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어? 페델리우스. 너도 출근해?”
반듯하게 갑옷을 차려입은 페델리우스를 보며 물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갑옷 차림의 페델리우스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예. 근신이 풀렸습니다.”
“이제 백수 아니구나.”
“다행히도 그렇게 됐습니다. 가는 길에 신전에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어차피 길을 몰라서 메리에게 안내해달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는데 잘됐다.
신전에서 마차를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역시 마차는 웬만하면 타고 싶지 않고…….
“좋아. 너 늦지 않아?”
“괜찮습니다.”
조금은 뻔뻔해진 것도 같은 페델리우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아서 하겠지.
“아콰는…….”
오늘도 없나?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나를 피해 다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느릿하게 시선을 깔았다.
“정령께선 아까 메리랑 함께 있는 걸 보았습니다.”
“메리랑?”
“네.”
“그래……?”
주방에서 나왔으면서 나한테 안 오는 거야?
울렁이는 기분이 묘하게 심장을 자극했다.
괜히 뚱해지는 기분을 애써 달래며 어색하게 웃었다.
“메리가 있으면 걱정 없겠지. 가자, 페델리우스.”
“네.”
앞장서는 페델리우스의 뒤를 곧장 쫓았다. 아래층에는 페드로가 있었다. 메리나 아콰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일하러 간 모양이다.
“다녀오십시오, 주인님. 오시리아 님.”
페드로의 부름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동자가 퍽 다정하다. 간질간질한 기분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응. 다녀올게.”
“다녀오지.”
“네.”
허리를 굽히는 페드로를 뒤로하고 페델리우스와 함께 집을 나섰다.
이제는 마차를 타는 것보단 페델리우스의 말 앞에 타는 게 더 익숙해진 참이다.
“일이 끝나면 데리러 오겠습니다.”
그게 뭐야. 완전히 어린애 같잖아. 이웃집에 맡겨놓은 갓난아기도 아니고.
뚱하게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냥 나도 말 타는 법 배우면 안 돼?”
“……받쳐드릴 테니 올라타십시오.”
와, 얘가 내 말 무시했어!
페델리우스가 요즘 들어 능구렁이처럼 스리슬쩍 넘어가려고 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 게 어딨어!
뚱하니 끙끙거리며 말에 올라탔다.
페델리우스가 뒤에 앉아 고삐를 붙잡는다.
‘별로 어려울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다고 여기서 겨우 황성 가는데 물로 만든 날개를 달고 둥둥 떠서 날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눈에 띄면 또 시끄러워질 테고…….
말이 말발굽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황성과 페델리우스의 집은 그다지 멀지 않다.
말을 타고 가면 대개 이십 분에서 삼십 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으니까.
신전은 황성과는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제법 수도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난생처음 와보는 길은 가면 갈수록 사람이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번화가에서는 꽤 떨어진 곳이었다.
사람이 확 줄었다고 생각했더니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건물이 나타났다.
그곳에 들락거리는 사람은 꽤 있었다.
점점 다가갈수록 바글거리는 인파가 늘어났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왔는지 놀라움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이쪽이 신전입니다.”
“사람이 너무 많은데…….”
“아마도, 오시리아가 온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입니다.”
“벌써?”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어제 전달했는데…….”
페델리우스가 말을 한편에 세워두고 뛰어내렸다.
그리곤 나를 덥석 들어 바닥에 내려줬다.
“말을 타고 가다간 다칠 수도 있으니 걸어가겠습니다.”
“음, 그래.”
“긴장하지 마십시오. 신전의 시녀들이 나와서 정리를 해줄 테니까요.”
긴장하지 않았는데…….
꿀꺽, 넘어가는 침을 삼키며 애써 발을 디뎠다.
페델리우스가 내 옆에 붙어 조심스럽게 나를 에스코트했다.
부드러운 손길에 따라 신전으로 점점 다가가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신전에서 흰 옷을 입은 시녀들이 뛰쳐나와 사람들이 계단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몸으로 막아섰다.
“어서 오십시오, 신녀.”
새하얀 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성큼성큼 계단 밑으로 내려왔다. 우아한 발걸음이나 몸짓은 귀족들의 그것보다도 훨씬 더 세련되고 고상해 보였다.
“음……. 안녕.”
내 인사에 벌꿀이 흐를 것 같은 황금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옅게 웃었다.
새파란 눈동자는 청명한 가을 하늘을 닮아 있었다.
페델리우스가 남자를 향해 묵례를 하자 남자가 마주 고개를 숙였다.
거추장스럽게 늘어진 하얀 제복을 남자가 잘 갈무리하며 내게 손을 뻗었다.
“이번 대신관으로 발탁된 라비엘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 응.”
그러고 보니 내가 신관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제법 많았다는 걸 간과했다.
새하얀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 색이었다.
“오시리아, 저는 이만 가봐야 합니다. 일을 마치면 데리러 오겠습니다.”
“알겠어.”
“네, 다녀오겠습니다.”
“응.”
손을 가볍게 흔들자 그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절제된 발걸음이 제법 기계적이다.
통이 넓어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소맷자락을 다른 손으로 치우며 라비엘이 내게 손을 뻗었다.
“함께 가시죠. 신녀.”
주변을 슬쩍 바라보니 사람들의 시선에 열망이 가득하다.
무엇에 대한 열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짧은 고민 끝에 그의 손을 붙잡았다.
얇다고 생각했던 손이 제법 강하게 내 손을 맞잡았다.
느릿하게 끌어당기는 그를 보다가 숨을 삼켰다.
‘온통 새하얘.’
조각부터 건물 전체가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위에 수놓은 색은 오로지 황금색뿐이다.
“신기하십니까?”
“아, 그냥. 온통 새하얘서.”
“그렇습니까.”
나지막한 웃음이 섞인 목소리는 상당히 듣기 좋았다. 달콤한 꿀을 발라놓은 것처럼 귀를 즐겁게 하는 목소리였다. 낮지만 다정하다.
“신녀께선 신전이 처음이십니까?”
“아, 난 오시리아야. 신녀라고 부르는 건 싫으니까 하지 마.”
“당신이 원하지 않으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순순한 대답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신녀가 되고 싶어서 온 건 아니고 단순히 비슷한 또래의 친구를 가지고 싶었던 것뿐이다.
‘여자친구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신전의 시녀들은 친구가 되어주지 않을 테니까.
“열세 살 때부터 신관을 했다던데 진짜야?”
“네. 전대 신관께서 저를 주워 기르셨지요. 그분을 이어 신관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혼자서?”
“네.”
옅은 미소를 띤 라비엘이 대답했다.
잔잔한 미소는 마치 호수 같은 안정감이 있었다.
“너 몇 살이야?”
“스물셋입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음. 라비엘.”
내 부름에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란 듯한 눈빛에 고개를 기울이자 그가 이내 다시 그린듯한 미소를 입에 띠었다.
“말씀하십시오. 오시리아.”
“나랑 친구 하자.”
“……네?”
라비엘의 표정이 허물어지듯 무너져 내렸다.
그가 조금은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사실 친구가 필요해서 왔어. 페델리우스가 여기에 나랑 비슷한 나이의 신관이 있다고 했거든.”
“친구, 말인가요?”
“응. 너도 신관이니까 날 모실 필요는 없잖아?”
라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이어서 그가 제법 당황하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
“친구 있어?”
“아뇨, 친구는…… 없었습니다만.”
“그럼 나랑 하면 되잖아.”
“갑작스럽네요.”
그가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머뭇거리는 그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뚱하니 입술을 내밀었다.
주변의 눈치를 보던 그가 이내 잡고 있던 손을 끌어당겼다.
“일단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도록 해요.”
“그래.”
주변 눈치를 보는 것이 분명한 시선에 순순히 그에게 응했다.
굳이 신전 한복판에서 떠들고 싶은 얘기는 아니었으니까.
“차 한 잔 어떠십니까?”
“뜨거운 건 싫어.”
“미지근하게 타오라고 할게요.”
그의 말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이면 차가운 게 좋지만, 너무 좋을 대로만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대충은 알고 있다.
“신녀가 생긴 건 몇 세대 만의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
“네. 신전이 있으니 대대로 신관은 있었지만 신녀는 아주 드물었습니다. 아주 종종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여인이 신녀가 되어왔으니까요.”
기쁜 듯 미소 짓는 그를 쳐다보다가 조금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사람들은 어쩐지 감정이 늘 얼굴로 다 드러난다.
그것은 대개 기분 좋은 긍정적인 종류의 감정이어서 보는 내가 다 설렐 때도 있었다.
마주 웃으니 라비엘의 눈동자가 한층 더 커졌다.
“갑자기 친구 하자는 말씀은 무슨 뜻이었나요?”
“친구가 가지고 싶어. 페델리우스도, 메리도 친구는 되어주지 않는단 말이야.”
뚱한 목소리가 절로 튀어나갔다.
라비엘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안정되어 있어서 어쩐지 말을 하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설마 그래서 신전에 오신 건가요?”
“응. 맨날 집에 있기도 싫고……. 사실 난, 신전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네가 있다고 해서 왔어.”
“신전을 싫어하시나요?”
“직설적으로 말하면, 응.”
고개를 끄덕이자 라비엘의 단정한 눈썹이 천천히 폭을 좁혀갔다.
“차를 내왔습니다.”
“고마워.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고급스러운 찻잔을 어루만졌다.
이것도 새하얀 색의 잔이다.
슬쩍 고개를 기울여 라비엘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제국의 신전이 싫었던 거야. 네가 싫은 게 아니야.”
말이 없는 그에게 냉큼 말을 덧붙였다.
“아…….”
라비엘이 작게 탄성을 흘렸다.
그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는 걸 보니 뭔가 들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신전에서는 뭘 해?”
“기본적으로는 신전을 관리하고, 신전이 주최해야 할 행사의 준비를 하고……. 드물지만, 순례를 돌기도 해요.”
“순례?”
“음, 수도가 아닌 다른 지역에 있는 신전을 방문해서 기도하고 오는 거예요.”
다른 지역?
라비엘의 한마디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건 재밌을 것 같다.
“대개는 기도하는 순례자들을 지켜보거나 이렇게 차를 마시는 일이 전부지만요.”
“심심하겠다.”
“그래서 신녀인 오시리아가 와준 게 저는 무척 기쁩니다.”
“그러니까 친구 하면 되겠다.”
라비엘의 말에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었다.
사람들이 악수를 하고 싶을 때 이렇게 하던데…….
라비엘이 내가 뻗은 손을 보더니 어색하게 웃는다.
“오시리아?”
“응. 악수.”
“악수요?”
라비엘이 뻗는 손을 냉큼 붙잡았다.
위아래로 휘휘 흔들며 웃었다.
“잘 부탁해, 친구.”
“네……?”
멍한 표정을 한 라비엘의 손을 붙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아싸, 친구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