게!”
다리가 휘청거렸다. 이제는 뛰는 것도 걷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속도였다.
‘더는 안 돼.’
걸음이 멈추려는 순간, 몸이 앞으로 훅 하고 날아갔다.
“황녀 전……하?!”
페델리우스의 손이 볼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얼음 위에 미끄러지는 것처럼 한 번 걸을 때마다 풍경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바닥과 발에 얇은 물로 된 막을 깔아보았답니다. 마찰이 적어져서 빠르게 달릴 수 있어요!>
“응, 고마워. 근데 달린다기보단, 미끄러지는 것 같은데?”
<으음, 그런가요?>
아콰가 반문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옅은 빛을 뿌리던 문양이 환하게 빛났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아콰가 마치 요정처럼 하늘을 날아다녔다.
휙휙 지나가는 풍경이 놀라웠다.
평소라면 겪어볼 수 없는 속도감에 묘하게 심장이 두근거린다.
“아콰, 이거 재밌다.”
발을 앞으로 밀면 나무 두세 그루가 훅 옆을 스쳐 지나간다. 다리는 조금 아프지만, 아까처럼 숨이 턱까지 차오르지도 않았다.
<근데, 주인님.>
“응?”
<기분 나쁜 것들이 있어요.>
잔잔하던 물소리가 얼음이 되듯 쩌적 갈라 붙었다. 아콰의 목소리에 열심히 움직이던 다리를 멈췄다.
“기분 나쁜 것들?”
<네에, 살기 때문에 공기 중의 수분들이 진동하고 있어요.>
살기.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다. 여기까지 나를 쫓아왔다면 또 트럼프 제국 첩자들일 거다.
장난삼아 도망쳤는데,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든다.
‘위험하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페델리우스는 안전하게 있어줬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지금처럼 종종 잔소리를 해주면서.
‘괜찮아.’
한 번 찔러봤으니까, 두 번은 쉬울 거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자신을 스스로 달래는 말치곤 살벌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살을 파고들어, 손끝에 닿는 단단하지만 무른 뼈를 깨부수던 느낌이 여전히 생생했으니까.
“아콰, 일전에 만들어 줬던 검을 부탁해도 될까?”
<네, 주인님.>
푸른빛을 띤 물로 된 검을 손에 쥐었다. 내가 들 수 있을 정도로 가볍지만 날카롭고 단단한 검이다.
“내 목을 가지고 싶은 거야? 나오지 않으면 가져갈 수 없어.”
평정을 가장하며 애써 입술을 달싹였다. 콧속으로 파고드는 숲의 냄새에 이상하게도 비릿함이 섞여 있다.
그때의 기억이 다시 머릿속에서 깜빡이며 떠오르길 반복했다.
‘나는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누군가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는 일을 망설이지 않을 거예요.’
다름 아닌 내가 한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반드시 지킬 생각이었다.
“내가 그 암살자들을 죽인 지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된 것 같은데, 생각보다 엄청 빨리 왔네? 날개라도 달고 왔어?”
배 타고, 마차 타고 오는 시간을 생각하더라도 너무 빠르다. 쉬지 않고 빠르게 달렸더라도 이삼 주는 걸렸어야 정상이다.
‘생각할 수 있는 건 현지에서 용병을 고용한 건가?’
누구한테서?
이 왕국에 미리 와있던 제국 사람 중 한 명이겠지. 두뇌 회전이 빠르지 않은 나라도 그 정도 유추는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가능한 선택지가 몇 개 남아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내려와.”
내 말에 나무 위나 기둥 뒤에 숨어있던 검은 복장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섯 명이네.”
<여섯 명이에요, 주인님. 한 명이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았답니다.>
‘위쪽에 있는 게 대장이겠지.’
어쨌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가 가장 중요한 인물일 확률이 높다.
황제가 퍽 급한 모양이다. 다시 사람을 보내는 것도 기다리지 못했으니까.
“근데 너희가 내려와도 난 죽지 않을 거야. 괜히 너희 목숨만 벌레처럼 짓밟히는 거지.”
아콰가 위협적으로 거대한 물방울을 여러 개 만들어냈다. 언제나 장난기 넘치던 표정만 짓던 아콰의 표정이 굳어있다.
마치 짙은 분노를 느낀 것처럼.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던가?’
조금 놀랐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한 인간과 같은 표정이었다.
“그대가 정말 오시리아 황녀인가?”
목소리가 들린 곳은 나무 위였다. 역시나 내려오지 않은 쪽이 대장인 게 분명하다.
아래쪽은 고용된 용병일 확률이 높다.
“문제 있어?”
“백치 수준의 반병신이라고 들었는데……. 보고서랑 많이 다른 것 같아서 그렇다. 정신 개조라도 당한 건가?”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날 병신으로 만든 건 제국의 다락방에 가둬둔 덕분이고. 여기에 와서 머리도 트이고 눈도 트이고 세상도 트였는데, 무슨 문제라도?”
보이지 않는 자와 얘기하려니 허공에 대고 떠드는 것 같다. 마치 나 스스로가 미친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여튼, 제국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데 뭐가 있다니까.’
긴장감이 팽팽하다. 당겨진 실은 누구 한쪽이 균형을 잃으면 바로 달려들 정도로 위협적이다.
다행히 내 뒤에는 아콰가 있다. 아콰가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그 뒤에 있는 푸른 건?”
“나랑 질문과 답변 놀이라도 하자고 여기 온 거야?”
“손등에 있는 건 신의 문양이겠고.”
그새 예리한 시선이 손등까지 훑어본 모양이다. 굳이 대답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군주께 명령받은 것은 쓸데없는 소문의 근원이 되는 오시리아 황녀의 목숨을 끊으라는 명령이었다.”
“……너 심심하니? 근데 이쪽은 바쁘거든.”
페델리우스가 언제 쫓아올지 모르는데 하하호호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다.
“소문이 사실 소문이 아니었다는 결과를 예상하진 못해서 곤란하군.”
내 말은 전부 무시한 채 자기 할 말만 내뱉는다. 그에게서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런지 아래에 내려온 이들도 공격 의사가 없다.
휙, 무언가가 옆을 스쳐 지나갔다.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주 작고 빨랐으니까.
다만 그것이 지나가고 난 후, 쿵- 묵직한 소리를 내며 검은 복면을 쓴 다섯 명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입에서 피를 토한 채로.
“분란의 싹은 잘라버리십시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매일매일 들어 익숙한 것이 아니라 극히 최근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라는 것이다. 아콰가 내 앞을 지키듯 막아섰다.
“넌…….”
눈을 홉떴다. 죽였다고 생각한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아니, 분명히 죽였다. 칼을 박아 넣었고, 피로 바닥을 적시며 남자는 쓰러졌다. 몸이 식어가는 것까지 느꼈었다.
“어떻게 살아있어?”
긴 침묵 끝에 내가 물었다.
눈앞에 살아있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유령이 아니냐고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리는 멀쩡히 바닥을 딛고 있었다.
“마무리가 어설펐습니다. 당신의 검은 제 심장을 찌르지 못했어요. 기껏 힘만 주면 심장을 찌를 수 있게 위치까지 맞춰줬더니.”
목소리에 아쉬움이 가득 묻어났다.
제 죽음을 저렇게 타인의 일처럼 말할 수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뿐이다. 누구는 살고 싶어서 숨죽인 채 발버둥을 쳤는데.
“검이 심장을 비껴가서 불행히도 살아났습니다.”
“있잖아, 그렇게 죽고 싶으면 목이라도 매다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아니면 네 손으로 정확히 심장을 찔러.”
굳이 내 손을 빌릴 것 없이 혼자 죽으면 될 일 아닌가. 생각해보니 내 손에 피를 묻힐 필요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피를 묻혔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살아 돌아왔다.
“무능한 황제에게 질렸습니다. 그를 위해서 제 목숨을 내어주는 건 아까운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음, 그건 그래.”
굳이 제국의 황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위해 제 목숨을 바치는 행위는 아까운 짓이다.
물거울을 통해 인간들을 오랜 시간 관찰했다. 사람은 신기하다.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고, 남의 눈치를 본다.
그저 내가 생각해서 결정하면 될 일을 여러 사람에게 묻기도 한다.
그런 이들을 물끄러미 보다 보면, 과연 누구를 위해 사는 인생인지 의문마저 들었다.
조금 더 자신만을 생각하며 이기적으로 살아도 세상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텐데.
사람은 가까운 주변이 세상 전부처럼 느껴지는 듯 군다. 사실 그 주변을 헤치고 한 걸음만 나가보면 세상이 새파랗기만 하진 않다는 걸 알게 될 텐데.
다락방으로 보던 창밖을 생각하다 고개를 내렸다.
“저는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그거야 만들면…….”
“그러니, 제가 당신을 지킬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무능한 황제의 개 따위가 아니라, 당신의 개로 죽을 수 있게 해주실 순 없겠습니까?”
두 걸음쯤 사이를 두고 남자가 말했다. 검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의 눈은 여전히 생기가 없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는 분명, 이번에 분대장을 명령받은 27번이 아닌가? 실종상태라고 들었는데, 살아있었군.”
“누구냐.”
“글쎄. 같이 온 부하 셋은 죽었고, 하나는 살았는데 실종상태. 근데 눈앞에 나타났군. 반역인가?”
“다른 이를 주인으로 섬기고 싶어졌을 뿐이다. 왕관을 쓴 가짜보단 물속에 묻혀있어도 빛을 발하는 진짜가 더 좋으니 말이야.”
그렇게 말한 남자가 내 손에서 조심스럽게 검을 가져갔다.
푸른 빛을 내는 아콰의 검이 남자의 손에서 길이를 늘여갔다. 아콰가 한 것이 분명했다.
몸을 돌리니 아콰가 물방울을 전부 없애고 있었다. 굳은 표정의 아콰가 내 옆으로 왔다.
“현 황제가 가짜라고 말하는 건가?”
“황녀께서 제국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것은 틀림없지.”
허공에 대고 대화를 나누는데도 남자는 망설임이 없다.
그는 시선을 둘 곳이 없었던 나와 다르게 울창한 나무 한 그루에 시선을 똑바로 향한 채였다.
“이건 정말 예상외의 변수야. 내가 결정할 사안은 아닌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어차피 내릴 결정은 하나밖에 없을 거다. 보고 따윈 할 수 없을 테니까.”
남자가 품에서 손바닥만 한 단검을 꺼내 흔들리는 나뭇가지로 던졌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튕겨나갔다.
나무 위에서 정체를 모를 사람이 뛰어내렸다.
검은 복면과 검은 복장을 한 남자였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위험한 기운을 풍기는 것은 분명하다.
“군주께선 맹수를 몇 마리나 기르신 건지. 이렇게 목줄을 풀어두니 주제도 모르고 이를 드러내지.”
복면을 쓴 남자가 뒷머리를 긁는다.
답답한 듯 여러 차례 한숨을 푹푹 내쉬기도 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살폈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시체가 썩는 지독한 냄새가 코에 닿았다.
다급히 좌우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정리되지 않은 시체들의 산을 올려다보는 기분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아콰와 남자가 내 시야를 가려줬다. 그제야 숨쉬기가 편했다. 마치 무덤 한가운데에 선 기분이었다.
“응.”
“황녀 전하! 어디 계십니까?!”
페델리우스의 목소리다. 황급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들켜선 안 된다. 그것보다 지금 오면 위험하다.
‘안 돼.’
페델리우스가 다치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
“흠. 여기선 제법 사랑받고 있다더니, 틀린 말은 아니었군. 오늘은 날이 아니었나 봐. 방해꾼이 산더미네. 이만 물러갈 테니 다음에 봅시다. 황녀.”
“거기 서…….”
쫓아가려는 남자의 옷을 붙잡았다. 고개를 저었다.
쫓아갔다가 정말 싸움이라도 붙어서 페델리우스와 저 유령 같은 남자가 만나게 되는 건 사양이다.
“황녀 전하!”
“페데리우스!”
더 늦기 전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쪽이었나.”
페델리우스의 목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아콰가 내 볼에 입을 맞추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의 문양도 모습을 감췄다. 남자가 내게서 가져갔던 아콰가 만들어준 검도 사라졌다.
동시에 페델리우스가 나무 사이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페델리우스의 표정은 새하얗게 질린 채였다. 나를 발견하고 다가오려던 페델리우스가 걸음을 멈췄다.
“넌 뭐냐.”
챙, 그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남자는 페델리우스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몸을 굽혀 힘이 빠져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줬다.
“당장 황녀 전하에게서 떨어져라.”
페델리우스의 검이 남자를 향해 횡으로 그어졌다. 남자가 살짝 발돋움하더니 뒤로 물러났다.
“페, 페데리우스!”
황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러다 정말 일 날 것 같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저자는 뭡니까? 해코지라도 당하셨습니까? 걱정했습니다…….”
“미안. 다음부턴 안 할게.”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아서 정말 놀랐습니다. 심장이 바닥에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로.”
“미안해.”
페델리우스가 숨을 길게 토해내며 나를 끌어안았다. 꽉 안아오는 팔이 잘게 떨렸다.
<주인님도 소중하신 분들을 잃었어요. 한낱 사용인인 제가 함부로 말씀드릴 순 없지만요.>
문득, 예전에 들었던 메리의 말이 떠올랐다.
페델리우스가 내 안전에 심각하게 민감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손을 들어 페델리우스의 등을 토닥였다.
“미안해. 페데리야.”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냥 안에 들어가서 조금 놀려주다 나올 생각이었다. 잠깐 아콰랑도 놀아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또 자객이 따라붙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행복한 기분인 건 알겠지만, 일단 여기서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황녀께도 좋지 않으실 테고.”
“넌 뭐지?”
“보면 모르나? 이분의 개다.”
“……황녀 전하? 개도 기르셨습니까?”
아니, 누가 봐도 저건 사람이잖아.
남자가 페델리우스의 뒤에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제가 당신을 지킬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무능한 황제의 개 따위가 아니라, 당신의 개로 죽을 수 있게 해주실 순 없겠습니까?>
애절한 부탁이었다. 여전히 죽은 눈을 한 남자는 생기라곤 느껴지지 않는다. 페델리우스나 메리처럼 반짝거리지 않는 탁한 눈동자였다.
“날 구해줬어!”
“구해줬다고요?”
그제야 페델리우스가 주변을 살폈다. 전투의 흔적을 본 페델리우스의 얼굴에 음영이 짙어졌다.
“응.”
“……그랬군요.”
맞장구쳐주는 페델리우스의 대답이 영 시원찮다.
남자가 눈을 깜빡이며 여전히 나를 보고 있다. 무뚝뚝한 눈빛이 애절하다기보단 뭐랄까, 먹이라도 달라고 기다리는 늑대 같다.
“그래서, 개 한다기에 하라고 했어.”
모르겠다. 다락방에서부터 개를 길렀다고 하는 것보단 이쪽이 더 나을 게 분명하다. 내 말에 페델리우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황녀 전하, 그는…….”
“맞습니다. 개입니다.”
남자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페델리우스의 얼굴에 황당함이 번졌다.
그가 남자를 흘겨봤지만, 그는 미동도 없다. 오히려 묵묵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황녀 전하, 저건 위험해서 못 데리고 갑니다.”
“하지만…… 갈 데가 없대.”
“들개는 길거리에서도 잘 자랍니다.”
“들개는 아니다만.”
남자가 페델리우스의 말을 정정했다. 생각보다 잘 지낼 것 같은데? 페델리우스가 한숨을 내쉬곤 나를 안아 들었다.
걸을 수 있긴 한데, 아까 달려서 그런지 다리가 후들거리기도 했다. 짧은 고민 끝에 그냥 페델리우스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일단 나가서 얘기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응.”
“내가 안고 갈 테니 저거 수습이나 하지 그래?”
남자가 중간에 끼어들며 시체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페델리우스가 그답지 않게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종잇장같이 구겨진 페델리우스의 표정이라니…….
내가 그림만 잘 그렸다면 분명히 그려서 액자에 걸어놨을 거다.
“내가 할 테니 꺼지든가 조용히 따라오든가 둘 중 하나만 하도록 해.”
내가 안긴 채 고개를 젓자 남자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숲을 벗어나 다시 돌아갔다. 메리와 실비아는 이제야 호수에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어? 황녀님 어딜 다녀오셨나요? 어머, 다치셨어요?!”
“아니, 안 다쳤어!”
“황녀 전하는 내가 방으로 데리고 갈 거다. 너희는 할 일 하도록 해.”
페델리우스가 굳은 표정으로 명령한다.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남자는 페델리우스의 뒤를 쫓았다. 사실 나라도 황당하긴 하겠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방에 돌아온 페델리우스가 내게 물었다.
“음……. 페데리 피해서 도망가는데, 걔들이 나타났어.”
“갑자기 말입니까?”
“응.”
페델리우스는 내 말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어느 때보다 무서웠다.
“트럼프 제국에서 황녀 전하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이번엔 용병을 고용했던 모양이고, 앞으로도 접촉은 계속 해올 거라고 생각하는데.”
페델리우스에게 하는 반말이 자연스럽다.
‘근데 얜 이름이 뭐지?’
손을 뻗어 남자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가 몸을 숙인다.
“예, 명령하십시오.”
“아니, 이름이 뭐야?”
“없습니다. 편하신 대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이름이 없다니. 계속 개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예전에 아콰의 이름을 지어줬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아콰가 가져다주는 책에서 예쁜 단어를 찾느라 바빴었다.
‘아는 게 별로 없었으니까.’
고민 끝에 웃었다.
“이그니!”
죽지 않고 살아난 게 마치 불씨 같았다. 내 외침에 남자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그니라고 불러주십시오.”
그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아콰에게 처음 이름을 정해줬을 때와는 무척 다른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