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99)

* * *

“앞으로도 오시리아라고 불러줘.”

“아…….”

“난 페데리 이름으로 불러주는데.”

툴툴거리며 말하자, 페델리우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두 손을 이리저리 내젓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에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나 이제 황녀 아닌데.”

“…….”

내 말에도 페델리우스는 반응이 없다. 입만 뻐끔거리며 대답을 찾는 모양이다.

멍하니 페델리우스를 바라봤다. 그가 불러주는 이름은 늘 기분이 좋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언제나 기분 좋게 울린다. 그러니까 페델리우스가 계속 이름을 불러줬으면 했다.

“조금, 익숙해지면 부르겠습니다.”

“그게 언젠데?”

“……언젠가.”

그니까 그게 언제냐고. 눈을 샐쭉 뜨자 페델리우스는 웅얼거리다 입을 딱 다물어버렸다. 정말 쓸데없이 올바른 남자다. 한 치의 어긋남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건 거짓말이지?”

“……황녀 전하의 입장에선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말해줘.”

나 스스로 나쁜 이야기를 듣자고 입을 열 줄은 몰랐다. 하지만 들어야겠다. 그게 페델리우스에게 좋지 못한 이야기라면 더더욱.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 황녀 전하를 음해하려는 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국에 퍼져있는 황녀 전하의 안 좋은 소문을 전부 끌어온 듯합니다.”

“어떤 거?”

“……입에 담기 좀 그러니 봐주십시오.”

페델리우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웃는 입술과는 다르게 눈은 평소처럼 휘어지질 않는다.

페델리우스도 그냥 웃을 수 없는 얘기들이 오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것만 말해줘.”

“예.”

“나 때문에 폐하한테 못 가는 거야?”

내 질문에 페델리우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고개를 젓는다. 거짓말이 아닌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뜬 채 페델리우스를 살폈다.

하지만 페델리우스의 표정은 미동조차 없다.

“아닙니다.”

“정말?”

“이건 엘레나 재상께서 휴가를 주신 것뿐입니다. 절대 당신 때문이 아닙니다.”

페델리우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나도 그리 멍청하지 않은데…….

재상이 이유도 없이 휴가를 줬을 리는 없다. 적어도 뭔가 문제가 있어서 페델리우스가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지경이 됐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일이 아예 없어진 게 아닙니다.”

“응?”

“광장에서 벌어진 참상을 조사하라는 명령이 따로 내려졌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폐하께는 뛰어난 기사가 많이 있습니다.”

페델리우스의 설명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 참상, 조사해서 범인이 이그니인 게 들키면 어쩌지? 그랬다간 사실 처음부터 멀쩡했다는 것을 전부 밝혀야 할 확률이 높다. 아콰도 페델리우스에겐 아직 들켜선 안 된다.

숨기고 싶지 않지만, 숨겨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이 다정한 온기가 부서지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그나저나 아까 광장에 다녀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응? 아, 응.”

아차. 그런 말도 했던 것 같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가길 반복한다. 실수했어. 너무 머리에 열이 몰려서 열심히 입을 움직이고 말았다.

“며칠 전에 정확히 언제입니까?”

“그러니까, 으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어쩌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동안 페델리우스의 눈이 한층 더 매섭게 빛났다. 슬쩍 옆에 서있는 이그니를 쳐다봤다.

그가 묵묵하게 나를 내려다본다.

‘어쩌지?’

갑자기 시간을 뒤로 되돌리고 싶어졌다. 그런 능력은 물론 세상에 없겠지만!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않자 페델리우스가 다시 입을 여는 게 보였다.

“황녀 전하.”

“으응.”

“설마…… 그날 다녀오신 겁니까?”

페델리우스가 인상을 찌푸린다. 주름진 미간의 골에서 깊은 탄식이 느껴질 정도다.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그는 이미 확신한 모양이다.

“페데, 리야?”

“그날 다녀오셨군요.”

“그게, 갑자기 막 답답하고 놀러 가고 싶어서. 이그니랑 같이…….”

페델리우스가 매섭게 눈을 치켜뜬다. 나를 향해 치켜뜬 게 아니라 옆에 서있는 애먼 이그니에게 치켜떴다.

솔직히 그날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저 개를 데리고 간 건 잘하셨습니다. 혼자 나가는 것보단 훨씬 낫습니다.”

‘아직도 개구나.’

어색하게 웃었다. 이그니를 살폈지만, 그는 페델리우스에게 정말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는 모양이다. 오죽하면 말을 하든지 말든지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

“그래서, 그거 보셨습니까?”

“……응.”

“설마 거기서 그 전단도 보신 겁니까?”

“그 종이는 이그니가 구겨서 버렸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곧 죽어도 보여주지 않을 기세여서 결국은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확인도 하지 못했다.

나를 본 페델리우스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는 고민하듯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입을 일자로 꽉 다물었다.

한참이나 페델리우스는 말이 없었다. 다만 점점 분위기가 차갑게 변해가는 건 느껴졌다.

최근 들어 이상하게 타인의 감정이 민감하게 느껴졌다. 물에서 이상한 기운까지 넘실거리는 게 보였다. 물을 따라준 사람이 걱정을 담고 있었다면, 그 걱정이 물에 스며든 것이 보일 정도였다.

최근에는 물에 손을 대는 것조차 껄끄러워졌다. 이유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아콰가 어린아이처럼 자란 이후로 생긴 능력이라는 사실이다.

“한 가지만 묻지. 개.”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들며 이그니를 쳐다봤다. 가만히 서있던 이그니가 눈동자만 슬쩍 굴리더니 페델리우스를 내려다본다. 정말 성의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말해라.”

“광장의 그것, 네가 했나?”

이그니가 말없이 페델리우스를 쳐다본다. 짙은 고동색 눈동자에 고민이 서려있는 게 보였다.

“대답해.”

페델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그니의 눈동자가 페델리우스를 따라 움직였다.

“그렇다면?”

“그걸 황녀 전하가 본 건가?”

이그니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페델리우스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채앵! 검과 검이 부딪쳤다.

이그니가 꺼내 든 것은 검이 아니라 손바닥만 한 작은 단검 두 개였다. 반응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눈으로 보지도 못했다.

그냥 페델리우스가 움직이는 것을 본 다음 순간, 이그니가 단검 두 개를 교차해 페델리우스의 검을 막고 있었다.

“황녀 전하께 누를 끼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런 적 없다.”

챙! 이그니가 단검 두 개로 페델리우스의 검을 밀어냈다.

페델리우스가 순순히 뒤로 밀려났다. 세 개의 검이 튕기며 서로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황녀 전하께 그런 끔찍한 걸 보여주다니 제정신인가!”

“내 앞에서 주인을 모욕하는 걸 그냥 지켜보라는 이야긴가?”

“내게 말했으면 알아서 처리했을 거다.”

페델리우스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페델리우스의 몸에서 살기가 넘실거린다. 난생처음 보는 거대한 감정의 폭발이었다.

평소엔 그것들을 어떻게 몸 안에 집어넣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페델리우스는 어느 때보다 강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그니는 대체 이 기운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어떻게 저렇게 멀쩡한 거야?

“그렇지. 너희 같은 놈들은 그놈들의 인권까지 배려해가며 부드러운 조사에 들어갔겠지. 난 그렇게 사람이 좋지 못해.”

“사람이었나? 개라고 알고 있었는데.”

……페델리우스가 비꽜어?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이다.

“충성스러운 개는 주인을 위해 얼마든지 이를 드러내는 법이지.”

이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페델리우스의 말에 그는 조금도 상처받지 않는 표정이다. 도리어 매우 한가로운 얼굴로 대답하고 있다.

“무슨 생각으로 황녀 전하께 그런 피 웅덩이를 보여드린 거냐.”

“너야말로 대체 뭔데 저분의 눈과 귀를 막으려는 거지?”

“황녀 전하는 오랜 시간 갇혀계신 분이다. 인간의 좋은 점이라곤 하나도 못 보고 자랐어.”

페델리우스가 이그니의 멱살을 붙잡으며 말했다. 애써 목소리를 낮추는 모양이지만, 이야기를 듣지 못할 정도로 방이 큰 건 아니다.

“좋은 것만 보여드려도 황녀 전하께서 평생 받아야 했던 걸 다 누리지 못하실 거다. 마땅히 가져야 할 것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받지 못했어.”

“…….”

“네놈들이 멋대로 판단해서 멋대로 가둬버린 덕분에.”

페델리우스가 잇새 사이로 내뱉었다. 이그니가 묵묵히 그런 페델리우스의 눈을 쳐다본다.

여전히 이그니의 눈동자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다.

연민도, 동정도, 공포도. 단지 그곳에 담겨있는 건 끝없는 공허뿐이다. 이그니가 눈동자를 굴려 나를 쳐다봤다.

“그게 저분의 눈과 귀를 틀어막는 이유가 되는 건가?”

“틀어막은 게 아니야! 때가 되면 다 알려드릴 생각이었다.”

네가 굳이 인간의 목을 자르는 걸 보여주지 않더라도.

페델리우스가 덧붙이며 말했다. 이그니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그리곤 페델리우스를 밀쳤다.

멱살을 잡고 있던 페델리우스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네가 생각하는 만큼 내 주인께선 약하지도, 어리지도 않다.”

“알고 있어. 황녀 전하께선 강하신 분이다. 조금 더 사랑받고, 주어진 것을 제대로 품으며 자랐다면 훨씬 더…….”

페델리우스가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사람이 성장하는 것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야. 그 속에 증오만 품어왔다면 더더욱.”

페델리우스의 주먹이 이그니의 가슴을 아프지 않게 쳤다. 그가 뽑았던 검을 집어넣고 한숨을 내쉬었다.

“두 번은 없었으면 하는군.”

“……주의하지.”

“네가 어떤 세계를 살아왔는지는 대충 짐작돼. 피와 철과 죽음의 냄새가 아주 진동할 정도로 풍겨 오니까.”

페델리우스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네가 모시는 주인에게 그런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건가?”

페델리우스가 묻는 말에 이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말없이 단검 두 개를 다시 허리춤에 집어넣을 뿐이다.

“안 좋은 꼴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으응, 괜찮아. 화났어?”

“조금 화났습니다.”

페델리우스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황녀 전하, 화가 많이 나셨었습니까?”

“응.”

“……그들이 없어졌으면 하셨습니까?”

페델리우스가 차분하게 물어왔다.

그 밤하늘을 닮은 군청색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때만큼은 진심으로 그것을 바랐으니까. 페델리우스가 쓰게 웃었다.

“황녀 전하의 그런 마음을 꿰뚫어보고 저 개가 멋대로 움직인 모양입니다. 이유 없이 죽였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페델리우스는 웃었지만, 평소와 다른 웃음이었다. 그는 어찌해야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멍청히 웃기만을 반복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늘 들어왔던 말과 똑같은 말이 튀어나올까 봐 차마 묻지도 못했다.

말없이 서로만 바라보는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갔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오시리아.”

쿵, 그의 예상치 못한 부름에 심장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피는 제가 묻힐 테니, 부디, 그 눈에 나쁜 것만 담지는 말아주십시오.”

충분히 봐오시지 않았습니까. 페델리우스가 덧붙여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그러겠다는 입에 발린 말조차 해주지 못했다. 이미 잔뜩 봐버려서 말할 수 없는 일까지 해버렸는데 어떻게 그리 말하겠어.

페델리우스가 말없이 창문 밖을 쳐다봤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맑은 날이다.

“점심시간입니다. 식사하러 가시겠습니까?”

“응.”

페델리우스가 뻗은 손을 말없이 붙잡았다. 일부러 묻지 않는 것이 뻔했지만, 나 역시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콰만큼은 들켜선 안 된다.

내가 이그니에게 직접 명했다는 것도 페델리우스는 알아선 안 된다.

그걸 알게 되면, 내가 처음부터 그를 속였다는 사실이 전부 까발려질 테니까. 그것만큼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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