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쿵!
땅이 한 번 울리더니 푸른 장막이 성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남은 잔당을 처리하고 있던 이그니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곧장 뒤에 있는 본성으로 향했다.
“이건…… 뭐지?”
<물의 장막이야. 주인님께서 이곳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길 바라셔.>
아콰가 짧게 설명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물의 장막은 아콰에게도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공간 안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고, 또한 아무도 바깥으로 나갈 수 없게 하려고 사용하는 일종의 방어막 비슷한 것이었다.
아콰가 조심스럽게 장막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물이 파문을 일으키며 아콰를 밀어냈다.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조차도, 들어오길 바라지 않으시는군요. 주인님.>
아콰의 주변을 맴돌던 물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그니가 그를 슬쩍 쳐다봤다.
“죽어라! 괴물들!”
이그니가 뛰어오는 병사의 목을 보지도 않은 채 한 번에 베어냈다.
“나는…… 당신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그니가 잠시 고민을 하다 아콰에게 경어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물의 정령이었고, 원래 그는 그러한 것들을 모시는 종류의 사람이었으니까.
모든 제국민들은 그랬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내가 한 말이 뭔데?>
“인간이 주군을 망친다는 이야기.”
이그니의 말에 아콰가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어린아이처럼 터진 웃음은 이내 매서운 눈초리가 되어 이그니에게 향했다.
주인의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었던 위험한 눈빛이었다.
<그래, 인간은 방해돼. 내 소중한 주인님을 어디까지고 망쳐놓지. 너희들의 타락한 지식을 머릿속에 넣으려고 한다.>
“타락한 지식?”
<인간이 죽는 건 당연해. 죽으면 윤회해서 언젠가 다시 땅으로 내려와. 그분께서, 인간 따위에게 연민을 가지게 됐어.>
“그동안 배우지 못했던 감정을 뒤늦게 배우는 것이 아닙니까.”
<……슬픔이라는 감정이 대체 왜 필요해? 나는 주인님이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느끼고,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길 바라는 것뿐인데.>
“그건…….”
<인간들은 주인님께 슬픔이나 증오, 분노, 괴로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꾸역꾸역 밀어 넣어서 그분을 슬프게 만들어.>
아콰의 주변에 물의 파장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태풍을 직격으로 맞은 바다처럼 아콰의 파장은 위험하게 느껴졌다.
이그니가 흠칫, 몸을 떨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넌 내가 무섭구나.>
아콰가 수많은 물 덩어리를 허공에 만들어냈다. 그것들이 마치 운석처럼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숨이 붙어있는 것을 조금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시체들을 부수고 꿰뚫었다. 땅바닥에도 깊은 구멍들이 수십 개 생겨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당연한 거야.>
“……당신.”
<인간이 나와 주인님을 두려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아콰의 머리 위로 수십 개의 물 덩어리가 다시 생겨났다. 그것은 묵직한 쇠로 만들어진 대포보다도 더 위험했다.
<감히 내 주인님을 망쳐버릴 자격 따윈 없다는 얘기야. 감히, 감히. 내 소중한 주인님께 이들은 수없이 많은 절망과 공포를 안겨줬다.>
이그니가 말없이 아콰를 쳐다봤다. 새파랗게 빛나는 눈에 담긴 살기에 그가 숨을 삼켰다. 다른 어떤 감정도 섞이지 않은 단지 순수한 살기.
그건 이그니가 봐왔던 어떤 살수의 것보다도 더 위험하고, 거대했다.
<그들은 마땅히 받아야 했던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소년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어린아이마냥 웃었다.
<주인님께서 줄곧 바라왔던 대로.>
살기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 * *
“젠장.”
페델리우스가 빠르게 다리를 움직이며 드문 욕설을 내뱉었다.
생각보다 물을 끊어내는 게 버거웠다. 생각보다 그것은 강철만큼이나 단단했다. 검기를 몇 번이나 날려서야 간신히 손발이 자유를 되찾았다.
그가 눈앞에 보이는 황성을 향해 달려가며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쓸어 넘겼다. 황성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검을 뽑았지만, 적은 없었다.
정확히는 시체들만 바닥에 굴러다녔다. 길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시체들이 널브러져있는 방향으로 달리기만 하면 됐으니까.
시체가 끊겼다. 페델리우스의 걸음이 멈춰 섰다.
“황녀 전하는 어디에 있지?”
페델리우스의 눈이 가늘어진 채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는 금세 제 목적지를 발견했다.
수많은 성 중에서도 단연코 눈에 띄는 성이 한 곳 있었다. 그녀의 푸른 기운을 마치 온몸에 머금은 듯한 성이었다. 은은한 푸른빛을 뿜어내는 장막이 페델리우스의 눈앞에 있었다.
그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재게 놀렸다. 페델리우스가 오래 달리지 않아 뜀박질을 멈췄다. 황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더 이상 평평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슨 거대한 대포로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반듯한 돌이 깔려있던 바닥은 전부 깨어져 뒤집혀있었고, 바닥에는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절단된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처참한 광경에 페델리우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가 검날을 세우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황성의 정문에서부터 난 길을 밟으며 그가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찰랑, 어디선가 물이 흘러넘치는 소리가 들렸다. 페델리우스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간 페델리우스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당신은…….”
페델리우스가 아콰를 보며 놀란 눈을 했다. 비단 주변에 시체가 낭자하게 흩어져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콰가 인간의 팔 하나를 손에 든 채 해맑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왔구나. 인간들에게 벌을 주고 있었다.>
페델리우스가 시선을 내렸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인간의 몸이 간헐적으로 한 번씩 떨렸다. 어떻게 해도 다시 살아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것에 동정을 주기보다 그 상황을 모른 척하는 편을 택했다.
“황녀 전하께선 어디에 계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물론, 너는 주인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는 인간이니까.>
아콰가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페델리우스가 뒤에서 가만히 서있는 이그니를 한 번 쳐다보고는 이내 다시 아콰에게 시선을 돌렸다.
본능적으로 눈앞에 있는 정령의 기분을 상하게 해선 안 될 것 같다는 위험신호가 울렸다.
페델리우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소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노력했다.
“어디에 계십니까?”
<이 안에 있단다. 물의 장막을 걸어놓으셔서 들어갈 수가 없어.>
아콰가 얇지만 단단해 보이는 막을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성 전체를 뒤덮고 있는 장막은 매우 단단해 보였다.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장막에선 푸른빛으로 된 가루가 쉴 새 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잠시 가만히 있던 페델리우스가 황성의 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가 한 발을 내디뎠다. 손에 들고 있던 팔을 던져버린 아콰가 의아한 시선으로 페델리우스를 쳐다봤다.
<거긴 들어갈 수 없어.>
“저는 그분을 뵈어야겠습니다.”
<튕겨 나가면 크게 다칠 거야.>
아콰가 미간을 좁힌 채 충고했다.
아콰의 지식 속에 있는 물의 장막은 시전자가 원하지 않는 모든 이들의 출입을 막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한 경우 침입자를 튕겨낸다.
<위험하다니까?>
아콰가 페델리우스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그럼에도 페델리우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네가 다치면 주인님이 슬퍼할 거야. 여기에 있으면 주인님은 분명 나오실 테니까…….>
“그러면 늦습니다.”
<뭐가?>
“뭔진 몰라도 늦을 것 같습니다. 지금 봐야겠습니다. 저는.”
페델리우스가 곧장 문을 향해 걸어갔다.
황금으로 된 장식이 눈을 사로잡았다. 얼마나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는지는 굳이 누군가에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위험하다니까?>
아콰가 답답하다는 듯 페델리우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드물게도 당황스러워 보이는 아콰가 고개를 한껏 젖혀 페델리우스를 올려다봤다.
“그분이 위험합니다.”
<주인님은 강해. 평범한 인간이 주인님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러니까 그냥…….>
“그게 아닙니다, 정령님.”
페델리우스가 아콰의 말을 중간에서 잘라냈다. 주름 하나 져 있지 않던 아콰의 얼굴에 깊은 시름이 자리 잡았다.
아콰는 눈앞의 사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것들을 깨우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콰와 눈을 마주친 페델리우스가 이내 그를 스쳐 지나가 문까지 걸어갔다.
아콰가 황급히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물에 닿은 촉감에 페델리우스의 눈이 조금 크게 떠졌다.
<인간! 위험하다 하지 않았어. 넌 다치면 안 된단 말이야.>
“괜찮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아콰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저는 가봐야겠습니다.”
<주인님께선 일을 처리하시면 곧 나오실 거야.>
“저는 그걸 막을 겁니다.”
<주인님이 줄곧 바라왔던 일이라고! 그걸 네가 대체 왜 막는다는 거야? 네가 대체 뭔데!>
아콰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아콰는 인간이 연약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죽으면 슬퍼할 인간이 많다는 것도. 그 안에 소중히, 또 소중히 품어온 제 주인이 있으리라는 것도.
“정령님과 신께 애정을 듬뿍 받고 있는 분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으니…….”
페델리우스가 황성의 문손잡이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아콰가 눈을 부릅떴다.
“목숨 정도는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막을 부드럽게 통과한 페델리우스의 손이 문손잡이를 붙잡았다. 아콰의 눈이 커다래지는 것과 동시에 페델리우스가 문을 열었다.
아콰를 밀어냈던 물의 장막은 페델리우스를 밀어내지 않았다.
“다녀오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아콰를 향해 가볍게 묵례를 해 보였다. 아콰가 붙박이처럼 그 자리에 선 채 닫히는 문을 쳐다봤다.
문이 닫히고, 아콰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장막을 향해 가져다 댔다. 쿵, 물이 폭발하듯 작은 파문이 일며 아콰의 손을 밀어냈다.
이그니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주인님. 대체 왜…….>
아콰가 울컥 솟아오르는 이름 모를 감정을 애써 짓밟았다. 아콰가 알지 못하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아콰는 그 이름 모를 감정의 이름을 알고 싶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이그니가 아콰를 향해 물었다.
<응.>
아콰가 고개를 숙인 채 기계적으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