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시리 님! 오셨어요?”
“메리!”
냉큼 메리의 품에 안겼다. 메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내 등을 토닥여준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페델리우스가 매우 괘씸했다.
‘근데 왜 괘씸하지?’
뚱한 기분이 드는 게 어쩐지 느낌이 묘하다.
페델리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나를 쳐다보고 있다.
“오시리아?”
“바쁘다며, 넌 가. 메리랑 올라갈 거니까.”
“모셔다드리고 가도 괜찮습니다.”
이상하게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술렁이는 기분을 애써 내리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페델리우스가 옅게 웃으며 나를 메리의 품에서 떼어냈다.
“올라가시죠.”
“응.”
근데 저 여자는 누구지?
페델리우스랑 친해 보이고. 펠은 또 뭐야?
‘페데리야’라는 별명은 너무 놀리는 것 같아서 그만뒀는데, 다른 걸 찾아야 하나?
게다가 만나고 싶었다는 건 또 뭐야?
옛날부터 아는 사이였나?
언제부터?
물론 내가 모르니 한참 전이겠지만. 심지어 페델리우스가 그 여자 이름도 불렀어…….
‘나는 이름을 불러달라고 몇 번을 애원해서야 간신히 불러주기 시작했으면서.’
제멋대로 쉴 새 없이 뻗어 나가는 생각을 붙잡기가 힘들었다.
고개를 저으며 다른 생각을 해보려고 했지만, 페델리우스의 품에 덥석 안기던 모습이 지워지질 않았다.
‘그 여자 누군지 물어봐도 되나?’
근데 만약 물어봐도 왜 물어보냐고 되물으면 할 말이 없다.
근데 애초에 나는 그게 도대체 왜 궁금한 거지? 잘 모르겠어.
“머리 아파…….”
생각했더니 머리만 아팠프다.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머리 아프십니까? 의원을 부를까요?”
아. 생각만 한다는 게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
눈동자를 도르륵 한 번 굴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닌데. 생각하기 싫었을 뿐이다.
“괜찮아. 쉬면 돼.”
“정말 괜찮습니까? 다른 의원이 불편하시면 메디르 님을 불러오겠습니다.”
‘그 사람 정말 바쁜 사람 아냐?’
막 부른다고 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닐 텐데…….
그래도 걱정해주는 게 좋다. 포스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슴이 괜찮아졌어.’
속이 울렁이고 이상하게 술렁거리던 느낌이 멎었다.
가슴께를 꾹꾹 누르다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정말 쉬면 돼.”
“……그렇습니까? 혹시 조금이라도 더 아프시거나 견디기 힘드시면 참지 마시고 곧바로 저나 메리를 부르십시오. 아니 사용인 아무나 불러도 괜찮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나를 침대 위에 앉히며 말했다.
응응,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걱정스러운지 그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럼 이제 주무십시오.”
“페델리우스. 나 아직 밥도 안 먹었어.”
“아. 식사는 메리보고 챙겨오라고 할 테니 이불 속에서 드십시오.”
“아니, 저기. 나 정말 괜찮아.”
“저도 오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말했다.
그게 아니라니까. 밑에 내려가서 먹어도 되는데 왜 여기에서 먹으래.
그런다고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눈을 모른 척할 수도 없고.
“페델리우스, 나는 정말 괜찮…….”
“사탕 두 개도 드리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손가락 두 개를 쫙 펴 보이며 말했다.
윽, 너무해.
게다가 나 이제 연기 안 하는데. 설마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생각하니 조금 의심스러워졌다.
그를 올려다보니 페델리우스가 어느새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있었다.
응……. 알고 있었구나.
느릿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모른 척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페델리우스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하고 덧붙였다.
그가 꿇고 있던 한쪽 무릎을 자연스럽게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쩍 그를 올려다봤다.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지만…….
‘느껴지는걸.’
계속 뚱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 내 시선을 느꼈는지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내렸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혹시나 페델리우스가 눈을 피할까 봐 냉큼 입을 열었다.
“페델리우스.”
“예, 오시리아.”
“너 괜찮아? 기분 안 좋아 보여.”
내 물음에 페델리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이 없던 그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처연한 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쿵, 심장이 바닥에 떨어진 줄 알았다.
무슨 말도 내뱉을 새 없이 입만 뻐끔거리자 페델리우스가 성큼 다가왔다.
곧장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그가 침대에 앉아 있는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꽈악, 힘주어 안는 손길에 눈이 절로 동그랗게 뜨였다.
페델리우스가 이랬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널브러져 있는 팔을 들어 페델리우스의 등을 토닥였다.
움찔, 그의 몸이 떨렸다.
“사실은…….”
“…….”
“별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났거든요.”
“보고 싶지 않은 사람?”
그 백작인지 망작인지 하는 사람인가 보다.
이름이 뭔지 기억도 안 난다.
칼비스였나? 칼리르? 콘……. 모르겠다. 어쨌든 그인 모양이다.
“네. 하지만, 방금 괜찮아졌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나를 끌어안은 팔을 냉큼 떼며 후다닥 물러났다.
도망가듯 떠나버린 온기에 순간 한기가 들었다.
“그래……?”
“네. 도리어 기분이 좋아졌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응. 그건 다행이네.”
좀 더 따뜻하게 해줘도 괜찮았는데. 묘한 아쉬움이 든다.
‘너무해.’
아무리 그래도 떨어진다고 말을 하고 천천히 떨어져도 됐을 텐데.
“품을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델리우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괜히 단어로 만드니 배가 간질간질한 기분이다. 고개를 젓자 그가 기분 좋게 웃었다.
또 웃으니 기분이 좋아서 나도 마주 웃어줬다.
“흠흠. 그, 그러면 저도 옷을 좀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응, 다녀와.”
손을 흔들자 페델리우스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곤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시-리-님!”
“메리.”
메리의 뒤에서 아콰가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콰가 메리보다 아주 조금 더 작다. 한 번 더 성장하면 분명 내 키는 물론이고 메리의 키도 훌쩍 넘을 게 분명했다.
쭈뼛거리는 아콰를 보다가 활짝 두 팔을 벌렸다.
“아콰, 오랜만이야.”
“……주인님.”
아콰가 달려와 훌쩍 품에 안겼다. 여전히 약간 서늘하고 부들부들한 촉감이다.
물을 만지는 것 같은 기분 좋은 감촉은 달라지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서 걱정했어.”
“죄송해요…….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요.”
“생각?”
“네.”
아콰가 제법 커진 덩치로 내 볼에 자신의 볼을 비볐다.
조금 커져서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느낌이 달라진 건 없다.
“한 번 더 자라면 엄청 커질 것 같아. 내 키도 훌쩍 넘는 게 아닐까?”
“헤헤, 그러면 제가 주인님을 이렇게 안고 다닐 수도 있어요!”
웃으며 말하는 아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너무 오랜만인 것 같기도 해서 이상한 기분이다.
그래도 여전히 불편하거나 어색하진 않다.
조곤조곤 말하던 아콰가 작게 웃었다.
‘조금 어른스러워졌나?’
표정이나 말투가 묘하게 어른스럽다.
목소리도 소프라노 톤에서 조금 낮아졌다. 이제야 자세히 봤지만, 정말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건 조금 어려울 거예요.”
예전이라면 짓지 않았을, 조금 부서질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아콰가 다정하게 대답했다.
확실히 어른이 됐다. 아콰는 뭔가 달라졌다.
어린아이처럼 맹목적이지도 않고 내게 붙어 있으려고만 하지도 않는다.
아콰가 손을 뻗어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줬다.
조금 멍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응? 왜?”
“자르딘의 왕께선 정령이 성인 크기까지 자란다고 했지만, 사실 여기까지만 자라는 게 일반적이랍니다.”
“왜?”
“정령이 인간의 성인 모습까지 성장하는 경우는 아주아주 드물어요. 물론 없지는 않지만요.”
“왜?”
내 질문에 아콰가 으음, 고민하듯 신음을 흘렸다.
소년이 된 아콰는 더 이상 고민하며 허공을 이리저리 날아다니지도 않았다.
그 느낌을 문득 깨닫게 되어버려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정령이 성장할 만큼 계약자가 성장하지 않기 때문일 거예요.”
“……어른이 된 아콰도 보고 싶은데.”
입을 툭, 내밀며 대답하니 아콰가 웃음을 터뜨렸다.
꺄르륵, 소리가 아니라 정말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웃음이었지만 말이다.
“아콰는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손을 뻗어 아콰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기분이 좋아야 할 텐데 그렇지만도 않은 듯했다.
옅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아콰가 메리의 뒤로 다가갔다.
“뭐 해? 인간.”
“…….”
“뭐 해? 메리.”
“정리정돈하고 있어요.”
“흐음……. 도와줄까?”
“괜찮아요. 아콰 님은 가만히 계시는 게 도와주는 거랍니다.”
메리가 아콰의 말을 매정하게 쳐냈다.
기분 나빠할 줄 알았던 아콰가 의외로 순순히 입만 뚱하니 내민 채 메리를 눈으로 좇았다.
나 이외의 인간에게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아콰가 메리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메리의 옆이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게 신기했다.
‘언제 저렇게 친해졌지?’
메리의 성격이 좋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아콰까지 저렇게 흐물흐물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메리 대단해.’
그래도 내가 밖에 있어도 아콰가 심심하지 않다는 건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메리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
“메리랑 아콰는 친구가 된 거야?”
“메리가 나중에 강에도 데리고 가준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걸 친구라고 하나요?”
“글쎄…….”
아콰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나도 친구라는 건 잘 모른다. 라비엘에게도 그냥 친구를 하자고 했더니 친구가 된 것뿐이고.
“너랑 나는 친구야? 인……. 메리?”
“아콰 님이 너랑 나를 우리라고 표현할 수 있게 되고 저를 자연스럽게 메리라고 부르시게 되면 저희는 친구가 되는 게 아닐까요?”
웃으며 하는 메리의 말에 아콰가 뚱하니 팔짱을 꼈다.
메리가 이상하게 퉁명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착각이겠지만.
‘아니면 원래 저런 성격인가?’
나한텐 한없이 다정하기만 하니까 잘 모르겠다. 그래도 아콰를 솔직히 상대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인간이라면 질색하는 아콰니까 걱정을 많이 했었다.
“메리, 나 뭐 물어봐도 돼?”
“네. 시리 님!”
정리를 하던 메리가 냉큼 다가와서 내 손을 붙잡았다.
아콰도 터덜터덜 걸어와 내 옆에 앉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입꼬리가 제멋대로 호선을 그렸다.
‘아, 행복해.’
아, 이게 행복이구나.
입술에서 절로 새어나가는 웃음을 막을 새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인데. 이것이 행복했다. 평생 이런 시간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다락방에서 벗어난 것조차 여전히 꿈만 같았다.
“좋아해, 메리. 아콰.”
와락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무언가가 품 안 가득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