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넌 대체 뭐지?”
눈앞의 정체 모를 남자에게 물었다.
황녀께서 이상한 생물을 주워왔다. 그녀가 주워온 것이 동물이나 야생동물 같은 것이었다면 흔쾌히 키우는 것을 허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사람이다. 자신을 스스로 개라고 지칭하고 있지만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정체가 대충 짐작이 갔다.
<처음 보고를 한 놈들은 네 구의 사체를 봤다고 해. 여러 명이 같은 증언을 했으니 틀림없다.>
사라진 사체 한 구. 사라진 게 아니라 살아있었던 모양이었다.
가슴 부근이 검에 찔린 듯 옷이 찢어져 있다. 황녀께서 옆에 있어 검을 함부로 뽑지도 못한다.
‘악의가 있거나 적대적인 것 같지는 않은데.’
살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까 봤던 네 구의 시체는 모두 일격에 죽었다. 자상이 없는 것으로 봐서 독살일 확률이 높았다.
‘그럼 일전에 그 시체 세 구를 죽인 것도 이놈이겠군.’
왜? 의문이 떠올랐지만, 답을 찾진 못했다. 저것이 황녀께 관심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관심을 허용할 만큼 난 너그러운 편이 아니었다.
“무슨 속셈인진 모르겠지만, 내 집에 네가 있을 자리는 없으니 나가라.”
“난 그분의 옆에 있을 거다. 네가 신경 쓸 일은 없을 것 같은데.”
“황녀 전하께서 계시는 공간도 내 집이다.”
“내가 사지. 얼마면 되는 거지?”
뻔뻔한 말에 말문이 막혔다. 황녀께서는 이자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건가? 그럴 확률은 없다.
아마 정체를 속였을 확률이 높다. 같은 민족이나 가족이라고 하면서.
“페데리야!”
“예. 황녀 전하.”
놈을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 툭툭, 옷깃이 잡아당겨진다.
결국, 남자를 경계하다 말고 시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몸을 굽히니 황녀 전하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괜찮아.”
“위험한 자입니다.”
“나한텐 안 위험해.”
“저자는 믿을 수 없습니다, 황녀 전하. 용서하십시오.”
내 말에 황녀께서 입술을 닫았다. 그녀가 뻐끔거리며 대답을 망설이다 어색하게 웃는다. 바스러질 것 같은 미소에 곤란함이 엿보였다.
‘상냥하신 분이라서 그렇군.’
거절하지 못하는 거다. 거절하는 법을 모르거나. 게다가 아직 어린아이의 사고를 하고 있다. 처음과 비교하면 많이 발전했지만, 아직 멀었다는 거다.
생각하며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저건 위험하다. 온몸에 피 냄새가 진동하고, 살기가 진동한다.
누군지 몰랐더라도 절대 밝은 곳에서 살아온 인간이 아님은 알아챘을 거다. 죽음의 냄새가 짙은 인간은 대개 암살을 업으로 삼고 있는 법이다.
‘나도 올바르게 살아온 건 아니지만.’
저것과는 다르다.
“페데리우스, 괜찮아.”
벌꿀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가끔 그런 의문이 든다. 정말, 황녀께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인지.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아주 가끔이지만, 세상을 다 산 어른을 닮은 눈을 한다. 상처받은 채 단단히 굳어져서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가 짓는 눈.
“……그럼 제가 대화를 해보겠습니다. 대화를 한 뒤에 결정해도 괜찮겠습니까?”
최대한 천천히 입을 크게 벌려 설명한 말에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다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어린아이처럼 웃는다. 활짝 핀 웃음에 절로 입가가 풀어졌다.
“이그니!”
“예, 주인님.”
“페데리한테 반말은 안 돼.”
명령을 들은 남자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가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생각보다 명령하는 데 익숙하신 것 같은데.’
대접받지 못했어도 역시 황족의 핏줄이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명령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뿌듯함에 고개를 끄덕이자 황녀께서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그럼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여기서 안 해?”
“……음. 죄송합니다. 좋은 말이 오고 갈 것 같지는 않아서 자리를 피하려고 합니다.”
좋은 말만 오고 가면 황녀의 옆에 있어도 되겠지만 그건 아닐 거다. 상황에 따라 검을 뽑아 피를 볼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남자에게 눈짓하니 그가 허리를 굽히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다녀오겠습니다.”
나도 그의 뒤를 쫓아 방을 나섰다.
“화가 엄청났네.”
얼굴이 엄청 딱딱했다. 페델리우스와 함께한 동안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아니, 갑자기 웬 개야.”
갈 곳 없다는 이를 돌려보낼 곳도 없었다. 자칫해서 다시 황제에게 돌아가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찌른다고 찔렀는데 심장을 비껴갔을 거라는 예상은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남자, 아니 이그니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기분 나쁘게 짓누르던 감각이 사라졌다.
손끝에 스치던 기묘하고도 섬뜩한 감각이 자취를 감췄다. 안도한 자신에게 조금 경멸까지 느꼈다.
“아아, 진짜.”
베개에 얼굴을 박았다. 페델리우스에게 들키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그보다 더 곤란한 걸 떠안게 됐다.
‘결국, 그 이름 모를 자객은 놓쳤고.’
황제의 귀에 이야기가 들어가는 건 거의 기정사실로 봐야 했다. 기회를 봐서 또 제국 근처에 있는 다른 나라에 갈 생각이다.
그곳에 비를 내리고, 같은 방법으로 소문을 퍼뜨리는 거다.
“그러면 전부, 죽으려나.”
베개에 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보석 상인의 말이 진실이라면, 제국민 중에는 분명 나를 걱정했던 사람도 있을 거다.
걱정까진 아니어도 동정을 느낀 사람도 섞여 있을 거다.
그런 사람도 죽이는 건 과연 옳은 일일까?
아콰는 내가 누군가를 죽이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약한 사람은 강한 사람에게 짓밟히는 것이다.
그사이에 작은 희생이 있다면 그건 감수할 부분이라고 했다.
화가 난다면, 분노를 숨기지 말라고 했다. 아콰의 말은 대개 옳았다.
‘정말 옳은 일일까?’
질문이 머릿속을 잠식한다. 아콰는 내 분노가 타당하다고 했다. 아콰는 인간의 생명을 경시한다. 그 아이에게 중요한 건 나다.
“그 안에서 날 걱정한 사람을 골라낼 수도 없는 노릇이야.”
아콰가 보여준 것은 작은 진실이었다. 아콰는 내게 처형장만을 보여줬다.
분명 그것을 구경하던 이들 중에는 수많은 국민이 있었지만, 그들이 제국민 전체라고 보기엔 숫자가 현저히 적다.
머릿속에 의문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아콰는 옳지만, 정말 늘 옳기만 할까?
“사람의 생명은 얼마큼의 가치가 있을까.”
혼잣말을 내뱉었다. 듣는 이 없어 허공에 울린 목소리엔 아무도 대답을 돌려주지 않는다.
생명에는 값을 매길 수 있는 걸까?
내가 괴롭힘 당한 것이 이 정도라고 가정할 때, 누군가 너는 이만큼만 죽이면 된다고 지침을 내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리나는 죽어 마땅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에게 증오심을 느끼고 있었고, 그녀는 내 바람대로 죽었다.
하지만, 길거리를 나뒹굴며 물을 갈구하던 아이와 남자는 죽어 마땅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그저 살기 위해 물을 갈구하다 죽어가기를 바란 적은 없다.
‘모르겠어.’
전부 모르겠다. 귀족과 황제에게는 조금도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다.
하지만, 제국민들까지 죽여야 하는 건가? 그렇게 하면 황제는, 내 아비인 솔루스는 후회라는 걸 하게 될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는 결코 제국민을 사랑하지 않는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다.
‘……그럼, 왜 죽여야 하지?’
귀족이나 황제가 그들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들은 왜 죽어야 하지?
내 어미의 죽음을 기뻐한 사람은 대체 몇이나 되는 거지? 정말, 제국의 모든 사람은 나와 내 어미를 원망했었나.
“아콰.”
<네, 주인님.>
“만약에 메리가 내가 소중히 여기는 뭔가를 훔쳐갔어. 그렇다면, 메리에겐 어떤 벌을 내려야 할까?”
<음. 죽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메리가 내 걸 훔쳐간 이유는 소중한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였대. 그래도 죽여야 할까?”
<네. 주인님의 물건에 손을 댄걸요.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주인님께서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었잖아요.>
무언가 잘못됐다.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콰는 어딘가 비틀려있다. 그리고 그것은 다락방에 있을 때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생각이었다.
“있잖아, 아콰.”
<네!>
사랑스럽게 웃으며 품에 안겨 오는 아이를 끌어안아주며 입술을 달싹였다.
“호수에 있는 잉어랑 인간의 차이는 뭘까?”
<음……. 크기요?>
“네겐 잉어가 죽는 것과 인간이 죽는 것은 별 차이 없지?”
<네.>
고민하던 아콰가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대답했다. 여전히 밝은 얼굴엔 내 질문이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듯했다.
감정이 결여된 게 아니다. 애초에 아콰에게 인간이란 지나가는 개미와도 같은 존재였던 거다.
<갑자기 왜 물어보시나요? 주인님.>
“아니야, 그냥. 그냥 궁금했어.”
<헤헤, 그렇구나. 주인님께 안길 수 있어서 좋아요. 주인님은 따뜻하거든요. 제 몸은 차가운데 괜찮으세요?>
“응. 물론이지.”
아콰는 그저 나만을 생각하는 아이였다.
그로 인해 누군가가 죽는 건 아콰에게는 다리를 간지럽히는 개미를 밟아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음에는 언제 제국에 가나요? 얼른 전부 죽였으면 좋겠어요.>
아콰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말했다. 한껏 흥분한 것이 아이의 주변에 흐르는 물소리로도 느껴졌다.
경쾌하게 튀는 물방울 소리가 마치 노래 같다.
“왜?”
<그래야 주인님이 자유로워지시니까요! 그러면 저도 그 인간 남자에게 소개해주실 건가요?>
“음. 잘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페델리우스랑 친해지고 싶니?”
<네, 주인님께 친절한 인간이니까요. 게다가…….>
말을 하려던 아콰가 돌연 입을 닫았다. 배시시 웃는 표정에 젖살이 흔들렸다.
손가락을 들어 쿡 찌르니 아콰가 꺄르륵 웃으며 뒤로 넘어간다.
<아아, 그 개와 인간 남자가 돌아오고 있어요. 가기 싫어요.>
아콰가 어리광을 피우며 볼에 얼굴을 비볐다.
“나도. 나중에 또 놀자. 또 불러줄게.”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자 한 번 더 얼굴을 비빈 아콰가 연기처럼 손등에 스며들었다. 빛을 뿜던 신의 문양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멍한 표정을 하는 것과 동시에 달칵, 문고리가 돌아갔다.
둘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표정이 제법 상반된 채였다. 무표정한 이그니와는 다르게 얼굴이 일그러진 페델리우스는 흉흉한 기색이었다.
“페데리야?”
“예, 황녀 전하. 이 개는 키우시되 폐하께 보고는 해야 합니다. 적어도 황녀 전하께 악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무릎을 꿇고 앉은 페델리우스가 내게 말했다. 여전히 ‘개’라고 표현하는 걸 봐선 그의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개를 끄덕였다. 페델리우스의 표정이 여전히 어두웠다.
그날, 온천 나들이는 생각보다 일찍 막을 내렸다.
그 후 황실에서 기사단을 꾸려 조사를 했지만 별다른 것이 발견되진 않은 모양이다. 어쨌든 암살의 위협 때문에 나는 일찍 수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 달이 흘렀다.
“이그니, 또 어딜 다녀온 거야?”
“아, 주군. 일어나셨습니까?”
“해가 중천을 훨씬 넘었는데, 일어나야지.”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제야 이그니가 낮은 탄성을 흘렸다.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뗐다.
“정보 길드에 다녀왔습니다. 제국은 곧 내전이 일어날 것 같다는 보고입니다. 그것 외의 별다른 소식은 다행히 없습니다.”
“내전? 아. 당연히 그럴 만하지.”
“애초에 물밑부터 썩어버린 나라였습니다. 곪고 곪은 상처가 여기저기서 조금씩 터지고 있죠. 지금에 와서 꿰매더라도 수복은 거의 불가능하죠.”
이그니는 생각보다 말썽 없이 잘 지내고 있다. 내 옆에서 거의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고, 내 눈과 귀가 되기를 자처했다. 매일 물어오는 정보에 지식이 풍부해졌다.
페델리우스나 메리가 위험해서 가르쳐주려 하지 않은 것을 이그니는 가감 없이 입에 담았다.
“페델리우스는?”
“그 남자라면 오전에 왕궁으로 입궁하는 걸 보았습니다.”
“음……. 그렇구나.”
페델리우스와 메리와도 이제는 제법 평범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됐다.
여전히 나는 모르는 것 많은 어린아이처럼 굴어야 했지만, 적어도 대화에 부족함은 없다.
“아무래도 제국이 잠잠한 게 이상합니다. 그 남자를 놓쳤으니 이야기가 전해졌을 텐데 말이죠.”
“기회가 되면 한 번쯤 제국에 다녀오고 싶은데…….”
이그니가 생긴 후에도 페델리우스는 같은 방에서 잔다. 매번 불편하게 소파에 누워 자는 페델리우스 때문에 여전히 제국에는 발도 딛지 못하고 있다.
“그때처럼 물로 이동하는 건가요?”
“응, 근데 페델리우스가 틈을 안 줘서. 몇 번 들킬 뻔한 적이 있거든.”
이그니는 같이 입을 맞춰주고 있는 공범자다. 덕분에 죄책감이 한층 더 상승했지만, 확실히 한 사람 더 있으니 편하긴 했다.
“페델리우스한테 갈까?”
“왕성에 말입니까?”
“응, 너도 있으니 가도 되겠지. 나 혼자는 절대 못 움직이게 한단 말이야.”
어느 정도 대화도 통하고, 길도 잘 찾게 됐다는 걸 호소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마치 한 번 어린아이는 영원한 어린아이라는 느낌이다.
“아니면 시장이라도 가자. 심심해.”
“채비하겠습니다. 메리라는 시녀를 불러드릴까요?”
“응, 그래.”
고개를 끄덕이니 이그니가 금세 모습을 감춘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지는지 모르겠다.
매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사라졌다가 나타난다.
“황녀님! 메리 부르셨어요?”
“메리! 요즘 자주 못 보는 기분이야.”
“아니에요!! 그래도 매일 아침, 매일 밤 만나 뵈러 온답니다. 어쩐 일이세요?”
“나, 이그니랑 나갔다 올게. 옷 입혀줘.”
내 말에 메리가 어색하게 웃는다.
으음, 볼을 긁적이는 것이 어딘가 떨떠름하게도 보였다. 메리가 옷장에서 편한 옷을 꺼내더니 내가 입고 있는 옷을 조심스럽게 벗기기 시작했다.
“이그니라는 남자는 괜찮으세요?”
“응, 좋은 애야.”
“메리보다 더요?”
아니, 그건 아니지. 굳이 따지면 이그니는 나쁜 놈들 사이의 좋은 놈이다. 시무룩한 메리의 질문에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메리가 더 착해.”
“주인님께서 이그니라는 남자는 실력이 괜찮아서 외출하고 싶다면 허락해드리라고 했어요.”
페델리우스가? 흠.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아 보였는데, 생각보다 좋았던 건가? 아니면 언제 대련이라도 해봤나?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지만, 메리는 더 대답해줄 마음은 없는 듯했다.
“용돈을 좀 드릴 테니 맛있는 거 사 드시고 오세요.”
“용돈?”
“네, 여기 이 주머니에 돈이 있으니까 가지고 싶은 게 있으시면 사 오시거나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면 사 드시면 된답니다.”
메리가 두툼한 양털로 된 숄을 어깨에 걸쳐주고 그 위에 긴 로브를 덧씌워줬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고 있긴 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다.
하지만, 메리의 걱정을 알기에 별말 없이 모자까지 꾹 눌러썼다. 천으로 된 둥글고 챙이 긴 모자는 바람에 날아가기 쉬워 보였다.
“이그니는?”
“그 새까만 복장으로 나갈 게 아니라면 페드로 씨에게 옷을 한 벌 빌려 입으라고 보내놨답니다.”
“눈에 띄긴 하지?”
“네, 무척이나요.”
다행히 집 안에서는 복면을 쓰고 있진 않지만, 얼굴을 내놔도 이그니는 위험한 사람으로 보였다.
온통 새까만 옷은 움직이기는 편해 보이겠지만, 그야말로 암살자 그 자체였다.
“자, 다 됐습니다. 황녀님, 예쁘세요!”
“응, 고마워.”
침대에 올려두었던 발을 내렸다. 굽 낮은 구두까지 신었다. 발이 불편하지도 않고, 걷기에도 편하다. 팔랑팔랑하는 로브가 어깨를 꾹 덮고 있다.
“조심해서 다녀오셔야 해요.”
“응, 선물 사올게!”
“우와. 기대하고 있을게요, 황녀님!”
메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감탄사를 흘렸다.
방을 나서 1층으로 내려가자 깔끔한 제복 차림의 이그니가 있었다. 짙은 붉은색 계열의 제복은 그에게 제법 잘 어울렸다.
“와, 이그니. 사람 같네.”
“……전 원래 사람입니다.”
“아냐, 검은색 개 같았어. 검은 개.”
“그렇습니까?”
“응. 앞으로도 그렇게 다녀. 예쁘네.”
“알겠습니다.”
내 말에 이그니는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 말을 거역하지 않는다. 작은 농담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입을 떼기가 무서울 정도다.
맹목적인 신뢰. 맹목적인 충성. 그것들은 자연히 생겨났다기보다는 오랜 훈련 끝에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잘 훈련된 개. 정말 이그니는 그 단어대로 굴었다.
“가자. 이그니.”
“네.”
“메리 다녀올게!”
“황녀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손을 붕붕 흔들어주며 이그니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덜컹거리는 소리 없이 부드럽게 출발했다.
수도 시장의 초입 부분에 들어서고 난 후엔 바로 내렸다. 마차를 끌고 들어가 눈에 띄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시장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와아, 역시 좋다. 이렇게 구경하는 건 처음이야. 페델리우스랑 다닐 땐 눈치가 좀 보여서.”
“페드로라는 집사가 잘 돌봐주라며 돈을 줬습니다.”
이그니가 척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꺼내며 말했다.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메리한테 받았는데.”
내 주머니도 만만찮게 묵직하다.
묵직한 동전 주머니만큼이나 두 사람의 배려가 느껴졌다. 페드로랑은 제대로 대화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좋은 집이지?”
“겪어본 가정이 많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전하를 굉장히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건 알겠습니다.”
“겪어본 가정이 많지 않다는 건, 겪어본 적이 있긴 하다는 거야?”
“네. 잠입해서 암살하기 위해서 호위기사로 들어간 적은 있습니다.”
가벼운 질문에 묵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내 입을 꿰매버리고 싶어졌다.
그의 과거가 하하호호 밝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광장 가볼까? 광장에 먹을거리를 파는 데가 많아!”
“네.”
다급히 이그니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광장이란 자고로 소문이 퍼지기 가장 좋은 곳이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고, 황실에서 공고를 띄우는 곳도 광장이 가장 먼저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저런 상인들이 자리를 펴기도 많이 폈다.
“이쪽인가 봐.”
나무로 된 표지판을 보며 열심히 발을 놀렸다. 이그니는 내가 끌고 올 것도 없이 제 발로 열심히 쫓아왔다.
“아,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광장에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중앙에 있는 작은 분수대를 기점으로 나무 의자마다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광장 게시판 앞에도 사람들이 옹기종기 한가득 몰려있었다.
“와, 저건 뭐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시끄럽다.
호기심에 다가가다가 문득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동요와 공포의 느낌이다.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건 행복하지 않은, 행복과는 제법 먼 감각이었다.
“저기, 이거 뭐야?”
안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끝에 서있는 사람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아, 누가 공고를 붙이고 갔는데 그게 이번에 온 트럼프 제국의 황녀 얘기라는구먼.”
퉁퉁한 남자가 나를 힐끗 보더니 성의 없이 설명했다. 그리곤 발을 동동 구르며 까치발을 뗀다.
‘트럼프 제국의 황녀?’
나잖아. 무슨 얘기지?
불안함이 등줄기를 스쳤다. 이곳 분위기는 즐겁지만은 않은 분위기다. 일렁이는 불안함이 뒤쪽까지 느껴질 정도다.
“자세한 건 잘 모르겠네. 어이고. 앞에 다 봤으면 좀 비킵시다! 뒤쪽은 보지도 못하잖소!”
퉁퉁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손을 쥐었다 펴며 앞으로 가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아, 이번에 볼모로 온 트럼프 황녀가 저주받았다고 해! 아니, 트럼프 제국에서 그 황녀를 떠넘겼다는데?”
“뭐?! 무슨 저주?!”
“그 황녀가 태어나고서 비도 안 내리고, 땅은 메마르고 전염병까지 퍼졌대! 그래서 옳다구나 하고 제국에서 황녀를 우리 왕국에 떠넘긴 모양이여!”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핏기가 쫙 빠져나가는 기분이 밀려와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앞줄에 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글을 읽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뭐? 저주?! 우리 왕께선 그것에 속은 것이란 말이여?”
“하지만, 여긴 비가 내리고 있잖소.”
“아, 나도 소문 들어본 적 있어! 예전에 제국에 갔을 때였는데 확실히 황녀 하나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소리가 있어. 분명 내가 갔을 때 그 어미가 저주받아서 처형당하고 있었지.”
“맞아, 맞아! 나도 그때 자네랑 같이 갔었지. 그 어미가 죽기 전에 저주를 걸지 않았던가?”
호흡이 멎었다. 핏기가 빠져나가, 눈앞이 새하얗게 변해간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저 공고를 대체 누가…… 누가 적었지?
“괜찮습니다. 뒤로 물러나 계십시오.”
이그니가 내 허리를 붙잡고 인파 사이에서 나를 끌어냈다. 그리곤 순식간에 인파를 뚫고 공고가 붙은 게시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 넌 뭔데 이걸 떼가?!”
“죽기 싫으면 꺼져라.”
살기가 순식간에 엉겨 붙은 사람들을 향해 퍼졌다. 엉거주춤 서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이그니에게서 멀어져갔다.
지익, 종이를 찢어낸 이그니가 그것을 우그러뜨렸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주군, 신경 쓰지 마십시오. 미천한 것들이 퍼뜨린 한심한 소문입니다.”
“……뭐라고 쓰여있어?”
“모릅니다. 구겨서 버렸습니다.”
이그니가 묵묵히 대답했다.
거짓말인 걸 뻔히 안다.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던 남자는 생각보다 배려가 있다.
이그니의 뒷주머니가 불룩한 게 굳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까지 꼬리표가 따라붙을 줄은 몰랐는데.’
입 안이 쓰고, 속이 쓰리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소문을 퍼뜨리는지도 알 수 없다. 사실 내 이야기라면 트럼프 제국에 있었던 이들은 누구나 알 법하다.
그걸 누군가 듣고, 이렇게 종이에 써서 날랐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제 나라 걱정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다. 아무렴, 소문으로 들은 끔찍하고 저주스러운 황녀가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지.
“에이, 누가 떼갔어?!”
“저쪽 뒤에 있는 공고판에도 붙어있대!”
“저쪽으로 갑세!
이그니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가 몸을 돌리려는 찰나, 내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그니가 말없이 나를 내려다본다.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이방인이었지.’
생각지도 못했다. 왕궁의 기사단이, 페델리우스와 그 식구들이 나를 다정하게 대해줘서 차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주먹이 절로 꽉 쥐어졌다.
사고는 치지 말라던 왕의 말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나는 무력하다.
이들에게 보복을 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내 앞엔 왕이라는 거대한 벽이 길을 틀어막고 있다.
“돌아가자, 이그니.”
몸을 돌렸다. 그 앞엔 이그니가 서있었다. 순식간에 이동한 모양이다. 놀라는 한편, 죽여달라고 말했을 때처럼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당신은 저주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그니.”
“당신은 내가 저주받은 존재를 섬기기로 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그니의 지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다. 그냥 속이 답답했을 뿐이다.
저주받은 황녀가 나를 지칭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어.”
“나는 섬기던 황제를 버렸습니다. 그보다는 당신이 진짜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
“당신의 검이 심장을 빗겨나갔을 때, 여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황제가 당신만큼 연민을 가졌다면 나라가 그리 엉망이 되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그니가 길게 말을 이어갔다. 그로서는 정말 드문 행동이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의견을 피력하지 않고, 대개 내 말에 무조건 수긍해주는 이그니였다. 이름을 지어줬지만 기뻐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냥 원래 그런 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가 당신의 손에 죽을 수 없다면, 차라리 당신을 지키다 죽자고 생각했습니다.”
담담한 말이 심금을 울렸다. 뭔가 괜찮다거나, 혹은 어떤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데 목이 턱 막혔다.
입술을 뻐끔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도 뭔가 말하고 싶어서 다시 고개를 들길 반복했다.
“제국이 깊은 오해에 빠져있다는 건 알게 됐습니다. 당신이 그걸 죽도록 원망했다는 것도 옆에 있으면서 느꼈습니다.”
“응.”
“저는 저주받은 존재를 주군으로 섬긴 적은 없습니다.”
“……응.”
“당신은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다른 무엇도 아닌 당신의 손등에서 빛나는 그것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딱딱하던 목소리가 한층 제자리를 찾았다. 부드러워진 목소리에 별다른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빨리 사실을 알아서 당신을 그 좁은 공간에서 빼내 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이그니가 드물게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위해 이 생명을 다 사용할 때까지, 속죄하겠습니다.”
“…….”
해줄 말이 없어서, 그저 말없이 보다가 웃었다. 괜찮다고 하기에는 나는 괜찮지 않았다. 거짓말을 입에 올리기에는 받은 상처가 너무 많았다.
“응.”
그저 서로에게 가장 편할 대답을 꺼내놨다.
그의 말도 맞다. 쓸데없는 작은 소문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럴 거다. 페델리우스의 식구들만 변하지 않는다면, 괜찮다.
“나도 미안해.”
“제게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전하께서 조금 더 어깨를 펴고 세상을 바라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언젠가 혼자 설 자신이 생기면 어디든 떠나도록 해. 세상은 생각보다 넓고 아름다워.”
나도 많은 곳을 보진 못했지만. 뒷말은 굳이 내뱉지 않았다.
이그니도 언젠가 좋은 사람을 만나 살아갔으면 좋겠다. 페델리우스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면 분명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줄 테니까.
“…….”
이그니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돌아가자며 묵묵히 몸을 돌렸다. 하필이면 날을 잡아도 이렇게 잡았을까.
나는 분명 운이 없는 게 틀림없어.
“트럼프 제국의 황녀를 자르딘에서 추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광장을 나가려는데 뒤쪽 공고 게시판에 모인 누군가가 소리쳤다. 커다란 목소리는 내게도 닿기에 충분했다.
신경 쓰지 않기로 했는데.
걸음이 절로 멈췄다. 이그니의 주변으로 살기가 일렁였다. 예민한 피부에 절로 느껴질 정도다.
페델리우스도 알게 되면 분명 이그니 못지않게 화를 낼 텐데.
“우리들의 왕께서 간악한 제국에게 속은 것이 분명합니다!”
“옳소, 옳소!”
목소리가 더 커졌다. 광장을 막 방문한 사람들이 호기심에 옹기종기 모여들기 시작했다.
“전하.”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건 아는데, 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왜? 여기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린아이를 연기하며, 조금씩 말을 하게 되기 위해 노력했다.
언젠가 일이 해결되면 페델리우스의 저택에서 계속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페델리우스에겐 어떤 치부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 근데 그거 확실한 거여? 그 황녀 때문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게.”
“이 양반이. 확실하지! 아, 그러니까 정기적으로 물을 달라고 황녀를 가져다 바친 거지. 비가 안 내려서 거의 사막이 될 지경이라더구먼!”
주먹을 쥐었다.
사실 틀린 말은 없다. 언제부턴가는 비가 내리지 않길 바랐다. 제국이 망하길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근데 그게 뭐가 나빠?’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 당한 것만 가득하다. 태어날 때부터 당한 게 너무 많아서 그 수를 셀 수가 없을 정도다.
그래서 똑같이 해주자고 생각했던 게 왜 나쁜 거야? 누구나 당하면 돌려주고 싶어지잖아. 왜 다들 내가 하는 건 안 된다고 하지?
다시 떠오른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간다.
이해할 수 없다. 어릴 적 아콰가 죽여버린 유모도, 나를 때려서 결국 죽음을 맞이한 이리나도, 자르딘의 왕도 전부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 말라는 것투성이라 더욱더 이해할 수 없다. 왕의 말은 너무 어렵다. 심장이 쿵쿵, 달음박질친다.
혈액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피부의 감각이 둔탁해졌다.
“왜.”
“말씀하십시오.”
“왜 난 죽이면 안 돼?”
눈앞이 붉게 물든다. 오른쪽 손등이 점점 뜨거워졌다. 열을 머금는 듯 문양이 제 위치를 계속해서 알려왔다.
고개를 들어 이그니를 쳐다봤다.
“이그니, 내게 죽이는 게 나쁜 일이래.”
“……누가 말입니까?”
“왕도, 이리나도. 죽여선 안 된다고 해. 하지만 아콰는 된다고 했어.”
아콰는 내 전부였다. 아콰의 말은 틀린 적이 없었고, 아콰의 말은 늘 옳았다. 대개 그것은 정답에 가까운 결론이었다.
그런데 자르딘에 와서 그것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왕은 그 의문에 기름을 붓는다. 내가 보고 온 수많은 것들을 다시금 떠올리라고 한다.
물을 구걸하다 길거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아이와 남자. 그것을 봤을 때 심장이 둔탁한 통증을 호소했다.
어떤 감정인지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그 통증은 매우 기분 나쁜 것이었다.
“대체 누가 옳은 거야?”
나는 왕에게 내 것을 위협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럼 나는? 누군가 내 자리를 위협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해? 공황에 빠진 머릿속에서 그저 호흡만 하릴없이 빨라진다.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그니가 돌연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가 부복한 채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죽이고 싶은 자가 있으십니까?”
“너무 많아.”
“명령하십시오. 당신이 명령하면, 그 손에 누구의 목이든 들려드리겠습니다.”
아,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안다. 누군가의 손에 대신 피를 묻히겠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내가 망설이자 이그니가 묵묵히 나를 올려다본다.
“저는 그저 당신이 하는 선택을 따를 뿐입니다.”
이그니의 말에 숨이 멎을 것 같다.
“애초에 왕께선 그런 망해가는 제국이랑 무슨 교류를 하겠다고 한 겁니까!”
“황녀가 우리 왕국에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됩니까?!”
“듣기론 미색이 빼어나다고 하던데.”
“그럼 뭐 해, 그 황녀 백치라는 소문이 자자해. 완전히 반병신이라고 하던데?”
쯔즈즛, 여기저기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주동자는 분명히 있다. 언성을 높이는 건 비슷한 음색의 남자 한둘이다.
듣기 싫어.
너희가 뭘 알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떠드는 것이 제일 짜증 난다. 하물며 제국의 국민은 피해라도 보았다.
‘너희는 무슨 피해를 봤는데?’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이곳에 와서는 숨죽이고 있었을 뿐이다.
피해를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자르딘 왕국이 망하기를 바란 적은 더더욱 없다.
그저 이 아름다운 광경이 지속되길 바랐을 뿐이다.
그것도 안 돼? 묻고 싶었다.
“이그니.”
“네, 명령하십시오.”
검지를 쫙 펴고 천천히 공고 게시판을 가리켰다.
“저 소리, 듣기 싫어.”
내가 말했다. 이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가 나를 조금 더 앞쪽의 나무 아래로 자리를 옮겨줬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응.”
이그니가 내 안위를 살피곤 곧장 몸을 뒤로 돌렸다. 느릿하게 걸어가는 것 같던 이그니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광장에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릿한 피 냄새가 내 코끝까지 닿았다. 광장은 금세 아수라장이 됐다.
“꺄아아아악!!”
“살인이야!”
“도망쳐!!”
비명 속에 두려움이 가득 담겨 있다.
그렇다고 이그니가 광장에 있는 사람을 전부 죽인 건 아니다. 그는 분위기를 주도하던 두 사람의 목을 단숨에 몸과 분리했다.
피어오르는 붉은빛에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나 자신도 내가 뭘 바라는지 모르겠다. 그저 거슬리는 것들이 눈앞에서 없어졌으면 했다.
“아콰, 내가 나빠?”
<아뇨, 주인님. 주인님은 나쁘지 않아요.>
“응. 너라면 그렇게 말해줄 것 같았어.”
페델리우스는?
만약 아콰에게 했던 질문을 페델리우스에게 똑같이 하면 어떻게 될까? 이 검고 검은 감정을 페델리우스에게 내보이면, 그도 괜찮다고 해줄까?
생각에 잠겨 있는 내게 이그니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어느새 인파 사이에 섞여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왔다.
방금 사람을 죽였다곤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의 손이나 옷에는 피 한 방울 튀기지 않은 채다. 오히려 피를 죄다 뒤집어쓴 건 근처에 있던 다른 관객들이었다.
“오늘은 산책할 기분이 아니실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응. 돌아가자.”
이그니가 나를 챙겨 몸을 돌렸다. 비명을 들으며 느릿하게 발걸음을 뗐다.
‘쓸데없는 정보를 퍼뜨리니까 그래.’
사실로 밝혀지지 않은, 아니 적어도 이 왕국에서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은 내 자리를 위협한 게 잘못이다.
이곳이 아니면 더는 갈 곳이 없다. 페델리우스가 아니면, 나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난 나쁘지 않아. 이그니.”
이그니의 옷자락을 꽉 부여잡았다.
“……그렇지?”
이그니가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무뚝뚝한 얼굴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게 오랜 시간 교육받은 거겠지.
그저 묵묵히 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께서 옳다고 선택한 길을 저는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응……. 내 자리를 지키고 싶었던 것뿐이야. 너처럼 나도, 페델리우스가 아니면 갈 곳이 없어.”
이그니의 말에 동요하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더 중요해서 그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어디까지나 내가 살기 위해서였다.
이그니를 받아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갈 곳이 없다는 말을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이해하지 못했다면 동정도 없었을 텐데.
“미안해, 이그니.”
내 일을 너에게 떠넘겼다.
“내가 죽였으면 좋았을 텐데.”
아콰도 이용하지 않고, 이그니도 이용하지 않고, 내 손으로 죽일 힘과 능력이 있었다면 좋았을 거다.
그랬다면 나는 조금 편한 마음을 가졌을 텐데.
“저는 당신을 위해 살기로 했습니다.”
“…….”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대답하지 못했다. 이그니가 묵묵히 손을 뻗어 나를 붙잡았다.
“당신께서 내리는 명령은 이제 내게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가 더러운 길 한복판에 한쪽 무릎을 꿇는다.
하지 말라고 고개를 젓자 이그니는 여전히 한 점 일그러짐 없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그저 절 이용하면 됩니다.”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말없이 손을 뻗어 이그니를 일으켜줬다.
그저 손을 잡고, 몸을 돌린 채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죽어버린 이를 되살릴 순 없다. 후회해도 늦는 것이 있다. 물론, 후회하진 않겠지만.
“이그니.”
“네.”
“집으로 돌아가자.”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