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99)

* * *

돌아오는 길은 간단했다.

올 때 그랬던 것처럼 물을 통해 자르딘 왕국으로 돌아갔다.

오염되었던 물은 길게 내린 장대비에 전부 흘러가거나 정화된 듯했다.

강과 호수에는 새로운 물이 가득 차있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호수로 뛰어들었다.

목적지는 페델리우스의 집 작은 연못이었다.

“페델리우스.”

“예, 오시리아.”

“결국, 일 잘린 거야?”

일주일째 출근하지 않는 페델리우스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베개 하나를 끌어안은 채 뒹굴거리는 건 아주 행복한 일이라는 걸 깨닫는 중이다.

“잘린 게 아니라……. 근신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언제까지?”

“따로 명령이 있을 때까지입니다.”

그 기약 없음을 잘렸다고 하지 않던가?

잠깐 떠오른 말을 내뱉으려다 혹여나 그가 상처받지 않을까 싶어 말을 아꼈다.

자르딘 왕국이 트럼프 제국을 점령한 지 어언 한 달이 지났다.

사흘 전에는 원정에 나갔던 왕이 돌아왔고, 왕국은 다시 바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나는 매일 찾아오는 신녀들을 뒤로하고 페델리우스의 저택에 숨어있었고 말이다.

“그나저나 황녀 전하께서 통 얼굴을 비치질 않아서 신전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나 그 사람들 부담스러운걸.”

생전 받아본 적도 없는 친절을 베푸는데 그 정도가 페델리우스와 메리의 열 배는 훌쩍 넘는 듯했다.

“그래도 신녀님이 되셨으니 한 번이라도 가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날 이용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내가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자 그가 의자를 끌고 와 침대 앞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음……. 생각보다 그런 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니라고? 원래는 저주받았다고 싫어했을 거잖아.”

내 말에 페델리우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한 지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받는 기분에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는 조금 다릅니다. 모두가 당신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고 안달이 나 있어요.”

“그렇게 싫어해 놓고?”

“분명히 이기적이긴 하죠. 제가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언제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한다.

버거운 일이라도 거짓말을 하는 법은 없었다.

그게 내가 페델리우스의 옆에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

언젠가 내가 귀찮아지기라도 한다면, 적어도 그는 솔직하게 말해줄 테니까.

“그래도 오랜만에 나가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온 왕국이 들썩이고 있으니까요.”

“내 이야기?”

“기사들이 퍼뜨린 황녀 전…….”

또다시 황녀 전하라고 부르는 것이 보여 눈을 부릅뜨자 그가 냉큼 입을 닫았다.

“크흠. 오시리아의 영웅담이 아주 수도를 뒤덮고 있습니다.”

“영웅담?”

“네. 오시리아 덕분에 이번 전쟁에서 사상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든가, 오시리아의 모든 소문이 사실은 전부 제국의 음모였다든가, 당신이 내린 비나 솔선수범해서 처치한 적군들에 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드물게도 길게 설명한 페델리우스를 보며 베개를 끌어안은 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앉은 채로 페델리우스를 바라보니 그가 슬쩍 눈을 피한다.

‘뭐야?’

평소엔 눈을 피하지 않는 페델리우스인데.

눈을 가늘게 뜬 채 몸을 기울여 그와 다시 눈을 마주쳤다.

하나. 둘. 셋. 넷…….

아, 또 피했다.

“그……. 흠흠, 그래서 나가시겠습니까?”

“아, 그러자.”

그러고 보니 최근 페델리우스와 5초 이상 눈을 마주친 적이 없는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울컥 얼굴을 구겼다.

제국에서 돌아온 뒤부터 저러는 것 같은데…….

“메리를 불러드릴 테니 일단 옷을 갈아입으시겠습니까? 식사도 간단하게 하고 나가고요. 아직 식사도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일어난 지 한 시간밖에 안 됐는걸.”

불퉁하게 말하자 페델리우스가 반쯤 포기했다는 얼굴로 웃었다.

물론 지금은 해가 중천에 뜨고도 한참이나 지난 시간이었다.

페델리우스가 늘 조금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어떠냐고 묻기는 하지만…….

‘자기는 일찍 자고 있는데.’

아침에 눈이 안 뜨이는 것뿐이다.

따지고 보면 하루에 열두 시간쯤 잠을 자는 것 같기도 하고…….

하루의 절반을 잠으로 보낸다는 게 생각해보니 허탈한 것 같기도 하다.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해볼까?’

페델리우스처럼 검을 휙휙 휘두르거나 뱅뱅 돌려보고 싶고. 바닥을 기는 체력도 어떻게 하고 싶다.

물론 하늘을 날아다니면 몸이 피로할 일은 딱히 없겠지만.

“황!녀!님!”

냉큼 문을 열고 들어온 메리가 품에 와락 안겼다.

“메리!”

“보고 싶었어요.”

“음……. 어젯밤에도 봤는걸?”

“매일매일 보고 싶어요.”

“그럼 황녀님이라고 부르는 거 그만두면 좋겠는데.”

입을 뚱하니 부풀리며 불만을 토하자 메리가 그제야 눈을 동그랗게 뜨곤 헤헤, 웃어 보였다.

“아! 맞다. 너무 입에 익어서……. 신녀님?”

“그것도 싫은데.”

“그, 그럼…… 오, 오시리……. 흠흠. 오시리아 님……?”

“응!”

근데 얼굴은 왜 그리 새빨갛게 붉히는지 잘 모르겠네.

곧 터질 토마토만큼이나 새빨갰다.

그러고 보니 페델리우스도 종종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도 하던데…….

“메리, 혹시 어디 아파?”

“아뇨? 메리는 건강하답니다.”

자꾸 목소리가 어린애처럼 돌아갈 것 같다.

메리가 너무 다정하고 상냥해서 그래.

그러니까 그녀의 앞에선 한없이 어린아이처럼 굴게 된다.

그리고 그게 별로 부끄럽지도 않고.

‘페델리우스한테는 그렇게 보이기 싫어서 엄청 노력하는데.’

연기했다는 걸 아예 지울 수도 없는지 종종 멋대로 튀어나오는 고음의 목소리가 당황스러울 때가 많긴 했다.

특히나 페델리우스 앞에서는 그게 어찌나 부끄럽던지…….

“어디 나가시려고 하세요? 주인님께선 외출할 거니 준비를 도와주라는 말만 하셨거든요.”

메리가 침대에 앉은 나를 두고 옷장을 뒤적이며 말했다.

“페델리우스가 밖에 나가재. 내 영웅담이 떠돌고 있다고.”

“아! 저도 가끔 시장에 장 보러 나가면 들어요. 그때마다 자랑하고 싶어지는 게…… 콧대가 쓱 올라가서 곤란하다니까요.”

키득키득 웃으며 덧붙이는 메리의 말을 듣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소문 하나에 그녀가 기뻐진다는 것이 자못 신기했다.

“그 소문에 메리가 기뻐?”

“그럼요. 제가 모시는 주인님이 이런 분이다! 하고 얼마나 소리치고 싶은데요. 안 좋은 소문이 돌았을 땐 저도 시장이 가기 싫을 정도로 슬펐거든요.”

“네 일이 아닌데도 슬퍼?”

내 질문에 옷장을 뒤지던 메리가 도리어 눈을 크게 뜨며 옷장 속에서 얼굴을 쑥 내밀었다.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서 주근깨가 유독 크게 보였다.

“당연하죠! 오시리아 님은 메리한테 안 좋은 소문이 돌면 슬프지 않을 거 같아요?”

슬픈 건 잘 모르겠지만…….

“음……. 몹시 화가 날 것 같아.”

“저도 화가 아주 많이 났었어요. 그래서 그때 황녀…… 아니, 오시리아 님의 악담을 했던 거래처에는 두 번 다시 가지 않으려고 해요.”

비밀 이야기를 하듯 귓가에 속삭이는 메리의 목소리에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언제나 유쾌하다.

“제가 하는 복수예요. 흥!”

콧방귀를 뀌는 그녀를 보다가 문득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복수야?”

“네, 그럼요. 매일매일 많은 재료를 사는 제가 그쪽으로 가지 않으니 손실이죠.”

“사람을 죽이지 않는데도?”

내 물음에 메리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복수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니까요. 꼭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복수가 되진 않는답니다.”

“……그래?”

“네. 그래요.”

생각해보지도 못한 이야기에 절로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말을 듣든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고 피를 보는 것만이 복수라고 생각했다.

다른 방법으로도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묘했다.

“그래서 오시리아 님! 이거랑 이것 중에 어느 드레스가 더 좋으세요?”

고양이처럼 둥글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로 메리가 내게 물었다.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에 침대 위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너무, 화려…… 화려한데? 조금 덜 풍성한 이 옷은 어때? 메리.”

“네에? 그렇지만 이제 신녀님이시니까 이 정도로 화려한 복장은 해주셔야죠!”

“아니, 몰래 나갈 거야. 로브 이렇게 푹 뒤집어쓰고…….”

내 말에 메리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녀가 실망한 티를 팍팍 내며 옷장에 다시 드레스를 집어넣었다.

‘저 드레스 무거운데 대체 한 손으로 어떻게 든 거야?’

저번에 멋도 모르고 들었다가 낑낑거렸을 때를 생각하며 눈치를 살짝 봤다.

저걸 입고 움직이면 한 걸음 걷는 것도 상당히 힘들고 버겁단 말이야.

“그럼 이거는요?”

“조금 더 가벼운 거로…….”

풀죽은 메리의 눈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꺼낸 것은 드레스가 아니었다. 스르륵 눈동자를 굴리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결국은 해맑게 웃어 보였다.

“그럼 여기에 머리 장식은 하게 해주세요.”

“응. 그래!”

더 거절했다간 액체가 되어 녹아내릴 것 같았기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메리. 그렇지만 너무 화려한걸.

“메리, 선물 사올까?”

“아뇨, 괜찮아요. 오시리아 님이 조심히만 다녀오시면 돼요.”

“그래도…….”

미안해서 그랬다. 내가 눈동자를 굴리자 메리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허리를 살짝 굽히며 눈을 맞췄다.

“그럼 저 대신 장을 봐오시는 건 어떠세요?”

“장?”

“네. 저녁 식재료를 사러 나갔어야 했거든요.”

“좋아! 내가 할게!”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오시리아 님은 너무 긴 것 같아요. 시아 님? 리아 님? 오리 님……은 좀 그러네요.”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는 그녀를 쳐다보다가 작은 침음을 흘렸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침대 밑으로 내린 다리를 앞뒤로 굴렀다.

“시리는 어때? 루덴도 그렇게 불렀고.”

“아! 그럼 시리 님으로 불러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지. 메리가 부르는 거라면 어떤 이름도 환영이야.”

내가 눈웃음을 그리며 말하자 메리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여튼 메리도 애 같다니까.’

조금 뿌듯한 기분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메리가 배시시 웃으며 꺼내놓은 옷을 다시 들고 일어났다.

“일단 씻으셔야죠. 이쪽으로 오세요.”

“네에-”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자 메리가 마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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