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99)

별로 고민할 필요도 없고 집에 들어오기 전에도 말했었고.

“메리랑 저 중엔 누가 더 좋습니까?”

“어? 음…….”

메리한텐 메리라고 했는데 페델리우스한텐 페델리우스라고 해줘야 하나? 도르륵 눈을 굴리다 애써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네가 더 좋아.”

메리도 좋지만 그래도 정말 의지할 수 있는 건 페델리우스라고 생각한다.

“정말입니까?”

“응. 너는 특별해. 그러니까 메리보다 더 좋아. 근데 이건 왜?”

물론, 어떤 의미에서 어떻게 특별한지 잘 설명할 순 없지만…….

조금 머뭇거리며 내뱉은 말에 페델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앉아 있는 내 시선에 맞춰 몸을 굽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는 오시리아가 가장 좋습니다.”

“응? 나도 좋다니까?”

“메리보다도, 페드로보다도, 폐하보다도 당신이 더 좋습니다.”

담담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어……?”

멍청한 표정으로 되묻자 그가 옅게 웃었다.

어쩐지 평소처럼 다정한 눈빛인데도 느낌이 달랐다.

일렁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미간을 좁혔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빛이 어쩐지 퍽 버겁다.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당신이 대신관에게 웃어주는 게 싫었습니다.”

“그건 그냥…….”

팔을 뻗은 페델리우스가 내 오른손을 붙잡았다.

라비엘이 살짝 입술을 대었다가 떨어진 곳에 페델리우스가 입을 맞췄다.

라비엘과는 달리 뜨겁게 닿아오는 입술에 몸이 절로 파드득 떨렸다.

전류가 흐르는 듯 찌릿 거리는 느낌에 굳은 채 페델리우스를 쳐다봤다.

“저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입술을 뗀 페델리우스가 나를 올려다봤다.

“눈이 있는데 어떻게 너만 봐……? 너만 보려면 여기에 계속 갇혀 있어야 하는걸?”

애써 웃으며 입을 열었다.

페델리우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없이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처음엔 단지 감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당신에게 검을 겨눌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렸지만, 그래도 제겐 폐하가 더 중요했으니까요.”

“……?”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니 당신이 아픔을 한껏 끌어안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저 지켜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상처받은 사람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무른 성격이니까요.”

“페델리우스?”

갑작스럽게 시작된 말에 눈이 절로 동그래졌다.

추억이라도 되짚어보자는 이야기인가 싶었지만 그의 눈이 제법 진지해서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러다 당신이 제게 웃어주셨습니다. 겁에 질린 상처투성이의 표정으로.”

페델리우스의 말에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진짜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습니다. 당신의 웃음이 매일매일 보고 싶어졌습니다.”

항상 내 앞에서는 미소를 띠고 있던 페델리우스의 표정이 떠올랐다.

무표정하던 페델리우스가 항상 나만 보면 웃었다.

‘그게 좋아서 나도…….’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니 페델리우스가 담담하게 다시 입술을 열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순간부터 제 시선이 당신을 좇고 있었습니다.”

“페델리우스, 잠, 잠깐만.”

쿵쾅거리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호흡이 빨라질 것 같아서 손으로 얼굴이라도 쓸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다 됐고 일단 귀라도 막고 싶어.

하지만 붙잡힌 손을 페델리우스가 순순히 놔주지 않았다.

그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대신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시리아, 당신만의 기사가 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떠난다고 하실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습니다. 당신을 다시 품에 안았을 때 세상에 태어나 받은 운을 다 썼다고 생각했습니다.”

담담하게 내뱉는 말은 껍질을 깐 과일이 속살을 전부 드러내 보이듯 직선적이고 순수하게 들렸다.

그런데도, 웃고 있음에도 페델리우스는 어쩐지 서글퍼 보였다.

“이곳에서 행복해하는 당신을 보면 행복해야 할 텐데, 당신의 웃음을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는 추악한 제가 있었습니다.”

“…….”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함부로 입을 열 수도 없었고 그의 건조한 고백에도 아무런 위로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내가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고백이었다.

어째서 웃고 있는데도 저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인지, 왜 그가 나를 붙잡은 손이 떨리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단지 그를 바라보며 멍하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페델리우스. 왜…….”

왜 그런 말을 해?

미처 목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그를 쳐다봤다.

울 것 같았다.

물밀듯 밀려오는 그 감정이 형용할 수 없이 복잡해서.

그저 그래서,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그녀가 알지 못하는 감정의 파편이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있자 페델리우스가 다시 입을 열어왔다.

“저는 욕심쟁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오시리아.”

너만큼 청렴결백하고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웃으며 전하려던 말이 차마 가볍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억지로 끌어올렸던 입술이 다시 축 처졌다.

그저 가볍게 웃어주면 좋을 텐데.

내 맘대로 쉽게 되지 않는 것에 속이 쓰렸다.

애써 입술을 여문 채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당신이 저만 봐주길 바라게 됐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시선을 마주친 채 말했다.

“제게만 웃어주시길 바라게 됐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담담했다. 그러나 확실히 귀에 틀어박힐 정도로 정확한 발음이었다.

“긴 시간 갇혀 지내서 자유를 지독하게도 갈망했을 당신을 숨겨두고 혼자만 보고 싶다고 생각해버렸습니다.”

일그러지는 페델리우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할 수만 있다면 여기서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었다. 이 시간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었다.

페델리우스가 이런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기사가 되어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당신을 마음에 담고 말았습니다.”

잡히지 않은 손을 천천히 뻗었다가 허공에서 주먹을 그러쥐었다.

페델리우스의 짙은 밤하늘 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내게 닿았다.

그는 눈을 피하지도, 심지어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목이 꽉 멘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억지로 뻣뻣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오시리아. 제가 감히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허락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억눌린 듯, 쥐어짜듯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에 심장이 아팠다.

쿵, 심장이 바닥에 떨어져 내린 듯했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누군가에게 붙잡힌 듯 눈꺼풀을 한 번 깜빡이는 것도 힘들었다. 잠깐 머릿속의 생각조차 멈춘 것 같았다.

“무슨, 소리야?”

눈을 깜빡였다. 나도 페델리우스를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이라는 단어는 무언가 다른 건가?

왜, 평소에 듣던 말과는 다르게 지금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거지?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잔뜩 번져나갔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꾹 누르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나도 너 좋아해. 페델리우스 좋아한다고 계속 얘기했잖아.”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페델리우스가 조곤조곤 설명했다. 뭐가 어떻게 다르다는 건지 나로선 알지 못하겠어. 고개를 젓자 페델리우스가 옅게 웃었다.

그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한쪽 무릎을 꿇으며 나와 시선을 맞췄다.

페델리우스가 손을 붙잡아 내 손가락 끝에 입술을 맞췄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손등에 입을 맞추고, 손목에 입을 맞춰왔다.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의미는…….”

손목에서 입술을 뗀 페델리우스가 숨이 닿을 정도로 코앞까지 다가와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한 곳까지 바싹 얼굴을 가까이 댔다.

“여기뿐만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마저 탐하고 싶고…….”

그의 손가락이 내 아랫입술을 살짝 꾹 누르곤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페델리우스는 결코 멋대로 입술에 입을 맞추지 않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로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의 손이 내 허리를 부드럽게 훑고, 허벅지를 훑고, 은밀한 곳을 아슬아슬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손을 대진 않았지만, 얼굴이 확 붉어졌다.

“오시리아의 모든 것들에 손을 대고 싶고 그저 당신을 다 가지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아…….”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의미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지금 무언가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피부로도 느껴졌다.

“내가, 가지고 싶어?”

“네. 당신을 품에 가둬두고 싶습니다.”

페델리우스의 입에서 진심이 터져 나왔다. 그가 다시 옅은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당신은 앞으로도 훨훨 날아가야 할 사람이니까. 지금껏 누리지 못한 것을 전부 누려야 할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밝힐 마음은 없었습니다.”

괴로운 듯 일그러진 그의 표정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혼자서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고 짐작되지도 않았다.

“그저 담아둘 생각이었는데…….”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내는 페델리우스의 표정이 확 일그러져 있었다. 숙여진 페델리우스의 얼굴을 보다가 입을 꾹 닫았다.

“대신관이 당신에게, 처음 생긴 친구라는 걸 알면서도…….”

꾹꾹 눌러 담아온 것을 내뱉듯, 느릿하면서도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것은 정말 무엇 하나 숨기는 것 없는 솔직한 말이었다.

“그저 순간 숨이 턱 막혔습니다. 그뿐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조각조각 잘린 말이지만 이상하게도 이해할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손을 뻗어 페델리우스의 손목을 붙잡아주는 것뿐이었다.

주전자를 기울인 채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순간 컵에 따르던 물이 넘쳐 흘러버릴 때가 있다.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페델리우스의 담을 수 없어 튀어나와 버린 말은.

“나는 페델리우스가 좋아. 줄곧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해. 하지만…….”

여기 오기 전, 이리나에게 교육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잊고 싶어도 수치스럽고 부끄러우면서도 충격적인 교육이었다.

“페델리우스가 원하는 건…… 그런 거지? 막 침대 위에서 옷 다 벗고 내가 다리를 벌리……. 읍.”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페델리우스의 굳은살 박인 커다란 손이 내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멍하니 쳐다보다가 슬쩍 눈동자를 굴렸다.

페델리우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과보다 더 빨간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페델리우스의 눈을 쳐다봤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다른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죄송합니다. 도대체 그건 어디서…….”

페델리우스가 천천히 손을 떼며 입술을 달싹였다.

턱턱 막히는 페델리우스의 목소리를 듣다가 입술을 손톱으로 긁었다. 그의 손이 닿았던 부위가 유독 후끈거리고 간지럽다.

“아. 여기 오기 전에 교육받았어.”

“……예?”

내가 입을 열자 페델리우스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볼모였잖아. 원래는 말이야.”

‘음, 안 불편하려나?’

잠시 말을 멈춘 채 고민했지만, 궁금증을 한껏 담은 그의 표정을 보니 작게 웃음이 터졌다. 몸을 앞뒤로 가볍게 흔들며 쓰게 웃었다.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다. 이미 다 끝난 일이기도 하고.

“그래서 여기 오기 전에 용도가……. 그, 왕의 성적인 뭐 그런, 장난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거였거든. 정확히는 모르지만, 시녀들이 말하는 뉘앙스가 그랬어!”

굳어져 가는 페델리우스에게 애써 괜찮다고 웃어 보이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정말 화내라고 한 말이 아닌데!

“아니, 어쨌든! 그냥 나도 알고 있다, 뭐 그런 말이야!”

최대한 밝은 목소리를 내며 페델리우스의 손을 꽉 잡아줬다. 아이씨, 어쩌지. 괜히 말한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 말하지 말걸.

그렇지만 어디서 배웠냐고 하는데 어디 배울 데가 있었어야지. 이것까지 왕의 탓으로 돌렸다가 페델리우스가 반역이라는 걸 일으키면 어쩌나 싶기도 했고.

물론 그러진 않겠지만…….

“그것들이…… 그랬단 말입니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미 지난 일이고…… 걔들은 내가 다 죽였고. 페델리우스!”

“……예.”

“화내지 마. 알았지? 화내지 마. 응? 네가 화내면 무서워.”

내 말에 그제야 페델리우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어둑한 표정은 사람 수십 명쯤 단숨에 베어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러니까, 나도 남자랑 관계하는 법을 배웠어.”

우지끈.

“…….”

쿵.

“아.”

식탁이 무너져 내렸다. 페델리우스의 손에 부러진 다리 하나의 일부분이 보였다. 4개의 다리가 있었어야 할 식탁은 다리 하나를 잃고 무너졌다.

“페델리우스, 이게 뭐야.”

페드로한테 혼날 게 뻔했다.

졸지에 탁자 없이 의자에 멀뚱히 앉아있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걸 시킨 건, 황제입니까?”

페델리우스가 그런 건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는 듯 물어왔다.

“그렇겠지. 내가 직접 명령을 들은 건 아니지만…….”

“감히 당신을, 아비라는 작자가! 감히, 자식을, 어떻게 그런 용도로…….”

페델리우스의 언성이 확 높아졌다.

사시나무 떨리듯 부들부들 떨리는 몸은 공포가 아니라 분노 때문인 게 분명했다.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옅게 웃었다.

아콰 때도 그랬지만, 페델리우스도 마찬가지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나 대신 화를 내줄 사람이 있어서 기뻐. 예전에도, 지금도 나는 무척 행복한 사람이 분명해.”

사랑스럽고 사랑스럽던 아콰와 마찬가지로 페델리우스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가 토해낸 감정과는 어쩌면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당신에게 바란 건 그런 게 아닙니다. 그저, 그저…….”

페델리우스가 입을 닫았다.

주먹을 꽉 쥔 그가 곧이어 고개를 푹 숙였다.

차마 내뱉지 못한 이야기가 있을 텐데도 그는 말을 아꼈다.

“알고 있어. 네가 해주는 건 분명 그런 더럽고 음습한 욕망과는 크게 다를 거야.”

내 말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아. 참고로 교육만 받은 거지 뭔가 당하진 않았어.”

“그, 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도 그저 좋아할 테니까요.”

내 단호한 말에 페델리우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는 무엇이든 좋은 말만 해주고 싶고 좋은 것만 건네주고 싶은데.

‘참 내 마음대로 안 되네.’

생각대로 되는 일이 너무 드문 것 같다.

“페델리우스.”

“예.”

“미안해.”

“아닙니다. 당신께 부담을 드리거나 사과를 받으려고 한 말은 절대 아닙니다. 불편하시다면 잊어주셔도 괜찮습니다.”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따라 내 목도 함께 젖혀졌다.

“페델리우스, 사랑이 뭐야?”

“…….”

페델리우스가 조심스럽게 손에 깍지를 껴왔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곁에 있어도 자꾸 보고 싶고, 닿고 싶고, 듣고 싶습니다. 그저 한 번 눈이 마주치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당신이 다른 곳을 보면 갈증이 납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살랑살랑 날아들어 귓가를 간질였다.

언제나처럼 낮고 담담하면서도 묘한 열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다.

“당신을 전부 소유하고 싶습니다.”

“나는…….”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온전히 제가 끌어안고 갈 마음이니 오시리아가 신경을 쓸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천천히 손가락을 풀어내며 말했다.

멀어져가는 온기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

“오늘 말씀드렸던 이야기는 잊어주십시오. 조금, 미쳤었나 봅니다.”

웃는 그를 바라보다 벌어졌던 턱이 툭 닫혔다.

내 말을 끊어내더니 페델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디를 가?”

“제 방에 갑니다만…….”

“같이 안 자고?”

돌아오고 나서도 계속 같은 방에서 잤으면서.

물론 페델리우스는 소파에서 자고 내가 침대에서 자는 이상한 모양새였지만.

옆에서 자라고 해도 몇 번이고 사양하던 페델리우스다.

“당신이 약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따로 자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직도 잠이 오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맨날 같이 잤잖아.”

“곁에서 보고 있으면, 당신에게 실수를 할 것 같아서요.”

페델리우스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싫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콰는 이제 부르지 않으면 잘 오지 않고 메리도 마찬가지다.

페델리우스까지 없으면 이 방에는 나 혼자뿐인데…….

“혼자는, 싫은데.”

“주무실 때까지만 곁에 있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내게 말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뚱하니 입을 내밀었다.

갑자기 느껴지는 이 거리감은 또 뭐야.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게서 멀어지는 거야?”

“아닙니다. 오시리아가 다칠까 봐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난 괜찮아!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나는 괜찮을 거야.”

설령 그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해서 내 목에 칼을 들이민다고 해도 나는 웃어줄 자신이 있었다.

그의 탓이 아니라고 웃어줄 수 있었다.

“난, 사랑은 잘 모르지만……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

페델리우스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말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내 구원자였다.

내 삶을 다시 쓰게 해줬다. 내게 다정함을 알게 해줬다.

상냥함도, 가족이라는 것도, 전부 그가 내게 잔뜩 밀어 넣어준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멀어지려고 하면 나는, 정말 슬플 것 같아.”

그건 분명 끔찍한 악몽보다도 더 끔찍할 테니까.

“너까지 멀어지면 안 돼.”

페델리우스의 잘 다려진 옷이 손에서 구겨졌다. 페델리우스마저 멀어지면 정말 남는 사람이 없다. 아콰도 멀어졌고, 가족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오직 페델리우스만이 내게 있을 곳을 마련해줬다. 페델리우스만이, 내게 숨을 쉴 공간을 만들어줬다. 페델리우스가 옷자락을 붙잡은 내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그리곤 천천히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꼈다.

“멀어지지 않습니다.”

“응.”

“오시리아가 저에게 멀리 가라고 해도 이미 멀리 갈 수 없게 됐습니다.”

“응…….”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질리도록 곁에 있겠습니다.”

“……응.”

귓가에 속삭이는 말이 뺨을 어루만지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목소리는 이제까지 먹어보았던 어떤 벌꿀보다도 달콤하고 얽혀오는 손은 어떤 바위보다도 단단했다.

“제가 당신을 떠날 거라는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떠나라고 해도 아마 제가 떠나지 못할 테니까.”

그의 입술이 뺨에 닿았다.

연못 위에 나뭇잎이 떨어지듯 살짝 닿았다 떨어진 온기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뭐, 뭐…….”

“고백하고 나니 한결 편해졌습니다.”

“너!”

페델리우스가 얽었던 손을 풀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에 입술이 저절로 툭 튀어나왔다.

“사랑이란 거, 나도 할 수 있을까? 좋아하는 거랑은 어떻게 달라? 나는 지금도 페델리우스가 보고 싶고 계속 곁에 있었으면 좋겠는데.”

“언젠가는 분명, 오시리아께도 그런 사람이 생길 겁니다.”

“그게 네가 아닐 수도 있어?”

“네. 제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제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단지, 어둠 속에서 살아왔던 당신이 행복해지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너는 괜찮아?

묻고 싶은 말이 목까지 차올랐으나 그걸 물어버리면 어쩐지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만 같아서.

애써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아이를 낳아야 하잖아.”

교육은 지독히도 척하고 기분 나빴지만, 그래도 아콰에게 배운 적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

관계를 맺으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낳고 싶지 않아도 낳게 된다고 했다.

누군가의 씨를 품는다는 건 그렇다고 들었다.

“그럼 그 아이는 내가 키워야 하잖아.”

그리고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어미의 품에서 자라는 아이는 얼마나 불행할까.

사랑이라곤 알지도 못하는, 아는 것이라고는 죽음의 색뿐인 내가 어떻게?

“오시리아는 분명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왜?”

“당신이 누구보다도 아픔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아픔을 겪어본 사람은 타인에게 친절해질 수 있습니다. 배려할 수도 있고요.”

페델리우스의 말에 옅게 웃었다.

“너는 가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곤 해.”

“만약 그러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응?”

“제가, 아니 오시리아가 사랑하는 사람이 분명 당신을 도울 테니까요.”

페델리우스의 말에 조용히 웃었다.

페델리우스가 하는 말은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 별만큼이나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 미래는 전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지만…

그랬으면 좋겠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예.”

“그건 너였으면 좋겠어.”

모든 감정을 쏟아 붓고 또 쏟아 부어도 한없이 끝나지 않는 애정을 줄 것이 분명하니까.

페델리우스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오, 오시리아?”

“페델리우스가 안아주는 게 제일 좋아.”

덥석 끌어안은 채 페델리우스를 침대에 밀쳤다.

혼자 자는 건 싫고, 이렇게 끌어안고 자도 좋을 것 같은데.

“같이 자자.”

“네?”

“매번 소파에서 자는 거 보는 게 불편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여기서 자.”

“안 됩니다.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오시리아가 바로 옆에 붙어있으면…….”

냉큼 뒤로 물러났다.

침대 한가운데에 베개 두 개를 세로로 놓았다.

폭신폭신한 베개를 손바닥으로 팡팡 치면서 웃었다.

“자, 여기에 이렇게 베개를 두면 침대가 두 개 붙어있는 것 같지 않아?”

“……예?”

“그러니까 불편하게 저기서 자지 말고 여기서 자도 돼.”

페델리우스가 떨떠름해 보이는 표정으로 얇은 베개 두 개를 내려다봤다.

나름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침대도 넓고. 두 개로 나눠도 떨어질 것 같지 않은데.’

페델리우스는 체격이 커서 떨어지려나?

슬쩍 뒤로 물러나며 베개를 뒤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페델리우스 쪽 침대가 조금 늘어났다.

“이제 안 떨어질 거야.”

“아. 네. 하하. 감사합니다.”

단어 책이라도 읽는 듯한 말투에 눈을 끔뻑였다. 뭔가 마음에 안 드나?

조금 더 자리를 내어주면 이젠 내가 떨어질 것 같은데…….

“좀 더 줄까? 근데 이것보다 더 주면 내가 떨어질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여기서 자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불을 덮으며 페델리우스에게도 이불을 덮어줬다.

침대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퍽 달갑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페델리우스 쪽을 보며 조심스럽게 누웠다.

순간 페델리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눈을 질끈 감는다.

있는 힘껏 감는 눈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 잡아도 돼, 페델리우스?”

“예?”

“손.”

“아, 예……. 괜찮, 습니다.”

하나도 괜찮아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냉큼 페델리우스의 손을 붙잡았다.

손에 닿는 온기가 좋아서 가운데 둔 베개를 푹 끌어안았다.

“나, 누가 옆에서 자는 건 처음이야. 아콰는 항상 내 손등에 들어가곤 했으니까.”

온기가 없는 빛무리였기에 이런 감각도 없었다.

“밤은 무서웠는데, 네가 옆에 있으니까 무섭지 않을 것 같아.”

눈을 감은 채 페델리우스에게 말했다.

혼자는 싫었다.

너무 싫어서, 끔찍해서, 영원히 없어졌으면 하고 바라던 때도 있었다.

추운 겨울도 싫었고 냄새나는 이불도, 딱딱한 빵도, 썩은 내 나는 음식도 끔찍스러웠다.

그러나 이곳에 온 순간부터 모든 게 뒤바뀌었다.

그건 전부 페델리우스가 끌어안고 있던 것을 하나둘 내게 나눠주고 내어준 것들이어서, 더는 품에서 놓을 수도 없게 됐다.

“페델리우스.”

“예.”

“날 사랑한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페델리우스와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꽉 쥐어오는 페델리우스를 느끼며 작게 웃었다.

열 마디의 대답보다 한 번의 손길이 믿음직할 수가 있을까.

“네가 날 사랑한다고 말해준, 유일한 사람이야.”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들을 수도 없었던, 듣게 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그러니까 놀랍고 충격적이면서도 생각해보면 고마운 일이다.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나라는 존재를 거부하지 않고 도리어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으니까.

“안녕히 주무십시오.”

“잘 자!”

“네.”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꽉 붙잡은 손이 단단해서 난생처음으로 밤이 무섭지 않았다.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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