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99)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만나야 할 사람은 아직 안락한 제 방에 틀어박혀 있을 테니까.

애써 심장을 달래며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황제가 있는 성에도 병사는 부족했다. 대부분이 전쟁에 차출되었음이 분명했다.

‘정작 황제 본인이 성안에 틀어박혀 있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내가 전쟁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전시에 황제가 제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게 옳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성 가장 안쪽의 가장 화려한 방.

다른 방에 비해 견고한 나무로 제작된 문은 그를 지키는 최후의 방어벽인 것이 분명했다.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문을 쳐다보다가 그것에 손을 올렸다.

“……후우.”

애써 목 끝까지 차오른 긴장을 내뱉었다. 손잡이를 잡은 채 힘껏 문을 밀었다.

스릉- 문을 열고 고개를 들기도 전에 금속음이 먼저 귀를 때렸다. 그것이 내 목 밑에 바싹 다가오는 데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환영 인사가 거한데.”

그리고 그것이 한두 사람의 것이 아닌 살기도 품고 있다는 것도.

천천히 고개를 들자 황금으로 장식된 사무용 의자에 앉아 불쾌한 듯 얼굴을 구기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비스듬히 앉아 턱을 괸, 지독히도 잊기 힘들었던 사람.

물거울 속에서 언제나 봐왔고, 또 꿈속에서도 몇 번이고 나타나 그 심장을 죄어 터뜨려주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안녕, 아바마마. 나한텐 초면인데 아바마마한텐 내가 구면이려나?”

분노로 바들바들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위로 끌어올렸다.

세상에 다시없을 환한 웃음을 내비치며 방 안으로 한 걸음 들였다.

검은 옷에 복면. 처음 이그니를 봤을 때와 별다를 것 없는 차림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누군지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너희는 그림자 기사단이구나.”

작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움찔, 몸이 떨리는 이가 분명히 있었다. 그것이 내게는 대답과 다름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또 한 걸음 더 들어갔다. 날카로운 검 끝이 내게 날을 드러낼 때까지 앞으로 갔다.

방의 중앙에 와서야 검 끝이 날카롭게 목 아래에 닿았다.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너희 모녀는 도움이 안 되는군. 천하고 더러운 집시의 피가 도대체 언제까지 이 땅을 더럽힐 생각인지…….”

저번에 봤을 때보다 한층 더 살집이 오른 그는 여전히 눈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주름이 꽤 많이 생기긴 했지만, 혈색이 안 좋거나 잠을 못 잔 것 같지는 않았다.

주먹이 절로 그러쥐어졌다.

“그런 말 해도 돼? 당신이 그렇게 찾던 신의 문양을 내가 가지고 태어났는데.”

이제는 가릴 필요도 없는 손등을 앞으로 내밀며 웃어 보였다.

황제는 눈만 슬쩍 내려 내 손등을 보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감히 신을 모욕하지 마라. 너 같은 천한 것에게 신이 문양 따위를 내렸을 리가 없지.”

“오, 이게 가짜라고?”

“네년을 죽이면 또 다른 신의 사자가 내려올 거다.”

황제가 내게 말했다.

일그러진 눈동자에서 형용할 수 없는 경멸 덩어리가 울컥울컥 밀려들어왔다.

지금껏 받아왔던 어떤 증오보다도 더 깊은 증오심이 느껴졌다.

“당신. 날 원망하고 있구나?”

“원망?! 아니! 증오한다. 가능하다면 그 얼굴을 가시로 된 나무 위에 몇 번이고 긁어버리고 싶을 정도야.”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의 여과도 없이 흘러들어오는 감정은 세상 어떤 것보다 짙고, 음습한, 저주의 말이었다.

“너 같은 것에게 내 고귀한 피가 흐른다는 것도 역겹지! 얼굴만 보이지 않으면 될 거라고 생각해서 가둬뒀더니 결국은 이렇게 일을 치르고. 더러운 년!”

“…….”

“뭐야? 그 얼굴. 황제인 이 내가 후회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 집시 년도 생김새가 반반했을 뿐이야! 밑에서 제발 살려달라고 비는 꼴이 얼마나 천해 보이던지!”

“……시끄러워.”

숙어진 고개를 들어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정말 닥쳐줬으면 했다.

아득히 구멍도 없는 바닥으로 몸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고는 있는데 내가 서있는 곳이 지금 어디 있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최악의 만남이었다. 훨씬 더 최악의 사람이었다.

살려달라고 애원할지도 모른다는 제 생각이 얼마나 얕고 또 세상 물정 모르는 생각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게 너같이 쓰레기 같은 것을 낳을 줄 알았으면 구멍에 박은 채로 검을 찔러버릴 것을! 아직도 후회된다.”

“시끄럽다고.”

“제발, 제발 안에다 하지 말아주세요~ 네 천한 어미가 어찌나 빌어댔는지 아나? 널 살려달라고도 빌었지. 내 앞에 스스로 옷을 벗고 무릎을 꿇으며 제 아이만은 살려주세요~”

황제가 키득거리며 저열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울리지도 않게 억지로 소프라노 톤으로 끌어올린 목소리가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웃음을 터뜨리는 황제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눈앞이 붉어지고, 또 붉어진다. 킬킬거리는 황제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지길 반복했다.

그저 그를 갈기갈기 찢어낼 무언가가 필요했다. 무언가를 원했다. 손에 단단한 것이 붙잡혔다.

느릿하게 고개를 내리자 아콰가 만들어줬던 것과 같은 물로 된 검이 들려있었다.

예리하고 새파란 검은 간단한 몸짓만으로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베어낼 것 같았다.

“나는 너같이 신의 힘을 가진 것들을 막을 방법을 알고 있지.”

황제가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키더니 옆에 세워놓았던 검을 뽑았다. 붉은 문양이 새겨진 검이었다.

허술하게 종이를 바른 것이 아닌, 검 자체에 붉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황제가 뽑은 검을 그대로 나를 향해 내려쳤다. 허공에 손을 횡으로 긋자 곧 푸른색의 얇은 장막이 펼쳐졌다.

콰직-!

단단해 보이는 장막이 검에 부딪쳐 어긋난 소리를 냈다. 약간의 균열이 보였다.

스멀스멀 올라온 푸른 기운이 몸을 잠식해간다. 나 역시 천천히 검을 들어 그를 향해 내질렀다.

아무리 이빨에 발톱까지 빠진 황제라도 황제는 황제인 모양이다.

그는 제법 능숙하게 내 검을 피했다. 눈동자로 그의 다리를 쳐다봤다.

허공에서 모인 물이 황제의 발을 옭아맨다. 혀를 찬 황제가 붉은 문양의 검으로 그것을 베어냈다.

“그건…….”

멋대로 입술이 움직였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아주아주 아득히 먼 과거에 이것을 본 적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오래전에 잊힌 고대의 언어군.”

내 목소리가 아콰의 목소리처럼 동굴에 울리듯 메아리친다.

“감히 인간 따위가 손댈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뭐?”

눈이 멋대로 가늘어지고, 시선이 황제를 마주한다.

그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은, 그저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푸른빛을 온몸에 품고 있었다.

“솔루스 솔 트럼프.”

느릿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감히 누구의 이름을 함부로……!!”

“아바마마.”

어쩐지 자유로워진 얼굴 근육을 당겨 생긋 웃었다.

“당신 오늘 죽을 거야.”

시선만 움직여 내가 열고 들어온 문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곳에 물이 생겨나 손잡이를 꽝꽝 얼려버렸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표정이 경악에 물들어있다.

“물론, 내가 내킬 때까지는 죽지 못하겠지만.”

커다란 방 안을 가득 뒤덮은 날카로운 물의 검을 보며 평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도 안……. 이런 얘기는 없었잖느냐, 둔켈!”

“둔켈?”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황제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아…….”

황제의 표정을 보자 얼굴에 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그의 표정 위로 공포라는 것이 떠올랐다.

이제야 죽음을 목전에 맞이한 사람처럼 그는 떨고 있었다.

“분, 분명히……. 약간 물을 다룰 수 있는…… 그런 수준이라고…….”

움찔, 그림자 기사단 중 한 명이 몸을 움직였다.

민감할 정도로 공기의 변화를 쉽게 감지하는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여 허공에 떠 있던 검 중 하나를 그쪽으로 날렸다.

콰직- 얼기설기 서있는 그림자 기사단의 사이를 지나 검이 벽에 꽂혔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잊지 마. 지금 우위에 있는 게 누구인지. 나는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너희를 전부 죽일 수 있어.”

날카로운 물의 검들이 허공에서 분신을 만들어냈다.

허공을 빽빽하게 뒤덮은 검은 누가 한 발짝만 떼도 그 온몸을 너덜너덜하게 만들기에 충분해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황제를 쳐다봤다.

“아바마마.”

그가 나를 쳐다봤다. 일그러진 표정 위로 드러난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흰자위를 보이며 뒤집힐 것 같았다.

그만큼 황제는 공황상태로 보였다. 그토록 바라던 장면과 이제야 조금 비슷해진 것 같다.

속에서 참을 수 없는 희열이 차올랐다. 당장, 어떻게든, 그를 무릎 꿇리고 싶은 마음이 목까지 꽉 차올랐다.

“누군가 나를 죽이면 새로운 신의 사자가 태어난다고라도 말했어?”

“당연하지! 신의 문양을 가진 자들은 여태까지 그렇게 계승됐다. 그러니까…….”

“그거, 이제 안 된다고 하면 안 믿을 거지?”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묻자 황제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무슨…….”

“내가 마지막이었어. 당신이 나를 타국에 버렸으니까. 더는 이곳에 신의 문양은 찾아오지 않을 거야.”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경악과 절망에 물들어가는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기분이 어찌나 유쾌하게 변해가는지.

“간단히 설명해줄까?”

“…….”

“이 제국은 곧 지도에서 없어질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꼿꼿하고 뻣뻣하게 들려있던 고개가 바닥을 향해 툭 떨어졌다.

언제나 앞만 보던, 결코 넘어뜨릴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의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참고로 더 말해주자면 이곳엔 더 이상 외부에서 물자도 들어오지 않을 거고.”

느릿하게 방 안을 둘러봤다. 긴장한 기색의 그림자 기사단을 한 번 보고 다시 그를 쳐다봤다.

“아무도 이 제국에서 나갈 수 없을 거야.”

나지막한 목소리에 황제가 검을 세게 쥐는 것이 보였다.

“빌어봐. 무릎을 꿇고,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황제가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쳐다봤다.

“아아, 그걸 원하는군. 불쌍하고 가여운 계집. 겨우 그 말을 듣겠다고 그리 발버둥을 쳤구나.”

황제가 매서운 눈으로 나를 살폈다.

챙그랑-! 그가 손에 있던 검을 멀리 던지며 말했다.

“나는 너를 낳는 걸 막지 못했지. 그걸 가장 후회한다. 네가 세상에 나오도록 내버려둔 걸 후회해! 평생 그 얼굴 따위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황제의 혀가 날카로운 검이 되었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멱살을 붙잡았다.

“네 존재가 정말 저주라도 끌어안고 태어났다고 생각하나?”

“……뭐?”

“물론 네 어미년을 만나고서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맞지. 하지만 그거. 대신관이 한 예언. 그건 사실 거짓말이었단다, 아가야.”

황제가 뱀처럼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가 꾸물거리며 귓가에 파고들었다.

“점점 비가 내리지 않게 돼서 화살받이가 필요했지. 마침 네 어미는 아주 적당했어. 할 줄 아는 거라곤 춤을 추고,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읊조리고, 다리를 벌려 넣어달라고 교태를 떠는 것밖에 없는 집시의 소문이란 대개 좋지 않으니 말이다.”

“……닥쳐.”

“그리고 다음 화살받이로 정해진 게 너였고.”

황제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광기에 미친 건 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손에 쥔 검에 힘이 들어갔다.

“근데 정말로 네년이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신의 문양을 가진 인간이 찾아도, 찾아도 없잖아. 그래서 네가 귀찮아졌어.”

“죽여버릴 거야.”

“그래서 물이랑 교환하는 용도로 써먹었다. 그런데 설마 정말로 네가 신의 문양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그가 내 손을 비틀어 꺾으며 말했다. 통증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눈을 부릅뜨며 그를 노려봤다.

툭,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끊어졌다.

후회든, 사과든, 살고 싶어서 하는 애원이든, 뭐든 하나는 듣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무언가 바뀌진 않겠지만 그런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그랬으면 적어도, 이렇게 진흙탕에 패대기쳐진 것처럼 기분이 더럽진 않을 텐데.

“그러니까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후회? 그때 네 목에 칼을 박아 넣지 않은 걸 후회한다면 후회하지!”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듯 그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래.”

쥐고 있었던 검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그럼 그냥 죽어버려.”

아래로 향해 있던 검을 그대로 들어 황제의 배를 찔렀다. 푹- 손에 닿는 살이 찢기는 촉감이 끔찍할 정도로 더러웠다. 그리고 느릿하게 내리긋자 내장이 안에서부터 흘러내렸다.

“커흑.”

황제의 입에서 고통 어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를 붙잡은 멱살이 그제야 풀리며 황제의 몸이 앞으로 서서히 무너졌다.

“아니, 아니다. 아니야. 아바마마, 죽지 마.”

얼른 고개를 저으며 환하게 웃어줬다.

위를 향해 있던 검날을 아래로 뒤집으며 그대로 황제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콰득, 뼈에 닿는 검날의 촉감이 기분 좋게 손가락 끝을 울렸다. 뼈가 드러나며 피가 철철 흘렀다. 아, 기분 좋아.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내장이 흘러내리는 것도, 뼈가 드러난 것도, 피가 흐르는 것도, 모두 줄곧 그에게서 보고 싶었던 모습이다. 줄곧 후회하길 바랐는데, 후회하지 않는다.

이 더러운 꼴이 되어서도 그는 기절하는 것으로 도망친다.

“움직이지 마.”

시퍼렇게 변한 안광이 나를 보고 있는 그림자 기사단의 눈동자에 비쳤다. 그것은 나였다. 공포에 질린 기사단을 쳐다보다 다시 황제를 쳐다봤다.

“죽지 말라니까? 아바마마.”

손을 뻗어 바닥에 널브러진 황제의 어깨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푸른 물결이 그를 감싸 안았다.

순식간에 치료되어가는 상처를 바라보다 활짝 웃었다.

쿵- 쿵- 쿵- 일정한 속도로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공포에 질린 박동이다.

“말했잖아.”

다시 한번 검날을 아래로 향하게 한 채 검을 들어 올렸다.

푹- 검이 다시 그의 허벅지를 찌르고 들어갔다. 또다시 뼈가 드러나고 피가 철철 흐른다. 다시 한번 검을 뽑았다. 벌어진 상처의 약간 위쪽에 다시 한번 검을 내리 찔렀다.

“끄아아아악!!”

비명이 귓가에 들린다.

답을 알 수 없는 그저 기분 좋은 감각만이 손가락 끝에서부터 온몸을 가득 채운다. 늘 텅 비어있다고 생각했던 어딘가가 드디어 꽉 들어찼다.

“내가 내킬 때까진 죽지도 못할 거라고.”

꽂아 넣은 검을 비틀며 말했다. 그가 듣기만 해도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다.

투둑, 검을 뽑자 피가 튀었다. 뼈가 드러나 안쪽이 끔찍하게 비쳐 보인다. 팔을 잘라내면 어떨까? 그래도 그는 울지 않을까? 잘못했다고 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스릉- 뒤쪽에서 검을 뽑는 금속음이 들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동시에 공기가 흔들렸다.

“쯧.”

푹- 뒤에서 꽂힌 검에 달려오던 기사단원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게,”

무너지는 인영의 위로 허공에 날아다니던 검 수십 개가 남자의 몸을 꿰뚫었다. 확실히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온몸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려 피가 줄줄 새어 나온다. 안에서 알 수 없는 내장도 흘러나오고 뇌수도 흘러나왔다. 바닥에 그의 피가 흥건하게 고였다. 피부가 새하얗게 질리고 몸에 있던 피가 모두 흘러나오기라도 하려는 듯 끊임없이 꿀렁꿀렁 새어 나온다. 물론 당연하게도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더는 움직이지 않는 기사단원을 슬쩍 내려다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끄헉, 꺼흑-”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황제의 입에서 갖은 고통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유쾌할 정도다. 늘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있던 남자가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고개를 숙일 거라고 과연 누가 생각이라도 했을까.

그림자 기사단을 찌른 물의 검들이 와해해 사라졌다. 시체에 남은 것은 수십 개의 바람구멍과 흥건한 피 웅덩이뿐이었다.

가만히 그를 쳐다보다가 다시 황제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바마마.”

“커흑.”

검을 들어 그대로 황제의 다리를 힘껏 내리쳤다.

“끄아아악!!!”

뼈까지는 자르지 못한 듯 다리는 아직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칼날이 살점을 파헤쳐 너덜너덜해졌을 뿐이었다.

덜렁거리는 다리에 지켜보던 다른 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차라리 한 번에 베었다면 덜 아팠을 것이 서툰 솜씨로 어중간하게 잘려 걸레 조각 같았다. 살점이 엉성하게 떨어져 고통스러워 보였다.

검으로 내려칠 때마다 얼굴로 피가 튀는 것이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덜 잘렸네.”

손에 힘이 부족한 모양이다.

‘나도 페델리우스처럼 힘이 세면 좋을 텐데.’

잘리지 않은 다리를 보며 생각했다.

그냥 전부 눈앞에서 없어지면 좋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생긋 웃으며 그를 다시 물로 감쌌다.

천천히 치료되는 상처를 바라보다가 방 전체에 물로 얇은 장막을 만들었다.

황제가 질린 표정으로 제 상처가 나아가는 꼴을 지켜봤다.

“사람이 굶으면서 얼마나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바마마.”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내뱉는 황제를 쳐다보다가 말없이 웃었다. 검을 다시 들자 황제의 몸이 파드득 떨렸다. 눈에 공포가 새겨졌다.

그것을 그의 왼쪽 다리에 다시 찔러 넣었다.

“끄아아아악!!”

비명이 듣기 좋게 울렸다.

“내가 제일 오래 굶어본 게 한 일주일쯤 되는데 아바마마는 얼마나 버틸까 궁금하네.”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물을 이용해 그림자 기사단을 문밖으로 몰아내고 그들이 뚫어놓은 길을 천천히 나갔다.

방 안에 얇은 장막을 펼쳐둔 채 문을 닫았다.

“만나서 반가웠어, 아바마마.”

닫힌 문에 손을 올리자 문 전체가 꽝꽝 얼었다. 문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얼음벽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주먹을 쥐었다.

부스럭, 밖으로 날려진 그림자 기사단이 자리에 선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쓸데없이 너희까지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살아.”

“…….”

“용병으로 살든지 평범하게 살든지 당신들 인생을 살라는 거야.”

이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도 좋아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닐 듯했다. 이그니와 같은 처지라면 굳이 죽이고 싶진 않았다.

“우릴 죽이지 않나?”

“죽고 싶어?”

사라졌던 물의 검이 순식간에 허공을 다시 가득 메웠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고.”

피곤함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피가 온몸을 쉬지 않고 팽팽 돌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푸른 기운이 흘러넘쳤다.

컵에 담아야 할 물이 흘러넘치고, 흘러넘쳐서, 고장 난 수도꼭지가 의미 없이 계속해서 물을 콸콸 쏟아냈다.

“하…….”

긴 숨을 뱉어냈다.

그림자 기사단이 쫓아올 기색이 없는 듯해서 곧장 몸을 돌렸다. 왔던 길을 따라 느리게 걸어가며 이마를 짚었다.

아까 죽인 경비병들이 머리에 긴 구멍이 뚫린 채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것을 무심하게 스쳐 지나갔다.

‘네 존재가 정말 저주라도 끌어안고 태어났다고 생각하나?’

물어오는 목소리는 나를 비꼬기 위해 악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아……. 붉은 문양의 검을 가지고 나왔어야 했는데.”

아쉬움에 혀를 찼다. 하지만 그것이 있어도 그는 그 방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거다.

다리도 제구실을 못 하겠지만, 겨우 그 검으로 저 거대한 얼음벽을 잘라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까.

“꼭꼭 숨어라.”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가엾은 귀족들.”

황성에는 분명 제법 많은 귀족이 있을 거다. 식량이 황성에 모여있으니 제법 많은 귀족이 이곳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수도에도 귀족들의 거리가 있었던 것 같은데.’

걸어가는 도중 거울에 비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얼굴에 피가 잔뜩 튀어있었고, 황금빛 눈동자가 새파랗게 변한 채 제 색을 잃은 후였다.

챙그랑- 촤악.

검을 바닥에 버리자 그것이 순식간에 물이 되어 바닥에 스며들었다.

손등으로 볼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냈다. 그래 봐야 피가 번져서 더 기분 나쁜 몰골로 바뀌기밖에 하지 않았지만.

“페델리우스가 보면 놀라겠는데.”

가라앉은 목소리는 내게도 별로 익숙한 건 아니다.

억지로 미소를 지어봤지만, 기분이 가라앉아서 그런지 쉽게 입꼬리가 올라가질 않았다.

다시 처지는 입꼬리를 쳐다보다 말없이 아무것도 없는 복도를 다시 거닐었다.

“나는 살려달라고 비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가.”

비명을 지르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았던 건가. 손을 뻗어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아까는 속이 가득 찬 것처럼 충만했는데, 지금은 처음보다 훨씬 더 텅 빈 것 같은 허탈함만 가득했다.

그토록 원하던 일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속이 허하다.

쿵, 발을 한 번 구르자 발밑에서부터 푸른 기운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곧 황제가 머무는 본성을 뒤덮을 때까지 가만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푸른 장막이 건물 전체에 깔렸다. 이로써 이 성안에 살아있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 아무도 이 성에서 나갈 수 없을 거다.

둘러보지 않은 반대쪽 복도를 향해 다시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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