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99)

* * *

누구 하나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경이로운 광경에는 나조차도 말을 잃을 정도였으니까.

감히 숨조차 쉴 수 없는 광경에 넋을 잃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장 엘의 목을 비틀어도 시원치 않을 상황에서도 눈앞에 있는 황녀는 지독히 아름다웠다.

은은한 푸른 빛이 그녀를 휘감고 있었다. 포근하게 감싸 안은 그 안에서 황녀의 벌꿀색 눈동자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푸른색이었다. 내가 봐왔던 어떤 푸른 하늘이나 푸른 바다보다도 이질적이고 눈을 사로잡았다.

“황녀…… 전하.”

내 목소리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내 쪽으로 향했다. 기품이 느껴지는 행동에 마치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주인님.]

동굴 속에 울려 퍼지는 듯한 목소리에 간신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 아래를 내려다봤다.

열 살쯤 되었을 법한 푸른색의 아이가 그녀의 옆에서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피가 흐르던 그녀의 배에서 더는 붉은 것의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신이 내려준 진정한 황제의 원석인가.”

엘이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가 아주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엘의 오른팔에 닿았다. 자칫 잘 세공된 유리장식물을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네게선 새까만 찌꺼기만 느껴진다.”

그녀가 느릿하게 엘의 팔을 더듬어 천천히 쓸어 올렸다.

“너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어둠을 닮았어.”

황녀의 손이 엘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두 걸음만 더 걸으면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건만 발이 떼어지질 않았다.

‘저게 정말 내가 아는 황녀 전하가 맞는 건가?’

버벅거리지 않는 목소리. 어린아이 같지 않은 유창한 언어 구사. 난생처음 보는 이상한 어린아이와 차갑게 가라앉은 생소한 시선.

“그래서 싫다.”

그녀가 잡은 엘의 손목이 점점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손목이 가늘어지자 팔과 어깨까지 조금씩 쪼그라들었다.

그녀가 아주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점점 가늘어지는 팔을 따라 올라갔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 시선이 사로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수분을 전부 빼앗겨 오래된 고목처럼 변해가는 기이한 현상처럼 보였다.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처럼 변한 엘의 팔은 더는 인간의 것이라고 부르기 어려워졌다.

“벌이야.”

그녀가 웃었다. 그리고 그대로, 엘의 오른팔을 뜯어냈다.

“흐아아아악!!!”

엘이 비명을 질렀다.

그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만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댔다.

우지끈,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 같은 팔을 그녀가 사뿐히 밟았다.

“아콰.”

<네, 주인님.>

“저것들을 다 죽이자.”

아직도 꿈틀거리는 인간의 형태를 한 검은 괴물을 보며 그녀가 말했다.

“황녀 전하!”

내 부름에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 페델리우스.”

생소한 푸른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다정했던 눈동자에 담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무감정한 눈이 익숙한 목소리에 기계적으로 반응한 듯했다.

마치 처음 만난 사람을 보듯, 그녀는 시종일관 무덤덤한 눈빛이었다.

“다치신 곳은, 괜찮으십니까.”

애써 위화감을 떨쳐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묻자 그녀가 시선을 내려 제 배를 살피는 듯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는 대로.”

그녀가 짧게 대답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마치 황제라도 된 것처럼 그녀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발걸음으로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양팔을 옆으로 벌리자 어디선가 생겨난 물이 날카로운 검이 되어 하늘을 뒤덮었다.

새떼가 하늘을 뒤덮듯 물로 된 검이 위협적으로 빛났다. 그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것들이 한꺼번에 지상으로 내리꽂히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그러나 동시에 두려웠다.

순식간에 그 많은 것들을 없애고 있는 그녀가 행복하다는 듯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이윽고 침입자는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애초에 형태가 없는 것들이어서 사라지고 나서 남는 것이라곤 바닥에 끈적하게 눌어붙은 검은 잔해뿐이었다.

“조금 더…….”

한 걸음 다가가려는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다시 하늘에 물이 모이기 시작했다. 더는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날카로운 검이 되어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허공에 떠오른 수많은 검이 갈 곳을 잃고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는 마치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굶주린 짐승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황녀 전하!”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내 부름에 그녀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출구를 찾아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뿐이다.

“오시리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차마 익숙해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부르면 심장 한쪽이 간지러워서 가만히 서있을 수조차 없는 이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늘 생소한 느낌을 선사한다. 이름을 부를 때도, 웃어줄 때도, 함께 밥을 먹을 때도 모든 게 생소했다.

목소리를 들은 텅 빈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굶주린 짐승이 눈앞에 있었다.

‘무엇이?’

당신은 무엇을 잡아먹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걸까? 그냥 뒀다간 분명히 모든 것들을 죽이려고 할 것 같았다.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작고, 연약한 몸.

이질적인 푸른 빛이 그녀를 감싸고 있지만, 평생에 걸쳐 만들어진 가녀린 몸을 전부 가려주진 못했다.

먹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고, 지독한 어둠 속에서 살았을 사람이다. 갈 곳을 잃은 짐승이 있어야 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가지 마십시오.”

“…….”

“여기 계셔도 괜찮습니다.”

“…….”

“제가 당신을 지키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끌어안은 채 응어리진 마음을 하나둘 풀어냈다.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지 못한다면…… 찾을 때까지 이곳에 있어도 좋았다.

“오시리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었다. 딱딱한 통나무처럼 가만히 안겨 있던 그녀가 천천히 팔을 들었다.

등 뒤에 닿아오는 손길이 무척이나 부드럽고, 강인했다. 그녀가 나를 끌어안았다.

* * *

“오시리아.”

들려오는 목소리와 몸에 닿은 온기에 서서히 시야가 밝아졌다. 붉었던 눈앞이 제 색을 찾아가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뿌연 안개에 사로잡혀있던 머릿속이 여전히 몽롱했다.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조차 페델리우스의 향기에 전부 기화되어 사라졌다. 허한 마음속이 텅 빈 듯했다.

그에게 끌어안긴 채,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너만이 늘 내 이름을 불러줘.”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차분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페델리우스.”

“예.”

“난 하고 싶은 일이 있었어.”

몸의 통제권을 잃은 듯했다. 그러나 잃은 듯, 잃지 않았다. 페델리우스가 말리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줄곧 염원하던 일을 처리하러 갔을 것이다.

“나는 사람을 죽여야 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훨씬 더 많은 사람을.”

페델리우스의 눈동자에 텅 빈 내가 비쳐 보였다. 그 눈동자에 비친 나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밤하늘 같은 눈동자가 나를 사로잡았다.

“누구를, ……왜 말입니까?”

“내 고향을. 이유는, 글쎄. 복수였던 것 같은데.”

그 수많은 이유가 이곳에 와서 빛바래버렸다. 페델리우스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를 만나서 모든 걸 잊고 그냥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종종 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 모든 것들은 헛된 꿈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악이다.

“악은, 처단해야 해.”

모든 사람을 죽이면 텅 빈 것 같은 이 가슴에 무언가 가득 들어차게 될까?

“고향이라는 건…… 제국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전부, 전부 사라졌으면 좋겠어.”

허공에 손을 휘젓자 일전에 아콰가 만들어줬던 것과 비슷한 검이 생겨났다. 그것을 붙잡았다. 아직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엘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나쁘지 않아.”

검을 세로로 세웠다. 벼려진 검 끝이 날카롭게 빛났다. 페델리우스가 주먹만큼이나 커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실망하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느릿하게 고개를 내려 엘을 쳐다봤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엘이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신을 황제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복수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내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주저앉은 엘을 쳐다보며 검을 높게 치켜세웠다.

“황녀 전하!”

페델리우스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와 동시에 엘의 심장을 향해 검을 내리꽂았다.

푹-

“잠시 깊은 잠을 주무시길.”

시야가 바스러진다. 쓰러지는 것은 엘이라고 생각했는데, 시야가 흔들리는 건 나였다. 시선을 내리자 엘이 내 배에 꽂아 넣은 검이 보였다.

그냥 검이라기엔, 검은 종이로 둘러싸여있었다.

‘붉은, 문양……?’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보인 것은 익숙한 문양이었다. 다락방에도 한가득 붙어있던 붉은색 문양.

그리고 그것은 아콰가 가장 싫어하는 문양이었다. 울컥울컥 쏟아지는 피는 멎을 기미도 없었다. 옆에서 아콰가 형체를 잃어가는 것이 보였다.

허물어지려는 몸을 애써 다잡았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팔을 뻗어 엘의 목을 붙잡았다.

“죽어버려.”

그를 죽여야겠다는 의지를 담아 중얼거렸다. 붙잡은 엘의 목에서 수분을 빼앗는 것과 동시에 몸이 허물어졌다.

‘죽여야 하는데…….’

죽이지 못했다.

‘대체 넌 누구야? 엘.’

묻겠다고 결심한 것조차 묻지 못했다. 엘의 군화가 뒤로 물러났다.

채앵-! 페델리우스의 검이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무언가와 부딪쳤다.

동시에 눈앞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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