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챙- 눈앞이 긴 창으로 가로막혔다.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기사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숨을 삼켰다.
“비켜라.”
짜증을 억누르며 명령했다. 그러나 기사들은 비키지 않는다. 그들은 결연한 의지를 담은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한동안 제1기사단장님의 왕궁 출입을 금하라는 재상 각하와 위대하신 폐하의 명령입니다.”
“……닥치고 비켜.”
“그럴 수 없습니다. 왕명을 거역해선 안 됩니다, 단장님.”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따지려면 직접 찾아오라더니 이런 식으로 막아버려? 속이 들끓어서 분노로 머리가 새하얗게 변할 것 같았다.
“폐하께 드릴 말이 있으니 비키라고 했을 텐데.”
분노로 떨리는 손을 검집에 가져다 댔다. 평소라면 충분히 제어했을 살기가 도저히 갈무리되질 않았다.
이러한 일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는다.
“안 됩니다.”
두 기사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얼굴에 역력한 긴장감이 그들도 공포에 떨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럼에도 비키지 않는다는 건…….
“네놈들도 황녀 전하가 저주받은 존재라고 생각하는군.”
내 휘하 단원은 아니다. 단지 그 사실 하나만이 분노를 삭이게 했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으나 대답을 들은 것처럼 속이 쓰렸다.
“외람되오나 페델리우스 단장님이 그 황녀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소문도 돌고 있습니다.”
“이봐! 그런 소리를…….”
기사 하나가 입술을 깨물며 대답하자 옆에 있던 기사가 말린다.
그제야 깨달았다.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엘레나 재상이 직접 찾아왔던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이마를 짚으며 짜증을 삭였다. 왜, 왜……. 그분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그러니 그 소문을 기정사실로 만들고 싶지 않으시면 단장님께서도 돌아가셔서 생각하실 시간이 필요할 듯합니다.”
“지금 일개 기사 따위가 날 협박하는 건가?”
“그런 의도는 없었습니다. 다만, 그만큼 여론이 불리하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검을 뽑아 두 사람에게 움직이지 못할 상해를 입히고 황녀 전하를 찾으러 가는 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데리고 도망치는 것도 문제다.
‘정말 소문이 그런 식으로 돌면 걷잡을 수 없어.’
불과 마그마로 타오르던 머리가 그제야 조금씩 가라앉는다. 그런데도 뜨거운 머리에 눈앞이 둘로 갈라져 보이기도 했다.
“정말 다 죽여버리고 싶군.”
악문 잇새로 말이 튀어나왔다.
눈앞에서 빼앗기는 게 아니었다. 검을 들이대서라도 엘레나 재상이 황녀를 데리고 가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거짓 소문에 놀아날 줄이야.
“소문을 퍼뜨린 놈은 누가 조사하고 있지?”
“수도의 경비대가 따로 조사를 맡고 있습니다.”
“진척상황은 알고 있나?”
“아뇨, 거기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시원스럽지 않은 대답이다. 기사단장씩이나 되어서 왕성의 출입권한을 박탈당하다니.
스스로의 꼴이 우습기 그지없다. 비릿한 헛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걸 애써 억눌렀다.
“황제 폐하께 내 말을 그대로 전해라.”
“예, 알겠습니다.”
“수도 경비대에 합류해 소문을 퍼뜨린 유포자를 체포하겠다고. 수사에 합류한다고 전해라. 만약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개인적으로 움직일 거라고도.”
“예, 알겠습니다.”
대답을 듣곤 곧장 몸을 돌렸다. 일단 소문의 유포자를 잡아서 이야기가 더 퍼지는 걸 막아야 한다.
이미 퍼질 대로 퍼졌지만, 일부러 그랬다는 증거는 있어야 했다.
수도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발을 멈췄다.
“한 가지 더.”
“예.”
“이건 재상 각하께 전달하도록.”
“예, 말씀하십시오.”
기사가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말을 들은 두 명 중 한 사람이 곧장 몸을 돌려 왕궁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걸 보다가 다시 수도를 향해 걸음을 뗐다.
* * *
똑똑.
페델리우스에게 명령을 받아 곧장 황제의 집무실로 뛰어온 기사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무실 안은 엉망이었다. 고개를 숙였지만,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온갖 양피지들엔 하나같이 글씨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무슨 일이지?”
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왕은 굉장히 피곤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그 옆에는 엘레나 재상 또한 있었지만 둘 다 표정은 좋지 않았다.
분위기가 영 좋지 않은 걸 민첩하게 깨달은 기사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방금 제1기사단 단장, 페델리우스 윌하튼 단장님께서 왕성 출입구에 도착하셨다가 돌아가셨습니다.”
“……하아.”
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피곤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가 순순히 돌아가던가?
”
“아뇨, 문을 부수고 들어올 기세였습니다.”
“그렇겠지. 굳이 그 보고를 하러 온 것이냐?”
“아닙니다. 페델리우스 단장님이 남기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기사의 말에 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 왕성에서 페델리우스의 성격을 가장 잘 아는 건 왕과 엘레나였다.
평소엔 얌전한 듯 보이지만 생각보다 다혈질이라는 건 두 사람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화나는 일에는 정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말해라.”
“제1기사단장님께서는 오늘부터 수도 경비대에 합류해 소문을 퍼뜨린 유포자를 체포하기 위해 수사에 참여한다고 하였습니다.”
“……생각보다 어른이 됐군.”
“만약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개인적으로 움직이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방금 한 말 취소. 아직도 애구나.”
왕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라고 하고 싶어서 한 선택은 아니나 왕의 권력으로 밀어붙이기엔 예민하고 민감한 사항이다.
‘페델리우스에겐 말을 번복한 꼴이 되었으니.’
그의 처지도 우스워졌다. 황녀의 신변에는 손도 대지 않겠다고 한 약속은 저 멀리 바다에 처박힌 기분이다.
곤란한 건 왕인 그도 마찬가지였다.
“알겠다. 허가하지. 경비대에 따로 언질을 줘두겠다. 이만 나가보거라.”
“……아, 저기…….”
눈을 내리깐 기사가 머뭇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나가지 않고 일어나지도 않는 기사를 보던 왕이 턱을 괴었다.
“왜?”
“엘레나 재상 각하께도 전할 말씀이 있습니다.”
“내게 말인가?”
옆에 서있던 엘레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도록.”
“그……. 이 말은 그대로 전달해달라고 했기 때문에, 페델리우스 단장님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겠습니다.”
비장한 표정의 기사가 말했다.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흠.”
헛기침을 한 번 한 기사가 눈을 매섭게 뜨며 엘레나를 노려봤다.
“다음에 만나면 한 대 때릴 테니까 각오하고 있어. 망할 새끼.”
엘레나의 눈이 커지는 것과 동시에 기사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내리깐 시선으로 기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벌렸다.
“……라고 눈빛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전달해달라고 하셨습니다.”
“…….”
“단단히 화가 났군. 큰일 났네, 엘레나 재상.”
왕이 말이 없는 엘레나에게 말했다. 엘레나는 제법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뜬 채 미동이 없었다.
왕이 손을 내젓자 기사가 고개를 깊게 숙이곤 집무실을 벗어났다.
“엘레나 재상.”
“……예.”
“너무 충격받지 마. 그대는 그대가 할 일을 한 것뿐이야. 페델리우스도 페델리우스의 일을 하고 있던 것뿐이고.”
“아뇨, 그냥……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늘 격식을 차리는 자였으니까.”
엘레나가 대답했다. 왕의 얼굴에 시름이 생겼다. 이번 일은 그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인간이란 정말 곤란해.’
쉽게 달궈지고, 쉽게 화내고, 쉽게 풀고, 그러나 그 쉬운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복잡하게 흘러간다.
오랜 시간 살피고 섞여들었어도 역시나 그런 섬세한 것들까지 이해하긴 어려웠다.
‘인간만큼 추하고 욕심 가득하지만, 한없이 사랑스러운 존재도 없지.’
그러니까 놓을 수 없는 거다. 불쾌할 때도 잦지만 결국은 사랑스러워지는 인간을.
왕이 손을 뻗어 엘레나의 볼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볼에 닿은 온기에 놀란 듯 엘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폐하?”
“참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존재들이야. 너도, 페델리우스 그 아이도.”
“……무슨.”
“그러니 그런 표정 하지 말아라. 엘레나.”
왕의 부름에 엘레나의 눈이 한층 더 크기를 키웠다. 꼿꼿하게 선 엘레나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볼에 닿았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이런, 장난은 삼가주십시오.”
엘레나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난 그대에게 장난한 적 한 번도 없어.”
“……진심이라면 더더욱 하지 마십시오.”
엘레나의 말에 왕의 눈이 굳었다.
‘역시 내가 눈독 들인 인재네.’
엘레나는 똑똑하다.
타인의 감정에도, 스스로의 감정에도 예민한 사람이었다. 왕은 엘레나의 천재성에 감탄해 그녀에게 왕궁으로 오는 길을 제시했다.
“그래서, 도대체 혼담은 언제까지 피할 예정이십니까?”
“글쎄. 그러게. 왜 그럴까. 이야기는 다 짜여있을 텐데…….”
왕이 중얼거렸다.
시작부터 끝까지, 그는 자신의 인생을 설계해둔 터였다. 대개는 예정대로 흘러가고 있다.
이번 사태만큼은 예정에서 한참 벗어났지만, 어쨌든 그랬다.
주홍빛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타오르는 태양을 닮은 색이다.
“당신에게는 분명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레이시스 후작 영애도 선하고 좋으신 분입니다. 제 생각엔 그리 권력이나 물욕도 없으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럼 그 여자랑 결혼할까?”
“……만나보지도 않고 말입니까?”
“파티장에서 몇 번 봤어. 그쪽도 날 봤겠지. 어차피 정략결혼인데 뭐가 더 필요하겠어. 사람 보는 눈이야 나보다 그대가 더 뛰어날 테니.”
왕의 말에 엘레나의 미간이 구겨졌다. 구겨진 미간에 짜증이 서렸다.
그녀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황녀 전하는 어쩔 생각이십니까?”
“상황을 봐야지. 본궁에 들이는 건 귀족들이 절대 반대하고, 결국 내어준 게 성 하나인데…….”
그곳에 경비를 두는 것조차 내켜 하지 않는다.
왕의 골머리를 썩이는 건 그 부분이었다. 자신이 있으니 경비병이 없어도 지킬 수야 있겠지만.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해서. 뭔가 꺼림칙하단 말이지.”
“갑작스럽게 소문을 퍼뜨린 것도 분명히 무슨 목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어차피 방해되어 이쪽으로 보낸 황녀에게 무슨 볼 일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엘레나가 유추한 상황을 술술 입에 올렸다.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에 왕이 한숨을 삼켰다.
그로서는 이유가 대충 감이 잡혔다.
간단했다. 돌덩이로 생각했던 것이 사실 귀한 보석이라는 걸 눈치챈 자가 있는 거다. 그것도 상당히 머리가 좋은 자가.
“페델리우스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 한동안 황녀는 이쪽에 둘 거다.”
“경비를 좀 더 늘리도록 지시하겠습니다.”
“괜찮겠나?”
“예. 제1기사단원들은 유일하게 소문에 휩쓸리지 않고 있으니 그들에게 일을 맡기면 될 듯싶습니다.”
“그러도록 해.”
“그리고…… 못 지켰다간 한 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엘레나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왕이 엘레나를 보다가 곧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맘에 들어 하는 두 아이가 다 사고뭉치라 곤란해.’
그래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군사와 이웃 나라의 협력은 얻어두었습니다. 적당한 명분만 있으면 언제든지 출격할 수 있습니다.”
“저쪽에서 조금 더 이를 드러내 주면 좋을 텐데 말이지.”
명분 없이 일으키는 전쟁은 다른 나라들의 불안을 사기 마련이다. 불안이 생기면 공포가 생기고 공포가 생기면 반발이 생겨난다.
제국을 치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제국을 친 후에는 폐하께선 진정한 황제로 거듭나시게 될 겁니다.”
“그래, 기대하고 있어.”
엘레나의 말에 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왕국에서 벗어나려면 언제고 제국을 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오랫동안 염원해온 것이 드디어 코앞까지 다가왔다. 엘레나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 그리고 그대가 말한 그 후작 영애.”
“네.”
“정말 그대가 괜찮다고 생각하면 자리를 마련해봐. 만나서 괜찮으면 그대가 원하는 대로 결혼을 할 테니.”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엘레나의 놀란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슬슬 나도 후계자를 생각할 때긴 하니까.”
왕이 덤덤하게 말했다. 왕의 말에 엘레나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 습니다.”
“그래. 그대도 나가서 볼 일 보도록 해.”
“예.”
엘레나가 허리를 굽히곤 몸을 돌렸다. 미련 없이 집무실을 뒤로하는 엘레나의 모습에 왕이 헛웃음을 흘렸다.
탁, 문이 닫혔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으면 있다고 말해도 전혀 화내지 않을 텐데.”
소파에 드러누우며 왕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감정을 억누르는 게 익숙한 이들은 그걸 죽을 때까지 드러내지 않는다. 아마 저대로 둔다면 정말 혼담까지 쭉 진행해줄 거다.
그것도 손수.
“어떻게 해야 저 목석을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만들 수 있을지.”
왕이 소파에 누운 채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