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99)

* * *

햇살이 눈부실 정도로 따가웠다.

커튼을 치지 않고 잔 덕분에 얼굴 위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애꿎은 허공을 휘젓다가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몇 시지?”

이불에 묻힌 목소리가 웅얼거린다.

“정오가 되기 십 분 전입니다.”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으나 대답이 들렸다. 이그니의 목소리다. 이불 속 어둠이 포근해 그의 대답을 천천히 분석했다.

‘정오…….’

정오가 뭐더라. 가라앉은 머릿속이 생각을 거부한다. 이불은 포근하고 햇빛은 눈부셔서 싫다.

“정오에…… 자르딘의 왕이 오라고 했다고 들었는데.”

“네. 심부름꾼이 왔다가 갔습니다.”

“……설마 쫓아냈니?”

“네. 준비가 되면 부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한숨을 삼킨 채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왕의 명령에도 나를 우선시하는 이그니를 칭찬해야 할지, 그런 건 지양하는 편이 좋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확실한 건…….

“졸려.”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막이 낀 듯 흐릿했던 시야가 몇 번의 깜빡임 끝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이그니가 앞에 서있었다.

“이그니.”

“어제 말씀하신 대로 주변을 둘러봤습니다만, 이상한 낌새는 없었습니다.”

“어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가? 이그니에게 뭔가 확인하라고 명령했던 건 기억난다.

‘뭘…… 확인하라고 했었지?’

손을 들어 머리를 짚었다. 내가 뭘 확인하라고 했더라? 기억이 희미했다. 왜 확인하라고 했지?

“어제, 내가…….”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고 확인을 명령하셨습니다.”

“아!”

목소리. 이그니의 말을 듣자 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 목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무슨 말을 했지? 어떤 목소리였더라? 나는 뭐가 수상해서 그에게 그런 명령을 내렸지?

‘뭐야?’

목소리를 들었던 순간이 전부 기억나질 않았다.

“그랬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잊어버렸다기보단 기억날 듯 말 듯 희미함에 가까웠다.

누군가 말하면 기억날 것 같지만, 그러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을 것처럼.

“설마 안 잔 건 아니지?”

“잠이 오지 않아 자지 않았습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미안, 내가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했나 봐.”

이그니의 말처럼 내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는데. 실제로 이그니는 듣지 못했다.

오감이 나보다 예민한 이그니가 내가 들었는데도 듣지 못할 확률은 낮았다.

“잠 좀 자.”

“괜찮습니다. 어쩐지 불안하니 그냥 곁에 있게 해주십시오.”

“그건 괜찮은데…….”

말끝을 흐렸다. 내가 걱정하는 건 외부의 침입이 아니라는 걸 설명하기엔 말주변이 부족했다.

“그러면 나 좀 씻고 나올게. 그동안이라도 눈 좀 붙여.”

돌려, 돌려 간신히 생각한 말에 이그니는 두 번 거절하진 않았다. 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나름의 타협인 듯싶다.

벽 한쪽에 주저앉는 이그니를 보고,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텅 빈 욕실은 지금껏 썼던 어떤 욕실보다 넓고 쾌적했다.

‘역시 왕궁이네.’

다락방 시절에 쓰던 욕실은 물론 페델리우스의 집 욕실과도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매우 생소했다.

“음……. 어떻게 씻으면 되더라.”

매번 메리가 씻기는 걸 도와줬다. 제국에 있을 때도 혼자 씻을 일은 거의 없었다. 씻기는 손길은 거칠고 그마저도 드물었지만 어쨌든 혼자서 씻어본 일이 없다.

목소리가 울리는 텅 빈 욕실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눈에 익지만 생소한 것투성이라서 어떤 것에 먼저 손을 대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차근차근 머릿속을 뒤적였다.

“물을 먼저 받던가?”

근데 물이 어디서 나오지? 무슨 구멍에서 나왔던 것 같은데 그럴 만한 구멍이 보이질 않았다.

한참을 이곳저곳 살피다 멍하니 욕조를 내려다봤다.

‘아, 굳이 물을 받을 필요가 없었지.’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이마를 짚었다. 하도 안 써 버릇하니까 있는 능력도 놀리게 된다.

허리를 굽혀 욕조에 손을 넣었다. 아무것도 없는 욕조 속에서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공기 중에서 작은 물방울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후두둑 욕조 안에 떨어져 내렸다.

작은 물방울들이 거대해지고, 거대한 물방울들이 욕조에 차근차근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욕조 가득 물이 차올랐다.

“차가워.”

찰랑거리는 물 속에 손을 몇 번 더 휘저었다. 물론 그렇다고 물이 김이 펄펄 날 정도로 따뜻하게 변하진 않았다.

‘뜨거워졌으면 좋겠는데…….’

생각하는 순간 차가웠던 물이 미지근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뜨거워지지 않고 서서히 올라가는 물 온도가 마음에 들었다. 어느새 욕조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와 욕실을 가득 채웠다.

“능력은 좋은데…….”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는다. 대개는 생각만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제대로 시험해본 적이 없었다.

‘늘 근처에 사람이 있었으니까.’

욕조에 담갔던 팔을 빼고 일어나 옷을 벗었다. 천천히 욕조에 몸을 담갔다.

“순서가 이게 맞던가?”

아무리 아콰라도 씻는 순서에 대해 강의해준 적은 없었다. 솔직히 그런 사소한 것까지 강의했다면 내 머리에 과부하가 걸렸을지도.

느릿하게 손을 휘저었다. 욕조 속 물이 찰랑거린다.

두 손으로 물을 퍼 담았다. 차가운 얼음덩어리가 되기를 바라자 손에 담겨 있던 물의 열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손에 퍼 담은 물이 그 상태로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게 얼음.”

뜨거운 물 속에서 손에 닿은 얼음만이 온기를 쉴 새 없이 빼앗아간다. 손을 모은 상태로 천천히 욕조에 담갔다.

이번엔 얼음이 순식간에 냉기를 빼앗겨 녹아내렸다.

“……비를 내릴 수도 있다고 했지.”

어떻게? 뒤늦게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졌다.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만이 들었다.

“비를 내린다.”

아콰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하늘로 올라간 수증기가 구름을 만들고, 만들어진 구름 속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떨어진 물이 비라고 불리며, 그것은 세상을 이롭게도 또한 동시에 해로운 일을 만들기도 한다고 했다.

‘왜였더라.’

아콰는 비가 내리는 게 왜 해롭다고 했었지?

오래된 기억이라 머릿속이 제법 뿌옇게 물들었다. 따뜻한 몸이 기분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대체 얼마만의 일인지.

‘의미 없이 시간이 재깍재깍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바라던 것은 하나도 손에 넣지 못한 채 엉망진창으로 시간만 굴러간다.

“아콰. 아직도 힘이 드니?”

작은 목소리로 아콰에게 물었다.

[네에……. 하지만, 이 방을 벗어나면 괜찮은 것 같기도 해요.]

아콰가 느릿느릿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어린아이가 피곤한 모습으로 욕조에 들어앉았다.

따뜻한 물이 기분 좋은 듯 아콰가 나른한 표정으로 몸을 푹 담갔다.

“나, 왕을 만나고 나면 이곳을 떠나려고.”

[떠나다뇨?]

“이대론 안 돼.”

[주인님?]

“이대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여기에 있으면 내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무서워.”

누군가는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고, 누군가는 죽여선 안 된다고 한다. 또 누군가는 네가 감당할 수 있다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어차피 자르딘에는 더 있을 수가 없어. 나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입술을 뻐끔거렸다. 덧붙이려는 목소리가 차마 쉽게 나오질 않았다.

“저주받은 존재야.”

앞으로도 평생 꼬리표가 떼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삶을 산다는 건 포기했다.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니까 그냥 목표로 하던 일이나 하려고.”

팔을 뻗어 아콰를 끌어안았다. 무게도 없고, 인간의 피부와는 확연히 다른 촉감이지만 이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아이였다.

“어른으로 만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콰.”

분명 이곳에 있었다면 아콰에게 조금 더 많은 세상을 보여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수많은 감정을 배워 아콰를 조금 더 성장시켜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왕에게 가자.”

촤악, 욕조에서 일어나자 물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욕조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작별의 시간이야.”

내가 떠날 때까지 페델리우스에게 별다른 피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메리는 꼭 거품을 내서 머리나 몸을 씻겨주었는데. 거품이 나는 액체를 찾아 이리저리 눈을 굴려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그냥 물로 씻고, 몸을 말렸다.

다시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자 구석에서 눈을 감고 있던 이그니가 일어났다.

‘제대로 잠도 안 잔 모양인데.’

물론 잠깐 씻는 동안 푹 자기는 힘들겠지만 말이다.

“왕이 부른다고 했지?”

“네.”

“가자. 이그니.”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엘레나 재상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사실 마중하러 나왔다기보단 제법 오랜 시간 아래서 기다린 듯했다.

“이제 내려오시는군요.”

“미안.”

짧게 사과를 건넸다. 잠을 자느라고 늦은 것은 맞고 이그니가 곱게 쫓아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응?”

“페델리우스가 담을 넘었습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엘레나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결국, 찾아온 모양이다. 오겠다고 약속했으니, 지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앗, 황녀 전하!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엘.”

엘이 정신없이 현관까지 달려왔다. 밝아 보이는 표정에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도 이상하게 껌딱지처럼 달라붙으려는 기질이 있다.

“일단 가시죠.”

엘레나가 몸을 돌리며 앞장섰다.

현관을 나서고 성의 입구까지 걸어가자 묵묵하게 서 있는 석상 같은 남자가 보였다. 울컥, 뭔가가 속에서 치고 올라올 것 같아 주먹을 꽉 쥐었다.

‘겨우 하루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사람이 이렇게 그리워질 수 있다는 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황녀 전하!”

페델리우스도 나를 발견했는지 소리를 높였다.

페델리우스의 목소리까지 듣자 속이 조급해졌다. 조금 더 빨라진 걸음으로 페델리우스에게 다가가 팔을 뻗었다.

그가 망설임 없이 나를 끌어안았다.

끌어안는 것으로도 모자라 덥석 들어 올렸다. 이건 몇 번을 당해도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

“페델리우스.”

내 부름에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예, 황……. 아니. 오시리아.”

속이 간지러울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어설픈 말투는 퍽 익숙하지 않은 그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페델리우스가 불러주는 이름은 늘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다른 사람이 부르면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데, 그만이 내 이름을 듣기 좋게 만들어준다.

“보고 싶었어.”

그리 오래 떨어져 있던 것도 아니지만 보고 싶었다. 솔직한 심정을 입 밖에 내자 페델리우스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예, 저도 그렇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날 바닥에 천천히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여기 와도 돼?”

“몰래 왔습니다. 걱정돼서요.”

“난 괜찮아.”

안녕이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여기서 인사를 건네고, 더는 찾아오지 말라고 하면 페델리우스는 상처를 받을까?

‘하지만, 나에 대해 몰랐으면 좋겠어.’

자르딘의 왕에게는 더 숨길 게 없다. 이그니도, 엘레나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사람한테 사실을 말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뼈아팠다.

“폐하한테 가는 길이야.”

“그렇습니까? 저도 마침 만나 봬야 했는데 다행이군요.”

“응? 페데리는 왜?”

들키고 싶지 않다. 알리고 싶지 않았다. 새까맣게 가라앉아있는 본심만큼은 그가 모르길 바랐다.

“화를 낼 일이 좀 있습니다.”

“폐하한테 화를 내?”

“예.”

“난 감싸주지 않을 거야, 페델리우스 경.”

엘레나의 목소리가 확실히 선을 그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방관하는 자세였지만, 표정은 미묘하게 굳어있었다.

“예, 바라지 않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가 내 손을 잡은 채 왕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쿵, 땅이 크게 울렸다. 내가 걸음을 멈추자 페델리우스가 의아하게 쳐다봤다. 아무도 땅의 울림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황녀 전하?”

“페델리우스, 뭔가 이상…….”

휘익. 푹-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호위병 하나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목에는 날카로운 화살이 박힌 채였다.

화살촉도, 화살대도, 깃대마저도 새까만 검은 화살이었다. 아콰가 청량한 느낌이라면 이것은 완전히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무슨…….”

페델리우스가 황급히 검을 뽑았다.

이그니는 물론 엘레나 재상도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엘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을 살피던 페델리우스가 나를 그의 등 뒤로 끌어당겼다.

“기습이다!!”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호위병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그니가 페델리우스의 옆에 서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새까만 무언가가 인간의 형태를 한 채 꾸물거리며 몰려오고 있었다.

인간이라고 하기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심장의 고동 소리도 없다.

길을 막듯 이그니와 페델리우스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황녀 전하! 이쪽으로 오세요!”

엘이 나를 끌어당겼다.

“아…….”

다급한 표정에 그를 쫓아 자리를 옮겼다. 엘이 나를 벽 쪽으로 몰아세우며 검을 쥐었다.

작은 몸에서 나는 힘이 상당했다. 잡혔던 손목이 욱신거렸다.

“황녀 전하.”

“응?”

“인간이 왜 잔인한지 아십니까?”

“엘?”

“자기와 다른 것을 한없이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눈앞에 실체가 되어 나타나면…… 그게 바로 괴물이 되는 거죠.”

엘이 검을 치켜세운 채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나와 똑같은 노란색 머리카락이 눈을 사로잡았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 뒤늦게 입을 열었다.

“엘?”

“그러니까 제 말은…….”

엘이 몸을 돌렸다. 그는 어쩐지 기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늘 한 점 그늘도 없던 웃음과는 달랐다.

“괴물이 되어주셔야겠습니다. 황녀.”

푹. 뭔가에 찔리는 기묘한 감각이 들어 눈을 크게 떴다. 통증이 밀려들어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엘……?”

그의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정확히는 내 의지가 아님에도 고개가 절로 떨어졌다.

은빛의 긴 검이 내 배를 뚫고 있었다. 긴 검은 손잡이만이 눈에 보일 정도로 깊게 박혀있는 듯했다.

울컥, 입에서 튀어나온 뭔가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붉은색의 피였다. 모든 것이 현실적이지 않았다.

“주군!”

“오시리아!!”

멍하니 들리는 이그니의 목소리도, 비명을 지르며 뛰어오는 페델리우스도. 전부.

“저는 당신을 황제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무슨, 아흑…….”

엘이 내 몸에 박힌 검을 비틀어 빼냈다.

“걱정 마세요, 황녀. 정령의 가호가 있어서 이 정도론 죽지 않을 테니까.”

직접 실험해본 일이니 확실합니다. 엘이 허리를 굽혀 귓가에 속살거렸다.

이건 정말 엘인가?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휘젓고 다녔다.

“넌, 누구…….”

“이름은 딱히 없습니다. 그저 오래전부터 존재해 어둠과 함께 제국의 빛나는 영광을 지켜왔을 뿐입니다. 이름을 지어주신다면 기꺼이…….”

눈앞에 존재하고 있을 엘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졌다. 머리가 아팠다. 온몸에 열이 오르는 듯 뜨거웠다.

주변의 공기가 진동하고, 물이 비명을 지른다.

아콰의 분노가 손등을 타고 심장까지 느껴졌다.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눈앞은 이상하게 점점 또렷해졌다. 시야가 붉게 물들어간다.

“황제가 될 당신을 미리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엘의 목소리조차 한낱 공기처럼 흩어져 사라져간다.

“당신이 황제가 될 준비를 해두겠습니다.”

그저 남는 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의 덩어리였다.

쿵, 쿵, 쿵. 바닥이 울리는지 내 몸이 울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확실한 것은 나를 고통스럽게 한 무언가를 죽여야 한다는 본능뿐이었다.

푸른 기운이 몸에서 흘러넘치고 있다. 일전에 왕이 아콰를 위협했을 때와 똑같다.

주체할 수 없이 흘러넘치는 푸른색 기운이 눈앞을 뒤덮었다.

‘페델리우스.’

놀란 표정의 페델리우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미안, 해…….”

기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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