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답니다. 주인님.>
아콰가 웃으며 대답했다. 곧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이상한 미소였다.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상한 미소.
<가요, 주인님.>
“아, 어. 그래.”
아콰가 내 손목을 붙잡으며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신전 안에도 연못은 있었다. 한가운데 새하얀 조각상이 세워진 커다란 연못이었다.
그 위에서 이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가자, 이그니. 아콰.”
“네.”
<네, 주인님.>
손을 붙잡은 채 곧장 연못을 향해 수직으로 하강했다.
‘제국으로 가자.’
풍덩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밝아졌다. 세상이 또 한 번 반전했다.
“흐악!”
입에서 튀어나온 이상한 비명과 함께 엉덩방아를 찧었다. 꼬리뼈를 타고 오르는 통증에 끙끙 앓으며 신음했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뭔가 튕겨 나간 느낌이…….”
<주인님, 힘이 엄청 늘어난 거 아세요? 주인님의 기운이 흘러넘치고 있어요. 힘을 쓸 때 조금 더 꽉 억누른다는 느낌으로 조정해야 해요.>
아콰가 두 팔로 나를 일으켜주며 설명했다. 어쩐지 뭔가 편하다 싶었더니…….
“힘이 늘었어?”
<네! 주인님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면 저도 성장한답니다. 그리고 정령인 제가 성장할수록 주인님의 힘이 점점 해방되는 거고요!>
아콰가 밝아진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포슬포슬 웃는 얼굴이 평소와 다름없어 보인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렇구나. 같이 성장하는 거네.”
<네!>
몸에 묻은 흙을 털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 제가 성장하기 전에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생각?”
<네. 제가 이렇게 커지려면 주인님께서 정신적으로 성장하셔야 할 필요가 있었잖아요!>
아콰가 두 팔을 양옆으로 파닥거리며 설명했다. 어린아이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여전히 동글동글한 얼굴이어서 그런지 귀여웠다.
“음……. 네가 틀렸다고 생각했어.”
<틀려요? 제가요?>
“인간의 죽음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이라는 걸 깨달았어. 아무리 영혼이 같아도, 나는 그 사람을 다시 볼 수 없으니까.”
내 설명을 듣던 아콰가 눈을 찌푸렸다.
<인간은 죽으면 다시 그 영혼이 윤회해서 땅으로 돌아온답니다.>
아콰가 내게 설명하듯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언제나와 같이 선생님처럼. 아콰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곤 나 역시 입술을 달싹였다.
“근데 그건 그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네가 틀렸다고 생각했어.”
<……제가 틀렸어요?>
“너도, 나도 모르는 것뿐이야.”
아콰가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평소와 다름없는 청량한 기운일 텐데 어쩐지 평소보다 더 차갑고 시리게 느껴졌다.
<인간은, 주인님을 망쳐놓는군요.>
아콰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말했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너무 작은 목소리라 듣지 못해서 되묻자 아콰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다시 배시시 웃는 표정을 보다가 이그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그니?”
“예.”
“왜 아콰를 그렇게 노려보고 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번엔 이그니가 아콰와 같은 말을 읊조리며 고개를 젓는다. 뭐야? 얘들 왜 이래? 눈을 가늘게 뜨자 이그니는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
“여긴 어디야?”
“창고로 보입니다.”
이그니의 설명에 그제야 짚이 깔린 창고가 눈에 들어왔다. 하필이면 내가 날아간 곳은 짚이 깔리지 않은 맨바닥이었다.
‘운도 없지.’
혀를 차고는 창고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그니가 타이밍 맞게 곧바로 문을 열었다.
“어디를 가실 겁니까?”
“갈 곳이야 한 곳뿐이지.”
목적은 하나뿐이었다.
“아무도 이 제국에서 나갈 수 없어.”
그건 내가 허락하지 않을 거다. 누구 하나 도망치지 못할 거고, 동시에 어떤 사람도 이 제국으로 오기 위해 배를 탈 수 없을 거다.
“아콰. 제국 근처에 있는 강과 바다에 배가 뜰 수 없게 만들어줘.”
내 말에 아콰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다. 사랑스러울 정도로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면 뭐든지.>
아콰가 물을 뜨듯이 양손을 모았다. 아콰의 손 위로 푸른색 기운이 자그마한 빛무리를 만들었다.
이윽고 그것이 성인 남자 주먹만큼 커졌을 때 아콰가 그것을 살포시 하늘로 띄워 올렸다.
풍선을 날리듯 아주 조심스럽게.
이그니가 그것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늘로 날아간 빛무리는 구름 속에 삼켜졌다.
<주인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아무도 이 제국에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을 거예요.>
울리는 목소리가 내 바람을 고스란히 읊었다.
쿠릉, 쿠르릉.
가깝지 않은 먼 곳에서 하늘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것은 작게 들려오는 소리로 알 수 있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아콰가 내 바람을 들어준 것이 분명했다.
“가자. 아콰, 이그니.”
조금 멀지만 커다란 황성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물론 황성이 보인다는 것은 내가 수도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천천히 걸어 수도의 큰길로 향했다. 골목골목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에 파고든 쥐와 벌레들은 배를 불리고 있었다.
“……훨씬 심해졌군요.”
“그러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따로 로브를 써서 머리를 가리지 않았다. 물론 눈 색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모든 걸 끝내려고 왔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내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제국민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생존을 갈망하는, 열망하는 인간의 눈이다.
‘저 눈을 이그니가 하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나도 최선을 다해 그의 목숨을 지키려고 노력했을 거다.
“페델리우스가 여기 없어서 다행이야.”
있었다면, 분명 좋지 못한 꼴을 보여줬어야 했을 테니까. 수도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뼈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말라있었다. 타는 듯한 기갈에 바닥을 긁는 것도 여러 차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제국과도 영원히 안녕할 수 있게 됐다.
“황녀 전하.”
익숙한 목소리에 걸음이 멈췄다.
앞에서 들린 목소리는 아니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었지만,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말도 안 돼.’
침이 절로 꿀꺽 삼켜졌다. 뒤를 돌아보기가 무서웠다. 눈을 질끈 감고 앞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오시리아.”
나지막한 부름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숨도 함께 멎었다. 여기서 절대 들려선 안 되는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려 퍼졌다.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간신히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돌아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에게 말했다. 지금 너를 보면 안 돼.
간신히 다잡은 것들이 또다시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이 분명했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싫었다.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돌아가지 않습니다.”
“돌아가.”
“당신과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기다렸습니다.”
“……내가 여기 올 걸 알았어?”
“부끄럽지만, 폐하께서 귀띔을 해주셔서 알게 됐습니다.”
등을 돌린 채로 대화를 나눴다. 꼿꼿하게 앞을 바라본 채로. 그런데도 목소리는 점점 등 뒤에서 가까워졌다.
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주먹을 꽉 쥐었다. 꽉 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린다.
“돌아가 줘.”
“싫습니다.”
훅, 뒤에서 끼치는 페델리우스 특유의 체향과 동시에 몸이 덥석 안겼다.
허리와 어깨를 뒤에서 감싸 끌어당긴 페델리우스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기다렸습니다.”
“나를, 왜?”
“당신이 보고 싶었고, 당신과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으니까요.”
그제야 내가 연기를 하고 있지 않은 상태로 처음 만난다는 걸 깨달았다. 저번엔 경황이 없었고, 그 앞에서 제대로 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난 갈 곳이 있어.”
“알고 있습니다.”
“알면 놔줘.”
“제게 당신의 시간을 조금 나눠주실 순 없겠습니까?”
귓가에 바싹 닿은 물음에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있던 페델리우스가 내 몸을 조심스럽게 돌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녀 전하.”
고개를 들지 않는 나를 위해 페델리우스가 한쪽 무릎을 꿇어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마주친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생기로 가득했다.
“황녀 전하.”
“화났어?”
내 던지는 듯한 질문에 페델리우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화나지 않았습니다.”
“그럼 실망했어?”
“아뇨,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역시나 고개를 저었다.
“메리도, 너도 바보인 것 같아.”
화를 내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텐데, 두 사람 다 똑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어떤 기분인지, 무슨 마음인지 조금도 이해되지 않는다.
페델리우스는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혼자야?”
“네.”
고개를 끄덕이는 페델리우스를 가만히 바라봤다. 말없이 고개를 돌려 우뚝 서있는 황성을 쳐다봤다. 여전히 견고하고, 여전히 화려하다.
겉보기만큼 그 내부도 멀쩡한지는 둘째 치고.
“어디에서 지내는데?”
“제대로 운영되고 있진 않지만, 여관이 있어서 그곳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운영하는 여관이 있어?”
“방만 내어주는 식이지만요.”
페델리우스가 쓴웃음을 지은 채 내게 대답했다. 뒤에서 묵묵히 기다리는 아콰와 이그니를 힐끗 쳐다보곤 페델리우스를 다시 내려다봤다.
“일어나, 페델리우스.”
“뒤에 있는 한 명은 누구입니까?”
“아콰라고 해. 소중한 가족이야.”
“아……. 그때, 황녀 전하의 상처를 치료해줬던 정령이시군요.”
이미 면식이 있는 듯 페델리우스가 아콰를 알아봤다. 아콰가 나를 치료해줬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걸 페델리우스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전부 다 알았겠지?’
이런 식으로 들켜서 스리슬쩍 넘어가고 싶진 않았다. 들키지 않는다면 끝까지 들키지 않기를 바랐다. 그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 될 줄이야.
“아콰, 이그니. 잠시 괜찮을까?”
“주군께서 원하신다면 상관없습니다.”
<물론이죠, 주인님.>
이그니와 아콰가 동시에 대답했다. 페델리우스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쪽 무릎에 가득 묻은 흙먼지를 그가 털어낸다.
“황녀라니……. 그분이 황녀님이란 말인가?”
페델리우스가 몸을 돌리려는데 옆에서 버석하게 마른 목소리가 들렸다. 절로 멈춘 걸음에 슬쩍 고개를 돌리자 놀란 눈을 한 노인이 서있었다.
“아아……. 돌아와 주셨군요.”
“…….”
털썩, 무릎을 꿇는 노인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절로 이마가 찌푸려졌다.
“부디,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고목마냥 말라붙어 자글자글한 주름 위로 굵직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마른 나뭇가지마냥 마른 몸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저희 아이가 죽어가고 있어요. 물도 식량도 먹질 못해서, 죽,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노인의 뒤에서 중년 여자가 불쑥 튀어나와 무릎을 꿇었다.
품에 안긴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작은 아이는 눈도 뜨지 못한 채 색색거리며 밭은 숨만 내뱉고 있었다.
바싹 마른 몸과는 다르게 기이할 정도로 배만 부풀어 오른 채였다.
의학에 문외한인 나로서도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저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황녀 전하.”
페델리우스가 옆에서 나를 불렀다.
“응, 미안해. 가자.”
“……그냥 가실 겁니까?”
“내가 뭔가를 해줘야 해?”
내 물음에 페델리우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팔을 뻗은 페델리우스가 내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저 한마디라도 해주는 게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을 뿐입니다. 매달릴 곳이 없어서 불안해 보이니까요.”
대답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물론, 이 상황을 황녀께서 만드신 건 아니겠지만요.”
페델리우스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여전히 꿇어앉아 땅이 이마에 닿을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한 거야.”
“네?”
“처음에는 내가 아니었지만, 나중에는 괘씸해서 비가 오지 말라고 간절히 빌었어. 자르딘 왕국으로 내가 넘어간 뒤에는 더욱더.”
“황녀…… 전하……?”
무겁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페델리우스를 쳐다봤다. 페델리우스의 푸른 눈동자에 내 눈빛이 비쳐 보였다.
주변이 쨍하니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다. 이곳에 무릎을 꿇고 앉은 이들의 절망이었다.
“페델리우스. 내가 이 사람들에게 한마디 해주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지?”
“……예.”
페델리우스가 당황한 듯 한 박자 늦게 대답을 내놨다.
“할 말이 없어.”
“아.”
“어차피 죽을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거든.”
내 말에 페델리우스의 입이 꾹 닫혔다.
그는 지금 사태가 이해되지 않는 듯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어차피 들킨 거 전부 드러내는 편이 나았다.
저 생각은 진심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곳에서 나가는 길은 모두 막혔고, 나는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거다.
“말했잖아. 난 이 나라가 싫어. 페델리우스.”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가 내게 정이 떨어진다면, 그것 또한 페델리우스를 지키는 방법의 하나가 되겠지.
‘엄청 슬플 것 같지만.’
눈시울에 열기가 몰리는 것 같아서 고개를 치켜들어 하늘을 향했다. 언제 이렇게 자신에게 파고들어온 걸까. 페델리우스는.
“안 됩니다. 제발. 우리 애만큼은, 저희 애만큼은 살려주십시오. 아무런 죄도 없는 아이입니다. 그저…… 그냥…….”
끅끅거리는 울음소리를 내며 아이를 안은 여자가 내 옷자락을 붙잡아왔다.
고개를 내젓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희가 다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죄는 제가, 다 짊어지고 갈 테니 부디…….”
쉽게 말이 나오질 않았다. 뭔가 내뱉고 싶은 말은 가득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전부 무용지물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숙소가 어디라고 했더라?”
“아, 수도 초입의 여관입니다.”
“가자.”
발을 붙잡은 여자를 떼어내고 곧장 몸을 돌렸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황녀 전하, 제발 자비를…….”
“제 목숨을 거둬 가시고 아이를 살려주세요!”
사방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흐느낌이 섞여있다. 귀를 아프게 하는 애절한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기듯이 쫓아오는 이들을 힐끗 쳐다보다 걷는 속도를 올렸다.
그들은 서있는 것조차 매우 힘겨워 보였다.
“황녀 전하.”
“응.”
“황녀 전하의 분노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 없는 백성들까지 복수에 휘말리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걸어가는 내게 그가 물었다. 페델리우스의 목소리에는 염려가 가득 담겨있었다. 과연 누구를 향한 염려일지는 짐작하지 못했지만.
인적이 드문 곳까지 가서야 걸음을 멈췄다.
“죄가 없어? 아냐, 그들은 내 어미가 죽는 걸 비웃고 나를 저주하고 내 죽음을 바랐어. 그런 이들에게 어떻게 죄가 없을 수가 있어.”
내가 고개를 젓자 페델리우스가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황녀께서 태어나 부당한 대우를 받고 다락방에 갇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랬지.”
“그러나 그건 20년 전의 일입니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들까지 휘말리게 하는 건, 저는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너도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죽이면 안 되는 이유를 모르겠어. 당한 걸 다시 돌려주겠다는 것뿐이잖아.”
“그들은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새로운 생명들 역시 죽어도 괜찮으신 겁니까?”
페델리우스가 내게 묻는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었어.
주먹을 쥐곤 고개를 치켜들었다. 너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네가 내 편을 들어주길 바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판 남의 편을 들어주기를 바라지도 않았어.
페델리우스의 표정이 굳건했다. 하나의 선처럼 꾹 다물린 입술은 그만큼 견고해 보였다. 애써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안타깝지만, 그건 태어난 게 죄잖아.”
“오시리아, 태어난 게 죄인 인간은 없습니다.”
울컥,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짜증이 목까지 솟아올랐다.
왜 네가 저것들의 편을 드는 거야? 왜 네가 나를 눈앞에 두고 오늘 처음 본 인간들의 생명을 논해?
나를 지켜주겠다고 했으면서. 내 편이 되어주겠다고 했으면서.
“없다고?”
훅, 바람이 입에서 새어나갔다.
“왜 없겠어. 페델리우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애써 웃는 얼굴을 지었는데 페델리우스의 표정은 이상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네 눈앞에 있잖아.”
꾹꾹 눌러왔던 것을 간신히 목 밖으로 끄집어냈다.
“평생토록 태어난 것이 죄였던 존재가.”
그것은 결코 내 입으로 한 적이 없는 말이었다. 처음으로 입에 올린 것은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페델리우스가 야속해서였다.
스스로의 속이 비좁다는 걸 새삼 깨달아버렸다. 한심하기는.
“……황녀 전, 아니. 오시리아.”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거 알아? 페델리우스. 네가 불러준 이름이 세상에 태어나 난생처음 내 눈을 제대로 직시하고 불러준 이름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그저 한없이 소중했다.
“있잖아, 페델리우스. 내가 나빠?”
꾹꾹 눌러 담아왔던 말을 내뱉었다.
줄곧 누군가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으나 전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것 같아서 차마 묻지 못했다.
나는 나쁘지 않다. 아콰는 내게 그렇다고 해줬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 질문에 페델리우스는 망설이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한참 만에 색소 옅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저는 당신의 세상을 부정하려고 말을 꺼낸 게 아닙니다. 오시리아.”
페델리우스가 말을 고르는 듯 아주 조심스럽게, 천천히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가만히 페델리우스를 올려다봤다.
“당신은…… 그저 살기 위해 그렇게 살아야 했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 당신께 감히 제가 어떻게 나쁘다고 말하겠습니까.”
페델리우스의 말에 꾹 입을 닫았다.
페델리우스는 늘 예상한 것과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흔하디흔한, 그저 입에 발린 말이 아닌 진심을 천천히 속에서 끄집어낸다.
“그러니까 저는 단지, 조금 틀린 부분을 바로잡아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주변을 보지 못해서 미처 당신이 배우지 못한 부분을요.”
“내가 틀렸다는 거야?”
“저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되면 당신이 망가질 겁니다.”
“나는 괜찮아.”
내 말에 페델리우스가 입을 닫았다. 꿋꿋하게 고개를 젓자 그가 말없이 내 손을 붙잡았다.
“그날.”
페델리우스가 다시 입을 연다.
“제게 무서운 꿈을 꿨다고 함께 자자고 했던 날 기억하십니까?”
움찔, 페델리우스를 붙잡은 손가락 끝이 떨렸다. 집요하게 따라오는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자 페델리우스가 작게 웃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
“사실은 저와 메리가 죽는 꿈을 꾸지 않으셨지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페델리우스의 물음에 몸이 굳었다. 간신히 잊고 있던 기억이 스멀스멀 등줄기를 타고 기어 올라온다.
“당신이 무섭다고 했던 그 다음 날, 저는 살인사건에 대해 보고받았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천천히 설명했다. 그건 내 기억 속에도 남아있는 일이었다. 차마 고개도 끄덕이지 못한 채 가만히 있자 페델리우스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신원불명의 첩자가 넷, 죽어있다는 보고였습니다. 세 사람은 독살, 한 사람은 심장 부근에 검에 찔린 흔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
“그러나 제가 갔을 땐 남은 시체는 세 구였고, 검상을 입었다는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천천히 내놓는 추측에 그를 붙잡고 있던 손을 빼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페델리우스가 다시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왔다.
“그때, 혹시 저자를 죽이려고 하셨습니까?”
“나 그냥 갈래.”
“당신을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절대 그런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까 떨지 마십시오.”
페델리우스가 천천히 몸을 숙이며 고개 숙인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어디로 피해도 페델리우스는 반드시 쫓아올 것 같아서 잡히지 않은 손을 그러쥐었다.
“그때 그를 죽인 줄 아시고 두려우셨던 게 아닙니까?”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그들을 정말 죽이고 싶습니까?”
페델리우스는 내 말을 들었음에도 질문을 던져왔다.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애써 꽉 오므렸다.
“죽일 거야.”
내 말에 페델리우스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렇다면 제가 당신의 검이 되겠습니다.”
“뭐?”
“제가 오시리아를 대신해 당신이 원하는 복수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붙잡았다.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히더니 이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제가 당신의 기사가 되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절제된 동작으로 그가 고개를 숙였다. 부드러운 입술이 손등을 꾹 누른다. 살짝 치켜뜬 눈동자가 곧장 나를 향했다.
“무슨 소리를…….”
한 걸음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페델리우스가 붙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떨리던 눈동자가 굳건하게 나를 향해 있었다.
“넌, 페델리우스 너는 폐하의 기사잖아.”
“사실 폐하께 이야기를 듣고 멋대로 뛰쳐나왔습니다.”
페델리우스의 말에 눈이 절로 크게 뜨였다. 페델리우스의 입가에 퍽 곤란한 미소가 슬쩍 떠올랐다.
“아마 기사단장 직위는 박탈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전선을 지켜야 할 제1기사단장이 멋대로 전선을 이탈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도 돼?”
“당연히 안 됩니다.”
“그럼 빨리 돌아가야지!”
“말씀드렸잖습니까. 당신 곁에 있겠습니다. 더는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힘든 일이 있으면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곤란한 일이 있으면 제게 이야기해주십시오.”
페델리우스가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확히는 페델리우스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간 것 같지만.
그런데도 그다지 아프지 않아서 그가 제법 힘 조절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페델리우스는 이제부터 실업자야? 아니면 백수?”
“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페델리우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물어왔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이상해졌다. 도르륵 눈을 굴리는 그의 표정을 보다가 활짝 웃었다.
“폐하가!”
연기할 때처럼 톤을 높이다 뒤늦게 아차 싶어 입을 닫았다.
“……그, 폐하가 알려줬어.”
이번엔 너무 낮췄다. 너무 연기에만 빠져있어서 그런 건가?
당황스러워서 목소리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고개를 좌우로 젓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셨습니까.”
페델리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반사적으로 그를 따라 웃으며 고개를 내렸다.
“당신을 지켜주고 싶습니다.”
“충분히 지켜줬어.”
고개를 저었다. 페델리우스는 이런 일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어. 페델리우스.”
“뭐가 말입니까?”
“내가 사실은 잘못된 길에 들어와 있다는 거. 네 말이 옳을 거야. 분명히. 너는 나보다 더 많은 사람과 생활해왔으니까 나보다 더 잘 알겠지.”
많은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왕도, 페델리우스도. 아마도 메리 역시 같은 말을 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틀린 건 분명히 나일 테지.
“근데 미안해.”
할 수 있다면 네 손에 이끌려 제 길을 찾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잘못된 길을 너무 오랫동안 깊숙하게 걸어와서 이제는 되돌아갈 길조차 잃어버렸다.
남은 건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원하는 대로, 원하던 대로. 그저 그것들을 다 끝내고 나면…….
‘뭔가가 보일까?’
다시 처음 시작했던 장소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역시 그대로 끝이 나는 걸까? 어느 쪽인지 감은 오지 않지만 분명히…….
“길을 잃어버렸어. 페델리우스.”
페델리우스가 붙잡은 손을 다른 손으로 풀어내며 빼냈다. 페델리우스가 순순히 힘을 풀며 손을 놓았다.
“그리고 나는 이 길에 네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황녀 전하.”
“돌아가, 페델리우스. 네가 있을 곳으로.”
정말 좋아한다면 분명히 같이 가길 바랐을 텐데. 어쩐지 그래선 안 된다고 머릿속에서 수십 번씩 경종을 울린다.
페델리우스의 손을 붙잡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너무 친절해서, 분명히 어디까지든 나락으로 떨어져 줄 테니까.
그러니까 안 될 것 같았다.
“나랑 이그니랑 아콰는 오래전에 길을 잃어버렸어.”
“오시리아!”
이제는 어렵지 않게 입에서 튀어나오는 이름에 포스스 웃음을 흘렸다. 조금 더 듣고 싶은데.
“페델리우스는 길을 잃지 않았잖아. 굳이 여기까지 들어오지 마.”
내가 서있는 곳은 죽음도, 삶도, 사실은 별로 상관이 없는 곳이다. 한 번 길을 잃으면 다시 원래의 길로 돌아가는 건 무리다.
“너는 나라를 위해 검을 들잖아. 네가 죽이는 생명에는 분명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거야.”
페델리우스와는 딱 한 걸음 차이였다. 그는 한 걸음만 다가오면 나를 잡을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페델리우스에겐 나 외에도 지켜야 할 것이 산처럼 많을 테니까. 다섯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나와는 분명히 다르다.
푸른 기운이 서서히 몸에서 올라온다. 그것이 온몸을 감싸고 눈앞이 다시 붉게 변한다.
“다음에 또 보면 좋겠다.”
손을 뻗어 페델리우스의 볼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잠깐 움직이기 어려울지도 몰라.”
“무슨……!”
페델리우스가 팔을 움직이려는 것이 보였다. 물을 밧줄처럼 이용해 그를 꽁꽁 묶어놓은 것은 그다지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잘 있어, 페델리우스.”
“……니다.”
“응?”
“당신을 좋아합니다! 오시리아.”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온 목소리에 걸음이 뚝 멈췄다.
삐걱거리는 허리를 비스듬하게 돌리자 페델리우스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아콰에게 향하던 몸을 아예 페델리우스 쪽으로 돌렸다. 뛰듯이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다.
“고마워. 페델리우스.”
“아…….”
“나도 페델리우스를 좋아해.”
그가 움찔, 몸을 떨었다.
“메리도 좋고, 이그니도 좋고, 아콰만큼이나 모두가 소중해.”
“……예?”
그가 멍하니 되물었다.
“응? 다 좋다고. 페델리우스는 특히 제일 좋아해.”
“……아.”
“일이 끝나면 꼭 찾아갈게.”
살짝 몸을 뒤로 물리며 대답했다.
“저기…….”
“이제 안 돼. 정말 가야 해.”
고개를 젓자 페델리우스가 픽, 바람 빠진 소리를 내더니 이내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몸은 굳은 채 웃음을 터뜨리는 페델리우스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뭔가…… 힘을 잘못 썼나?’
생각하는데 그가 불쑥 웃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먼저 가 계십시오. 금방 쫓아가겠습니다.”
“오지 마.”
“싫습니다.”
“페델리우스, 너…….”
“도와드리겠습니다.”
“필요 없…….”
“그러니 얼른 같이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죠. 오시리아.”
내 말을 끊고 들어온 페델리우스가 툭 말을 내뱉었다.
말없이 주먹을 쥐었다가 펴길 반복하다 냉큼 몸을 돌렸다.
“가자. 아콰, 이그니.”
페델리우스는 아마 한 시간 정도는 저러고 있어야 할 거다. 그리고 지금부터 날아가면 나는 그가 오기 전에는 충분히 일을 다 끝낼 수 있다.
“얼른 가자.”
푸른 기운이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힘이 흘러넘친다는 아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을 뻗어 이그니의 등에 대는 순간 푸른빛이 뻗어가더니 그럴싸한 날개를 만들어냈다. 푸른빛의 날개가 그의 등을 가득 메웠다.
이그니가 이제는 능숙하게 조절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흘끗 뒤를 쳐다보니 페델리우스가 이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자.”
최대한 아래를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곧장 황성으로 향했다. 황성의 구조는 굳이 고민할 것도 없었다.
황제가 자주 가는 곳이라면 대개 다 알고 있었다. 나는 다락방에서 나올 수 없었지만, 아콰가 거울로 보여주는 것은 황성의 지리를 깨우치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황성 안은 수도에 비해 멀쩡했다. 비쩍 마른 사람도 별로 없어 보였고, 혈색도 밖보다는 훨씬 좋아 보인다.
허공에서 방을 찾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곧 그냥 바닥에 착지했다.
“누구냐!!”
“침입자다!!”
그래도 경비병은 경비병이라고 민감하게 위험을 감지했다.
‘전쟁 중인 것인지 일보 직전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성 경비가 허술하긴 허술했다. 눈을 가늘게 뜨다가 이내 활짝 웃어 보였다.
“너희 전쟁 중 아니었어? 한가하네.”
“누구냐고 물었다.”
날카로운 창끝이 목 밑까지 파고들었다. 이그니가 손을 뻗어 그것을 치워내곤 제 단검을 끄집어냈다.
“하나뿐인 황녀를 대하는 태도가 영 별론데.”
“황녀라니…….”
창을 들이댄 병사가 눈을 크게 떴다. 이그니가 나를 힐끗 보더니 검날을 세운다.
“마음대로 해.”
어깨를 으쓱이곤 몸을 돌렸다. 툭, 분리된 머리가 데구르르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봤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적의가 언제나처럼 피부를 따끔하게 했다.
땡! 땡! 땡! 황성에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콰, 이그니를 좀 도와줘.”
[네, 주인님.]
허공에 뜬 채 내 뒤를 졸졸졸 쫓아오던 아콰가 곧장 몸을 돌렸다. 허공에 수십 개의 물 덩어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만히 바라보다가 황성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물거울 속에서만 봤던 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보지 않은 지 조금 됐지만, 여전히 기억은 생생했다.
‘쉽게 잊을 만한 종류는 아니겠지만.’
황성 안은 텅 비어있었다. 전부 병사로 차출된 건지, 문을 지키는 자들은 몇 없었다.
“넌 뭐냐. 이 앞은 지나갈 수 없는 곳이다.”
“응응, 그렇겠지.”
살짝 웃자 그들이 움찔하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손을 살짝 들어 올리자 날카로운 얼음조각이 내 주변을 한가득 메웠다.
“나는 황제를 봐야겠으니 비켜줬으면 좋겠는데.”
손가락으로 통로를 가리키자 긴 창이 앞을 가로막았다.
“하여튼 아무도 황녀 취급은 안 해주지.”
“황녀……?”
오른쪽에 있는 병사가 놀란 눈으로 내 말을 따라 했다.
“황금빛 눈동자에, 진홍색 머리카락.”
“이제 비켜줄 마음이 생겼어?”
두 병사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살금살금 창을 치워냈다. 예전이었다면 곧장 목에 창을 들이대고도 남았을 텐데.
“부디, 자비를…….”
그들이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인다. 조심스러운 몸짓에는 겁에 질린 것이 눈에 띌 정도로 느껴졌다.
통로로 발을 내디디며 고개를 저었다.
“싫어.”
푹, 콰득-
푸욱, 푹-
여러 차례 날카로운 얼음 검이 그들의 머리와 심장을 찔러댔다. 뇌수가 터져 나오고 심장에서 피가 질질 흘러나온다. 분수처럼 뿜어지는 피가 하늘에서 후두둑 떨어졌다. 마치 핏빛 비가 내리는 것 같다.
눈이 움푹 파이고 찢어져 제 형체를 갖추지 못하게 됐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내가 직접 손으로 하는 게 아니어서 그런지 떨림이 덜했다. 애써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딨는 거야.’
쿵쿵, 쿵, 쿵. 심장이 쉬지 않고 박동하기를 반복한다. 숨을 삼킨 채 주먹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