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99)

* * *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식사를 하고 옷도 갈아입었다.

물론 전부 메리의 도움을 받았지만.

어쨌든 그러고 침대에 앉아있으려니 몸이 노곤했다.

“페델리우스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으응…….”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하다. 졸린다. 라비엘이 입에 담았던 수업을 생각하면 사실 오늘은 신전에 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래도 안 가면 심심하고.’

달칵, 열리는 문을 쳐다보며 하품을 했다.

“슬슬 출발할 시간인데……. 피곤하십니까?”

페델리우스가 훌쩍 다가와 물었다. 피곤한 것 같진 않지만 졸리다.

그래도 페델리우스는 왠지 쉬라고 할 것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가자.”

“피곤하시면 가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신전에는 제가 따로 말을 전해도 괜찮으니까요.”

“아니, 라비엘도 심심할 거고.”

침대에서 내려오며 대답했다.

방을 나가려고 걸어가는데 페델리우스가 따라오는 기척이 없다.

걸음을 멈춰 뒤를 돌아보니 그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그래?”

“아뇨, 아닙니다.”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젓고는 곧장 내 옆에 따라붙었다.

언제나처럼 나를 먼저 말 등에 앉힌 페델리우스가 뒤에 올라타 고삐를 붙잡았다.

페델리우스의 몸에 등을 기대며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꼿꼿하게 굳은 페델리우스가 고삐를 잡아당겼다.

“페델리우스.”

“예.”

“나중에 카울란이랑 부하들 보러 가도 돼?”

“……그것들은 봐서 뭐 하려고 하십니까?”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 제법 걱정을 많이 해줬다고 들었으니까.

본인이 말해줘 놓고는 전부 까먹은 듯 구는 페델리우스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은 나보고 수업을 들으래. 말도 안 되지 않아?”

“오시리아는 이제 신녀님이시니까요. 행사에도 한 번씩 얼굴을 보이셔야 할 겁니다.”

“친구도 많이 생기려나?”

라비엘은 충분히 즐거운 친구였다.

“흠…….”

하지만……. 의외로 페델리우스만큼 깐깐하단 말이야. 게다가 남자고. 여자 친구가 필요해.

물론 배부른 소리라는 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페델리우스.”

“네.”

“오늘도 데리러 올 거야?”

“네.”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대답에 조금 질렸다.

몇 번을 왔다 갔다 한 길이라 이제 혼자 다닐 수 있을 것 같은데…….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오늘은 혼자 가면 안 돼?”

“위험해서 안 됩니다.”

“호위기사랑 같이 갈게!”

아, 그러면 굳이 혼자 돌아가는 의미가 없어지나?

멍청한 질문을 했다고 한마디 들을 줄 알았던 페델리우스는 예상외로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호위기사보다 제가 더 강합니다.”

“어? 응. 그렇지?”

일단 네가 호위기사들 대장님이니까.

“네.”

당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페델리우스를 보다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신전 앞으로 마중 나온 라비엘이 보였다.

‘라비엘도 날 애 취급하는 건가?’

그도 보면 매일 마중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첫날에야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벌써 며칠이나 됐는데.

“어머, 신녀님이 오셨어.”

“얘, 조용히 해.”

“아, 어쩜 저렇게 아름다우실까.”

“대신관님과 서 계시는 모습이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대신관님과 신녀님이 동시에 계시는 걸 볼 수 있을 줄이야…….”

“이번 황제 폐하는 분명히 신이 내려주신 분이 분명해!”

언제나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신도들이 웅성거렸다.

그들 나름대로는 분명 조용히 대화하려고 애쓰는 것 같은데, 다 들리는 게 문제다.

그것도 정말 여과 없이 들렸다.

“오셨군요, 오시리아. 혹시나 수업 듣기 싫어서 도망이라도 치신 줄 알았어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말에서 냉큼 뛰어내렸다.

“잠……!”

“응?”

멀쩡히 착지하고 난 후에 고개를 돌리자 그가 놀란 표정을 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살짝 질려 보이기도 하는 표정에 뛰어내린 내가 도리어 민망해졌다.

“페델리우스?”

“아. 예…….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페델리우스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말했다.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상하게 내가 다치는 걸 무서워한다.

“나는 멀쩡해. 말없이 뛰어내려서 놀랐어?”

두 팔을 쫙 벌려 보이자 그가 놀란 눈을 깜빡이더니 설핏, 웃음을 흘렸다. 마주보며 함께 웃었다.

손을 뻗어 페델리우스의 어깨를 꾹 눌렀다.

페델리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깨 너무 뻣뻣해서 기댈 때 힘들어.”

“…….”

“그리고,”

흠흠.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페델리우스의 어깨를 한 번 더 꾹 눌렀다.

페델리우스가 순순히 허리를 굽혀 몸을 낮췄다.

“라비엘보단 네가 더 좋아.”

하도 라비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 같기에 작게 속삭였다.

페델리우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사과만큼이나 빨갛다.

“……저도 그렇습니다.”

“와, 메리보다도?”

“예.”

“영광이야. 조심히 다녀와!”

“……예. 다녀오겠습니다.”

내 말에 페델리우스가 어딘가 못마땅한 얼굴로 대답했다.

의아함에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잠시, 그가 곧 말에 올라탔다.

‘뭐지?’

묘하게 뚱한 표정 같았는데. 훌쩍 올라가 버려서 등밖에 안 보인다.

잘 가라고 인사를 해주고 나도 몸을 돌렸다.

라비엘이 그제야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굉장히 당신을 잘 보살피네요. 오시리아를 걱정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예요.”

“착해서 그래.”

냉큼 몸을 돌리며 신전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내 대답에 라비엘이 고개를 옆으로 슬쩍 기울였다.

“제가 알기로 페델리우스 경은 그다지 착하지 않을 텐데요?”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쟤 미련하게 착해. 뭐랄까…….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말 잘 듣는 강아지 같아.”

페델리우스를 떠올리며 라비엘에게 대답했다.

물론 아주 작은 목소리로.

혹시나 누가 듣고 페델리우스한테 쪼르르 달려가 일러버리면 안 되니까 말이다.

“그런가요?”

라비엘의 표정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공부하기 싫다.”

“아직 한 번도 해보지 않으신 거 압니다.”

“공부는 아콰한테 지겹도록 배웠단 말이야.”

“아콰가 누구입니까?”

“아. 물의 정령이야. 내 소중한 가족인데, 요즘은 메리랑 붙어 다니더라고. 솔직히 조금 기분이 이상해.”

뚱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물론 조금 소홀했다는 건 나도 인정하는 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훅 멀어져간 기분은 지울 수가 없었다.

‘아콰가 사과하긴 했지만…….’

멀어진 거리가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내가 싫어진 걸까?”

“고서에 따르면 정령과 주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라고 하던데 틀린 건가요?”

“그랬던 것 같은데……. 이제는 솔직히 모르겠어.”

훅 멀어져간 아콰는 이제 내가 필요 없는 듯했다.

메리랑도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니까.

“물론 나도 다른 사람들이랑 지내긴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또 내게 변명할 거리는 없다.

울컥울컥 치솟는 서운함이 그저 갈 곳을 잃고 멋대로 방황할 뿐이다.

“그 기분, 공부를 통해 지워보는 것도 좋습니다.”

“얼마나 공부해야 돼?”

“음, 하루에 세 시간에서 네 시간 정도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은 시간은 지금처럼 자유롭게 계시면 돼요.”

“내가 공부하는 동안 넌 뭘 할 건데?”

“저는……. 화단이나 가꿀까요?”

고민하던 라비엘이 화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파릇파릇하게 자란 꽃들이 퍽 싱싱해 보인다.

그러나 내 기분은 좋지 못했다.

“나는 공부하는데 너는 화단을 가꾼다고? 치사하잖아.”

“저는 이미 어릴 적에 다 배운 것들이라서……. 화단에서 다과를 먹으며 기다리고 있을게요. 오시리아.”

활짝 웃는 라비엘의 뒤로 순간 시커먼 날개가 보인 것 같기도 했다.

손등으로 눈을 한 번 비비고 뚱하게 그를 쳐다봤다.

“여기에 계셨습니까? 라비엘 대신관님.”

“아. 알렉 신관.”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보이는 노인이 나와 눈을 마주치자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하얀 신관복을 입은 그의 옷은 라비엘의 것보다는 조금 덜 화려했다.

“마침 잘됐네요. 오시리아. 그는 알렉 신관입니다. 이번에 당신의 교육을 맡게 된 다섯 신관 중 한 분이죠.”

“다섯 명이나 돼?”

“네. 각자 시간을 조금씩 할애해서 하루씩 돌아가며 이런저런 것들을 알려줄 거예요.”

라비엘의 설명이 끝나자 알렉 신관이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부드러운 표정은 제법 인자했다.

‘메디르랑 비슷한 느낌이네.’

알렉 신관이 살짝 허리를 굽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알렉산드리오 맥시멈이라고 합니다. 짧게 알렉 신관이나 알렉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셔도 괜찮습니다.”

“안녕. 음, 알렉 선생님.”

“네. 신녀님을 만나 뵙게 되어 대단히 반갑습니다.”

그가 옅게 웃었다.

인자한 웃음을 쳐다보다가 조금 떨떠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절한 사람들은 역시 불편해.

‘아니, 할아버지들이 싫은 건가.’

어쨌든 아바마마 또래의 사람들은 전부 싫다.

‘아바마마……. 그러고 보니 그 뒤로 아무런 얘기도 전해 듣지 못했는데.’

생각에 잠긴 채 느릿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물어볼 수도 있지만, 또다시 저주하는 말을 듣는다면…… 그저 버틸 수 없게 될 것만 같았다.

“근심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머리 위로 들리는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알렉이 웃으며 물은 듯했다.

“아니. 음, 나도 반가워.”

“수업할 곳을 봐두었는데 어떠십니까? 저랑 같이 자리를 옮기시는 건.”

“음…….”

슬쩍 라비엘을 쳐다보니 라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괜찮다고 하니 괜찮은 사람이겠지만.

“그래.”

“잘 부탁해요. 알렉 신관.”

“여부가 있겠습니까.”

짧게 고개를 숙인 그가 앞장섰다. 신전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숙인 채 걸었다.

쿵,

“……어?”

누군가와 부딪쳤다. 무너지는 몸 중심에 뒤뚱거리며 팔을 허우적거렸다. 필사적으로 파닥거리는 나를 누군가 붙잡았다.

“어이쿠, 괜찮습니까?”

“아. 응.”

앞을 안 보고 다닌 제 잘못이다.

이마를 꾹 누르며 몸을 바로 했다.

슬쩍 고개를 들자 붉은 눈동자가 가장 먼저 눈에 사로잡혔다.

제법 눈에 띄는 젊은 남자였다.

왼쪽 눈에 세로로 그어진 자상이 눈에 들어왔다.

“넘어지지 않으셔서 다행이네요. 신녀 님.”

“날 알아?”

“유명하니까요. 신도라면 누구나 다 알 테죠.”

제법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남자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녀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알렉 신관이 가다 말고 돌아온 듯 내게 물어왔다.

붉은 눈의 남자를 잠깐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잡아줘서 고마워. 가자, 알렉 선생님.”

남자를 스쳐지나 다시 신전을 향해 걸었다.

“넘어지셨나요?”

“아니, 안 넘어졌어.”

살짝 뒤를 돌아보니 붉은 눈의 남자는 묘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이상한 사람이네.’

알렉을 따라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알렉은 나를 도서관과 비슷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수업 첫날이기도 하고, 신녀님께서는 별로 수업이 내키지 않으시는 것 같으니 오늘은 서로 자기소개만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자기소개? 나는 모르겠지만, 알렉은 이미 했잖아.”

그것으로 시간을 때우는 건 내 기준에서는 매우 불가능한 일이었다. 서로 이름을 한 번씩 말하면 끝나는 소개가 아니던가.

고개를 기울이는 내게 알렉은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음, 일단 성함을 알려주시겠습니까?”

“오시리아. 편한 대로 불러도 돼.”

“네, 오시리아 님. 그러면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신가요?”

“좋아하는 거? 음…….”

솔직히 딱딱한 빵이랑 썩은 내 나는 수프만 아니면 뭐든지 좋아서. 눈동자를 굴리다가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난 다 좋은데? 싫은 거 없어.”

“그렇습니까? 그럼 이제 오시리아 님께서 제게 궁금하신 걸 물어보십시오.”

“알렉한테 궁금한 거?”

없는데. 이제 막 만난 사람한테 궁금한 게 있을 리가 있나.

사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라비엘이 소개해줘서 만난 것뿐이었고.

“네, 저에 대해서여야 합니다.”

빙그레 웃는 그 표정을 바라보다 알렉을 뚫어져라 살폈다. 뚱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신음을 흘리기도 하고 여기저기 몸을 비틀며 살피기도 했다.

“아기 있어?”

“아기요? 제 자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아기. 귀엽잖아. 있으면 보여주라.”

가볍게 던진 말투에 그가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알렉이 고개를 젓고는 입술을 벌렸다.

“아쉽게도 손주는 없습니다.”

그는 말없이 웃어 보이고는 금세 다른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렸다.

한참을 대화하고 나니 불편했던 기색이 싹 사라졌다.

사실 중간부터는 내가 답답해 보였는지 느긋하게 신전을 산책하며 대화를 나눴다. 생각보다 알렉은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고 나보다도 훨씬 현명했으며 불편하게 하지도 않았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응. 알렉이 사실은 개랑 물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게 돼서 신기했어.”

“아. 그래도 비는 좋아합니다. 고여 있는 물을 좋아하지 않는 것뿐이지요.”

“그래? 내려줄까?”

내 물음에 알렉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정말 놀란 것처럼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주름진 이마를 꾹 누르며 입을 열어왔다.

“지금 오시리아 님께서 내려주시겠다는 말인가요?”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다시 한번 물어오는 알렉에게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이후론 거의 힘을 쓰지도 않았고.’

지쳤었기에 한동안 쓰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었다.

그래도 보고 싶다면 내려주지 못할 것도 없다.

“신녀라면서. 신녀다운 일은 하나도 못 해줬잖아.”

“당신께옵서 힘드시지 않으시다면, 제게는 영광이지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 힘을 발하기 위해 두 손을 모았다.

아콰가 하는 것처럼 푸른 기운을 손바닥 위에 모으자 알렉이 “오오!” 감탄사를 내뱉었다.

알렉의 감탄사에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실 모여들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푸른 기운이 워낙 밝아야지.’

은은한 이 주먹을 세 개 모은 것만큼 모이고 나서야 그것을 살짝 하늘로 띄워 올렸다.

손등 위의 문양이 저를 알아봐달라고 소리치듯 환하게 빛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제법 모여있었다.

신도들은 물론 신관의 옷을 입은 신관이나 시녀들도 보였다.

제법 먼 곳에서 라비엘이 놀란 눈을 하는 것도 보였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그가 나를 발견하곤 냉큼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다.

쿠르릉!

하늘이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뱉듯 낮게 울부짖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것을 지켜봤다.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오오!!”

“신이시여!”

알렉이 느릿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것을 따라 신도들과 다른 시녀들도 마찬가지로 몸을 한껏 낮췄다.

“아니…….”

이걸 바랐던 건 아니다.

당황한 눈으로 눈동자를 굴리고 있으니 라비엘이 엎드린 신도들을 뚫고 내 옆에 섰다.

“이렇게 일을 멋대로 벌이기가 있는 건가요? 오시리아.”

라비엘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냉큼 고개를 저었다.

그럴 마음은 없었다.

“알렉이 비는 좋아한다기에…… 그저 내려줄까? 하고 물어본 것뿐이야.”

“그렇군요. 이렇게 신의 힘을 목격하는 건 저도 처음입니다. 대신관을 하길 잘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대체 왜 해야 하는지 몰라서 무척 짜증 나고 화났었거든요.”

라비엘의 얘기에 눈이 절로 동그래졌다.

누가 봐도 대신관의 모범 위의 모범 같은 라비엘이다.

처음부터 천직이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덕분에 이 광경을 몸을 숙이지 않고 고개를 든 채 당신의 옆에서 볼 수 있게 됐어요.”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어. 그렇게 감탄할 거 없다고.”

뚱하게 말을 내뱉었다.

다들 무릎을 꿇었고 심지어 개중엔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엎드린 사람도 있었다.

너무 대놓고 한 모양이다.

‘그래도…….’

단 한 번도 이렇게 대놓고 능력을 쓴 적이 없다.

숨기기에 바빴고 들키면 기분 나쁜 것으로 취급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건 참, 감사한 말이네요.”

웃는 라비엘은 여전히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비가 내리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먹구름이 하늘을 완전히 뒤덮고 다시 한번 쿠릉- 하늘이 울부짖었을 때 툭,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비는 순식간에 굵은 빗방울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여기저기서 울음 섞인 감탄사가 들렸다.

익숙하지 않은 찬양에 몸이 절로 굳어졌다.

“당신이 이 나라에 와줘서 다행이에요. 오시리아.”

라비엘의 말에 툭, 입술을 내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취급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에 울고 있는 신도들이 그다지 좋게 보이진 않았다.

라비엘은, 잘 모르겠지만.

라비엘이 손을 뻗어 내 오른손을 붙잡았다.

아직도 옅은 푸른빛을 내는 손등을 바라보다가 살짝 들어 올렸다.

허리춤까지 들어 올린 손등에 라비엘이 허리를 굽혀 입을 맞췄다.

성적인 의미도 아니었고, 오래 닿아있던 것도 아니다.

그저 경건한 자세로 잠시 닿았다가 떨어져 갔다.

“당신의 앞길에 축복이 있기를. 그대에게 경의를 표해요.”

“……라비엘?”

쑥스러움에 볼을 긁적이며 그를 불렀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는 시야를 조금 가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시리아.”

잠시 그러고 있는 동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페델리우스다.

어색한 가운데 제법 반가운 목소리였기에 표정이 절로 밝아졌다.

“페델리우……스?”

세 걸음 정도의 거리를 사이에 둔 그가 축 늘어진 머리카락을 한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비를 맞았으니 머리카락이 늘어진 건 당연하지만…….

라비엘이 내 손을 조심스럽게 돌려놓고 손을 떼어냈다.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네요. 비를 너무 맞았어요, 오시리아.”

“어, 아니. 괜찮아. 이건 금방 말릴 수 있고…….”

페델리우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라비엘에게 대답했다.

평소였으면 냉큼 옆으로 다가왔을 페델리우스가 어쩐지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페델리우스?”

다시 한번 그를 부르자 그가 그제야 눈을 한 번 깜빡이며 나를 제대로 쳐다보았다.

“예, 오시리아.”

“나 데리러 온 거지?”

“네.”

무뚝뚝한 대답이 익숙지 않다.

페델리우스는 말을 덧붙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내게 훌쩍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불안해진 건 내 쪽이었다.

냉큼 엎드린 신도들 사이를 지나 페델리우스에게 다가갔다.

“그럼 가자. 라비엘, 내일 봐.”

대충 손을 흔들고 페델리우스의 앞에서 그를 올려다봤다.

“가자, 페델리우스.”

“……알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제 옷을 벗어 내 어깨 위에 걸쳐줬다.

사실 젖은 건 매한가지였지만, 그의 온기에 조금 따뜻한 것 같기도 하다.

‘힘이 없어 보이는데.’

왜 그러지?

또 그 콘샐러드 같은 놈이랑 무슨 일이 있었나?

이름을 잊어먹었는데 생각나는 게 콘이라는 단어밖에 없다.

그래서 그냥 콘샐러드로 부르기로 했지만.

슬쩍 눈치를 살피다 페델리우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페델리우스.”

“예.”

“하늘, 날아볼래?”

“……예?”

“하늘 말이야. 예전에 나처럼 하늘 날 수 있는데. 날개 만들어줄게.”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밖에 없으니. 하늘을 날면 기분이 좀 풀리지 않을까.

쏴아아아아-

비가 내리기는 하지만…….

페델리우스가 옅게 웃었다.

굵었던 빗줄기가 서서히 가늘어지고 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페델리우스의 등에 손을 얹었다.

뚝.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또 굳었어.’

빗자루마냥 뻣뻣해진 페델리우스가 의아한 기색을 담아 나를 쳐다본다.

“짠.”

이번에는 이그니 때처럼 실패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발을 떼 하늘을 날아오르며 페델리우스를 붙잡았다.

“얼른!”

“저, 저기! 이건 어떻게 쓰면 됩니까?!”

“음, 손을 파닥파닥하는 것처럼 날개를 파닥파닥한다고 생각하면 돼.”

양손을 파닥거리며 설명했다.

페델리우스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눈을 쓱 감아버렸다.

두리뭉실한 내 설명에도 페델리우스는 어쨌든 따라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렇게 한 오 분을 낑낑거린 후에야 페델리우스의 날개가 조금씩 퍼덕거리기 시작했다.

‘이그니는 그래도 금방 했는데.’

페델리우스는 이그니보다 응용력이 조금 떨어지는 모양이다.

‘비밀이지만.’

이런 생각 하는 거 알면 분명 뚱한 표정을 하겠지.

“와, 잘했어!”

페델리우스가 날아올랐다. 손뼉을 치며 칭찬을 했다. 칭찬하면 사람은 더 잘한다고 하니까.

“우리 페데리 잘하네!”

한동안 부르지 않았던 별명을 꺼내 어깨를 두드리니 페델리우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감사합니다.”

그러면서도 매우 성실하게 감사 인사까지 한다.

나 같으면 하지 말라고 소리쳤을 것 같은데.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페델리우스가 내 옆까지 날아올랐다.

한 번 성공하고 나니 다루기 쉬운지 페델리우스는 생각보다 금세 익숙해졌다.

“어때?”

“신기합니다.”

그가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혹시나 떨어질까 맞잡은 손의 열기가 빗속에서도 제법 선연하게 느껴졌다.

페델리우스의 손을 붙잡은 채 빗속을 날아다녔다. 손에 잡히는 온기가 있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들뜨는 기분이다.

“당신은 항상 이런 풍경을 보셨군요.”

페델리우스가 제법 크기가 줄어든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감탄 섞인 목소리에는 아까 같은 묘한 어두움이 없었다.

“응, 되게 장난감 같지 않아?”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묻자 그가 옅게 웃었다. 축 늘어진 머리카락이 제법 엉망이다.

“페델리우스.”

“예.”

“나 안아줘.”

내 말에 그가 제법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오랜만에 페델리우스에게 안기고 싶었다.

‘예전에는 싫다고 해도 덥석덥석 안아 올리더니…….’

요즘은 묘하게 닿아오는 일도 줄었다.

공중에 뜬 채 냉큼 양팔을 활짝 벌렸다.

뚱한 표정을 짓자 페델리우스가 어색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

“…….”

물론 이렇게 안아주는 것도 안아주는 거지만. 오랜만에 닿아서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닌데.

“안아서 집까지 데려다줘.”

“아.”

확실히 설명하니 그제야 알아들었는지 페델리우스가 황급히 끌어안은 몸을 떨어뜨렸다.

귀까지 벌게진 그가 젖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훌쩍 다가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페델리우스의 목에 팔을 휘감으며 낮게 웃었다.

“가자.”

“알겠습니다.”

페델리우스는 나를 안아 들고도 무거운 기색도 없이 곧장 날았다.

처음에는 삐걱거리더니 좀 익숙해지니 오히려 이그니보다 훨씬 더 잘 날아다니는 것 같다.

“사실은…….”

“응?”

“대신관과 제법 친한 듯 보여서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라비엘? 라비엘은 친구니까.”

점점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있었다. 시야가 한결 또렷해졌다. 이그니의 어깨에 얼굴을 비벼 물기를 닦아냈다. 사실 별 소용은 없었지만.

“그렇지만 나는 페델리우스가 더 좋아.”

의아함에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솔직히 라비엘이냐, 페델리우스냐 누군가 묻는다면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페델리우스였다.

내 말에 페델리우스가 옅게 웃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저택에 도착해서 놀란 메리와 페드로가 커다란 수건을 들고 뛰쳐나올 때까지도.

“메리한테 잔뜩 혼났어…….”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후끈후끈하게 달아오른 몸을 끌고 나와 침대에 풀썩 엎드리며 툴툴거렸다.

페델리우스도 제법 지친 표정으로 탁자 앞에 앉아있었다.

“페드로는 사실 악마가 인간이 된 게 아닌가 종종 생각합니다.”

페델리우스가 진지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전에 없이 새하얗게 질린 페델리우스는 매우 신선했지만…….

“페드로는 가끔 무섭지만 친절한데.”

“그건 아마도 오시리아 한정일 겁니다.”

페델리우스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진지한 페델리우스는 처음 봐.

“그러니까 절대 페드로가 화낼 일을 만들지 마십시오. 화가 나면 정말……. 정말로…….”

더듬거리는 페델리우스의 입이 끝내 마지막 말을 내뱉지 못했다.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페드로는 절대 화나게 하면 안 되겠다.

비가 그쳤는지 하늘의 먹구름이 걷혔다.

어느새 저녁이 되어 커다란 보름달이 창문에 꽉 차 보였다.

“이쪽에 와서 앉으십시오. 오시리아.”

페델리우스가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침대에 엎드린 채 뒹굴다 말고 그를 쳐다봤다.

‘반짝반짝 빛나네.’

뒤에 달이 크게 떠 있어서 그런가?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곤 페델리우스의 맞은편에 걸어가 앉았다.

“대신관보다 제가 더 좋으십니까?”

페델리우스가 문득 내게 물어왔다.

가만히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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