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99)

* * *

“모시러 왔습니다, 오시리아.”

신전 안으로 들어선 페델리우스가 큰 보폭으로 훌쩍 다가왔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그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비엘과 담소를 나누는 도중이었는데…….

“오늘은 빨리 왔네?”

“예. 기사단 훈련만 봐주고 일찍 돌아갈까 합니다.”

“왜?”

페델리우스는 내가 아니면 왕의 껌딱지 같은 존재가 아니었던가.

내 질문에 페델리우스가 설핏 웃었다.

“기사단 훈련이 생각보다 일찍 마쳤을 뿐입니다.”

“……그래?”

“예.”

페델리우스의 대답에 앉아있던 탁자에서 일어났다.

마중을 나왔으니 돌아갈 시간이겠지만…….

거짓말쟁이.

사실은 그 콘니르인지 뭔지 하는 사람 때문이면서.

라비엘과 나누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페델리우스를 살짝 흘겨봤다.

그는 내게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언제까지 애 취급을 할 생각인지. 옅게 웃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뚱하니 먼저 몸을 돌렸다.

“갈게, 라비엘!”

“네. 내일부터는 말씀드렸던 대로 신녀에 관한 수업을 할 겁니다. 각오하고 와주세요.”

“……네에.”

뚱하니 대답하자 라비엘이 낮게 웃었다.

장난기 넘치는 미소에 절로 어깨가 들썩였다.

“조심히 가세요.”

“응.”

손을 흔들고 방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 보니 페델리우스가 여기까지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다른 시녀들이 안내라도 해준 모양이다.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는 내 뒤를 페델리우스가 금세 따라붙었다.

내가 느린 건지 그가 빠른 건지.

아마도 둘 다라고 생각하지만.

“신관과는 금세 친해지셨군요.”

“응, 라비엘은 저래 봬도 수다쟁이야.”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묵묵히 들어주던 라비엘도 어느 순간부터 열심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오늘은 특히나 대화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렇습니까.”

“응. 나중에 너도…….”

웃으며 고개를 돌리자 묘한 표정을 한 페델리우스가 있었다.

무슨 표정이라고 해야 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평소와는 많이 다르다.

“표정이 왜 그래?”

“예? 제 표정이 이상합니까?”

“응. 뭐랄까…….”

눈을 동그랗게 뜨며 페델리우스의 얼굴을 요모조모 살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뭔가 어쩐지 뚱해 보이는…….

“아콰 같아.”

“예……?”

“얼른 돌아가자. 아콰랑 메리가 기다리겠다.”

“아, 예. 알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조금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걸어가도 되겠습니까?”

“응? 괜찮은데 왜?”

“그냥, 바람이 조금 쐬고 싶어서요.”

“그래.”

고개를 끄덕이자 페델리우스가 냉큼 옆으로 다가왔다.

훌쩍 다가온 그의 손끝이 내 손에 닿았다.

갑작스러운 온기에 고개를 들자 그가 옅게 웃었다.

“그리고…… 손, 잡아도 괜찮습니까?”

“뭘 그걸 일일이 물어봐.”

페델리우스의 손을 붙잡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괜히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으니 묘한 기분을 숨길 수가 없었다.

뱃속이 간질간질한 것 같다.

닿은 손가락에 묘하게 열기가 올라서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눈을 바닥에 내리깐 채 느릿하게 굴렸다.

“사실은 오늘 보기 싫은 사람을 봤습니다.”

묵묵히 걸어가던 페델리우스가 문득 소리를 냈다.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올리자 그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어쩐지 낮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앞을 보고 있었다.

“응.”

타인의 고민을 들어주는 건 잘하는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들어주고 싶었다.

페델리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으니까.

“그래서 폐하의 호위를 팽개치고 기사단 훈련만 보고 당신을 보러 간 겁니다.”

“응. 잘했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데, 그 와중에 오시리아가 보고 싶었거든요.”

솔직담백한 말에 가슴 한편을 무언가가 꾹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잡히지 않은 손으로 가슴께를 더듬거렸다.

‘뭐지?’

뭔가 찡- 하고 가슴을 때린 것 같았는데.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지금은 또 괜찮아졌다.

의아한 기분이 든다.

슬쩍 페델리우스를 봤지만, 그는 아까보단 한결 편안해진 표정이었다.

“보러 오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잘했다, 잘했어.”

왼손으로 페델리우스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페델리우스가 이상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뭐야?”

“크흡. 아, 아닙니다.”

어깨가 부들부들 경련하고 있는데 아니긴 뭐가 아니래.

그를 슬쩍 흘겨보다가 뚱하니 고개를 돌렸다.

‘뭐, 웃으니까 보기 좋지만.’

페델리우스는 늘 웃어줬으면 좋겠다. 언제나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서.

그렇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하며 살 수 있을 텐데.

“신녀 일은 할 만하십니까?”

“응? 아니,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삼 일이나 됐는데요?”

“응. 맨날 라비엘이랑 대화하고 신전 구경시켜주기에 그거 구경하고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도 지켜봤어.”

신전은 황성보다는 넓지 않았지만 그래도 넓었고 생각보다 왕래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라비엘은 특히나 최근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었다고 말을 덧붙였지만 그래도 매일 신전 주위를 돌고 절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이 나로선 신기하게만 보였다.

‘신이 정말 존재할까?’

라비엘에게 물었더니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바로 그 증거인데 그리 물으면 어떡하냐고.

사실 그건 그렇지만.

“그분과는 많이 친해 보이시더군요.”

“응. 신관은 늘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라비엘은 아니야. 엄청 착하고 말도 잘하고 뭐랄까…….”

그는 마치,

“예전에 내가 꿈꿨던 천사님 같아.”

다락방 속에서 한없이 기도했던 천사 같았다.

언젠가 누군가가 구원을 해준다면 그런 천사 같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물론 아주 어릴 적의 일이다.

그래도 라비엘은 정말 선한 사람이었다.

타인의 상처에 거리낌 없이 손을 대고 다정한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

“…….”

뭔가 말을 덧붙일 줄 알았던 페델리우스에게서 대답이 없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페델리우스가 나를 쳐다봤다.

“페델리우스?”

“아, 네.”

“왜 그래? 멍하니.”

“아뇨.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내일도 대화만 나누시는 건가요?”

페델리우스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매번 놀기만 하는 내게 라비엘이 결국은 수업을 예고했다.

신전의 시녀들도 기다리던 소식이었는지 오늘 온종일 그네들의 얼굴이 매우 밝았다.

‘물론, 나는 배우는 게 정말 싫다고 했지만…….’

라비엘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강경했고, 아주 강경했고……. 젠장. 그냥 강경했다.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친구야.

생각하니 못마땅해졌다.

“교육은 누가 맡으십니까?”

“아, 교육을 해주는 신관이 따로 있대. 라비엘은 대신관이고 그 아래로 다른 신관들이 있나 봐.”

“남자입니까?”

“신관이니까 그러지 않을까? 근데 라비엘 빼고는 다 아저씨들이었던 것 같아. 주름이 자글자글.”

뚱하게 대답하자 페델리우스는 어쩐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네가 만족스러워 보여?

“그건 다행입니다.”

“뭐가 다행이야?”

“어, 예?”

“뭐가 다행인데?”

페델리우스가 조금 멍청한 표정을 짓는다.

자기가 말해놓고 왜 대답을 못 해.

인상을 찡그리자 그가 머쓱한 듯 뒷목을 긁적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페델리우스, 역시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오늘 이상한데…….”

“아뇨, 괜찮습니다.”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젓는다.

슬쩍 쳐다보다가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더 덧붙일 말도 없었고.

“와, 벌써 집에 다 도착하고 있어.”

“그러게요.”

“너랑 이렇게 오면 다리가 하나도 안 아파. 눈 한 번 깜빡하면 딱 집에 와있다니까?”

신기하네.

덧붙이며 웃자 그도 낮게 마주 웃었다.

그냥 정말 별것 없이 대화만 나누며 오는 길인데도 다리가 아프지 않다.

물론 오늘은 드물게 걸어오게 된 것이었지만.

‘한 번씩 이렇게 걸어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손을 잡고 온 것도 어쩐지 기분이 좋았고. 그의 온기나 심장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더 좋았다.

“마차? 저건 누구 마차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택에 다가갈수록 보이는 화려한 마차에 고개를 기울이자 페델리우스도 함께 의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손님이라도 오신 모양입니다.”

“손님? 아, 메디르가 왔나?”

“글쎄요. 그분일 수도 있습니다만…….”

페델리우스의 시선이 다시 마차를 한 번 훑는다.

나도 그를 따라 시선을 돌렸지만, 마차는 그냥 시장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마차였다.

저택의 문을 열기도 전에 먼저 안쪽에서 누군가 열었다.

“돌아오셨습니까? 주인님. 오시리아 님.”

페드로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깨를 덮었던 숄을 페드로에게 넘기자 그가 옅게 웃으며 받아들였다.

“아, 그래. 밖에 마차가 있던데 누가 온 건가?”

“……네. 드문 손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일단, 밖에 방치할 순 없어서 집 안으로 들였습니다만 화내지 않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페드로의 말에 재킷을 벗던 페델리우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가 페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려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펠!!”

우다다다 달려오는 소리와 동시에 무언가가 페델리우스에게 덥석 매달렸다. 그 충격에 페델리우스와 잡고 있던 손이 절로 풀렸다.

“…….”

어차피 집에 들어왔으니 풀어야 했던 손이지만, 어쩐지 기분이 나쁘다. 아니, 나쁜 수준을 넘어서 매우 더럽다고 표현해도 부족할 것 같았다.

“오랜만이야, 펠. 보고 싶었어.”

하나로 질끈 묶은 적갈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페델리우스의 어깨에 볼을 부볐다.

울컥, 순간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애써 주먹을 쥐었다.

깔끔하게 달라붙는 옷.

허리춤에 맨 검과 살짝 탄 듯한 피부.

그냥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검을 제법 잘 다루는 사람이라는 것을.

“프루니아.”

“정말, 오랜만이야.”

“그렇군. 그가 돌아왔으니 너도…….”

“오라버니를 만났어?”

그녀의 말에 페델리우스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묘하게 굳은 그 표정으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걸 눈치챈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프루니아라는 여자도 당황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방문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데.”

“어, 미안……. 너무 오랜만이라 보고 싶어서.”

머쓱하게 대답하는 여자를 바라보다가 뚱하게 페델리우스를 올려다봤다.

“페델리우스, 나 피곤해.”

“아, 죄송합니다. 방에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응.”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응접실에서 잠깐 기다려.”

덧붙이는 페델리우스의 말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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