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99)

* * *

“후우.”

배에서 내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건조한 공기와 메마른 땅. 버석거리는 모래는 결코 비옥하다고 하기엔 부족했다.

전쟁은 결코 무언가 신호를 주고받으며 시작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분위기가 스산해졌고, 자르딘 병사들은 황녀가 쓰러지고 5일쯤 지나자 하나둘 배에 올랐다.

일주일쯤 후에는 당연하게도 트럼프 제국에서 이상을 감지했다.

물론, 자르딘 왕국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포로로 신병을 넘겨주었던 황녀를 제국이 암살하려고 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녀는 신녀가 될 예정이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제국에서 암살자를 보냈다는 것이 이야기의 골자였다.

트럼프 제국은 눈엣가시로 전락했다.

사막화가 되어가는 그 제국 덕분에 근처에 붙어있는 타국 역시 피해를 받았다.

하물며 그들이 쫓아낸 존재가 신녀가 될 예정이었다는 이야기는 모두가 제국에게서 등을 돌리는 기폭제가 되어주었다.

신벌이 두려운 듯 다들 제국을 모른 척하고 있다고 들었다.

타국의 도움을 받아 왕국의 군대는 무사히 제국이 있는 대륙을 밟을 수 있었다.

“그래도 바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불어줘서 시간이 제법 단축됐습니다.”

“하늘이 출정을 반가워하고 있는 모양이지.”

내 질문에 폐하가 담담히 대답했다.

평소와 비슷하게 비스듬히 올라간 입꼬리로 내뱉은 목소리였지만 표정은 제법 단단했다.

설치된 천막 안은 아늑했다. 침대에 앉은 폐하는 지쳐 보였다.

“인사는 제대로 나누고 왔느냐?”

“출발하는 날까지도 눈을 뜨지 않으셨습니다. 외상은 다 나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차오르는 한숨을 애써 삼켰다. 긴 전쟁이 될 거다. 아무리 예전만 못한 제국이라고 하더라도 전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일 년 안에만 끝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방에 군대가 깔렸더구나.”

그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폐하는 퍽 유쾌해 보였다. 무엇이 그렇게 유쾌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건 그렇고, 굉장히 건조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황녀 전하께서 살아오신 겁니까?”

“긴 시간을 땅조차 밟지 못하고 살았지.”

“황녀 전하께서는 절 속이신 거겠죠.”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수없이 고민해봤다. 왜 속였을까. 자신이 그렇게 믿음직하지 못했을까.

그저 신뢰를 주지 못한 것이 마음 아팠다.

“너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속인 거지.”

“힘이 되어주고 싶었습니다.”

“적국의 사내를 쉽게 믿을 수 있을 리가 있나. 평생을 아무도 믿지 못하고 살아온 아이가 말이다.”

폐하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다. 그 정도 사실은 나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심장이 아픈 것은 달랐다.

“제가 조금 더 강했다면, 좋았을 텐데요.”

탄식하듯 튀어나간 말은 막을 새도 없었다. 황급히 입을 닫았다가 힘을 풀었다.

“그녀는 광장에서 자신을 욕하는 이들이 없어지길 바랐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그니라는 남자가 그들을 전부 죽였죠.”

“들었지.”

“그런 것처럼, 황녀께서는 자신을 괴롭힌 이들이 전부 죽길 바라는 것입니까?”

숨기고 또 숨긴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을 거듭하다가, 최종적으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는 내가 몇 번이고 물었을 때 제국이 싫다고 했다.

그녀의 그 분노가 진짜라면 원하는 것은 눈에 보였다. 말없이 주먹을 쥐었다.

“그녀와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폐하.”

힘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쥔 주먹에는 더 힘이 들어가지 못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천천히 펼쳤다.

“진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제대로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제 손으로 이루어줄 수 있도록.

바라는 것이 누군가의 죽음이라도 기꺼이 피를 묻힐 의향이 있었다.

다만, 줄곧 어둠에만 갇혀있던 그녀가 절망에 빠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는 나 역시 겪어봐서 안다.

첫 살인이란 누구에게나 존재했다. 병사든 기사든 처음에는 모두가 트라우마에 갇혀 벗어나질 못했다.

살아있는 인간의 심장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검 끝에 갈라진다. 박동하던 것이 멈추고 이윽고 무너진 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러려면 눈앞의 적부터 물리쳐야지.”

“예,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주면 좋으련만.”

폐하가 한숨을 삼켰다.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몸을 돌렸지만 폐하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천막을 빠져나갔다. 천막 바로 앞에는 갑옷을 입은 엘레나 재상이 있었다.

“재상 각하.”

“이야기는 다 끝났나?”

“예. 어딜 갔다 오시는 길입니까?”

옆구리에 찬 검은 호신용인 듯 날카로운 레이피어였다.

최전선에서 싸울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책략에 도움을 줄 군사로 참여했다.

“군사 회의 일정을 알려줬다. 오늘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할 예정이니 그대도 늦지 않게 오도록 해.”

“알겠습니다. 폐하께서 생각에 잠기신 듯해 따로 인사를 건네지 않고 나왔습니다. 저는 제 기사단에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엘레나 재상에게 가볍게 묵례를 해 보이곤 발을 재게 놀렸다.

아직 검에 피를 묻히진 않았지만, 속이 울렁인다.

곧 시작될 전쟁에서 먼저 베지 않으면 베이는 것은 나다. 지켜야 할 것을 상기하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오시리아…….”

목소리가 바람에 흩날리며 흩어졌다.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다. 그저 웃는 얼굴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

계곡물이 흐르는 것처럼 잔잔한 목소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검 손잡이를 매만지다 곧장 기사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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