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99)

흘러넘치는 힘은 제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제어되지 않았다.

“곁에 있어주는 걸로 충분해. 그러니까…….”

“저도 검을 들겠습니다.”

“페델리우스.”

“그러니 일이 전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페델리우스의 말에 입 안이 썼다.

페델리우스는 그렇다 쳐도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 왕이 한 충고를 무시했고, 왕이 만들어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이제 와서 신녀랍시고 다시 얼굴을 들이밀 수도 없었다.

‘이런 피투성이의 모습으로는 더더욱.’

느리게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예민해지는 감각에 인기척까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숨소리나 작은 움직임이 공기를 울리면 그것이 내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누군가 숨어있더라도 마치 투시라도 하는 것처럼 투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이쪽이야.”

“그런 것도 알 수 있습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몇 명이나 있습니까?”

“아마도 4층에 있는 사람들 전부.”

다른 곳에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보아 한곳으로 모인 게 분명했다.

저벅저벅,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퍽 든든했다.

“페델리우스.”

“예, 황녀 전하.”

“……넌 내가 아직도 황녀로 보여?”

“음. 오시리아.”

불퉁하게 낸 목소리에 페델리우스가 얼른 말을 정정했다. 눈동자를 슬쩍 굴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제법 넓어 보이는 방문의 문고리를 붙잡았다. 페델리우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널 지켜줄게, 페델리우스.”

페델리우스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나는 문을 힘껏 밀어젖혔다.

끼익,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무장한 경비병과 시종 시녀들이 보였다.

“죽어라, 이 악마!!”

가장 뒤쪽에 있던 귀족이 소리치자 한가운데 있던 기사가 달려들었다. 그것과 거의 한 끗 차이로 무기를 든 다른 사람들도 함께 덤벼든다.

“괴물 다음엔 악마야?”

참 기분 나쁜 별명을 쉽게도 생각해낸다 싶다.

“…….”

달려오던 기사가 경악 어린 표정으로 자리에서 멈춰 섰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미동도 없이 굳어졌다.

“왜? 죽으라며.”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한 번 깜빡이며 물었다.

기사가 챙그랑, 검을 떨어뜨렸다.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사방팔방 방 안을 뒤덮은 날카로운 물의 검들이 한 개도 빠짐없이 전부 그들을 향해 있었다.

“살려, 주십시오.”

기사가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 이마까지 박은 기사의 말에 다른 시녀들도 황급히 무기를 버렸다.

승산이 없는 싸움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나는 단지 손을 한 번 움직이면 수십 개의 칼날을 그들에게 날릴 수 있으니까.

“방금까진 나보고 죽으라며. 날 죽일 거 아니었어? 근데 왜 살려달래.”

“집에, 가족이 있습니다. 아내와 이제 막 태어난…… 쌍둥이가…….”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기사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제 품 안쪽에서 낡은 사진 조각을 꺼냈다.

어찌나 만졌는지 손때가 탄 그것은 누렇게 바라기까지 했다.

“제가 죽으면 제 가족도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부디 자비를.”

“흐음……. 네 가족이 어딨는데?”

“수도에…….”

기사의 대답에 활짝 웃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지. 힐끗 뒤를 바라보자 페델리우스가 꼿꼿하게 서있었다.

“그거라면 괜찮아.”

“네?”

“너희 다음은 수도고, 수도 다음은 제국 전체야. 그러니까 어디에 있든 간에 순서만 다를 뿐이고 전부…….”

입술이 절로 호선을 그렸다.

“전부 죽을 테니까.”

내 말에 기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어차피 인간은 다 죽는 거니까. 지금 죽든 나중에 죽든 별 상관 없지 않을까?”

게다가 엎어져 있는 시녀와 시종 몇 명은 기억에도 있었다. 가운데 무릎을 꿇은 기사는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왜, 대체 왜 이러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하얗게 질려있던 기사가 물어왔다. 뒤쪽에 있는 귀족은 이미 정신을 반쯤 놓은 듯했다.

‘아하! 저 귀족을 지키려고 있었던 거구나.’

저 귀족은 살겠다고 4층에 있는 사용인 전부를 불러 모은 거다. 그걸 가운데에 있는 저 기사가 통솔한 게 분명했다.

말없이 눈을 굴리다가 페델리우스에게 손짓했다. 페델리우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뒤에서 안아줘. 페델리우스.”

“예?”

“안아줘.”

“……지금 말입니까?”

“응.”

페델리우스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벌어진 품으로 냉큼 등을 밀어 넣으며 그의 팔에 볼을 비볐다.

포근해서 잠을 자고 싶었다. 이렇게 있으면 페델리우스와 함께했던 얼마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대로 쭉,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왜 그러냐고?”

“예.”

“그걸 왜 몰라?”

“……정말 몰라서 여쭙습니다. 애초에,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몸을 웅크린 기사가 내게 물었다. 설마 거기까지 질문이 되돌아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입이 떡 벌어졌다.

“거기 옆에 있는 시종, 시녀 몇 명한테만 물어봐도 알 것 같은데.”

“예?”

“아니면 저 뒤에 있는 몽당연필 같은 귀족한테나.”

내가 웃으며 말했다. 지목당한, 정확히는 나와 껄끄러운 일이 분명히 있을 시녀들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 나라의 황녀야. 기사……씨?”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황녀……? 저는 당신과 같은 황녀마마를 알지 못합니다.”

“……무슨 소리야? 너 어디서 이민 왔어?”

“명실상부 이곳 제국 태생입니다.”

“근데 왜 날 몰라? 비가 내리지 않는 건 내 탓이라고 원망했을 텐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떨렸다. 모른다는 거짓말을 뻔뻔하게 내뱉는 꼴이 짜증스럽다.

엘만큼이나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기사가 의아한 표정을 한다.

“비가 내리지 않는 건, 가엾은 어린아이를 제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뭐……라고?”

“그러니까, 그건……. 신전에서 갓 태어난 어린아이를 제물로 삼았기 때문에 하늘이 노한 거라고, 하셨습니다.”

기사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막히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지금 태어나 단 한 번도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거짓말.”

“거짓말이 아닙니다. 정말, 정말입니다. 제가 태어난 해에 태어난 갓난아이를 신전이 제물로 삼았다고, 그랬다고 들었습니다.”

기사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눈을 부릅뜬 채 그를 노려보자 그가 황급히 다시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아무도 함부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벌벌 떠는 귀족조차도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고귀하고 오만한 귀족이, 나를 짓밟던 귀족이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가엾죠. 트럼프 제국의 황녀 이야기는 유명해요. 집시를 공개 처형하고, 집시가 낳은 아이를 성 꼭대기에 가둬버렸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죠. 대개는 황녀를 가엾게 여겨요.]

[지금이야 워낙 살기가 힘드니 황녀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처음엔 아니었어요. 황녀를 동정하는 이들도 많았죠.]

보석상인이 했던 말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괜찮으십니까? 오시리아.”

“……모르겠어.”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듣지 않았더라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들어버려서 무시할 수도 없게 됐다.

“너, 몇 살인데?”

기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올해 스물입니다.”

“……그래?”

느릿하게 눈꺼풀을 내리깔자 시종과 시녀들이 힐끔힐끔 눈치를 보았다.

“그래.”

손을 치켜들었다가 그대로 천천히 아래로 내려쳤다.

푸욱- 푹, 푸북-

고깃덩이를 찌르는 소리가 수십 번 울렸다. 흘러내린 장기들과 핏덩이들이 스멀스멀 몸에서 흘러나왔다. 방 안이 피범벅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조금만 더 모으면 작은 개울도 만들어질 것 같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피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죽어버린 것들은 말을 하지 못한다. 질질 흘러내리는 공포감에 젖은 이들은 한마디 비명도 내뱉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살아남은 것은 기사 하나와 귀족 하나뿐이었다.

“네 말을 믿을게. 가족에게 가. 네가 원하는 대로.”

“흐읍……. 욱- 가, 감사, 욱, 감사합니다.”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를 밟으며 기사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안 좋은 듯 입을 가린 채 그가 이리저리 몸을 휘청였다.

“남은 건 넌데.”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손에 쥐어진 물의 검을 꽉 붙잡았다. 팔다리에 하나씩 내리 찌르는 게 목표였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한 걸음 다가가려고 했다.

꼬옥-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페델리우스가 순순히 팔에 힘을 풀어만 줬다면.

“실망했어? 페델리우스?”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내가 끔찍스러워?”

“전혀요. 여전히 당신은 사랑스럽습니다.”

“거짓말.”

“예, 사실 조금 거짓말입니다. 얼굴이 피투성이라 잘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 얼른 끝내고 샤워라도 하십시오.”

장난기를 담은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키득키득 웃으며 몸을 떨었다.

그가 기사라는 걸 이럴 때마다 깨닫는다. 수많은 시체의 산을 보고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는다.

“……근데, 페델리우스.”

“예.”

“스무 살도 결혼할 수 있어?”

방금 기사를 떠올리며 되물었다.

“네. 법적으로는 열일곱부터 가능합니다.”

“애도 낳을 수 있어?!”

“예? 예. 그렇습니다.”

“……아까 그 기사 좀, 무지막지하게 성공한 애구나.”

내 말에 페델리우스가 입을 꾹 닫았다. 그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어떤 거?”

“마지막 말 전부 말입니다!”

페델리우스가 부들부들 떨며 말을 덧붙였다. 말없이 눈을 데구르르 굴리다가 히죽, 웃었다.

“왕님!”

“……정말입니까?”

“응, 정말이지!”

해맑게 웃으며 말을 덧붙이자 페델리우스가 수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웃고는 있는데 어쩐지 무섭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리고 이건…….”

페델리우스가 내 손에서 물로 된 날카로운 검을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생각지도 못한 사이 빼앗긴 검에 황급히 손을 뻗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크아아아악!!!”

페델리우스의 검이 귀족의 허벅지에 그대로 박혔다.

언제나와 같이 반듯한 자세로 페델리우스가 허공에 떠 있는 다른 검 하나를 손에 붙잡았다. 그리곤 나를 보곤 빙긋 미소를 지었다.

비명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빼앗긴 검을 향해 뻗은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 페델리우스의 얼굴에 튄 핏방울을 보다가 황급히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하지 마.”

“저는 이런 괴로운 일을 당신이 하지 않길 바랍니다.”

“너 진짜…….”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페델리우스가 이렇게 잔인한 모습을 나는 본 기억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내 앞에서는 한없이 다정했고, 한없이 상냥했다.

그냥 그렇게, 그 자리에 있어주길 바랐다.

“네가 손에 피를 묻힐 이유는 없어.”

페델리우스가 바닥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귀족을 쳐다보다가 검을 오른쪽으로 비틀어 꺾었다. 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사람의 목에서 나오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끔찍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이윽고 앓는 소리조차도 제대로 내지 못하게 됐을 즈음에야 페델리우스는 그것을 들어 올렸다.

콰득- 귀족이 기묘한 방향으로 목이 꺾인 채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눈알이 툭 튀어나오고 입에선 피가 뒤늦게 흘러나왔다. 그제야 그는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시리아를 찾으려고 저는 이 성의 맨 꼭대기에 올라갔다 왔습니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며 당신을 찾기 위해서요.”

페델리우스가 내뱉는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내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누군가에겐 그게 뭐 어떠냐고 되물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겐 아니었다.

“……거짓말.”

“그리고 전 그곳에서 누군가 갇혀 살았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거긴 왜, 왜 올라갔어?”

“당신을 찾으려고요. 혼자서 성을 헤매며 울고 있을 당신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페델리우스는 귀족에게 꽂아둔 검을 그대로 둔 채 내게 몸을 돌렸다. 그의 손이 내 볼에 닿았다.

“그러다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아아…….”

“좁디좁은 방, 먼지가 가득 쌓이고 이불의 기능을 제대로 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얇은 천, 겨울에도 닫히지 않을 것이 분명한 작은 창문과 바닥에 떨어진 음식물.”

귀를 두드리는 목소리에 눈앞에는 그 장소가 선명히 그려졌다. 그다지 상상력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은 내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리고, 붉은 작약보다도 더 짙게 빛나는 진홍색 머리카락.”

페델리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볼에 닿아있던 그의 손가락이 어느새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굳이 그에게 하나하나 설명을 듣지 않아도 눈만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곳.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꿈속에서 떠올라 나라는 존재를 언제든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장소였다.

“왜 하필이면 거기에…….”

그리고 그곳을 가장 보여주기 싫은 사람이 있었다.

페델리우스는, 페델리우스만큼은 내 과거를 몰랐으면 했다. 어떤 곳에서,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했는지는 몰랐으면 했다.

“……네가 간 거야, 페델리우스.”

울음 섞인 목소리가 터져나갔다.

사실은 이렇게 바닥까지 떨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죽이거나, 진흙탕을 구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진흙탕을 구르고 있어도 너만큼은, 내 발밑을 보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면 다시 네게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왜 그랬어.”

“저는 조금 화가 났습니다. 아니, 사실 조금 많이 화가 났습니다.”

“뭐……?”

“이 화를 주체할 수가 없어서, 내려오는 길에 몇 명을 베어버렸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페델리우스가 뽑았던 검에는 핏자국이 묻어있었다. 금세 다른 피에 젖어 알아보기도 힘들게 됐지만.

“그러니 그런 표정 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당신의 허락 없이 제멋대로 죽이고 온 참이니까요.”

“…….”

“오시리아의 분노를 이해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이 성안의 모두를 죽이고 싶다면 저는 기꺼이 그것을 위해 당신의 검이 되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가 내 손을 붙잡고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그러니 이곳을 다 정리하신다면…….”

페델리우스의 입술이 닿은 손등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화끈거리는 열기가 오로지 손등에 우르르 몰려든다. 시야가 흔들렸다.

“나머지는 저와 부하들에게 맡겨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무엇을?”

“이 나라를 정복하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내게 말했다. 그건 지금껏 들어온 어떤 말들보다 황당한 말이었으나 동시에 가장 믿음직스러웠다.

“너는, 내가 제국 사람들을 죽이지 않길 바라는구나.”

“당신이 이 일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웃어주길 바랄 뿐입니다.”

“……모르겠어.”

가만히 귀족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저것은 저대로 박제되어있다가 언젠가 죽을 거다.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아직 죽여야 할 귀족들이 너무 많아.”

제국의 귀족들은 수가 너무 많았다. 이름만 귀족인 자들도 상당수였다.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지라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귀족의 작위를 사고팔 수도 있었다.

“속이 텅 빈 것 같아. 페델리우스.”

“예?”

“비어버린 속을 채워야 할 것 같아.”

페델리우스를 한 번 쳐다보고 곧장 몸을 돌렸다. 계단으로 향하는 걸음은 전에 없이 무거웠다.

페델리우스가 뒤에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페델리우스, 나 황제를 만났어.”

“황제라면…….”

“아바마마.”

“죽였습니까?”

“아니. 가둬뒀어. 도망갈 수 없게 막을 쳐두고, 문을 닫고, 결코 빠져나올 수 없게 문을 얼려버렸어.”

담담한 고백을 하듯 페델리우스에게 입을 열었다. 수없이 많은 잔인한 방법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가장 괴로웠던 것은 굶주림이었다.

내가 겪었기에 그건 어떤 고통보다 길고, 지독히도 아픈 기억이었다.

“나는 굶주림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지 알고 있어. 페델리우스.”

저벅저벅, 뒤에서 걸어오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멋대로 달싹이는 입술을 굳이 멈추지 않았다.

“그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어. 바닥에 깔린 나무라도 뜯어 먹고 싶게 만들고, 제 사지육신이라도 씹어 먹고 싶게 해.”

“…….”

“일주일.”

한숨을 토하듯 입술에 단어를 올렸다.

“일주일을 굶어본 적이 있어. 몇 살 때였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을 오래전이었는데…….”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나는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어. 모두가 며칠에 한 끼만 먹고, 모두가 좁은 방에서 딱딱한 빵을 먹는 줄 알았어. 세상은 언제나 새까맣다고 생각했고, 나는 더러운 존재라서 누구에게도 닿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모든 사람이 나를 싫어했고, 모든 사람이 나를 꺼렸다. 더러운 존재가 되는 것처럼 닿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 모든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아콰가 있었지만, 빛무리의 아콰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콰가 울면 빛무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는데, 나는 그걸 받아마셨다.

그것은 나의 생명수였고, 아콰는 내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때의 나는 죽어있었다. 내 눈도 죽어있었고, 내 세상도 죽어있었다. 내 눈에 비친 세상은 그저 한없이 죽은 곳이었다.

일주일씩 굶어 죽어갈 때도 눈앞에 던져진 것은 경멸 어린 시선과 딱딱한 빵과 약간의 물뿐이었다.

꽈악. 흘깃 뒤를 돌아보니 페델리우스의 주먹에 힘줄이 돋아나 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차라리 죽어버리길 바랐던 것 같아.”

일주일이나 사람이 누군가의 식사를 차려주는 걸 잊을 리가 없다. 게다가 나중에 알게 됐지만, 다락방으로 들어오는 계단 앞에는 경비병도 있었다.

매일매일 경비를 서면서도 아무도 챙겨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네 다정함은 무서웠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네 기분을 상하게 하면 나를 때릴 것 같았으니까.”

처음 만난 날 페델리우스는 다정했으나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저 무서웠다. 지금은 그에게 악의가 없었다는 걸 알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저는……!”

“알아. 지금은 알아. 네가 그러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도.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도.”

“…….”

“페델리우스. 너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만난 가장 큰 축복이야.”

계단을 올라가다 멈춘 채 힘껏 얼굴 근육을 움직여 웃음을 띠었다.

절망 같은 어둠 속에서 아콰를 만난 것은 내게 구원이었고, 건조한 인생에서 그를 만난 것은 내 인생의 유일한 축복이었다.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페델리우스.”

“저야말로 절 곁에 두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델리우스가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다정함에 수많은 것들을 맛봤다. 세상은 훨씬 넓고, 훨씬 다정했다.

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넓은 하늘은 작은 창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네가 보여준 세상은, 마치 꿈 같았어.”

줄곧 꿔왔던 꿈과 같았다. 널 닮은 꿈이었다.

“여기가 마지막이야.”

다락방을 제외하면 이곳이 마지막 층이었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처리하는 건 간단했다. 아래층과 마찬가지로 귀족들을 붙잡아 가두고, 방을 얼리고, 병사와 시녀들을 처리했다.

익숙했던 시녀와 병사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그대로 말없이 몸을 돌렸다.

“페델리우스.”

“예.”

“나랑 게임을 할까?”

“게임…… 말입니까? 무슨…….”

복도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바라보다 작게 웃었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을 페델리우스는 분명히 싫어할 거다. 그러니까 데려갈 수는 없다.

“숨바꼭질.”

“갑자기 무슨…….”

“네가 날 찾으면 집에 돌아가는 거야. 물론 네가 그때까지도 날 싫어하지 않는다는 가정 아래의 이야기지만.”

창문을 활짝 열고 창틀에 올라섰다. 페델리우스가 황급히 내 곁으로 다가왔다.

“너는 이 안에 들어왔으니 혼자서도 잘 나갈 수 있을 거야.”

“오시리아! 대체 어딜 가신다는 겁니까. 함께 가겠습니다.”

“싫어. 나는 네가 싫어할 일을 할 거야.”

내가 고개를 젓자 그의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주인님!>

아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완전히 어른에 가까워진 소년이 허공에 떠 있었다.

바로 코앞에 온 아콰를 보다 손을 뻗어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가자, 아콰.”

<네. 주인님이 원하신다면요.>

아콰가 다가와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차가운 물이 잠시 볼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감촉이었다.

“비가 멈추면, 네가 진 거야. 페델리우스.”

“제가 지면, 어떻게 됩니까?”

페델리우스의 물음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새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보이질 않았다.

“너는 나를 잊고, 나는 너를 잊고 각자의 길을 가면 되겠지.”

고개를 든 채 대답했다. 페델리우스가 입술을 달싹이는 것이 눈에 보였다. 옅게 웃으며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물론 말이 뛰어내린 거지, 나 역시 아콰처럼 허공에 둥둥 떴지만.

<주인님, 날개도 없이…….>

아콰가 놀란 눈으로 내 주변을 뱅글뱅글 돌며 살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제야 나도 고개를 한껏 꺾어 뒤를 쳐다볼 수 있었다.

‘정말 없네.’

힘이 강해졌다는 건 느낄 수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말없이 몸을 돌려 페델리우스를 쳐다봤다.

“가지 마십시오.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을 싫어하지 않을 겁니다.”

“무서워서 그래. 네가, 네가 나를 그런 눈으로 보게 되는 게 무서워서. 나는 분명히 네가 싫어할 일을 할 건데, 너마저 날 싫어하게 되면 나는 정말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게 될 거야.”

만약 찾으러 오지 않는다면 너무 꼭꼭 숨어서 찾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다.

그럴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지금,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

두 손을 뻗어 그의 볼을 붙잡았다.

페델리우스의 동공이 바람에 흔적을 남기는 물결마냥 흔들렸다. 그저 그 푸른 눈동자를 오랜 시간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군청색 눈동자가 사랑스럽게 반짝였다.

“비가…….”

쿠릉, 쿠르르릉-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멀리서부터 천둥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파랗게,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페델리우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멈추지 못해서 미안해.”

훌쩍 뒤로 물러나며 페델리우스에게 웃어 보였다. 페델리우스가 떠나간 온기를 매만지듯 뒤늦게 손을 뻗는 것이 보였지만 몸을 뒤로 돌렸다.

“가자. 아콰.”

아래에서 이그니가 고개를 번쩍 든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고 앞으로 날아갔다.

“오시리아!!”

페델리우스가 커다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멈칫, 절로 굳어버린 몸이 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반드시 찾는다고 약속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당신을 찾는다면 그때는 제 곁에 계속 있어주시겠습니까?”

사람이 어디까지 다정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끝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면 나야말로 묻고 싶다. 페델리우스, 너는 대체 어디까지 내게 다정할 거냐고……. 그렇게 묻고 싶었다.

“응. 약속할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빠르게 상공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메마른 하늘에는 더 이상 새 한 마리조차 쉽게 보이지 않았다.

“비다!!”

“비가 내리고 있어!”

“오오, 신이시여!”

“황녀 전하께서, 신의 사자인 그분께서 내려주신 게 분명해.”

여기저기서 감탄의 목소리가 들렸다.

푸른 물빛이 허공을 가른다. 가장 조용하고, 가장 사람의 발길이 닿기 힘든 곳까지 가기 위해 나는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제국의 수도는 크고 넓다. 오래전에는 그 안에 숲이 있었을 정도니까.

물론 지금은 다 사라지고 사막의 형상으로 바뀌었지만.

<주인님, 왜 비를 내리시나요?>

“네가 그랬잖아. 과한 것은 언제나 독이 된다고.”

<아……! 그랬군요.>

아콰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어린아이 같은 장난기 어린 미소에 말없이 소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한참을 날아가서야 아래로 내려갔다. 인적이 드문, 수도의 가장 끄트머리. 그 아래에는 지하통로가 있다.

옛날 피난길로 사용했던 통로였는데, 아콰가 가져온 지도에 실려있었다.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이곳으로 들어가시려고요?>

“응. 여기에 있을 거야.”

<얼마나요?>

“글쎄, 이 비가 멈출 때까지.”

통로는 바람에 날아온 모래에 깊게 묻혀있었다. 물의 힘을 사용하니 그것들을 치우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머리가 아파…….’

날뛰는 푸른색의 기운이 피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몸을 돌고 있다. 그것이 점점 신경 쓰여서 죽을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쉬고 싶었다.

<주인님.>

“응, 아콰.”

<비를 내리는 건 큰 힘을 소모하는 일이랍니다. 가능하시다면 저는 일단 조금 휴식을 취하시는 걸 추천해드려요.>

“안 돼. 비는 멈추지 않을 거야.”

<쓰러지실 거예요.>

“그러면 게임은 끝나는 거고.”

어두컴컴한 통로는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 덕분에 어둡지 않았다. 횃불이 없어도 앞을 보는 데 지장은 없다는 이야기다.

천천히 돌계단을 내려가자 문이 닫혔다.

불어오는 바람은 또 모래를 이 위로 옮길 거고, 페델리우스가 이곳을 찾을 확률은 현저히 낮아진다.

‘그렇다면 거기까지겠지.’

흐린 눈을 애써 붙잡으며 통로 깊숙이, 조금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자연을 움직이는 힘은 체력을 많이 소모해요. 잠이 들면 비가 멈출 거예요.>

“그럼 나는 잠을 자지 않아야겠네.”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지만 애써 이를 악물었다.

전신을 도는 기운 때문인지 자고 싶어도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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