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채앵-! 챙!
“엘 파나로아! 네가 미쳤구나!”
페델리우스가 빠른 속도로 검을 내질렀다. 그 사이를 파고든 이그니가 쓰러진 오시리아를 챙겨 들었다.
배를 정확히 꿰뚫은 검은 장검보다는 짧았고, 단검보다는 길었다.
“이 문양은…….”
이그니의 눈이 크게 뜨였다.
검을 둘둘 감싼 얇은 종이에 새겨진 붉은 문양은 그에게도 눈에 익은 것이었다.
또한, 이곳에, 특히나 이곳 토박이일 것이 분명한 기사의 손에 들려있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이그니가 오시리아를 끌어안은 채 페델리우스와 검을 맞대고 있는 엘이라는 사내를 쳐다봤다.
“설마…….”
그의 눈이 또 한 번 크게 벌어졌다. 그가 아는 한 이 문양을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다. 그가 오시리아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주군.”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긴 잠에 빠진 것처럼. 점점 새하얘지는 피부색은 분명 쉴 새 없이 빠져나가는 피 때문이었다.
끼긱, 챙-!
페델리우스가 검을 쳐내며 다른 손으로 엘의 멱살을 붙잡았다. 페델리우스가 한 손으로 머리통 하나만큼 작은 엘을 덜렁 들어 올렸다.
“이건 반역이다.”
“단장님. 이건 세상이 원하는 일이에요. 모두가 저 괴물이 죽기를 바란다고요!”
엘이 활짝 웃으며 크게 소리쳤다. 엘은 오시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던 것과는 다르게 마치 그녀를 원망한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수많은 용병이 그녀를 죽이려고 안달이에요.”
“엘, 네놈…….”
페델리우스가 으르렁거리며 그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엘의 몸이 땅에 처박혔다. 그러면서도 엘은 웃었다.
“이봐요, 단장님. 대체 누가 저 수많은 대군이 들어오는 걸 허락해줬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뭐?”
“경비병들이라고요! 그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저는 괴물을 죽일 또 다른 괴물들을 들일 수 있었어요.”
엘이 뱀 같은 혀를 쉬지 않고 놀렸다.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치 정말 원망스러운 사람을 보는 것처럼 엘은 말을 쉼 없이 지어냈다.
“일이 꼬였지만, 드디어 괴물을 봉인할 수 있었어요.”
엘이 이를 드러내며 대답했다. 잔뜩 상기된 표정에 그의 멱살을 붙잡은 페델리우스의 손끝이 떨렸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오시리아를 쳐다봤다. 이그니의 품에 축 늘어진 그녀의 모습에 페델리우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바닥에 내리누른 엘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대체 어디서 무슨 이상한 소리를 들은 거야! 엘 파나로아!!”
페델리우스가 그의 멱살을 힘껏 내리누르며 소리쳤다.
“그 괴물들은 대체 뭐야. 황녀께…….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나.”
그가 멱살을 잡지 않은 손에 든 검을 엘의 어깨에 가져다 댔다. 페델리우스는 여차하면 검을 박을 생각이 충분히 있었다.
“대답해.”
날카로운 검 끝이 하나 남은 엘의 어깨에서 위험하게 빛났다. 엘의 표정이 확 구겨지며 울상이 되었다.
“전 몰라요. 전 그냥……. 그냥, 누군가 검을 주면서 황녀를 찌르라고 하기에……. 그 이상한 괴물들도 누군가가 줘서……. 그래서…….”
엘이 고개를 저으며 울먹였다. 방금까지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페델리우스가 얼굴을 굳히며 으르렁거렸다.
“개짓거리 하지 마라, 엘 파나로아. 대체 무슨 짓이지?”
“저는, 잘, 잘 모르겠어요. 단장님. 이건 전부……. 전부 저희 왕국을 위해서였다고요.”
엘이 바들바들 떨며 입을 열었다. 정신이 분열되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 사납게 구는 엘의 모습에 페델리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그가 검을 치켜들며 엘을 내려찍으려는 순간,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이지?”
뒤에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륵, 바닥에 스치는 푸른색 망토는 금실로 자수가 놓여있었다. 자르딘의 왕, 그가 눈을 매섭게 빛내며 걸음을 옮겼다.
페델리우스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엘이 페델리우스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있었다.
“누가 감히 내 왕궁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냐.”
왕의 목소리가 엄하게 울려 퍼졌다.
낮은 목소리에 담긴 분노는 시린 서리만큼이나 차디찼다. 왕의 눈이 엉망이 된 왕궁 안을 훑었다. 그의 눈이 마지막으로 검이 꽂힌 오시리아에게 닿았다. 그는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꺼져라, 찌꺼기 같은 것아.”
왕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는 엘의 앞에 서있었다.
엘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그의 시선이 엘의 사라진 팔에 닿았다가 다시 그의 눈에 닿았다.
“당신은…….”
엘의 입이 뻐끔거렸다.
“감히, 내 아이의 껍데기를 뒤집어썼구나.”
그의 손이 엘의 목에 닿으려는 순간 엘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정확히는 새까만 무언가가 엘을 뒤로 끌어당겼다.
엘이 바닥에 엉덩이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주군!!”
이그니의 비명에 페델리우스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피 웅덩이에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오시리아!!”
비명을 지르는 목소리에 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 처벌은 뒤로 미루도록 하지. 살고 싶다면 당장, 내 눈앞에서 떠나라. 타다 남은 잿더미야.”
푸른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얼려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시선에 엘이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런 게 인간 행세를 하고 있을 줄이야.”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울림통에서 울려 퍼지듯 여러 갈래로 메아리쳤다.
엘이 한 걸음 내딛자 눈앞에 새까만 구멍이 생겨났다. 엘의 모습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왕이 몸을 돌렸다. 그가 단 한 걸음에 오시리아의 앞에 다가가 무릎 한쪽을 굽히며 몸을 숙였다.
“이건…….”
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손을 뻗어 곧장 그녀의 몸에 박혀있는 검을 빼냈다. 피가 튀어 왕의 옷에도 묻었다.
그가 손을 뻗어 오시리아의 오른쪽 손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무것도 없는 듯 보였던 손등에 서서히 푸른빛의 문양이 떠올랐다.
“네 주인을 지켜라.”
왕이 명령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아진 문양에서 차오르던 빛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작은 빛무리가 그녀의 손등에서 한 움큼 빠져나왔다. 그것이 뭉쳐 작은 형체가 되더니 이내 아콰의 형상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감사합니다.]
아콰가 고개를 숙이곤 손을 뻗어 물을 모았다. 작은 물 덩어리가 오시리아의 손을 삼키고, 발을 삼키고, 다리를 삼키기 시작했다.
아콰가 보이는 경이로운 광경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오시리아가 거대한 물 덩어리 속에 삼켜졌다. 페델리우스가 흔들리는 눈으로 죽은 듯 잠든 그녀를 살폈다.
“폐하……. 그녀는, 황녀께선 괜찮은 겁니까?”
“난 네게 왕궁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다.”
왕의 매서운 시선이 페델리우스에게 향했다. 평소와 다르게 날카롭게 날이 선 눈동자가 위험스럽게 빛났다.
그 기백에 페델리우스가 숨을 삼켰다.
“황녀 전하가 걱정됐습니다.”
그는 변명하기보단 솔직히 대답했다. 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물의 정령의 가호를 받고 있다. 오늘 그녀의 의사를 묻고 가까운 시일 내에 물을 관장하는 신녀로 추대할 예정이었고.”
왕이 설명했다.
그가 굳이 그녀를 부른 이유는 그것이었다. 있을 곳을 찾지 못하는 아이에게 있을 곳을 주자는 취지였다.
원래 아이가 마땅히 가져야 했을 자리를 내어줄 생각이었다.
자르딘 왕국은 트럼프 제국처럼 유일신을 추구하진 않는다.
왕국은 다양한 신을 추대하지만, 긴 역사 속에 신녀나 신관은 분명히 있었다.
시끄러워진 김에 아예 그녀가 가진 신의 문양을 드러내고 제국에 선전포고를 할 생각이었다.
그 의중을 묻기 위한 만남이 될 터였다. 그녀가 오늘 제 부름에 제대로 응할 수 있었더라면.
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런 오래된 것이 제국의 땅 밑에 똬리를 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지.’
왕이 오시리아의 복부에서 빼낸 검을 이그니에게 던졌다.
“그게 뭔지는 네가 가장 잘 알겠지.”
그의 시린 눈빛에 이그니가 숨을 삼키곤 검을 내려다봤다. 피에 물들어버린 종이에 적힌 문양은 이그니에게 분명 익숙한 것이었다.
“그녀를 안에 들여라.”
왕의 명령에 페델리우스가 조심스럽게 오시리아에게 다가갔다.
그가 손을 뻗자 거대한 물 덩어리에 잠긴 그녀가 천천히 그의 팔로 내려앉았다.
물은 그리 차갑지 않았다. 페델리우스가 오시리아를 꽉 끌어안아 품에 가뒀다.
[주인님을 부탁드립니다.]
아콰가 고개를 숙였다. 아이는 순식간에 빛무리로 돌아갔다.
“삼 일 뒤 황녀를 자르딘의 정식 신녀로 추대할 거다. 그녀는 신의 문양을 몸에 품은 존재이며, 그 강력한 힘으로 왕국을 가호할 것이다.”
왕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제 청량한 영역에 침범한 찌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분이 상할 대로 상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또한, 황녀를 찌른 것은 트럼프 왕국의 첩자였다.”
왕이 짧게 상황을 정리했다.
엘레나와 페델리우스가 동시에 숨을 삼켰다. 그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두 사람은 머리가 나쁘지 않았다.
“그 말인즉…….”
페델리우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제국은 내가 신녀로 추대하려던 자를 암살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볼모입니다, 폐하.”
엘레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왕의 새파란 눈동자가 느릿하게 굴러가 엘레나에게 향했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아…….”
엘레나의 입이 잠시 벌어졌다가 닫혔다.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왕의 의중을 이해한 듯 깊이 허리를 숙였다.
“폐하의 뜻대로.”
하나뿐인 재상이 머리를 숙였다. 그것은 왕의 의견이 수일 내에 무리 없이 통과될 것이라는 증거였다.
왕이 낸 의견이 통과되지 못하는 가장 큰 장벽은 재상이었다.
재상을 이해시키지 않는 안건은 결코 통과되는 일이 없었다.
왕은 그것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종종 긴 시간 탁상공론을 펼치곤 했다. 어떻게 반박하더라도 엘레나 재상은 무난하게 대답했다.
“그녀를 감싼 물이 전부 사라지면 의원을 불러 다시 한번 진찰하도록 해라.”
“예.”
“그녀가 머무는 공간에는 누구 하나 함부로 접근할 수 없게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황녀를 신전으로 옮기거라.”
“폐하.”
페델리우스가 왕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단단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은 채였다.
“폐하. 더는 황녀 전하를 품에서 놓을 수 없습니다.”
페델리우스가 꽉 다문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왕이 페델리우스와 오시리아를 번갈아 살폈다.
“하아.”
짧은 한숨을 내쉰 왕이 몸을 돌렸다.
“따라와라.”
페델리우스와 엘레나가 왕의 뒤로 곧장 따라붙었다. 왕은 따라오려는 다른 호위기사들을 물리고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페델리우스 경, 왕궁의 호위를 강화하고 그 첩자가 말한 사실 여부를 판단하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재상. 전쟁 준비를 서둘러라. 필요한 물자를 준비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장군들을 불러 모아라.”
“네, 부족함 없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끝낸 왕이 소파에 앉았다. 그는 제법 피곤한 기색으로 맞은편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페델리우스가 그의 앞에 앉았다.
“황녀는 태어날 때부터 신의 힘을 몸에 품고 태어난 존재다. 신녀가 되는 것에 부족함은 없지. 그녀가 다루는 힘을 그대들도 보았을 테니 말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왕은 드물게도 말을 길게 이어 붙였다.
페델리우스는 꼿꼿하게 편 허리로 묵묵히 듣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오시리아를 살피기 바빴다.
그녀가 혹시나 숨이라도 쉬지 않을까, 페델리우스의 신경은 온통 오시리아에게 쏠려있었다.
“말씀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 이들은 쉽게 믿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그녀가 눈을 뜨면 될 일이지.”
엘레나의 말에 왕이 담담히 대답했다. 묵묵히 앉아있던 페델리우스가 왕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폐하.”
왕이 페델리우스의 눈을 마주봤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구나.”
“그녀는 자신이 이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페델리우스는 수많은 질문 중에 단 한 가지만을 끄집어냈다. 왕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건…… 언제부터입니까?”
두 번째 질문을 내뱉는 페델리우스의 목소리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그 눈동자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처음부터다.”
대답하는 왕의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녀의 옆에 제가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
“전쟁이 시작될 거다.”
왕이 페델리우스를 책망하듯 쳐다봤다.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숙였다. 전장은 그가 나서야 할 곳이다. 앞장서서 검을 빼 들 곳이다.
페델리우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뼈저리게.
“하지만…….”
“우리는 제국을 칠 거고, 그 이름을 넘겨받을 것이다. 자르딘은 그 어떤 곳보다 강대국이 되어 그 이름이 영원히 역사에 새겨지게 될 거다.”
쿵, 쿵, 쿵. 왕의 말에 페델리우스의 심장이 거칠게 펌프질을 했다. 전율이 올라올 정도로 황홀한 말이었다.
페델리우스도, 엘레나도, 왕 역시도 줄곧 바라왔던 일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그것이 일어날 거라고 모두가 생각했다.
그러나 왕이 그 사실을 입 밖에 올린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위한다면 그녀의 적들을 페델리우스, 네가 먼저 베는 것이 좋을 거다.”
왕이 푸른 기운에 둘러싸여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듯했던 기운을 상기시켰다.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것은 왕궁에 침입한 새까만 덩어리 따위가 아니었다.
도리어 청명한 하늘처럼 맑고 깨끗하면서도 순수한 분노가 깃들어있는 미숙한 기운이었다.
“페델리우스, 내 오른팔이 되어 검을 들어라. 네가 지켜야 할 것은 품에 안은 것뿐만은 아닐 것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품에는 오시리아를 소중히 끌어안은 채였다.
“그 아이가 저주받은 아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선 그 반대의 힘이 필요했다. 황녀가 제 힘만 증명한다면 여론은 금방 돌아서겠지.”
왕이 말을 덧붙였다. 페델리우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디로?”
“……예전에 제가 지내던 방에서 돌보겠습니다. 말씀하신 일들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을 테니 허락해주십시오.”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톡, 톡, 톡. 손가락으로 소파를 두드리던 왕이 이내 포기한 듯 손을 내저었다.
“고집 센 자식들이 많아서 곤란하구나.”
왕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잊지 말아라. 이미 출정 준비는 되어있으니 출발은 칠 일을 넘지 않을 것이다.”
“예. 감사합니다.”
페델리우스가 대답하곤 몸을 돌렸다. 달칵, 문이 닫히자 왕이 긴 숨을 내뱉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출정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짧으면 삼 일, 길어도 오 일 이내입니다.”
왕의 물음에 엘레나 재상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녀가 곁눈질로 왕의 기색을 살폈다.
“몸이 좋지 않으십니까?”
“아니. 잠깐 피곤한 것뿐이다.”
“그렇습니까? 피로를 풀어드리는 차를 타드릴까요?”
엘레나가 올곧게 자세를 편 채 물었다. 왕이 고개를 젓는다. 트럼프 제국을 치는 건 좋으나 허락을 받아야 할 자가 있었다.
“이만 너도 물러나 쉬거라.”
“하지만…….”
“밤에 심심하다면 찾아갈 테니.”
왕이 장난스럽게 덧붙이자 엘레나가 확 붉어진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장난은 좀 삼가십시오. 보기 안 좋습니다!”
“황후 후보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전쟁을 앞두고 있으니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미루고 있었습니다. 급하다면 전쟁 전에 먼저 처리할까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물어오는 엘레나의 목소리에 왕의 입가에 쓴웃음이 매달렸다 떨어져 나갔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됐다. 나가서 볼 일 보아라.”
“폐하?”
엘레나가 되묻는 목소리에도 왕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 느껴졌다. 달가우면서도 그리 달갑지 않은 침입자였다.
왕은 이것이 짧은 담소의 끝임을 느꼈다.
“나가거라.”
왕의 명령에 엘레나가 결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라면 한마디를 덧붙였겠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그녀도 느낄 수 있었다.
“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또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경비병들에게 지금 이 시각 이후로 내가 따로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절대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전해라.”
왕의 생소한 명령에 엘레나가 눈을 깜빡였다.
“네, 폐하.”
그녀가 곧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곧장 몸을 돌린 그녀가 집무실 문을 느리게 닫고 빠져나갔다. 완전히 문이 닫히자 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랜만이야, 친우여.”
“인간생활이 제법 입맛에 맞는 모양이지.”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누군가의 발이 생겨났다. 마치 벌꿀을 발라놓은 듯한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가진 작은 소년이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의 소년은 매우 앳되어 보였지만, 이질적이게도 말투에는 연륜이 깃들어 있었다.
“그대가 축복을 내려준 제국에 벌써 질리기라도 한 거야?”
자르딘의 왕이 허공에 팔을 휘젓자 황금잔에 담긴 와인이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가무잡잡한 소년은 익숙하게 그것을 받아들며 왕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글쎄, 너야말로 내 아이를 빼가다니 무슨 생각이야?”
“빼가다니, 말은 바로 해야지. 네 아이들이 내게 준 것을 그저 받아들였을 뿐이야. 그리고…… 넌 그 아이를 버려둬도 너무 버려뒀어.”
“예상하지 못했어.”
소년이 황금잔을 한번 흔들더니 그것을 입에 머금으며 대답했다. 왕은 말없이 제 잔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알다시피 우리가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건 한 세기에 단 한 번뿐이지. 너는 한 시대를 통솔할 왕이 되길 원했고, 나는 그 아이를 세계에 내려 보냈다.”
소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목소리 자체가 제법 앳되었기 때문에 그 묘한 괴리감에 왕은 얼굴을 구겼다.
“황제가 될 예정이었다. 내 아이는.”
소년이 잔을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푹신한 소파는 작은 몸집을 한 소년을 깊이 감싸 안기에 충분했다. 소년은 지쳐 보였고, 왕은 한숨을 삼켰다.
“이봐, 솔(Sol). 아무것도 모르고 자란 네 아이는 선과 악의 구분이 없어. 폭주하면 나라 하나 무너지는 거로는 끝나지 않을 거야.”
왕이 자못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내 아이가 원하는 게 트럼프 제국의 멸망이라면 나는 반대하지 않아. 그 아이는 그럴 자격이 있어.”
“솔, 인간은 물러. 아무리 가호를 받고 태어났어도 마찬가지야. 몸이 아니라 정신이 망가질 거야.”
인간은 피 냄새를 많이 맡으면 미쳐버린다. 사람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다 보면 누군가를 죽일 때의 죄책감조차 희미하게 변해간다.
그것이 당연해지고, 익숙해져서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몰랐다.
“나는 네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어.”
“내 아이는 약하지 않아. 내려 보내기 전에 수많은 가호를 붙였고, 황제가 되었다면 제국을 태평성대로 이끌어 신인 나에게 의지하지 않고 인간들끼리 꾸려나갈 수 있는 나라로 만들었을 거야.”
솔의 벌꿀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으며 어두워졌다. 반짝거려야 할 눈동자가 탁해진 모습에 왕이 숨을 삼켰다.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그는 화가 나 있었다. 왕은 솔의 눈을 제대로 들여다봤을 때 비로소 그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었다.
“눈(Nun). 나는 화가 나.”
“무엇이?”
“최초의 인간들은 발전이 있었어. 자연현상까지는 내게 기도하는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직접 발전시키고 새로운 기구를 만들고 새로운 문명을 발전시켰지. 그걸 보는 게 즐거웠다.”
솔이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깐 채 입을 열었다.
자르딘의 왕, 눈이 말없이 이야기를 들었다. 솔이 붙잡은 황금잔이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내게만 의지하려고 애썼지. 발전은커녕 통치해야 할 놈들이 점점 타락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질린 건가?”
“제국에 축복을 내려달라고 요청한 초대 황제의 기백이 마음에 들었다. 그 자식들도 어느 순간까지는 그의 유지를 이어받았지. 하지만 수십 번 왕이 바뀐 지금 그조차도 아무 쓸모가 없어졌어.”
점점 더 썩어 들어가는 나무를 보는 것도 질렸다. 솔이 말을 덧붙이며 황금잔에 든 술을 한 번에 비웠다.
소중한 씨앗을 심어준 제국은 순식간에 거대한 나무로 자랐지만, 그 순간 썩기 시작했다. 썩어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건 속이 아팠다.
“내 소중한 아이를 내려 보낸 것은 그들의 간절함을 외면하지 않은 내 마지막 배려였다.”
쿵. 건물이 크게 한 번 흔들렸다. 동시에 솔의 몸에서 황금빛의 빛무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태양만큼이나 뜨거운 열기에 걸어둔 그림의 물감이 녹아내렸다. 화병에 꽂힌 꽃은 순식간에 가루로 바스러졌고, 허공에 떠오른 서류들이 재가 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보다 못한 자르딘의 왕이 손을 허공에 횡으로 그었다. 이번엔 푸른 기운이 황금빛 빛무리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내 나라를 불바다로 만들 생각이 없다면 기운을 좀 억눌러.”
“……그래.”
황금의 빛무리가 다시 솔의 몸으로 스며들자 푸른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한껏 올라갔던 온도가 서서히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그 아이들을 위해서 해줄 게 없다.”
“네가 기르는 그 나무 밑에 굉장히 오래된 것이 똬리를 틀고 있더군. 그 찌꺼기가 내 왕궁에 침범해서 오랜만에 기분이 더러웠어.”
“그 땅에 뿌리내리고 있는 죽은 정령이야. 제국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지. 최근에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았더군.”
“최근?”
“인간의 시간으로 따지면 몇백 년쯤 전이겠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솔이 손을 뻗어 내려놓은 잔을 다시 붙잡았다. 살짝 내리깐 눈꺼풀이 잘게 흔들렸다. 소년이 한숨을 삼키곤 잔을 잡은 손을 뻗었다.
왕이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자 솔의 잔에 와인이 차올랐다. 솔이 그것을 한 모금 다시 머금었다.
“눈, 인간놀이는 재밌나 봐?”
“제법 좋아.”
“너는 예전부터 인간을 좋아했으니까. 나랑은 달랐지.”
“너 그 아이에게 대체 무슨 힘을 불어 넣어놓은 거야?”
“내 영혼의 일부분을 줬을 뿐이야. 그 힘이 후대까지 이어져 그들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번성하고 번영을 이뤄서 썩은 뿌리를 도려내주길 바랐다.”
솔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가 말없이 한숨을 삼키곤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가 바랐던 것과는 많이 달라졌다.
인간들은 솔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편의를 봐주면 봐줄수록 더욱 썩어버렸고 이윽고 소중한 아이까지 망가뜨렸다. 솔의 인내심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할 만큼 했다.”
“솔.”
“눈, 나는 마지막까지 약속을 지키려 했어. 내 아이가 여황이 되었다면 나라는 그들이 원하던 대로 태평성대를 이룩했을 거다.”
그만큼 솔은 아끼고 아끼던 영혼을 내려 보냈다. 보듬고 다듬어서 애정을 듬뿍 주어 기른 소중한 아이였다.
망가져가는 아이를 보며 속이 쓰렸던 것은 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손을 뻗을 순 없었다. 그들의 세계에도 규칙은 분명히 존재했다.
“네가 부러워, 눈.”
솔은 고통받는 아이를 보며 직접 세계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나는 사랑하는 아이에게 힘을 줬다.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어.”
“솔.”
“물론, 네가 그 아이보다 먼저 선수를 친다고 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거다. 내 나라를 구원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도록 해.”
솔이 찰랑거리는 와인을 한 번에 들이켜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지쳤고, 인간 세상을 지켜보는 것에 신물이 났다.
솔은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지독히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최근 수백 년간 그 계획들이 수없이 틀어지고 틀어지길 반복했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봐온 애증 어린 정을 버릴 수가 없어서 소중한 아이까지 내려 보낸 것이었다.
그것조차 제 발로 차버린 이들에게 솔은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었다.
“그 아이는 원한다면 비를 부를 것이고, 물을 마르게 할 것이며, 수분을 머금은 모든 생명체를 제 손에서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을 거다.”
솔의 눈에서 황금빛 안광이 번쩍였다. 왕이 이마를 짚었다. 골치 아픈 일들이 차곡차곡 눈앞에 쌓여 그를 괴롭게 했다.
“그래서 신의 문양을 가진 자들을 그렇게 내려 보냈나?”
눈의 물음에 솔이 눈을 샐쭉 위로 치켜세웠다.
“아.”
소년의 몸을 한 솔이 이내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내 문양을 준 아이들은 한 세기에 딱 한 명씩이었다. 절대로 동시대에 겹치지 않았지.”
“기사들이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여러 명이라고 하던데.”
“난 모르는 일이야. 인간들의 잔머리가 그만큼 발전했다는 거겠지. 감히 스스로 신의 이름을 탐할 정도로.”
솔이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돌아가려던 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허리를 꺾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녀가 있더군. 할리아.”
잔을 입술에 대던 왕의 손이 멈췄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솔을 쳐다봤다.
“인간으로 환생한다고 하더니 결국 필멸자가 되었어.”
“솔. 그녀는 죽었어. 네가 본 것은 할리아가 아니야. 너라도 그 이상 입 밖에 낸다면 가만히 두지 않겠어.”
“오, 눈. 자네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군.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나도 결국 잊지 못해서, 굴레를 반복하는 그녀를 옆에 뒀어.”
솔이 비뚜름히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왕이 한숨을 내쉬며 잔을 내려놨다.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들켜 놀림당하는 건 그다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돌아가, 솔. 네 나라로.”
“내 나라는 없어. 네가 이 왕국을 만든 것과는 다르게 나는 그 나라를 만들지 않았어. 그저 필멸자였던 친우와의 약속을 지켜온 것뿐이다.”
“아주 오랜 시간 지켜왔지.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을 내려다보며 정말 애정이 생기지 않았다고 할 수 있어?”
왕의 질문에 솔의 입이 닫혔다. 오랜 시간 애정 한 톨 쌓이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솔은 아픈 곳을 찔러오는 그의 말에 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것보단 내 아이가 걱정되는군.”
솔이 능숙하게 말머리를 돌렸다.
“그 찌꺼기가 신기한 걸 알고 있었어. 대륙이 제대로 존재하지도 않았을 아주 고대의 기록. 그 안에서만 나오는 우리들의 힘을 막을 수 있는 아주 약간의 가능성.”
“붉은 문양.”
솔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고대에 존재해왔던 것이었다. 땅속 깊이 묻혀 다시는 빛을 볼 일 없어야 했던 것이었다.
“내 아이를 그 문양으로 가득 쓰인 방에 가뒀지. 물의 정령이 아이를 처음부터 지키지 못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작은 힘은 대항하지 못할 테니까.”
“이야기는 그게 전부라면 난 이만 잠을 자러 갈 거다.”
“제국은 내가 품지. 내 소중한 아들이 네 딸을 마음에 들어 하거든.”
왕이 페델리우스를 생각하며 말했다.
“괘씸하기는.”
솔이 입술을 툭 내밀며 뚱하니 대답했다.
눈(Nun)이 말하는 아이가 누군지 모르지 않는다. 소중한 아이를 품에 안고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눈길을 하던 남자아이를 솔도 보고 온 참이다.
“괘씸? 내 아들이 뭐가 어때서?”
“당연하지. 내 딸은 신이 와서 결혼시켜달라고 무릎을 꿇어도 안 줄 거다.”
“허. 웬만한 떨거지 신보다 우리 아들이 훨씬 잘났어. 그 나이에 검술로 나랑 맞먹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사라지려던 솔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소년이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뒤로 돌아 왕의 눈을 쳐다봤다.
“네놈 실력이 떨어졌겠지. 멍청한 물방개 같은 놈. 내 아이가 네 아들에 비해 모자란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솔의 가시 돋친 말투에 왕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툭 튀어나왔다.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팔짱을 끼고 있던 솔이 지지 않고 그를 노려봤다.
“내가 물방개면 너는 사막 전갈이라도 되는 건가?”
되묻는 왕의 목소리에 솔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네 딸이 내 아들 좋아해.”
“병아리가 어미 닭 졸졸 쫓아다니는 거겠지. 수천 년을 살았으면서 각인효과도 모르다니. 필멸자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 어때?”
솔의 주변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반대로 왕의 주변은 평균온도보다 낮게 가라앉았다. 집무실 안의 온도가 급격하게 차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똑똑한 양반이 각인효과가 얼마나 강력한지도 모르나?”
“그 아이가 좋다면, 뭐든 좋겠지.”
“분노에 휩쓸려 살인을 하려고 하는 건 내키지 않아.”
“네가 막아도 그 아이는 분명 원하는 바는 이룰 거야. 네 말마따나 내 소중한 딸이니까.”
솔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어 왕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 문양이 그려진 검에 찔렸으니 당분간 일어나진 못하겠지만, 죽음의 기운은 보이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당연하지. 그녀는 강해. 내 소중한 아이니까.”
그가 몸을 돌려 한 걸음 내딛자 검은 공간이 생겨났다.
“난 돌아가지.”
“조심히 가게.”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하자고.”
왕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솔이 훌쩍 검은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왕이 참았던 긴 한숨을 내뱉었다.
오래된 친우였지만,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인간이 되고는 처음 보는 거였지.”
그는 제국이 있는 그의 영역에서 자신은 자르딘의 근처에서 나가질 않았다.
‘내가 왜 저놈의 뒤치다꺼리를 해줘야 하는 건지.’
눈앞에 황녀가 왔을 때 그는 별생각이 없었다. 문양을 보고서야 그녀가 솔의 사랑을 받고 태어난 아이라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그 안에 담긴 깊은 어둠을 보고서 예정을 바꿔 거두기로 마음을 돌렸다. 한숨을 삼킨 채 와인을 한 모금 더 입에 머금었다.
“오랜만의 전쟁이군.”
확립되지 않은 나라에는 인재가 필요했다. 한 세기, 인간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만 세계에 간섭하기로 한 이유는 그것이었다.
필요한 인재는 제각각 이곳저곳 숨어있었고, 좋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는 이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을 하나둘 모아서 동기를 부여하고 왕궁에 모아놓자 짧은 통치 기간 내에 나라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슬슬 나도 물러날 때가 됐군.”
필요한 건 후계자뿐이다. 왕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눈꺼풀 위로 타오르는 불꽃을 닮은 색을 가진 머리카락이 얼핏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