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99)

* * *

최근 이그니는 용병 일을 시작한 모양이다.

내가 뭐라도 좀 하지 않으면 쫓아내겠다고 했더니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집을 나선 게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위협이 없어졌는데도 365일 24시간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내 옆에 붙어있으려고 하니까.

지금은 가끔 장기의뢰를 받으면 출장도 나가곤 한다.

그렇게라도 그가 다른 삶을, 내 곁을 지키지 않아도 살아갈 이유를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알겠어.”

하고 싶은 말이야 잔뜩 있지만 전부 참았다.

페델리우스가 그제야 옅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말을 덧붙였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뭘?”

“그, 처음부터 다 알고 계셨다면…… 혹시 글자나 물건에 대해서도 전부 알고 계셨던 겁……니까?”

꿀꺽.

페델리우스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그의 말을 천천히 곱씹다가 얼굴에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가 말하는 거라면…….

‘왜애?’

‘안조아아?’

즉, 그러니까…….

‘자, 아 하십시오.’

‘잘하셨습니다!’

머릿속에 하나씩 떠오르는 숨기고 싶은 기억들에 귀까지 뜨거워졌다.

두 손바닥을 모아 거기에 얼굴을 묻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었으면…….

슬쩍 고개를 들어 올리니 페델리우스가 손바닥으로 제 눈을 스스로 덮고 있었다.

그에게도 퍽 떠올리기 힘든 기억임은 분명한 듯하다.

“죄송합니다…….”

기어들어갈 것 같은 아주 작은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흐릿하게 들려왔다.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미안해…….”

이럴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고. 페델리우스가 말을 꺼내지 않아서 나도 자연스럽게 잊고 싶었다.

잊고 싶었다.

……잊고 싶었어.

굳이 끄집어내지 않았다면 잊었을 거라고!

“페데리야.”

“……예.”

“나 땅굴 하나만 파줘. 거기서 살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보지 않아도 달궈진 쇳물만큼이나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 분명한 얼굴을 알 것 같았다.

“안 됩니다. 숨쉬기가 어렵습니다.”

“미친…….”

“예?”

아, 실수했다. 아콰가 이런 말 쓰지 말랬는데.

예전에 마구잡이로 보던 물거울 속에서 뒷골목을 뛰어다니는 소년들이 하던 말이 퍽 입에 와 닿아서…….

하지만, 페델리우스의 진지한 말이 순간 황당했었다.

아무리 사람이 진지해도 너무 진지하잖아.

“그, 방금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잘못 들은 거 아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기울이자 페델리우스가 순식간에 의아한 표정이 된다.

“그렇……습니까?”

“응.”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기울이는 것과 동시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한참을 곱씹듯 생각해보더니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억였다.

“그렇군요.”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볼을 주먹으로 꾹꾹 누르다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얼른 가자.”

페델리우스의 팔을 잡아끌자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걸어가는데 그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붙잡았다.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만 붙잡은 페델리우스가 조심스럽게 깍지를 끼고 단단히 손을 마주 잡는다.

“가죠, 오시리아.”

“아, 응.”

얼굴만 뜨거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잡힌 손까지도 화끈거렸다.

“아, 그래서 제국에 그동안 내리지 않은 비를 이 주 동안이나 내려주셨다잖아!”

“맞아, 맞아. 그래서 결국 쓰러지신 걸 기사단장님이 발견했다는 얘기던데.”

시장 중심가로 들어가니 떠들썩한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굳이 귀를 쫑긋 세울 것도 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이 절로 멈췄다.

슬쩍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 정말 어떤 못된 놈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뜨렸는지!”

“제국 놈들이라는 얘기가 있던데?”

“정말?”

“아, 그래! 제국에서 황녀 전하를 음해해서 내쫓으려고 했대. 아무래도 자기들이 데리고 있을 때는 그분이 신녀님이라는 걸 아무도 몰라서 막 대했던 모양이야.”

“내가 뭔가 음모라고 생각했다니까!”

대낮부터 술집에 모여 앉은 남자들이 나누는 대화는 제법 목소리가 컸다.

호리호리한 남자의 말에 다른 사내들이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네가 제일 먼저 그분을 쫓아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흐, 흐흠! 내, 내가 그랬던가? 아이고. 나이가 드니 기억도 가물가물해서…….”

“자네가 여기서 제일 어리네!”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등을 내려쳤다.

호리호리한 남자가 끙끙 앓는 신음을 흘리며 애꿎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듣다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유쾌한 사람들이네.’

저런 친구가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괜찮으십니까?”

“응? 뭐가?”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를 가만히 살피던 페델리우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처음 거리에 나왔을 때처럼 불쾌한 기분도 아니었고 주변도 제법 활기차서 싫지 않았다.

“페델리우스!”

“예, 말씀하십시오.”

“야채가게 가자.”

“……예?”

“시장 봐야 돼.”

페델리우스에게 잡힌 손을 잡아당기자 그가 순순히 끌려왔다.

페델리우스가 금세 내 옆으로 다가왔다.

“곧장 장을 보러 가시는 겁니까?”

“음, 응. 어차피 바람 쐬러 나온 거잖아.”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페델리우스의 목소리가 묘하게 떨떠름하게 들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뭔가 생각해둔 게 있는 건가?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었어?”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래?”

근데 왜 저렇게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인지.

‘밥도 먹고 나왔고…….’

뭔가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다.

맨날 집에만 있으니 페델리우스가 바깥바람 쐴 겸 분위기를 확인해보라고 데리고 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페델리우스.”

“예.”

“친구는 어떻게 사귀는 거야?”

친구든 연인이든 두셋씩 짝지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묘하게 부러움이 일었다.

페델리우스는 소중하지만, 친구……라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하고……. 메리도, 아콰도 소중한 이들이지만 둘은 가족에 가깝다.

특히 아콰는 혼자였을 때부터 유일한 가족이었다.

“음. 친구는 앞으로 이것저것 여러 가지 활동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길 겁니다.”

“신전에 간다고 해도 친구 해줄 사람 없잖아?”

“……예. 아무래도.”

“신녀랑 친구 해줄 사람은?”

“그건……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조금 느릿하게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옅게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시장은 거리 하나가 통째로 상인들로 가득 차있었다. 오죽 많으면 거리 하나를 다 차지했나 싶을 정도다.

“근데 신녀는 뭘 하면 돼? 신한테 기도해? 그런 거 싫은데.”

“음, 신녀는 신전을 관리하는 제일 높은 사람입니다. 그 대에 뽑힌 신관과 함께 신전을 관리하고 회의에 참석해서 의견을 내시는 분입니다.”

“의견?”

“네. 신전에는 할 일이 많습니다. 예산 분배도 해야 하고, 신전에서 주최하는 축제가 열릴 때면 몹시 바쁩니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덕담도 해주어야 하고요. 일 년에 한 번 신께 감사의 인사를 하거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제사도 신전의 일입니다.”

묵묵히 듣다가 중간부터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도대체 페델리우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뭐가 저렇게 복잡한지.

“머리 아파.”

“신녀님은 지금까지도 몇 번이고 계셨지만, 한동안은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신관께서도 제법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신관?”

“네. 열세 살의 나이에 신관의 직위를 짊어지고 십 년이 넘게 신전을 이끌어오신 분입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나이를 계산하니 생각보다 젊다.

제국 신관처럼 콧수염 꼿꼿하게 기른 기분 나쁜 남자인 줄 알았더니.

나이도 비슷하고, 신전의 시녀도 아니면…….

눈이 절로 동그래졌다.

“그럼 걔랑 친구 하면 되겠다.”

“……예?”

“신관이면 신전의 시녀도 아니고 나를 신녀님이라고 떠받들지도 않지?”

내 물음에 페델리우스가 “예.” 하고 짧게 대답했다.

문제는 어쩐지 떨떠름해 보이는 그의 표정이었다.

슬쩍 페델리우스의 눈치를 살피다가 배시시 웃었다.

“나 내일부터 신전에 가도 돼?”

“당신이 원하신다면요.”

내 질문에 페델리우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곤 대답했다.

생각지도 못한 걸 얻은 기분이다.

“메리가 준 쪽지엔 뭐라고 적혀있습니까?”

“당근 한 묶음, 양파 한 묶음, 고기 잔뜩! 그리고 먹고 싶은 과일을 사 오래.”

쪽지를 품에 다시 집어넣고 가게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페델리우스가 여전히 큼직한 손으로 깍지를 낀 채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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