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99)

* * *

똑똑.

페델리우스가 문을 노크했다. 집무실 문 안에서는 금세 대답이 들려왔다.

그가 허락을 받은 후에야 문고리를 돌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폐하.”

“아. 출근했군, 페델리우스 경.”

“예.”

대답한 페델리우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웬일로 왕은 소파에 흐트러진 채 누워있지 않았다.

정말 드물게도 그는 집무실 의자에 앉아있었으며, 그 앞에는 단정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서있었다.

붉은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

페델리우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오랜만이야, 윌하튼 경.”

“…….”

“아니, 페델리우스라고 불러도 괜찮으려나? 물론 허락해준다면.”

페델리우스가 묵묵히 그의 붉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더니 곧 고개를 돌려 성큼성큼 왕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오늘은 따로 명령이 없으시다면 연무장에서 기사단의 훈련을 봐주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페델리우스가 온통 붉은색의 남자를 깔끔하게 무시하며 지나쳐갔다.

마치 아예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페델리우스를 보며 남자가 쓰게 웃었다.

“그래. 오늘은 엘레나 재상이 오기로 했으니 일이 있다면 가봐도 좋아.”

“감사합니다.”

페델리우스가 몸을 돌렸다.

곧장 밖으로 나가려는 그를 바라보던 붉은 눈의 사내, 콘니르가 입술을 뗐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를 이렇게까지 모른 척하기 있어?”

페델리우스의 걸음이 뚝 멈췄다.

“난,”

그가 이를 악문 채 잇새 사이로 목소리를 냈다.

“네놈 같은 친구를 둔 적이 없다. 친히 말하지. 내 눈앞에서 꺼져도 좋아.”

쾅!

거친 소리를 내며 닫힌 문을 황망하게 바라보던 콘니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머쓱한 듯 뒷목을 긁적이던 그가 긴 한숨을 삼켰다.

“아직도 절 용서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는.”

“글쎄……. 용서하지 않은 게 과연 그대일지, 아니면…….”

왕이 서류를 뒤집으며 자리를 옮겨 소파에 앉았다.

덧붙이지 않는 말을 기다리던 콘니르도 왕의 권유를 따라 맞은편에 앉았다.

“돌아와서 반갑네.”

“감사합니다. 살아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정말 살아남아 버려서 염치없게 돌아왔습니다.”

“아니. 추방 권유는 그대가 내게 내려달라고 요청한 것이었으니.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시간이 됐다면 충분하네. 그건 자네의 잘못이 아니었으니.”

왕의 말에 콘니르가 옅게 웃었다.

믿어주는 사람이 있더라도 소중했던 것은 잃어버렸다.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도, 되돌릴 방법이 없다는 것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오는 소문을 듣자 하니 페델리우스가 마음을 준 상대가 있다던데요.”

콘니르가 웃으며 물었다.

“이국의 황녀라고 하던데…….”

“설마…….”

“어디에 가야 볼 수 있습니까? 아주 궁금하거든요.”

짓궂은 웃음기가 담긴 미소에 왕이 한숨을 삼켰다.

그의 주변에 있는 인재들은 뛰어나기는 하나 왜 이렇게 하나같이 통제가 어려운지 모르겠다.

“그 불에 넣어도 녹을 것 같지 않던 강철 같은 사내를 저렇게 물렁물렁하게 만든 건 누구입니까?”

선명한 적안이 이채를 내며 반짝 빛났다.

“그대가 그러니까 페델리우스 경을 더 화나게 한다는 건 알고 있나?”

왕의 타박에 콘니르가 말없이 웃었다.

절대 제 선택을 되돌릴 마음이 없어 보이는 웃음에 왕이 어깨를 으쓱이며 포기했다.

* * *

“표정이 어두운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엘레나 재상 각하.”

“호오, 일전에는 망할 새끼라고 하더니 갑자기 다시 너무 격식을 차리는 거 아닌가?”

엘레나의 말에 페델리우스가 냉큼 입을 닫았다.

그때는 열이 뻗쳐서 멋대로 나간 말을 그녀는 아직까지도 우려먹고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말씀하실 건지.’

페델리우스가 지친 표정으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페델리우스의 눈빛을 눈치챘는지 그녀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내가 기억하는 한은 아마도 계속 우려먹지 않을까 싶네. 아니면 그대가 나를 재상 각하라고 부르지 않는 날이나.”

엘레나의 말에 페델리우스가 입을 꾹 닫았다. 말로는 절대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페델리우스는 빠르게 포기했다.

팔짱을 낀 엘레나가 페델리우스를 한번 보더니 입을 열었다.

“콘니르 백작이 돌아왔다던데.”

“한창 전쟁한다고 할 땐 얼굴도 비치지 않더니 겁쟁이 놈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추방 중이지 않았나.”

“어쨌든 저는 그가 싫습니다. 보고 싶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드물게도 길게 말을 늘어놨다.

드물게도 느껴지는 그의 적나라한 감정에 엘레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페델리우스 경, 그때 그 일은…….”

“엘레나 재상 각하.”

페델리우스가 엘레나의 말을 끊었다.

단단하게 벽을 친 눈동자는 그녀에게 더 이상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영민하게 눈치챈 엘레나가 말을 멈췄다.

“오늘은 폐하께 기사단의 훈련을 봐준다고 했으니 그곳에 갈 예정입니다. 폐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어쨌든 곧 공표가 있을 예정이니 귀족가에 빈자리는 없는 편이 현명하지. 내가 말을 하지 않길 바란다면 그대도 너무 드러내진 말도록 해.”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폐하는 내가 맡을 테니 걱정 말고 일 보게.”

“예.”

페델리우스가 가볍게 묵례를 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연무장으로 걸어가는 페델리우스를 보던 엘레나가 작은 한숨을 삼켰다.

그녀도 곧 집무실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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