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층에도 사람들은 바글바글했다. 많은 귀족이 이곳에 몰려있는 모양이었다. 가만히 있는 내게 덤벼드는 이들에게서 미안함이나 후회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단 한 명도, 나를 그 꼴로 만든 이들 중 단 한 명도 죄책감을 품고 있지 않았다.
단 한 명도!
“괴, 괴물…….”
주저앉은 채 뒷걸음치는 이름 모를 귀족을 쳐다보다가 활짝 웃었다.
“새삼스럽게. 너희가 나는 태어날 때부터 괴물이었다고 했잖아.”
“살, 살려…….”
“안 죽여. 걱정 마.”
죽인 것은 경비병들뿐이다. 귀족들은 정말 조금도 다치게 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열려있는 문을 가리켰다.
바닥에서 떨고 있는 귀족들이 넷이다. 2층에선 이들이 마지막이다.
“이 안에 들어가.”
“무, 무슨…….”
“아니면 여기서 죽든가.”
“흐익!”
귀족들이 손과 무릎에 피를 묻혀가며 개처럼 기듯이 황급히 방 안에 들어갔다.
넓은 방 안은 네 명이 들어가서 생활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응응, 착하다.”
그들이 기억할 수 있게 활짝 웃었다. 발을 안으로 들이며 방 내부에 물로 된 푸른 장막을 만들었다. 혹여나 창문으로 뛰어내릴 수 없도록.
“모쪼록 오래 생존하길 바랄게.”
“자, 잠……!”
쾅- 문을 밀어 꽉 닫았다. 황제에게 했던 것처럼 문을 얼음으로 얼려버렸다. 거대한 얼음으로 덮인 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을 테니까.
“2층도 끝.”
아까까지만 해도 호선을 그릴 수 있었던 입꼬리가 더 올라가질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부족한 것 같아.”
또 뱃속이 허해졌다. 텅 빈 것 같은 기분은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몇 명에게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뱃속이 충만해질까?
생각하며 천천히 3층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가는 길에 만난 시녀 중에는 눈에 익은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놀란 듯 걸음을 뚝 멈췄다.
그 안에 드러난 공포는 그때와는 달랐다. 내게 손찌검을 하던 시녀는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살고 싶어서 동료들의 시체 사이에 무릎 꿇고 앉아 빌었다.
‘잘, 잘못했어요. 제가 그때 미쳤었나 봐요. 저는 그냥,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데, 다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흐읍, 저, 저주가 옮을 거라고 해서. 그래서…….’
비굴하게도 일그러진 얼굴로 비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또 속이 가득 찬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의 목에 천천히 검을 찔러 넣었다.
그 눈에서 생기가 사라지자, 또다시 속이 텅 비어버렸다.
“3층이네.”
생각에 잠긴 채 계단을 올랐더니 벌써 3층이었다. 고개를 숙이자 피에 전 손이 보였다.
“못, 돌아가겠네.”
메리와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이대로 계속하면 분명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릴 것 같은데 멈출 수가 없었다.
“침입자다!! 죽여라!!”
“시끄럽잖아.”
이제는 숨 쉬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생겨난 수십 개의 검이 달려오는 경비병의 몸을 난도질했다.
찰박, 흥건한 피가 발밑에 고였다. 그것을 밟으며 천천히 복도를 걸어 들어갔다.
[손에 피가 묻으면 묻을수록 손은 제 색을 잃어가지. 다채로운 세계도 온통 핏빛으로 물든다. 그리고 그 세계가 당연해졌을 때쯤 너는 생명의 무게를 잃어버리고, 죽이는 것을 망설이지 않게 돼.]
왕이 했던 말이 이제야 머릿속에 조금씩 떠올랐다. 아주 조금,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을 것 같았다.
“좀 늦은 것 같은데.”
처음 이그니를 죽일 뻔했을 때는 미친 듯이 떨렸던 손이 더는 떨리지 않았다. 흘러내리는 피가 그저 물처럼 무덤덤하게 보였다.
[내가 네게 널 지킬 검을 줬다는 걸 잊지 말아라.]
“왕님한테 사과해야겠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제 와서 페델리우스가 보고 싶다고 하면 분명히 안 될 말이겠지만.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오시리아.]
아쉬움이 조금 남았다. 분명 이제는 더 돌아갈 수 없는 길에 들어섰겠지만, 그래도 역시…….
“혼자는 외롭네.”
아콰라도 데리고 올 걸 그랬다. 입맛을 다시며 안쪽으로 조금 더 걸어 들어갔다. 2층과는 다르게 3층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걸어가며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젖혔다. 아무도 없다. 정말 아무도 없었다.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귀족은 없고, 경비병만 죽어있고.”
생각지도 못하는 사이에 내가 3층까지 쓸어버렸던가? 부작용으로 기억을 잃은 건가 싶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이마를 짚고 생각해보아도 기억이 끊긴 흔적은 없었다.
“앗! 이제야 오셨군요. 폐하.”
발랄한 목소리에 미간이 좁아졌다.
“네 목소리를 여기서 듣고 싶진 않았는데.”
“섭섭한 말씀을. 황좌를 만들어두고 기다린다고 했잖습니까.”
“그런 것치곤 내가 다 정리하고 있잖아.”
“그야……. 그걸 원하셨잖아요?”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해맑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티끌 하나 없는 표정의 엘이 웃고 있었다.
“제가 폐하를 위해 남겨놨어요. 자, 3층은 제가 정리했고요.”
“정리?”
“아, 귀족들이요.”
엘이 출입문에서 비켜서며 손가락으로 복도 창문 밑에 널브러진 귀족들을 가리켰다.
귀족들이라기엔 전부 반쯤 정신이 나가서 팔들이 기이하게 꺾여있었지만.
“아, 근데 좀 망가져버렸어요. 생각보다 반항을 많이 해서.”
엘이 귀족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
“역시 이 얼굴이 문제일까요? 너무 얕보이는 것 같아요.”
엘이 손톱으로 제 볼을 긁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헤헤, 웃어 보이는 표정이 처음 만났을 때와 그다지 다르지 않아서 그것이 거슬렸다.
“나는 네가 엘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네에? 아, 그렇죠. 저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것뿐이니까.”
“엘은 어떻게 됐지?”
“어……. 음, 말씀드려야 하나요? 별로 듣기 좋은 얘기는 아니라 폐하께 들려주고 싶지는 않은데.”
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덧붙였다. 후, 짧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방해받고 싶지는 않았는데.
“나는 황제가 될 마음도 없어. 제국을 없앨 마음은 있지만.”
“어, 그러면 안 되는데.”
“난 네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고 있어.”
응축된 푸른 기운이 허공에 흩날렸다. 입가를 비틀어 올리자 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다시 말할게. 난 황제가 되지 않을 거고, 나는 널 없앨 방법을 알고 있어.”
내 말에 그의 눈이 더 크게 벌어졌다.
“3층은 네 맘대로 해. 엉망이 된 건 나도 필요 없으니까. 살고 싶다면 따라오지도 말고 영원히 내 눈앞에서 사라져.”
곧장 4층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엘의 거죽을 뒤집어쓴 무언가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다락방까지 하면 몇 층이더라.’
느릿하게 생각에 잠긴 채 걸음을 옮겼다. 하고 싶었던 복수를 하고 있을 텐데 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았다.
“올라가자.”
가슴께를 꾹꾹 누르다 계단이 있는 곳으로 곧장 향했다.
“죽일 걸 그랬나.”
엘의 탈을 쓴 무언가 기분 나쁜 것.
손대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그것을 없애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굳이 내가 손대지 않아도 그것은 자연히 사라질 거다.
‘내가 왜 그 방법을 알고 있더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계단을 올라가다 걸음을 멈췄다.
아콰에게 들은 적도 없고, 갇혀있던 내가 그런 처음 보는 것을 죽이는 법을 홀로 깨우쳤을 확률은 드물었다.
“이 힘 때문인가.”
온몸을 맴도는 푸른 기운을 바라보다가 다시 발을 움직였다.
이 본성만으로 안 된다면 다른 성도 전부 뒤지면 된다. 그걸로도 안 된다면 내 어미를 비웃은 이 나라를 전부 없애버리면 조금 기분이 풀리려나.
‘대신관이 한 예언. 그건 사실 거짓말이었단다, 아가야.’
거짓말.
거짓말에 나는 이십 년을 다락방에 갇혀 지냈고, 거짓말에 내 어머니는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백성들은 전부 나와 어머니를 원망했다. 시녀들과 경비병들의 손찌검도 수없이 많았다. 전부 죽여버려도 시원찮았다.
‘오시리아, 태어난 게 죄인 인간은 없습니다.’
그건 거짓말이야. 페델리우스.
나는 태어난 게 죄였던 사람이고, 실제로 그것을 눈앞에서 확인받았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비참한 삶을 살게 되지도 않았을 거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인간들을 죽도록 원망하며 그들을 죽이겠다고 살아남지도 않았을 거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딱 몇 년만이라도 일찍 페델리우스를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조금 더, 조금 더 다른 길을…… 함께 걷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질문을 잘못했네.”
페델리우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설프게 웃었다.
“난 나쁜 게 맞나 봐.”
널브러진 시체를 보고도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나는 살아갈 의욕을 누군가의 죽음에서 얻었다.
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랬다.
나는 복수하기 위해 살았고, 그것만이 목적이었다.
‘왜 그게 목적이 됐더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의문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콰.”
문득 머릿속에 작고 사랑스러운 빛무리가 떠올랐다.
아콰는 매일매일 내게 나를 이곳에 가둔 인간들은 죽어 마땅한 존재라고 했다.
똑같이 되돌려주자고, 이곳을 나가면 나는 그들보다 위대한 존재라고 했다.
매일매일 듣다 보니 어느 날부터 그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있었다.
언젠가 아콰에게 물어보려다 묻지 못한 게 이제야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러면 아콰, 복수가 끝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숨이 턱 막혔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이다.
다락방에 갇혀있을 때 황제의 목숨이란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것이었다. 제국을 멸망시킨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꿈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 되어 바로 코앞에 있다. 코앞에 있는데, 아직도 무언가 부족했다.
“안 돼.”
멈추면 안 된다. 멈추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게 될 거야. 황급히 남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4층에 들어서자마자 시녀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꺄아아악!!”
화등잔만 하게 커진 눈동자가 공포를 담은 채 나를 보고 있다.
“사, 살려…….”
바들바들 떠는 시녀를 보다가 검을 들었다.
페델리우스가 들고 있는 검처럼 크고 길지만, 결코 무겁지는 않다. 내가 들기에도 버거움은 없었다.
“난 널 알고 있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의아하게 나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놈들은 대개…….”
검이 높이 치켜들었다.
“죽을 놈들이지.”
그대로 시녀의 어깨를 향해 검을 내리꽂았다.
아니, 정확히는 내리꽂으려고 했다. 내 손목을 잡아 오는 손길만 없었다면.
탁, 하고 손을 잡은 것은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있었고 매우 커다랬다.
“안녕, 페델리우스.”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시녀가 벌벌 떨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치마가 뒤집히고 신발 한쪽은 벗겨진 우스운 꼴이었다.
“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시리아.”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왔는데.”
“당신이 보고 싶어서요.”
“……난 네가 보고 싶지 않았어. 페델리우스. 적어도 이런 장소에서 이런 꼴로는!”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페델리우스가 검지를 내 입술 위로 꼭 눌러왔다.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거짓말. 내가 피에 절어있는 건 고개만 숙여도 보여.”
페델리우스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시선을 내린 상태로 말했다. 페델리우스가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검을 뽑았다.
스릉, 날카로운 금속음에 몸이 절로 굳었다. 그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검 끝이 반짝인다.
하늘을 향해 치켜든 검이 그대로 내리그어졌다.
촤악, 피가 하늘로 튀었다.
툭-
“아…….”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시녀의 목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페델리우스가 검을 한 번 털어내며 다시 허리춤에 찬 칼집에 집어넣었다.
“너, 너 지금 무슨…….”
경악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굳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페델리우스의 멱살을 붙잡았다.
“너 지금 무슨 짓을!”
“복수입니다.”
내 언성에 페델리우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믿을 수가 없다. 페델리우스가 인간을 죽였다. 아니, 사람을 죽인 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너 지금…….”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시녀는 내가 치료해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애초에 목이 바닥에 굴러떨어진 인간을 어떻게 살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페델리우스는 기사다.
지금껏 내가 봐온 바로는 하늘보다도 더 높고 강건한 의지를 담고 있는 긍지 높은 기사였다.
그러니까 그는 결코, 기사도에 반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절대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페델리우스는 그런 사람이다. 적어도 내가 봐온 페델리우스는 그랬다.
“미쳤구나, 페델리우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약속대로 당신의 기사가 된 것뿐입니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나는 네게 내 복수를 대신해달라고 명령하지 않았어! 네가 날 대신해서 피를 묻힐 필요는 없다고!”
페델리우스가 나와 함께 진창을 구를 필요는 없었다.
애초부터 진흙탕 속에서 태어난 것은 나였다.
어차피 이십 년을 다락방에서 가축보다 더 못한 존재처럼 자랐다. 이제 와서 몸에 붉은색이 들러붙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당장 이 성에서 나가! 애초에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야? 나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어.”
“어, 그냥 문을 열었습니다.”
“……뭐?”
“그냥 걸어가서 황성 문손잡이를 붙잡고 돌렸습니다. 문이 열려서 들어왔을 뿐입니다.”
“하지만…….”
벌린 입이 황당함을 담은 채 닫히질 않았다.
나는 뭔가 장막 같은 걸 쳤다. 그걸 치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고, 나가지도 못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누군가에게 배운 적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냥 알고 있었다.
아니, 알게 됐다. 그런데 그 장막을 아무렇지도 않게 뚫고 들어왔다니.
“그러니 운명이라 생각하고 곁에 있을 겁니다.”
“싫어. 나가.”
고개를 단호하게 저어도 페델리우스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발에 못이라도 박힌 사람처럼 한 걸음도 움직이질 않았다.
애초에 움직일 마음도 없는 것처럼.
“싫습니다. 저는 당신을 지킬 겁니다.”
“지키지 않아도 돼. 난 강해졌어! 아무도…….”
꽈득,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아무도 날 때리지 못해. 무시하지도 못할 거야. 더는, 날 가둬두지도 못할 거라고.”
입 밖으로 쏟아진 말은 내뱉고 보니 비참해서 뒤늦게 입술을 여물었다.
페델리우스는 여전히 말없이 내 앞에 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버렸는데도 머리 위로 느껴지는 시선이 끈덕지다.
“네. 더 이상 아무도 그러지 못할 겁니다.”
따뜻한 손이 피 묻은 내 손을 단단히 붙잡아왔다. 손을 빼기 위해 힘을 줘 비틀었지만, 페델리우스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 세게 잡은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손을 피할 수가 없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
“제가 당신의 검이 되겠다고요.”
움찔, 몸이 떨렸다. 울컥 솟아오르는 덩어리를 애써 꾹꾹 눌러버렸다.
그저 이 미친 것처럼 뛰는 심장을 저 멀리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싶었다.
“저를 이용하십시오. 당신을 위해서라면 이 검에 얼마든지 피를 묻혀도 괜찮으니까요.”
페델리우스의 나지막한 말이 귓가를 울렸다.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쯤은 지금 바닥을 굴러다니는 시녀의 머리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당신이 나락의 밑바닥에 있다면…….”
그의 커다란 손이 볼에 닿았다.
“저는 그런 당신의 바로 뒤에 있을 겁니다.”
싫다는 말도, 짜증이 난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모진 말을 내뱉어 이곳에서 쫓아내고 싶은데도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가, 또다시 무슨 말이라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러니 길을 잃으신 것 같다면 뒤를 돌아보십시오.”
페델리우스의 손이 눈 밑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묻어났다.
“어딘지 모르겠더라도 뒤를 돌아보십시오.”
얼굴을 쓸어내리던 손이 팔을 타고 내려와 깍지를 껴왔다.
그저 할 수 있는 건 내가 어떤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를 쳐다보는 것뿐이었다.
“그곳이 피투성이의 전장이라도 저는 당신의 뒤에 있을 겁니다.”
“……네가 없으면 어떡해?”
“오시리아.”
“응.”
“저는 지금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페델리우스가 나와 깍지를 낀 채 몸을 웅크렸다. 쪼그려 앉은 그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페델리우스가 웃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미소가 속을 아프게 했다. 그가 밟고 있는 흥건한 피 웅덩이가 보였다.
“……응.”
한 차례 고개를 주억였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이미 내 곁에 있었다. 누군가의 피를 밟고서.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페델리우스를 맞잡았다.
“고마워. 와줘서.”
페델리우스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말했다.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리던 차였다. 페델리우스의 한마디에 속이 조금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