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엘레나가 페델리우스와 대치한 채 앉아있다.
“황녀를 왕궁에 들여 왕궁에서 돌보는 것이 최종적으로 결정됐다. 페델리우스 경.”
그녀의 말에 페델리우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페델리우스는 평소와 같은 꼿꼿한 자세로 엘레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갑자기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엘레나 재상 각하.”
‘갑자기 뭐야?’
몸을 움츠린 채 생각했다.
오늘 아침, 엘레나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막 식사를 마친 후였기 때문에 나는 두 사람을 피해 방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문제는 엘레나가 방으로 올라가려는 나까지 붙잡았다는 거다.
그녀는 응접실에 앉은 채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내가 왕궁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그녀는 나를 한번 보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곧장 페델리우스에게 다시 시선을 옮겼다.
“황녀께선 왕궁으로 들어와 주셔야겠네.”
엘레나가 말했다. 어쩐지 등줄기가 싸하기만 해서 말없이 상황을 살피며 대화를 경청했다.
“그러니까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유를 설명하면 보내줄 건가?”
페델리우스가 나를 쳐다봤다. 그가 평소처럼 입꼬리를 끌어올려 부드럽게 웃는다.
“아뇨. 그럴 일 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지.”
엘레나가 한숨을 삼키곤 넉넉한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끈으로 묶인 고급스러운 양피지였다.
아레나가 잘 묶인 양피지를 곧장 페델리우스에게 내밀었다.
“무엇입니까?”
“열어보게.”
페델리우스가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양피지를 받아들었다.
“후우.”
페델리우스가 한숨을 내뱉곤 양피지를 묶은 끈을 풀었다. 그의 눈이 천천히 글자를 읽어 내린다.
점점 찌푸려지는 미간에 불쾌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콰직, 양피지가 거칠게 구겨졌다.
고급스러운 양피지가 페델리우스의 손에서 순식간에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지금 저랑 장난치십니까?”
“거기에 나와 있는 전부가 진실이네만. 아래 보다시피 폐하의 직인도 있지. 그대에게 거부권은 없어.”
“이번 사태가 문제라면 차라리 조금 잠잠해질 때까지 황녀 전하와 도피라도 하고 있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그대도 알겠지.”
“그럼 몰래 도망치겠습니다.”
“그걸 이 일의 책임자인 내 앞에서 말하는 건가?”
엘레나가 근처에 손짓했다. 그러자 그녀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두 명의 기사가 한 걸음에 성큼 다가왔다.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덩치 큰 기사들에 절로 몸이 굳었다.
이곳은 제국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 반사적인 태도까진 어쩔 수가 없다.
내 팔뚝을 스스로 꽉 쥐었다. 미세한 떨림이 쉽게 멈추질 않았다.
‘괜찮아.’
괜찮다. 괜찮을 거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애써 감았다가 떴다. 두 명의 기사가 내게 손을 뻗었다.
“멈춰.”
훅, 바람이 부는 듯 매서운 기운이 페델리우스에게서 새어 나왔다. 싸늘하고, 시리다. 따뜻한 태양 같았던 페델리우스에겐 어울리지 않는 기운이었다.
“상관없으니 황녀를 모셔라.”
엘레나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기사들의 팔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철컥, 탁! 페델리우스가 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검집째로 뽑아내 손목을 잡은 기사의 손등을 내려쳤다.
“제1기사단장님!”
기사 하나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다음은 손목이다. 그분에게서 당장 손 떼.”
“자네야말로 한 번만 더 방해하면 왕명에 불복하는 것으로 알고 그에 맞게 조처하도록 하지.”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리던 엘레나와 잠깐 눈이 마주쳤다. 엘레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내 눈을 피했다.
‘내가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닌 모양이네.’
아주 잠시 잠깐의 눈 맞춤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화가 나거나 혹은 정말로 내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황녀 전하의 신변은 제게 넘겨주셔놓고 이러시는 게 어딨습니까!”
“그걸 따질 사람은 내가 아닌 것 같군.”
소파에 앉아있던 엘레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치를 보던 기사들이 나를 끌어당겼다.
“내가 다음은 손목이라고 했을 텐…….”
탁, 엘레나의 손이 검을 뽑는 페델리우스의 팔을 붙잡았다.
“그걸 뽑는다면 나는 폐하께 보고를 할 수밖에 없게 돼. 왕명 불복은 반역과 마찬가지야. 내게 하나뿐인 동기의 목을 조르게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꽈악. 페델리우스가 검신을 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감옥이든 저택이든 구금되어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황녀를 면회조차 할 수 없게 되기 전에 오늘은 이만 물러나.”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페델리우스가 소리쳤다. 엘레나가 팔짱을 낀 채 한숨을 삼켰다. 그녀가 몸을 돌렸다.
“이봐. 황녀를 잠시 두고 너희 둘은 밖에서 대기하도록 해.”
“하지만…….”
“너희까지 내 명령에 토를 달려는 게 아니라면 조용히 돌아나가.”
엘레나가 나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기사들이 내 손을 놓고 밖으로 나갔다.
엘레나가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어. 선동하는 이들이 있는 건 분명한데 꼬리가 잡히지 않아 애를 먹고 있네.”
“그게 황녀 전하 때문은 아니잖습니까.”
“그래. 설령 그게 전부 거짓이라고 해도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버렸어. 국민이 그걸 진실로 믿고 있다.”
엘레나가 말을 이어나갔다. 엘레나의 말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상황을 유추했다.
그때 그 공원에서의 선동이 끝이 아니었다는 거지? 보이지 않는 악의가 날카로운 칼처럼 몸을 들쑤신다. 한숨을 삼켰다.
“그대의 말은 알겠어. 그러나 귀족들의 여론도 황녀의 신변을 왕궁에 구속해두자는 데 모였어. 폐하는 말을 아끼고 있다.”
“엘레나 재상!”
페델리우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대가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도 오랜만의 일이네.”
엘레나가 눈이 샐그러지게 웃으며 말했다. 웃는 것도,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이 퍽 이상하다.
“페델리우스. 친우로서 한마디 할게. 지금은 일단 한 발 뒤로 물러나.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폐하께 가도록 해.”
그녀가 손을 뻗어 페델리우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쥔다.
후우. 페델리우스가 긴 숨을 뱉었다.
“대신 호위 하나는 붙이게 해주십시오.”
“호위는 왕궁에서 제공할 거야.”
“믿을 수 없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것이니 거기까지는 양보해주십시오.”
엘레나가 답답한 듯 팔짱을 꼈다.
그녀가 곤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다. 어쨌든 엘레나는 지금 페델리우스가 어찌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닌 듯했다.
“누군데?”
“황녀 전하. 그자를.”
페델리우스가 말했다. 그는 시종일관 불쾌한 표정이었으나 다시 말을 번복하지는 않는다. 페델리우스가 말하는 게 누군지 모르진 않았다.
“이그니.”
“예, 주군.”
내가 그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이그니가 내 옆에 내려와 한쪽 무릎을 꿇곤 대답했다.
‘어디서 나온 거야?’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새삼 그의 존재를 알아챈 페델리우스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페델리우스. 이런 위험한 자는 또 어디서 데리고 왔나.”
“가능합니까?”
“전신을 검은 천으로 둘둘 감싼 저 복장을 멀쩡하게 갈아입는다고 약속한다면.”
페델리우스의 양보에 엘레나도 한 발 뒤로 물러나기로 한 듯했다. 이그니의 의사도 묻지 않고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 겁니다.”
이그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여튼 쟤도 의견을 쉽게 안 굽힌다니까.’
묘하게 석상 같은 면이 있다. 쉽게 물러나지도 않는다. 한 번 정한 일은 무조건 밀고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웬일로 이그니는 페델리우스의 말에 이견을 덧붙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페델리우스가 내게 성큼 다가왔다. 그가 팔을 뻗어 잡은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내 손바닥에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손가락에 한 번씩 입을 더 맞춘다.
“곧 데리러 가겠습니다.”
짝! 이그니가 페델리우스의 손목을 때렸다. 커다란 소리에 눈이 절로 커졌다.
동시에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기습공격에 페델리우스가 놓친 것 같았다. 그가 인상을 구기며 이그니를 노려봤다.
“더러운 손은 치우고 말해라.”
이그니가 담담히 말했다.
“더럽지 않다.”
“더러워.”
이그니의 말에 페델리우스가 아예 나를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곤 이그니를 등지며 다시 손을 잡아 왔다.
‘얘들 대체 뭐 하는 거야.’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인형이라도 된 기분이다.
“황녀 전하.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페델리우스가 단단히 굳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페델리우스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불편하겠지만, 지금으로선 그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민폐 끼치기는 싫어.’
그리고 행동이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거다. 그러면 하던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전쟁이 나기 전에 내가 먼저 제국에 가야 했다.
“페델리우스.”
내 부름에 그의 눈이 말없이 커졌다.
“예.”
“난 괜찮아.”
괜찮을 거다. 죽지 않을 자신은 있다. 내 힘만으로는 안 되겠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쉽게 죽진 않을 거다. 다만 페델리우스가 걱정이다.
‘나 때문에 표적이 될 수도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그 왕이 손을 썼다는 건 일이 그만큼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겠지.
“……예. 곧 만나 뵈러 가겠습니다.”
페델리우스의 손등에 힘줄이 돋아났다. 꽉 쥔 주먹이 떨리고 있다. 고맙고 미안한 사람이다.
왕명이라면 곧바로 나를 내칠 줄 알았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그가 내뱉었던 말대로 약속을 지켰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한다.
“페델리우스 경, 이제 시간이 없다. 황녀께서도 이만 가시지요.”
“응.”
페델리우스에게서 몸을 돌렸다.
제국이 조금 더 많은 수의 자객을 보내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페델리우스와 약간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페델리우스는 워낙 과보호를 하니까.’
한시도 떨어지려고 하질 않아서 곤란하다. 물론 싫은 건 아니지만.
달칵, 엘레나 재상이 문을 열었다. 내가 그 뒤를 따라 나가자 이그니도 내 뒤를 따라 나왔다.
“황녀.”
복도를 조금 걸었을 때 엘레나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응?”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마차에 가면 대답해줄 수 있습니까?”
“질문?”
“네, 질문입니다.”
대화하는 사이에 이미 마차 앞에 도착해 있다. 제법 널찍한 마차였다. 눈앞에 보이는 마차에 숨을 삼켰다.
‘괜찮아.’
애써 이그니의 도움을 받아 내가 먼저 올라가고 엘레나가 뒤를 따라 올라왔다.
“저는 밖에서 말을 타고 따라가겠습니다.”
“응, 알았어.”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부르십시오.”
“응.”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이그니가 그러고도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느리게 문을 닫았다.
‘이그니도 과보호야.’
페델리우스도, 이그니도, 심지어 메리도 분명히 나를 과잉보호한다.
물론 내가 그런 게 필요한 사람을 연기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그니는 다 알면서 저래.’
모든 걸 다 아는 이그니도 애 취급을 하는 건 영 마음에 들진 않는다. 그래도 고맙긴 하지만.
덜컹, 마차가 기묘한 음을 내며 출발했다. 속이 울렁거릴 것 같아서 애써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엘레나가 이쪽을 보고 있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조금 떨떠름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방긋, 웃어주니 엘레나의 몸이 움찔 떨렸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응!”
“예전부터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만. 당신이 말을 알아듣는 수준은 사실 어린아이나 백치라고 할 법한 게 아닙니다.”
“……으응?”
눈이 절로 깜빡여졌다. 내 반문에 엘레나가 옅은 한숨을 삼키며 팔짱을 꼈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지만 어쩐지 말투에는 확신이라는 것이 묻어났다.
‘안 돼, 설마…… 아니지?’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애써 모른 척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기울였다.
“가끔 보이는 눈빛도 어린아이라고 할 법한 게 아니었습니다.”
겨우 두 번인가 세 번 만났다. 그것도 엘레나와 대화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눈치챘다는 말인가?
“그리고, 폐하께서 당신과 독대를 했습니다. 그분은 느긋하게 보여도 인내심이 강한 분은 아니십니다.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게 서툰 분이죠.”
“…….”
“서툰 말을 하던 당신과 대화를 했을 거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습니다.”
‘왕이라니. 결국, 왕 때문인 거야?!’
“그래서 생각한 겁니다만, 지금 연기를 하고 계시는 겁니까?”
결론은 다 들켰다는 거다.
어쩌지? 죽이기엔 왕이 아끼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기억을 지울 수 있는 특별한 힘이 내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조금 예민한 것뿐이고, 이번엔 폐하의 행동이 수상해 당신을 조금 깊게 관찰한 것뿐이니까요.”
“…….”
“그리고 숨기는 데 이유가 있다면 타인의 비밀을 굳이 발설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입이 가볍진 않아요.”
거짓말.
사람은 쉽게 거짓말을 하고, 쉽게 등을 돌린다. 특히, 페델리우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그녀는 왕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왕국의 일에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내 비밀을 밝힐 사람이었다.
사람은 믿고 싶지 않다. 상대가 정말로 믿을 만한 사람이라도 믿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상처받을 날이 올 수도 있다면 그 가능성을 한없이 0으로 만들고 싶었다.
“페델리우스에게도 말하지 않은 눈치던데……. 이유가 무엇입니까? 페델리우스가 믿음직하지 않았습니까?”
엘레나의 말에 조용히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이미 확신하고 있는 자의 말투다. 거짓도, 변명도, 연기도 필요 없다.
‘방해가 된다면…….’
생각하다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요즘 모든 사고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보단 일단 목숨을 빼앗는 것이 먼저인 것처럼 머리가 굴러가고 있다.
“페델리우스는 나와 한 약속을 지켜준 유일한 사람이야. 믿음직하지 않을 리도, 소중하지 않을 리도 없잖아.”
짧은 고민 끝에 결국 입술을 뗐다. 엘레나의 눈이 조금 동그랗게 뜨였다. 말이 유창해서 놀란 건지 그저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놀란 건지는 모르겠다.
“말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 지키는 게 좋을 거야.”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적어도 네가 이 땅을 밟고 서있진 못하지 않을까?”
엘레나의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내키지 않은 대답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협박이란 대개 목숨에 한정된 것뿐이다.
나는 아콰와 신의 힘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당신은 왕국에서도 계속 백치처럼 굴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거기선 위험부담 때문에 그랬다고 쳐도 우리나라에서까지 그러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엘레나가 말을 이어갔다. 페델리우스가 말하길 그녀는 굉장히 똑똑하다고 했다. 천재에 가까울 정도로 타고난 두뇌를 가졌다고.
“유추해봤습니다만, 혹시 뭔가를 꾸미고 계십니까?”
“뭔가?”
“당신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은 게 제국 쪽이라면……. 제국, 제국에 뭔가를 하려는 생각이라든가.”
엘레나는 말을 하면서도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럴 만했다.
그녀가 보기에 나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뒷배도 없는 사람이니까.
“약속대로 내가 멀쩡하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줘.”
“최대한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폐하께선 당신의 일을 알고 계시는 겁니까?”
“응. 아마도 첫날, 눈치챘던 것 같아.”
“그렇군요. 그래서 말을 바꿔서 당신을 받아들인 건가…….”
엘레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고 싶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누군가 비밀을 알게 되는 건 상관없다.
단, 이 나라 전체가 알아도 제국은 몰라야 했다. 첩자를 통해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일은 피해야 했다.
“엘이라는 기사를 제법 마음에 들어 했다고 들었습니다.”
“아, 응. 엘! 기억나!”
“…….”
“……가, 아니라 기억나. 응.”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연기가 습관이 되어버린 인생이란 서글프기 그지없다.
이러다 나중에 페델리우스한테도 계속 이러는 거 아닐까 모르겠다.
‘물론 페델리우스는 끝까지 몰랐으면 하지만.’
“……예.”
엘레나가 뒤늦은 대답을 했다.
“그자를 개인 호위로 붙여드렸습니다. 기왕이면 눈에 익은 사람이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
“아, 응. 고마워.”
생각보다 배려 넘치는 사람이다. 혹시나 덩치 크고 무서운 기사면 어쩌나 싶었는데 엘이라면 문제없다.
샛노란 머리카락에 덩치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덜 무서운 사람이 좋아.’
옆에 계속 붙어있을 거라면 더더욱.
“있잖아, 엘레나.”
“아, 네.”
“누군가를 죽이는 건 나쁜 일인 거야?”
“누군가를 이유 없이 죽인다면 당연히 나쁜 일입니다.”
엘레나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죄가 없는 사람을 죽이는 건 나쁘다.
죽음이란 혼이 빠져나가 이 세상에서 누려야 할 것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는 거라고 했다.
“이유가 있다면?”
“이유가 있다면…… 이유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엘레나가 미간을 구긴 채 대답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그냥.”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냥 문득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이그니와 아콰는 나라면 얼마든지 그리해도 된다고 했고, 왕과 페델리우스는 하지 말라고 했다.
‘엘레나는 또 달라. 이유에 따라서 달라진다니…….’
누구 말이 옳은지 잘 모르겠다.
누군가 어떤 사람의 말이 가장 옳은지를 알 수 있는 법을 책으로 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인간으로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을 적은 책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죽이는 것도, 죽이고 싶은 상대를 용서하기도 쉽진 않겠지만, 확실한 건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겁니다.”
“무슨 소리야?”
“당신이 만약 저를 죽인다고 칩시다.”
“내가 널 왜 죽여?”
“만약입니다. 만약. 황녀.”
굳이 자기 자신을 예로 들 필요는 없지 않나.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않던 사람이 담담하게 자기의 죽음을 말하니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다.
“나는 당신의 소중한 사람을 죽였고, 당신은 마땅한 이유가 있어서 저를 죽였어요.”
“……응.”
“그런데 제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었죠. 당신이 절 죽였으니 절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무척 화가 날 거야.”
엘레나의 말에 어렵지 않게 답을 찾아냈다.
내가 대답하자 엘레나가 그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원망까지 업고 간다는 겁니다. 그것만 알고 계신다면 선택은 황녀의 몫이죠.”
엘레나는 하라고 하지도, 하지 말라고 하지도 않았다. 내 선택이라고 떠넘긴 그 말은 머릿속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일단, 말씀드리고 싶은 건 하나입니다.”
“응?”
“왕궁으로 들어가면 모든 이들이 당신의 적일 겁니다. 생각보다 불안감이 훨씬 가중되어 왕국 전체를 들썩이게 하고 있어요.”
엘레나가 초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각오했음에도 속이 좋진 않다. 타인의 악의란 지겹도록 겪어왔음에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제국의 오랜 가뭄은 이곳까지 이야기가 퍼졌으니까요.”
“사람은 죽는 걸 무서워하니까.”
“네, 목숨과 직결되었으니 아마 더 그럴 겁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당신은 정말 저주받은 사람입니까?”
엘레나의 물음에 나는 말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나 어떤 대답도 내놓지 않았다. 만약 내가 대답할 수 있었다면 오래전에 얘기해서 훨씬 더 좋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저주라…….’
처음엔 아니었다. 처음엔 분명히 아니었을 거다.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아콰를 만나기 전에는 내게 쏟아지는 폭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밥을 주러 오는 사람들이 하는 말대로 태어나선 안 되는 존재가 태어났음에도 흔쾌히 키워주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맞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굶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배가 고프다 못해 아플 정도로 굶어도 그건 내게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사람이 어두컴컴한 방에 갇혀 산다고 생각했다. 창문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은 뭘까, 고민했던 적도 있다.
나는 그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편이 훨씬 편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실제로 그랬다.
아주 가끔, 나는 그때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아무것도 몰라서 내게 행해지는 부당한 일들이 그저 당연하다고 여겼을 때가 그리울 때가 있었다.
“있잖아, 엘레나.”
말없이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불렀다. 마차는 왕궁 안으로 들어섰다.
“저주란 건 뭐야?”
“네?”
“타인에게 불행을 주는 게 저주야? 저주라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어? 태어난 게 저주인 사람도 있을까?”
“저주는 그러니까…….”
엘레나는 말문이 막힌 듯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럴 것 같았다. 사람들은 심심하면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만 정작 그 의미를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차라리 그냥 솔직히 말해줬으면 좋겠어.”
“……무슨.”
“불행의 이유를 떠넘겨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낼 제물이 필요하다고 말이야. 차라리 그랬다면 그렇게 비참한 기분이 들진 않았을 텐데.”
차라리 그랬으면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제국에서도 그랬다. 저주라거나, 불행을 타고났다거나, 신에게 버림받았다거나. 그런 수많은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솔직히 말해줬으면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오랜 시간 사람을 관찰했어. 사람은 역시 자기보다 못한 누군가가 있어야 하더라. 깔보고 얕보고 함부로 대해도 찍소리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필요한가 봐.”
엘레나가 정말 이 사태를 잠재우기 위해 나를 왕궁으로 끌어들였는지는 모르겠다.
왕의 명령이었다고 해도 그 왕이 무슨 생각인지 머리 나쁜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미 웬만해선 사태를 수습하기 힘든 지경에 도달했다는 거다.
“거대한 나라에도 분명히 화살받이가 하나쯤은 필요했겠지.”
나는 제국의 화살받이였고, 이번엔 누군가에 의해 벌거벗겨져 왕국의 광장에 걸린 것뿐이다.
“엘레나, 이제는 아마도 내가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 여부는 조금도 관계가 없을 거야.”
언젠가 아콰가 그런 적이 있다.
잔잔한 물은 무섭지 않다고. 그러나 그 물이 한꺼번에 모이는 어느 지점에 가면 급류가 되어 뭐든지 집어삼키는 흉포한 맹수가 된다고.
이번 일도 비슷한 사태라고 생각한다. 작은 일렁임이 순식간에 크기를 키운 거겠지.
그게 귀족들에게까지 전해지니 걷잡을 수 없어진 거고.
“내가 또 방해가 됐나 봐.”
마차가 멈췄다. 슬슬 한계였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먹 쥔 손이 새하얗게 질려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곳은 조금은 낡아 보이는 성이다. 아마 이게 그녀와의 마지막 대화가 될 거다.
내가 아무리 자르딘 왕국을 마음에 들어 해도 결국 내가 있을 자리는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제국의 손길이 닿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가두는 건 상관없어. 익숙하니까.”
그냥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엘레나는 왕국이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는다. 아마 가장 좋은 선택은 나를 어딘가에 가두는 것일 테지.
‘세월이 지나도 사람은 변하질 않네.’
그래도 조금은 서글퍼졌다.
원한다면 이런 성쯤은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겠지만, 그냥 서글펐다. 이유는 알 수 없이 그저 심장 한쪽이 찌르르했다.
“가두려는 게 아닙니다.”
“응.”
마차 문이 열리며 시원한 공기가 훅 들어왔다. 이그니가 내게 손을 뻗는다. 굳어진 표정이 그도 앞으로 있을 일을 대충 예견한 듯했다.
가까이서 보니 한층 더 스산한 성이다.
‘관리 안 되는 성도 있기는 한가 보구나.’
어디에서 지내든 다락방보다 못한 곳이야 없겠지만.
‘페델리우스가 알면 엄청 화내겠네.’
“사태가 잠잠해질 때까지만 참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엘레나가 허리를 굽혔다.
그녀로서도 분명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다. 엘레나는 재상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멋대로 할 힘이 있는 건 아닐 테니까.
“시녀는 따로 배정해두었습니다.”
“…….”
보는 눈이 있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엘레나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화가 나진 않는다. 익숙한 대접에 약간의 정중함이 더해져 도리어 조금 신선할 정도다.
‘이편이 낫지. 제국을 왔다 갔다 하려면.’
성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그니가 곧장 뒤를 쫓아온다.
‘메리에게 인사도 못 했는데.’
울지 않으면 좋겠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가슴이 아팠으니까.
페델리우스는 강한 사람이니까 분명히 괜찮겠지.
뚝, 발이 멈췄다. 주먹을 꽉 쥐었다. 손이 부들거릴 정도로 강하게 쥐어 봤자 누구 하나 목 졸라 죽일 수 없을 거다.
‘왜 나만 늘…….’
고개를 숙인 채 성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살지 않았던 성인지 스산하기 그지없다. 누가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 어울리는 꼴이네.”
울컥, 눈으로 몰리려는 열기에 그저 이를 악물었다.
무엇을 잘못했던가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자르딘에서는 그저 잘하려고 했다. 원한다면 평생 정체를 숨길 마음도 있었다.
평생 백치처럼, 어린아이처럼 굴어도 괜찮았다.
‘페델리우스…….’
그가 닿았던 온기가 그립다.
“앗, 황녀 전하!!”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휘날리는 노란색 머리카락. 엘이었다. 호위를 한 명 붙여준다고 하더니 먼저 와있었나 보네.
“엘!”
그래도 아는 사람을 만나니 조금 반갑긴 하다. 엘이 내 손등을 붙잡고 저번처럼 입을 맞췄다.
“또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응! 좋아!”
“제가 황녀 전화를 호위할 수 있게 되다니. 경쟁이 얼마나 셌는지 아세요? 흑흑, 저 정말 고생 많았어요.”
동글동글한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엘이 말했다.
괜히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다. 손을 뻗어 엘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줬다. 또 좋다고 하니 이쪽도 기분이 좋아지네.
“어? 뒤에 저분은 누구예요?”
“음…….”
“음?”
“이그니!”
“이그니?”
엘의 고개가 옆으로 툭 기울어졌다.
엘의 눈이 이그니를 향했다. 이그니는 팔짱을 낀 채 당당하게 엘을 마주봤다.
“집사인가요?”
“아니! 지키는 사람!”
“헉, 호위예요?! 저 말고 또 있는 거예요?!”
엘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퍽 속상해 보이는 모습에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럼 어떡해. 페델리우스가 데리고 가라고 했고, 나도 이그니가 있으면 편한걸.
“밖이 조금 시끄럽지만, 곧 잠잠해질 거예요.”
“응.”
“선배님들도 다 황녀 전하를 걱정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힘내요!”
“응!”
모른 척 환하게 웃어주니 엘이 해맑게 마주 웃는다. 엘의 화사함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일단 말을 퍼뜨린 사람이라도 잡혀야 할 텐데.’
안내해주겠다며 앞장서는 엘을 따라서 뒤를 쫓아갔다.
뭘 우선순위로 둬야 할지 모르겠다.
자르딘 왕국까지 와서 말을 퍼뜨린 범인을 잡는 거? 아니면 제국을 고립시키는 거?
어느 쪽이든 둘 다 내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제국의 첩자가 들어와 있다고 하더라고요.”
“첩자?”
이번에 되물은 건 내가 아니었다. 옆에서 따라오던 이그니였다.
엘이 2층으로 올라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소문을 퍼뜨린 것도 제국 첩자의 짓이라는 얘기가 많아요. 그래서 지금 수사 인력을 그쪽으로 돌리고 있어요.”
“귀찮게 됐군.”
이그니가 혀를 찼다. 저번에 도망친 첩자도 있었다. 분명히 그냥 물러설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사람이 소문을 퍼뜨리고 다닐 수도 있어.’
거기까지 생각하니 괜히 머리가 아팠다. 깨끗하게 해결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해결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복잡함 위에 또 다른 복잡함이 끼얹어졌다.
“여기가 황녀 전하의 방이에요! 오시기 전에 제가 깔끔하게 치워놨어요.”
“엘! 착해!”
“칭찬받으니 기분이 좋네요. 식사하시겠어요? 주방에 시녀가 있거든요. 음식을 좀 가져오라고 할까요?”
“나중에. 나 쉴래.”
고개를 젓자 엘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진짜 쉬고 싶었다. 머뭇거리던 엘이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곤 방에서 나갔다.
“이그니도 옷 갈아입고 쉬어. 나 좀 잘래.”
“……알겠습니다. 필요하시면 불러주십시오. 근처에 있겠습니다.”
“응.”
그가 창문이 잠겼는지 점검을 한 번 하더니 곧 허리를 굽히곤 사라졌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봉변이야.’
눈을 감았다.
“페델리우스.”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보고 싶다.”
텅 빈 방이 이토록 싸늘할 수가 없었다.
“아콰.”
[…….]
“아콰?”
[…….]
두 번을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평소라면 부르자마자 곧바로 대답했을 아콰다. 잠이라도 자나? 정령한테 잠이 필요하진 않을 텐데.
“아콰아.”
[……네, 주인님.]
목소리가 들렸다. 아콰가 손등에서 쏙 모습을 드러냈다. 어쩐지 지치고 피곤해 보인다.
“무슨 일 있었어?”
[아뇨, 그냥 조금 몸이 나른해서…….]
아콰가 한층 풀린 눈으로 내 앞에 주저앉았다. 어린아이의 형체는 여전한데 정말 피곤한 듯 눈을 비비고 있다.
“왜 그러지? 어디 아파?”
[아니에요, 이 성이 조금…… 이상한 것 같답니다.]
“그럼 들어가서 쉬는 게 어때?”
[네에……. 금방 익숙해질 것 같으니 조금만 더 쉬고 나올게요.]
“응, 그래.”
아콰가 순식간에 연기처럼 변해 내 손등으로 사라졌다.
빛나던 신의 문양이 다시 모습을 감췄다. 다시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텅 빈 방에 혼자 있으려니 기분이 좋진 않다.
‘이그니를 괜히 가라고 했나.’
하지만 정말 지쳤다. 엘레나가 내게 보인 것은 악의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부드럽고 일렁이는 감정이었다.
그 감정에 어떤 이름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나 악의가 아님에도 나는 이곳에 있다. 혼자는 싫다. 끔찍이도 싫었다.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밤이 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