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99)

다락방 황녀님 4권

주변이 물로 가득했다. 물속에 갇혔는데도 숨쉬기가 어렵지 않았다. 포근하고 아늑해서 마치 커다란 솜이불 속에 푹 박혀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주인님, 주인님.>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눈을 뜨고 싶은데 눈꺼풀이 무거워서 뜰 수가 없었다. 축 처진 몸은 움직이는 것을 거부한다.

<주인님,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울먹임이 섞인 목소리가 간절하게 귓가를 간질였다. 알겠다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입술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웠다.

아콰, 울지 마.

아이가 우는 건 싫다. 이상하게 가슴이 아팠다. 소중한 가족은 이제 웃어줬으면 했다. 조금 더 자라서 어른이 되게 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질끈 감긴 눈꺼풀이 무거웠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애써 끌어당겼다. 숨을 삼키고 뱉는 것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이상하게도 숨 쉬기가 버거웠다. 마치 숨을 쉬는 장기 일부분이 고장이라도 난 것 같았다.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애써 눈을 뜨자 주변은 새까만 것들투성이였다.

새까만 물인가?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둠에 조금 익숙해지자 뭔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누운 채 눈동자만 살짝 굴렸다.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다. 그 안으로 물이 통과하고 있었다.

“흐아악!!”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묶여있다고 생각했던 몸은 생각보다 쉽게 움직였다.

벌컥, 내지르는 비명을 들은 건지 문이 활짝 열렸다.

“신녀님!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멍하니 새하얀 옷을 입고 물밀듯 들어오는 여자들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너희, 뭐야?”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불을 손에 쥔 채 바싹 끌어당기며 그들을 노려봤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 방은 기억 속에는 없는 방이었다.

더러운 다락방도 아니었고, 깔끔하고 아기자기하던 페델리우스의 방도 아니었다. 심지어 잠시 머물던 왕궁의 방과도 달랐다.

“누구야…….”

낮아진 목소리로 그들을 향해 털을 한껏 세웠다.

“황녀님!!”

새하얗고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여자들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껏 매섭게 치켜떴던 눈이 순식간에 쓱 가라앉았다.

“메리……?”

눈이 절로 동그랗게 뜨였다. 여자들이 순식간에 몸을 비켜 세우곤 틈을 만들었다. 그 사이로 볼에 주근깨가 박힌 익숙한 인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황녀니임!!”

눈물이 그렁그렁한 메리가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메리.”

울컥, 뭔가가 속을 치고 올라온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데 마치 정말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깨어나셔서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차오른 눈물이 톡 건드리면 툭 떨어질 것처럼 위험하게 매달려있다. 이상하게도 몸이 나른해서 손을 뻗어 메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해.”

거기서 엘이 그렇게 치고 들어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엘.’

해맑게 웃던 사람이 순식간에 돌변하는 일은 쉽게 적응하기 힘들었다. 정신이 멍하고, 몸이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어디, 히끅, 더 아픈 데는 없으, 없으세요?”

벌벌 떨리는 손을 붙잡아주며 고개를 저었다.

“아픈 데 없어.”

몸이 축 늘어지고 나른했지만 그뿐이다. 아마 오랜 시간 잠을 자서 그렇겠지. 편하게 생각하며 메리의 등을 토닥였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퍽 서러운 것처럼 보여서 속이 상했다.

‘황녀님은 죽지 마세요.’

그렇게 속삭였던 목소리가 아직 잊히질 않았다. 메리가 얼마나 놀랐을지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미안해.”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곤 결국 그거 하나뿐이다. 메리가 훌쩍거리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많이 울었어?”

“네…….”

“나 때문에 슬펐어? 메리.”

메리가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건 묻지 말아주세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슬퍼서, 매일 밤 황녀님이 깨어나시길 간절히 빌었다고요.”

그렇게 말하는 메리는 한 번도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발갛게 부어오른 눈동자가 사랑스러워서 그저 마주 웃어주며 메리를 끌어안았다.

“응, 고마워.”

“제발 다시는 다치지 마세요.”

“미안해.”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못해서 미안했고, 속이 상한 메리를 진심으로 달래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곧 떠날 거라는 말조차도 내뱉을 수 없어서 그저 메리의 등만 말없이 토닥였다.

‘울어준 게 기쁘다고 하면, 메리는 화내겠지?’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울어줬다는 사실에 가슴 한쪽이 간질간질했다. 텅 빈 것 같았던 속이 차오르는 느낌에 조심스럽게 가슴께를 문질렀다.

“어디 아프세요?”

“으응, 아냐. 안 아파.”

“정말 다행이에요.”

“메리, 조금 진정됐어?”

눈 밑에 서린 짙은 그늘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쓸며 물었다.

침대 밑에서 무릎 꿇고 있는 메리를 끌어당겨 침대에 앉혔다.

“네, 네, 그럼요.”

여전히 짓무른 눈으로 메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상황 좀 설명해줄래? 저 사람들은 누구고…… 여긴 어디야?”

내 질문에 메리가 살짝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조금 곤란한 기색으로 나와 뒤쪽에 서있는 하얀 옷을 입은 여자들의 눈치를 살폈다.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비슷한 옷차림을 한 여자들을 쳐다봤다.

“나가.”

“……그럴 순 없습니다.”

“메리랑 먼저 이야기할 테니까 나가. 일단 얘기를 듣고 생각할 테니까.”

누군지는 몰라도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다락방에서 나를 돌봐주던 시녀들처럼 우르르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좋게 보이진 않았다.

“그럼 이야기가 끝나면 불러주십시오. 이 앞에 있겠습니다.”

“……알겠어.”

내 대답에 하늘하늘한 하얀 옷차림의 여자들이 고개를 숙이곤 다시 우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황녀님.”

메리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이런, 너무 날카롭게 굴었나? 메리는 내가 거짓말을 해왔다는 사실을 못 들은 건가?

“으응, 메리.”

“너무 멋져요!!”

메리가 나를 와락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분명히 실망했다거나 무섭다거나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들려올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다른 메리의 반응에 눈이 절로 동그랗게 떠졌다.

“메, 메리?”

“정말 너무 멋지잖아요, 황녀님!”

메리가 호들갑을 떨며 두 팔을 양쪽으로 파닥거렸다. 한껏 기대감을 담은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사랑스러웠다.

“멋져?”

“네. 너무 멋져요. 보셨어요? 아까 그분들 엄청 당황한 눈이었잖아요. 얼마나 격식을 강요하던지, 황녀님이 일어날 때까지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어요.”

툭 내민 입술로 메리가 불만을 토해냈다. 퉁명스러운 말투는 그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속여서 미안해, 메리.”

내 사과에 메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눈을 찡그렸다.

“뭐가 미안하다는 말씀이세요? 황녀님.”

“음……. 막, 말 못하는 어린애처럼 굴었잖아. 그러니까 처음부터 솔직히 말하지 않아서…….”

메리가 묵묵히 이야기를 들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시선을 살짝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응. 그래서 미안해.”

들키지 않았다면 평생 이야기할 마음이 없었다는 건 애써 목 너머로 삼켜냈다. 평생 속일 생각이었다. 가능했다면.

그때 힘이 폭주하지 않았다면, 눈앞이 멋대로 시뻘겋게 물들어서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이 몸에서 흘러넘치지만 않았더라면 분명히 계속 숨겼을 거다.

“왜 황녀님께서 제게 죄송해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이유는 아까 말했는데 못 알아들었나 싶어 눈을 깜빡이자 메리가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황녀님은 메리가 싫으세요?”

“아니!”

“저도 황녀님이 좋아요.”

메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자 메리가 다시 입을 열어왔다.

“지금도 이전에도 저는 황녀님을 좋아해요. 황녀님도 그런가요?”

“응. 당연하지.”

“저를 속인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아요, 황녀님. 황녀님이 어린아이 같다고 제가 황녀님을 싫어했던 것도 아니고, 사실은 멀쩡하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지금의 황녀님이 더 좋은 것도 아니니까요.”

덧붙이는 말에 멍하니 메리를 쳐다봤다.

“메리는 신기해.”

“제가요?”

“응. 늘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걸.”

언제나 생각지도 않던 말을 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듣고 보면 바라 마지않던 말이라서 늘 속이 간질간질해 견딜 수가 없게 된다.

“좋아해, 메리.”

손을 뻗어 메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메리가 순순히 품에 안겨 왔다.

“황녀님께서 왕궁에 침입한 괴물을 처치했다고 들었어요.”

“으음…….”

그때의 기억은 흐릿해서 사실 뭐라고 대답을 해주기도 어려웠다. 어색하게 웃으니 메리가 내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아왔다.

메리의 손은 언제나 거칠다. 그러나 동시에 따뜻했다. 기분 좋은 감각에 메리를 보며 마주 웃었다.

“사실 그거 말인데요.”

“응?”

“그때 황녀님이 물을 다루는 모습을 경비병들이 많이 목격했다고 해요. 그래서 폐하께서 황녀님께 신녀라는 칭호를 내리셨어요.”

메리가 도르륵 눈동자를 굴리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

“그러니까 신녀요. 신을 모시는 분인데 폐하께서 황녀님께 직위를 내려주신 거예요. 더는 볼모라는 틀에 얽매여있지 않아도 괜찮다는 이야기예요, 황녀님.”

신녀의 의미를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조곤조곤하게 설명을 덧붙이는 메리를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신녀는 밖에 못 나가?”

“아니에요! 물론 당장은 어렵겠지만, 일 년 정도 신전에서 수행을 하시면 어디든 가실 수 있어요. 그리고 월급도 나와요!”

“페델리우스랑 폐하는?”

“아, 두 분께서는…….”

메리가 말을 끌며 눈동자를 조심스럽게 굴렸다. 굳이 닦달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가만히 메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황녀님께서 쓰러지신 후로 한 달 정도 지난 건 아시나요?”

“한 달?!”

“네.”

“아니, 몰랐어.”

고개를 젓자 메리가 부드럽게 웃는다.

“한 달 전, 폐하께서 신녀로 추대하려던 황녀님을 제국이 기습했다고 공표하셨습니다.”

“그게 제국의 짓이었어?”

“공식적인 발표는 그렇게 났어요. 정확한 이유를 물어도 주인님께선 대답해주지 않으셔서요.”

메리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씁쓸하게 웃는 얼굴 위로 서운함이 언뜻 비쳤다. 질문을 던지려던 입술이 풀칠한 듯 딱 붙었다.

“그래서 페델리우스는?”

“그 뒤에 폐하께서 검을 뽑으셨고, 현재는 전쟁을 위해 트럼프 제국에 가 계실 거예요. 이쪽으론 정보가 잘 들어오지 않아서 자세히는 모르지만요.”

메리가 애써 웃으며 내게 설명했다.

눈동자에 언뜻 비친 불안감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조심히 손을 뻗어 메리의 볼에 가져다 댔다.

“뭔가 무서워?”

내 질문에 메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토끼를 닮아서 작게 웃자 그녀가 마주 웃어줬다.

페델리우스의 식구들은 언제나 그렇다. 언제나 내가 웃으면 똑같이 마주 웃어준다.

그게 좋아서 그들에게는 말문이 막히면 그저 웃는 걸로 무마할 때도 잦았다.

“전쟁은 늘 무서워요.”

“죽을까 봐?”

“네.”

“지켜줄게. 메리는 내가 지킬게.”

그것만큼은 약속해줄 수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게 내가 줄 수 있는 것이라서 다행이었다.

내 말에 메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니에요.”

“응?”

“제가 죽을까 봐 무섭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러면?”

“소중한 사람이 죽을까 봐 무서워요.”

“소중한 사람?”

“네. 주인님이나 전쟁에 동원된 다른 병사들이나, 오다가다 인사를 했던 사람이나, 그런 사람들이요.”

메리의 말에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페델리우스의 죽음이 무섭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죽는 건 나 역시도 싫었다. 그건 내게도 무서운 일이었다.

“왜?”

“네?”

“왜 다른 병사들을 걱정해?”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메리의 말을 빌리자면 오가며 인사만 나눈 사람들이 죽는 게 어째서 메리에게 두려운 일이 되는 걸까.

“그 사람들은 메리의 소중한 사람이 아니잖아.”

“하지만 나라를 위해서 싸워주는 사람들이에요.”

“병사나 기사는 원래 그런 직업 아니야?”

미간을 찌푸렸다. 메리는 어쩐지 놀란 듯 입을 벌린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게 왜 메리가 두려워할 일이 되는 건지 잘 모르겠어.”

메리와 페델리우스는 반드시 지킬 거다. 페델리우스의 식구들도 마찬가지다. 힘이 닿는 한 나는 그들의 검이 되어줄 마음이 있었다.

“나는 전쟁을 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전쟁은 모두가 살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알고 있어.”

“네, 그렇죠. 하지만……. 그들도 생판 모르는 저나 다른 사람을 위해 싸워주고 있으니까요.”

“그건 일이니까 그런 게 아니야?”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가족이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예요. 그리고 눈앞에 있는 동료도요.”

메리의 말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것이 그들의 죽음을 메리가 두려워할 이유가 되는 걸까?

“그 동료가 모르는 사람이어도?”

고개를 기울이자 메리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르딘의 모든 병사는 어떤 이유 없이도 전장에서 동료의 등을 지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예요.”

“사람의 마음은 정말 어려운 것 같아.”

메리의 입술을 바라보다 툭, 말을 내뱉었다.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그랬다. 나는 하나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은 숨 쉬는 것보다도 당연하다는 듯 입에 올렸다.

그럴 때마다 다정한 메리에게서마저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살아 돌아오셔서 기뻐요.”

메리가 눈물이 가득 들어찬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투명한 눈물이 뚝뚝 서럽게 떨어져 내렸다.

“고마워.”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면, 내가 향할 곳은 간단했다.

자르딘의 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는 내가 복수를 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황제의 목을 벨 생각이었다.

‘멍청한 왕.’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거라 생각했다면,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다.

메리의 품도, 왕이 채워둔 신녀라는 족쇄도 전부 필요 없다. 적어도 지금은 그런 것들에 매여 있을 때가 아니었다.

“메리.”

“네! 아, 혹시 배는 고프지 않으세요? 식사를 내올까요?”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메리가 연신 재잘거렸다. 하늘은 아직 밝았다. 곧장 떠나겠다고 입을 열려다가 느릿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응, 좋아.”

내 입에서 원하던 대답이 나왔는지 메리가 벌떡 일어났다.

“금방 가져올게요. 잠시만 계세요!”

“응.”

“정말 금방 올 테니까 아무 데도 가시면 안 돼요!”

메리가 연신 불안한 듯 내 손을 붙잡은 채 신신당부를 했다. 지금 당장 떠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저 그녀의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기다릴게.”

“네. 다녀오겠습니다!”

메리가 펄쩍 뛰어오르더니 곧장 쌩하니 방에서 뛰쳐나갔다. 오랜만에 정신없는 메리의 모습에 웃음이 포슬포슬 새어나왔다.

“아콰, 있니?”

<네, 주인님.>

“몸은 괜찮아?”

<그럼요. 주인님께선 괜찮으세요?>

“괜찮긴 한데…….”

평소에는 불쑥 모습 먼저 드러냈을 아콰가 빛무리조차 내뿜지 않았다. 목소리도 푹 가라앉은 것처럼 들렸다.

“아콰?”

<네. 주인님.>

“밖으로 나와 보렴.”

내 부름에도 아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예 대답도 들리지 않아 눈을 가늘게 떴다.

“나와 봐, 아콰.”

다시 한번 부드럽게 부르자 손등에서 꾸물거리는 빛무리가 아주 천천히 빠져나왔다. 빛무리임에도 불구하고 나오기 싫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빛무리는 아주 천천히 눈에 익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무슨 일 있었어?”

<죄송해요…….>

“뭐?”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기어들어가다 못해 죽어가는 목소리에 울먹임이 가득했다. 그제야 아콰가 나오길 꺼렸던 이유를 깨달았다.

“괜찮아. 뭘 사과해. 네가 날 치료해준 걸 알고 있어.”

<…….>

“온몸에 아콰의 기운이 풀풀 느껴지는걸.”

포근한 물속에 잠겨 있는 기분이었다. 꿈속에서 헤매는 내내 그래서 외롭지 않았다.

<자르딘의 왕께서 제게 힘을 불어넣어주셨어요. 그래서 그 돌아온 힘으로 주인님을 치료해드릴 수 있었어요.>

아콰가 내 앞에 꿇어앉은 채 조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잔뜩 풀이 죽어 축 내려온 눈꼬리가 안쓰럽다.

“물은 사람을 치료할 수도 있구나.”

서툴게 말머리를 돌렸다. 아콰가 물고기처럼 눈을 끔뻑이더니 이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반짝이는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사람의 몸에서 수분을 전부 빼낼 수도 있지만, 치유의 힘도 가지고 있어요. 인간의 운명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중상이 아니라면 이렇게 물로 치료할 사람을 감싸게 하면 돼요!>

생각보다 간단한 방법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헤실헤실 웃던 아콰가 양팔을 파닥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치료가 되기를 바라면 돼요!>

“그냥 바라기만 해?”

<네! 주인님의 힘은 기본적으로 물과 간절한 바람으로 이뤄져 있어요. 원한다면 비도 내릴 수 있답니다!>

아콰가 나를 끌어안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어린아이처럼 들뜬 모습으로 재잘거리는 표정은 오랜만의 만남을 퍽 반가워하고 있다는 것이 물씬 느껴졌다.

“저녁에 트럼프로 가자.”

<트럼프 제국이요?>

“내 아버지란 사람을 죽여보려고.”

그걸로 이 답답하고 텅 빈 속을 어떻게든 채울 수만 있다면 기꺼이 피를 묻히는 것도 마다치 않을 거다.

“그리고…… 엘이 거기에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내 한 달을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날려버렸는데, 복수 정도는 해줘야지.”

배와 심장 사이를 꿰뚫던 감각이 아직도 잊히질 않았다. 아무런 의심 없이 믿었다. 해맑은 표정도, 천진난만한 목소리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거짓이었는지.’

기사단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인가? 도대체 나를 황제로 만든다는 건 무슨 뜻이지? 정말 트럼프 제국과 관련된 사람인가? 그럼 도대체 왜 자르딘 왕국의 기사단에 들어와 있었던 거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열심히 늘어진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응? 아, 그럼! 왜?”

<주인님을 둘러싼 기운이 불안정해서 여쭤봤어요.>

“아콰, 그건 뭐였을까?”

<그거요?>

“엘 말이야.”

내 물음에 아콰가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저번에 기사단에서 만났던 그 남자와는 기운이 완전히 다르다는 거예요.>

“다르다니?”

<그러니까, 겉모습은 똑같아 보였지만, 내용물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어요.>

아콰의 설명이 그리 길지도 않았는데 쉽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음. 인간의 몸을 물이 담긴 컵이라고 칠 때 컵은 그대론데 컵 안에 물이 아니라 썩은 무언가가 담겨 있는 느낌이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그럴 수도 있어?”

<글쎄요, 저도 그런 경우는 본 적이 없어서요.>

아콰가 침대 밑에 늘어뜨린 다리를 이리저리 흔들거리며 대답했다. 고개를 이쪽저쪽 기울이며 고민을 하는 듯했다.

“그럼 그 썩은 무언가를 쏟아버리면 컵은 다시 쓸 수 있는 거야?”

<사용할 수는 있죠.>

아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불쑥 고개를 다시 치켜들었다.

<아! 혹시 원래의 물을 다시 담을 수 있는 거냐고 물으시는 거면 그건 어려워요.>

“어려워?”

<네. 뭐, 물이란 게 다 그렇지만 바닥에 쏟아버리면 다시 그 물을 주워 담을 순 없으니까요. 새 물을 담아야 한답니다.>

망설임 없는 아콰의 말은 냉정할 정도로 아무런 여지도 주지 않았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네.]

“그래, 그렇구나.”

다시 한번 수긍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아콰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주인님, 슬프신가요?>

“슬퍼? 아니?”

<……근데 왜 울고 계세요?>

아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바싹 다가왔다.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댄 아콰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울어……?”

<네.>

아콰의 작은 손이 뻗어와 눈 밑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어차피 잠시 잠깐 스쳐간 인간이니 상관없지 않나요?>

아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내게 묻는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으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분명히, 아콰의 말에는 틀린 게 없다.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축축한 것이 손등에 묻어났다.

‘눈물…….’

멍하니 그 투명한 물방울을 쳐다봤다. 나는 왜 이걸 흘리고 있었더라?

아콰의 말대로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간 인연이다.

단지 한 번의 카드게임을 했을 뿐이다. 한두 번의 인사를 나눴을 뿐이다.

[소중한 사람이 죽을까 봐 무서워요.]

[소중한 사람?]

[네. 주인님이나 전쟁에 동원된 다른 병사들이나, 오다가다 인사를 했던 사람이나, 그런 사람들이요.]

그것은 분명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대화였다.

[그 동료가 모르는 사람이어도?]

이유도 없이 눈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거슬려 손등으로 벅벅 문질렀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 밑이 금세 따끔따끔해졌다.

“죽는 건 영원히 보지 못하는 거야? 아콰.”

<인간의 죽음이란 대개 그런 거죠. 하늘로 돌아가서 언젠가 다시 땅으로 돌아올 거예요. 그러니 슬퍼할 필요는 없답니다.>

조곤조곤한 설명에도 심장이 침착하게 가라앉지 않았다.

“아콰.”

<네, 주인님.>

“근데 그러면…… 내가 알던 엘은 다시 볼 수 없다는 거지?”

<영혼은 같겠지만, 인간은 성장환경에 따라 다르게 자라니까요. 그래도 영혼의 형질이라는 게 있으니 비슷하게 자랄 거예요.>

아콰가 같은 모양의 도자기를 제작하는 법을 설명하듯 가볍게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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