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99)

* * *

“여긴 무슨 일로 왔어?”

“펠이 보고 싶어서 왔어. 이게 대체 얼마 만인지…….”

“나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응접실 맞은편에 앉으며 페델리우스가 대답했다.

프루니아가 쓴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햇볕에 탄 외모가 제법 가무잡잡했다.

그녀의 채 묶이지 않은 적갈색 머리카락이 이마로 흘러내렸다.

“그건 사고였어. 아직도 오라버니를 용서하지 못했어?”

“나는…… 그가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인정했지만, 그게 내가 그 녀석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가 되진 않아.”

페델리우스가 담담하게 얘기하더니 곧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그리고 내 앞에서 그 얘기를 꺼내지 마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프루니아가 주먹을 쥐었다.

몇 년간을 전장에서 굴렀다. 위험한 전장을 수없이 뒹굴었다.

하나뿐인 오라비를 혼자 둘 수 없어서 그녀도 검을 들고 함께 떠났다.

“정말, 그저 보고 싶었어. 다녀왔다는 말도, 수고했다는 말도 해주지 않을 거야?”

페델리우스가 그녀의 볼에 난 깊은 자상을 쳐다봤다.

왕국을 떠나기 전에는 없었던 상처였다.

페델리우스의 입매가 꽉 다물어졌다.

“……수고했다.”

“응. 고마워.”

프루니아가 옅게 웃었다.

이 한마디를 듣겠다고 세 시간을 넘게 집에서 기다렸다.

볼 수 있는 시간은 비록 아주 짧겠지만.

“아까 그 사람은 누구야? 굉장히 예쁘게 생겼던데.”

“황녀 전하시다. 지금은 자르딘 왕국의 신녀로 계시지.”

“아하, 저 사람이 소문의 그 사람이구나. 흐음……. 신의 가호를 받았다면서?”

“그래.”

프루니아가 호기심 섞인 눈으로 이런저런 질문은 던졌다.

페델리우스가 제법 성의껏 대답했다.

드물게도 대답을 길게 하는 그를 쳐다보다가 프루니아가 쓰게 웃었다.

누가 봐도 이것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표정이다.

여전히 무표정하고 담담하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이 목석같은 남자의 마음에 들어온 사람이 있을 줄이야.’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었는데…….

입 안이 쓰다.

프루니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웃어 보였다.

“그랬구나. 펠. 나 종종 찾아와도 돼?”

“뭔가 볼 일이라도 있는 건가?”

“소꿉친구의 집에도 못 놀러 오게 하는 거야?”

“…….”

페델리우스가 대답하지 않았다.

프루니아가 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뚱한 표정을 지어 보인 그녀가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기댔다.

“오라버니랑 싸운 거지 나랑 싸운 게 아니잖아.”

“……미리 허락을 받는다면.”

페델리우스가 결국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늘 없는 웃음은 페델리우스의 기억에 있던 어릴 적 모습과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고마워.”

프루니아가 대답했다.

오늘은 얼굴만 보러 온 것이었으니 더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챙겨 들었다.

“집 멋지게 재건됐네. 튼튼해 보여.”

프루니아의 말에 페델리우스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애써 웃음 지은 그녀가 벗어놨던 제복 상의를 다시 걸쳤다.

“많이 강해진 것 같구나.”

페델리우스가 상처 가득한 그녀의 팔을 보며 말했다.

프루니아가 금세 제복을 걸치며 말없이 웃었다.

“살아야 했으니까.”

“……그래.”

“난 갈게. 다음에는 그 황녀 전하라는 사람도 만나봐야겠어.”

“신녀님이시다.”

어깨를 으쓱인 그녀가 그대로 몸을 돌려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말없이 뒷모습을 바라보던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숙였다.

<네가! 감히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게 그렇게 맹세해놓고서!!>

떠오르는 기억에 그가 이마를 짚었다.

그다지 떠올리고 싶은 기억은 아니었다.

숨을 멈춘 페델리우스가 길게 내뱉고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해야지.”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페델리우스가 천천히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차 한 잔 내어주지 못한 삭막한 만남이었다.

* * *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네. 들어가자마자 문전박대당하고 울면서 나올 줄 알았더니.”

장난스러운 말투에 저택을 나서던 프루니아가 눈을 쭉 치켜떴다.

담장 옆에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던 콘니르가 몸을 바로 세웠다.

“내가 오라버니인 줄 알아?”

“아니지, 사랑스러운 여동생이잖아.”

손을 뻗은 콘니르가 프루니아의 적갈색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옅게 웃은 그가 프루니아의 손을 냉큼 잡아챘다.

“아직도 화가 많이 나 있더라.”

“그렇겠지.”

콘니르가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수긍했다.

두 사람이 느릿하게 거리를 걸었다.

흔치 않은 적갈색 머리카락의 두 남녀가 거리를 걷는 모습은 제법 눈에 띄었다.

프루니아가 말없이 그의 옆을 걷다가 입을 열었다.

“펠이 신녀를 데리고 있더라고.”

“아. 들었어. 제국의 황녀 말하는 거지? 물론, 곧 제국이 아니게 되겠지만. 아, 그래서 신녀는 어떻게 생겼어?”

“굉장히 예쁘던데? 머리카락은 보석인 루비처럼 반짝거리고, 눈은 벌꿀 같았어. 곱게 자란 티가 나더라.”

프루니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콘니르가 그녀를 슬쩍 쳐다보고는 낮게 웃었다.

“저주받은 황녀로 유명했다잖아.”

“그래도 황녀였잖아? 어디 갇혀 있었다고 해도 서민들 생활보다는 호화로웠겠지.”

“그러려나?”

콘니르가 느릿하게 되물었다.

프루니아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미 어둑해진 하늘은 완연한 저녁이 내려앉은 후였다.

“오라버니는 어떻게, 폐하와의 독대는 다 끝난 거야?”

“아, 복귀는 천천히 하라고 하더군. 자르딘 왕국이 제국으로 승격하는 큰 행사를 앞두고 각지에 흩어진 귀족들을 전부 불러 모으고 있는 모양이야.”

프루니아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숨을 삼킨 콘니르가 긴 숨을 뱉으며 주변을 구경했다.

얼마 만에 거리를 거니는 것인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다.

“내일은 신전에 가봐야겠어.”

“왜? 아, 설마…….”

“설마는 늘 사람을 잡는 법이지. 펠의 마음을 빼앗았다니 너도 궁금하잖아.”

프루니아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었지만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이십 년을 넘도록 함께해온 남매를 속일 순 없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좋아하지? 아직도.”

“…….”

“굳이 좋아하지도 않는 제복 상의를 입고 간 건 상처를 보여주기 싫어서잖아.”

“시끄러워.”

퉁명스러운 프루니아의 말에 콘니르가 쓴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실제로도 입맛이 썼다.

사랑하는 동생이 좋아하게 된 것이 하필이면 페델리우스였다.

그래서 하나뿐인 동생의 짝사랑을 온전히 응원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뭐가 미안해? 그건 어디까지나 사고였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솔직히 아직도 뚱한 펠이 나쁜 거야.”

그래도 오빠라고 제 편을 들어주는 프루니아를 보며 콘니르가 낮게 웃었다. 그가 손을 들어 프루니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도 나보고 수고했다고 했어.”

“멋없는 녀석이군. 이렇게 매력적인 여자에게 하는 말이 딱딱하기 그지없어.”

“상처투성이의 여자를 누가 좋아한다고.”

프루니아가 제복 상의 아래로 보이는 제 살결을 쳐다봤다.

남들처럼 새하얗지도 않고 가무잡잡하다. 여기저기 베이고 찔린 상처로 가득했다.

‘게다가 얼굴도…….’

프루니아가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으아아아! 아직도 얼굴에 상처 낸 놈을 너무 곱게 죽인 건 아닌가 후회가 돼!”

“음. 그런 걸 아쉬워하는 부분이 일단 네가 콤플렉스라고 생각하는 부분보다 더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아, 흉터를 없애는 방법은 없겠지?”

“안 듣고 있구나.”

콘니르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가망이 없어 보인다고는 생각하지만 이렇게 좋아하니 차마 그만두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일이었다.

“세상엔 그런 강철로 된 목석보다도 더 괜찮은 녀석이 많아.”

“시끄러.”

프루니아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직 포기 안 했어. 제대로 고백 한 번 못 해봤는데 차인 것처럼 말하지 마.”

“그래, 그래.”

“아!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프루니아가 콘니르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질질 끌려가면서도 콘니르는 유쾌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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