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심심해.”
잠도 오질 않는다. 드러누워 뒹굴거리다가 하는 일이라곤 한숨을 푹푹 내쉬는 것뿐이다. 이그니도 오질 않고, 엘도 오지 않는다.
물론 내가 오지 말라고 했지만…….
“밥 먹을까?”
맨날 붙어있던 메리도 그립고, 페델리우스도 그립다. 아직 온 지 몇 시간도 안 됐는데 온기가 그리워질 줄 몰랐다. 밤이나 되어야 내게도 자유가 생긴다.
‘아콰가 없어도 물을 조종할 줄은 아니까.’
날개를 만들거나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건 분명히 문제없을 거다.
그래도 그걸 하려면 밤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낮에는 푹 잘 수 있겠지.
‘그렇게라도 시간을 보내야지.’
페델리우스라면 분명 뭔가를 해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도 뭔가를 해야 했다.
‘비는 내리고 있겠지만, 다른 곳에는 손도 대질 못했어.’
계획이 틀어졌다. 너무 오랫동안 왕국에 발목이 잡혀있었다. 조금 다른 방법을 구상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점점 촉박해지는 것 같아 불안했다.
‘황제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얼굴을 제대로 마주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자르딘 왕국에서의 생활도 불안해졌다. 서글픈 일이지만 아마 이곳에 계속 있는 건 무리겠지.
“그냥 일을 터뜨려버릴까.”
그것도 그리 나쁜 방법은 아닐 거다. 머무를 장소는 이미 사라졌다. 돌아간다고 해도 그건 페델리우스에게 민폐가 될 거다.
‘다 터뜨리고 훌쩍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페델리우스야 분명 어떻게든 내게 손을 뻗으러 오겠지만…….
오늘 이 꼴을 봐선 사태가 심각한 게 분명했다. 페델리우스에게도 분명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칠 거다.
‘대답하지 않길 잘했어.’
기다려달라는 페델리우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내가 진짜라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한데.’
아, 기대된다.
얼른 전부 죽이고, 그냥 한없이 자유로워지고 싶다. 내게 살려달라고 비는 꼴이라도 보고 싶었다.
작은 다락방 대신 거대한 황성에 갇혀서 메말라 죽어가는 꼴을 보고 싶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도 똑같이 당했으면 좋겠다.
“그래, 아콰가 괜찮아지면 그 사람을 보러 가자.”
그 사람이 혼자 있을 때 보러 가면 별문제는 없을 거다. 나를 쫓아낸 사람이다.
이제 와서 사실은 내가 진짜 신의 문양을 받은 자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떠벌릴 수 있을 리도 없다.
‘좋아.’
그렇게 하자. 그리고 마지막 장의 문을 여는 거다. 긴 악몽에서 깰 수 있다. 기다렸던 결과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응!”
엘인지 이그니인지 몰라서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문이 달칵 열렸다.
엘이었다.
“황녀 전하, 엘이에요! 지금도 식사하기 어려우세요?”
“아니! 먹을래!”
“앗, 식당으로 가실래요? 아니면 제가 여기로 들고 올까요?”
“식당! 다 같이 먹어.”
“헉, 저도요?”
“엘도, 이그니도, 시녀도 전부!”
내 대답에 엘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준비하겠다며 순식간에 방을 나섰다. 침대에 혼자 앉아있는 것보단 훨씬 낫다. 발을 바닥에 슬쩍 내리고 나도 일어났다.
아직 오후밖에 되지 않은 밝은 낮이었다.
* * *
“안녕하십니까, 제1기사단장님!”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듣자하니 황녀 전하의 소문을 퍼뜨린 유포자를 조사하고 있다지?”
“예! 현재 폐하의 명령으로 최우선순위로 수사하고 있습니다.”
군기가 꽉 잡힌 기사와 병사들이 경례하며 대답했다. 느릿하게 경비대 안을 살피다가 그들 쪽으로 성큼 다가갔다.
여태 아무도 말리러 오지 않는 것을 보면 폐하께서 결국 허락을 해준 모양이다.
만약 허락해주지 않았더라도 정말 혼자 움직였을 테지만.
“오늘부터 함께 수사하게 됐다.”
“단장님께서 직접 말입니까?!”
“그래. 조사의 진척상황을 좀 듣고 싶은데.”
팔짱을 낀 채 옹기종기 모여있는 기사들에게 물었다. 기사들이 눈동자를 굴려가며 서로 눈치를 본다. 답답함에 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두 번 물어야 하나?”
“아닙니다. 다만 워낙 신출귀몰한 사람이라서 여태 수사를 하고는 있지만…….”
“있지만?”
“……죄송합니다.”
“설마 아무것도 얻지 못했나?”
목울대가 절로 일렁였다.
가장 앞에 선 기사에게 묻자 기사가 대답 없이 고개만 숙인다. 그 행동의 의미를 모르지 않기에 속이 타는 듯했다.
“내게 지금 놀았다는 이야기를 돌려 말하고 있는 건가?”
“아닙니다! 수사는 분명히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수소문을 해봐도 목격자가 한 명도 없어서…….”
“한 명도 없었다?”
“네……. 광장에서 사람들을 선동하던 자들이 유일한 목격자인데 그들이 살해당해버리는 바람에, 그 범인도 함께 쫓는 중이어서…….”
더듬더듬 나오는 변명이 황당하기 그지없다. 결국은 제대로 된 수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면 범인을 잡는 걸 목 빠지게 기다릴 뻔했다.
“아무것도 없다, 이거지?”
“……그, 네.”
“수사는 어떻게 했나?”
“예?”
“수사를 어떻게 했냐고 묻고 있다. 경비대의 갑옷을 입고 가서 대놓고 묻고 다녔나? 술집은? 용병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설마 평범한 주민들한테만 묻고 다닌 건 아니겠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입에서 비꼬는 말이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그의 말이 나올 때마다 기사들이 점점 고개를 숙였다.
“경비대 갑옷 입고 수사를 하는데 퍽이나 누가 말해주겠군. 아주 잘했어. 누구한테 뭘 배웠는지 궁금할 정도야. 대단해.”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경비대의 숙소를 훑었다. 따뜻한 난방에 차와 다과. 경비를 하는 건지 여기서 휴식을 취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 굴러가고 있었군. 경비대가.’
경비대 담당이 누구였는지 잠시 생각했지만, 나도 별 관심이 없던 곳이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게 웃긴 건 안다. 경비대란 기사단에서 떨어지거나 좌천된 이들이 오는 곳으로, 맡은 일도 순찰 정도가 전부다.
“……경비대가 왜 한없이 바닥에서 맴돌고 있는지 오늘 직접 와서 깨닫게 됐어.”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들의 눈에는 향상심도, 어떤 것도 없다. 그저 이 생활을 영위하느라 바쁜 눈이었다.
기대도, 미련도 없이 모든 걸 체념한 듯했다.
“누가 봐도 불합리한 처지에서 일하면서도 그걸 바꿀 의지가 없으니 바닥에서 맴도는 거겠지.”
페델리우스가 몸을 돌렸다.
“오늘 내가 온 건 없던 일로 하지. 나는 따로 조사할 테니 그대들은 계속 그러고 지내도록.”
괜한 시간 낭비였다.
더 할 말은 없다. 그냥 곧바로 몸을 돌렸다.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와서 수소문을 따로 해야 할 듯했다.
쿵쾅거리며 일렁이는 가슴을 꾹 누르며 빠르게 경비대를 빠져나갔다.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일을 꾸민 건지.”
증거든 약간의 단서든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다. 허공에 헛발질하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런데도 놓을 수가 없다.
“……오시리아.”
괜찮다고 말하던 그 눈이 도저히 잊히질 않았다.
“트럼프 제국의 황녀를 쫓아내야 합니다!”
“옳소, 옳소! 분명 재앙의 근원이 될 거야!”
여기저기서 선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는 저들이 주동자인지 아니면 정말 선동을 당해서 다른 사람을 선동하고 있는지 감도 잡히지도 않는다.
‘심각하군.’
수도 분위기가 완전히 엉망이었다.
주민들의 얼굴에 불안이 가득하다. 이 정도면 귀족들이 회의에서 황녀 전하를 왕궁으로 불러들인 이유가 조금은 짐작이 됐다.
“일단 범인부터 잡아야 해.”
일이 시작된 근원이 있을 거다.
근원에 가장 가까운 첫 주동자들은 이그니가 죽여버렸다. 발걸음을 광장으로 향했다. 길거리 여기저기에 황녀를 추방하라고 써 붙인 글들이 가득했다.
‘내보내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이군.’
이걸 보았다면 황녀 전하의 심정도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졌을 거다. 그리 오랫동안 학대받으며 자랐는데 증오심이나 적개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들이 없어졌으면 하셨습니까?>
그렇게 물어본 것은 단지 확인을 위해서였다.
<응.>
담담한 대답은 불처럼 격렬하고 뜨겁진 않았다.
그러나 흔들림이 없었다. 그 밑에 얼마나 거대한 불꽃이 숨겨져 있는지 차마 짐작되지도 않았다.
“일단 술집부터 가야겠군.”
용병들이나 위험한 녀석들이 왕왕 다니는 곳을 기점으로 수사할 생각이었다.
조금 더 걸음을 빨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