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 황녀님 5권
Ⅹ
언제나처럼 신전에 도착해 페델리우스를 떠나보냈다. 매일매일 마중을 나오던 라비엘이 없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서 빠르게 신전 안으로 들어가던 차였다.
“안녕하십니까, 신녀님?”
아침부터 앞길을 떡하니 막은 남자에 표정이 절로 구겨졌다.
“누구야? 아, 저번에 그 신도네.”
고개를 치켜들자 보이는 붉은 눈동자는 낯익은 것이었다.
적갈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휘어진 눈꼬리는 꽤 장난스럽게 보였다.
“왜? 나 바빠.”
“불쌍한 신도를 위해 시간을 좀 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내가 왜 시간을 내야 돼.
능글맞은 표정이 별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라비엘을 보러 가야 되는데 앞에 있는 남자는 비킬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비켜.”
“긴히 상담 드릴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나는 그런 거 안 하니까 다른 신관한테 물어봐.”
길이 넓은데 굳이 이 앞의 길을 사용할 필요가 있나 싶어 몸을 비켜 그를 지나쳤다.
냉큼 지나치는 내 뒤를 붉은 눈의 남자가 훌쩍 따라붙었다.
‘아이씨! 귀찮아 죽겠네.’
모른 체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데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옆에 냉큼 붙어온다.
그것도 힘든 기색도 없이.
‘이거 어디서 본 장면 같은데…….’
페델리우스도 내가 필사적으로 도망칠 때마다 한 걸음에 덥석덥석 따라잡곤 했다.
그런 눈치 없는 놈이 하나 더 있을 줄이야!
‘페델리우스는 귀엽기라도 하지!’
뭐야?! 이 똥파리 같은 놈은.
“에이, 신녀님. 그러지 마시고 한 번만 자비를 좀 부탁해요. 아주 진지하고 심각한 고민이라니까요?”
붉은 눈의 남자가 졸졸졸 쫓아오며 입을 놀렸다.
아주 끈덕지게 붙어서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오늘따라 신전 가는 길이 왜 이리 멀지.’
신전 건물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지가 않다.
가까이 다가가면 신전 경비병들이 분명 막아줄 거야.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열심히 다리를 놀렸다.
“아아, 너무하네. 몇십 년 만의 신녀님이 이렇게도 냉정하신 분일 줄이야. 흑흑…….”
우와, 이 뻔뻔한 인간은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
어느새 내 앞을 또 가로막은 남자가 두 손에 얼굴을 푹 묻은 채 거짓 흐느낌을 흘렸다.
“아아! 잔인하신 신이시여! 이렇게 고민 많은 신도를 내버리고 떠나시는 신의 사자께옵서 저를 다시 바라보시게 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약을 잘못 먹었든가, 미쳤든가. 아니면 그 비슷한 것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아니, 그냥 미쳤나?
응. 그냥 미쳤다고 하자.
미친 사람은 절대 상대하지 말라고 페델리우스가 여러 차례 말했지. 고개를 주억이고 다시 남자를 피해 발을 내디뎠다.
“아, 신 콘니르! 대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이옵니까. 흑흑.”
뚝, 발걸음이 절로 멈췄다.
‘콘니르?’
익숙한 이름이다. 그리고 무척이나 불쾌한 이름이기도 했다. 이놈이구나.
“네 이름이 콘니르?”
“네. 절 아십니까?”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놈이 언제 훌쩍였냐는 듯 냉큼 고개를 들며 말했다. 확인까지 받으니 한층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추방됐다던 콘니르 백작?”
“이런, 제 부끄러운 과거까지 알고 계시는군요. 이거 참…….”
“너구나. 페델리우스를 그렇게 만든 게.”
환하게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페델리우스가 한동안 기운이 없어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이게 내 앞에 나타나?
“너 잘 만났다.”
내 말에 콘니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증스럽게 올라가는 눈꼬리가 라비엘에게 들었던 것과는 제법 달랐다.
눈동자가 절로 가늘어졌다.
“윌하튼 경이 저에 대해서 뭔가 말했나요?”
“아니. 친구한테 훔쳐 들었는데. 네가 온 뒤로 페델리우스가 얼마나 잔뜩 찡그린 얼굴을 했는지 알아?”
그런 울적하고 풀죽은 얼굴은 함께하는 내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옆에서 울적해 하고 있으니 무슨 말을 꺼내기도 힘들었고.
“그가 그랬습니까?”
“그래. 그렇게 살벌한 페델리우스는 처음이었어.”
얼굴을 찌푸린 채 콘니르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 말에 그가 어쩐지 기쁘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띤 채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가 기뻐서 웃어?”
“반응해준다는 건 그래도 완전히 마음에서 지워버리진 않았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콘니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화를 내는데 기쁘다는 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적어도 나로서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에게 시간을 내어준다고 내가 페델리우스의 일에 끼어들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너 왜 나한테 접근했어?”
팔짱을 낀 채 그에게 물었다.
페델리우스를 알고 페델리우스가 나를 돌보고 있다는 것도 알 텐데 굳이 내게 접근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 이용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
미간을 찌푸린 채 솔직하게 물었다.
표정을 보면 페델리우스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는 페델리우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내게 접근한 거라면 생각할 수 있는 목적은 간단했다.
내 말에 콘니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헉, 저를 그렇게 생각하신 겁니까?”
또 과장된 표정으로 입을 동그랗게 벌린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다.
“응.”
“전 그렇게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충분히 수상해 보여.”
수상하다 못해 이상하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어쩐지 멍청해 보여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도 능글맞게 구니 어쩐지 상대하기가 버거웠다.
“원하는 대로 시간 내줬으니까 들어갈래.”
콘니르를 훌쩍 스쳐 지나갔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등 뒤로 다행히 그는 쫓아오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모로 돌려 그를 쳐다봤다.
“내일도 또 찾아올게요.”
웃음기 서린 목소리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저렇게 끈질길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우와, 정말 싫은데.”
“……상처네요. 흑.”
우는 척 입을 가린 콘니르가 고개를 홱 돌렸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몸을 돌리기 전 그가 문득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제가 뭐 때문에 페델리우스와 사이가 멀어졌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뚝, 걸음이 절로 멈췄다.
페델리우스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 진실.
그는 아직도 나를 어린애로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한층 가라앉았다.
“궁금해.”
솔직하게 말했다.
궁금하다. 뭐 때문에 그렇게 어두운 표정을 했는지, 메리도 페델리우스도 얘기해주지 않는 숨겨진 과거가 무엇인지도.
“페델리우스에 관해서라면 전부 궁금해.”
내 말에 콘니르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그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거라면 제가 잘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최근에는 제법 서먹해졌지만, 그 전에는 누구보다 친한 친구였으니까요.”
말하는 목소리가 꽤 씁쓸하게 들렸다.
살짝 눈꺼풀을 내리깔며 그를 살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뭘 원하는데?”
“종종 신전에 찾아오면 고민 상담을 들어주세요.”
검지를 쫙 편 콘니르가 말을 덧붙였다.
어려운 제안은 아니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페델리우스가 좋아할 제안도 아니다.
‘하지만 페델리우스는 절대 말해주지 않을 것 같고.’
물론 물의 힘을 통한다면 과거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거기까지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느릿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좋아. 대신 이 시간쯤에 찾아와. 다른 시간은 안 돼.”
다른 시간에 찾아왔다간 페델리우스한테 들킬 확률이 높다.
이 시간대라면 페델리우스도 출근을 할 시간이니 문제없겠지만.
스스로 생각한 결론이 뿌듯해 고개를 주억였다.
“음, 그 정돈 괜찮은 것 같네요. 아, 얘기 들으셨나요?”
“얘기?”
“이번에 자르딘 왕국이 자르딘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이달 내로 정식 공표할 예정이고요. 추방되었던 제가 굳이 돌아온 이유죠.”
‘제국’. 원래 제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는 오래전 영광스러운 시절을 누린 트럼프 제국뿐이었다.
자르딘 왕국이 제국이 된다는 건 상징적인 의미가 제법 클 듯했다.
“위대하신 폐하께서 드디어 정식으로 황제의 좌에 앉게 되시는 거죠.”
“그렇구나.”
처음 듣는 소식에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바깥소식을 일부러 들으려고 하진 않지만,
누군가 일부러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모르셨어요?”
콘니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정말 놀랍지도 않은데 놀란 척을 하는 것이 뻔히 보였지만,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모르면 안 돼?”
“당신은 신녀잖아요. 당신이 속한 나라의 일인데 모른다니 그건 좀…… 이상하네요.”
울컥, 콘니르의 지적에 고개를 치켜들었다가 이내 주먹을 쥐었다.
괜히 놀리려고 한다는 건 알고 있다.
아니면, 내가 정말 조금은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 있을지도.
“게다가 왕국이 제국으로 승격하는 날입니다. 신녀께서 축하를 하지 않으시면 누가 축하를 해준다는 건가요?
당신은 무려 신의 힘을 모두의 앞에서 보여준 신의 여인인데요.”
“너, 나 화나게 해서 뭐 하려고?”
울컥울컥 치솟는 짜증 속에서도 그가 일부러 그런다는 사실을 애써 상기했다.
눈앞의 콘샐러드 같은 놈은 뭔가 원하는 게 있다.
그가 또다시 놀란 눈으로 턱을 긁적였다.
“당신은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군요. 분명히 오랜 시간 백치였다고 들었는데…….”
“멀쩡했어. 그냥 연기한 거고.”
내 말에 그가 낮게 웃었다.
얘는 왜 자꾸 웃어? 짜증 나게.
페델리우스가 웃는 것과는 다르게 사람 성질을 닥닥 긁는 웃음이다.
어깨까지 떨며 웃던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연기를 오랜 시간 하면 말투도 행동도 자연스럽게 습관이 되어 몸에 배는 법이죠. 오랜 시간 연기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종종 잊어버릴 때가 있다고 하니까요.”
움찔, 몸이 절로 떨렸다.
짜증스럽게 구겨져 있던 눈이 커졌다.
핏기가 가시는 듯 싸해지는 피부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너…….”
“성인 남성이 손을 들어 올리면 절로 몸이 움츠러들죠?”
그가 웃으며 말했다.
“오랜 시간 갇혀 있었다면 어둠도, 밤도, 혼자가 되는 것도 무서울 테고.”
웃던 콘니르의 입가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축축하게 젖어있던 수건에서 서서히 물기가 빠져 말라가듯 콘니르의 장난기도 마찬가지였다.
“미움받기 싫어서 눈치도 열심히 볼 테고 아닌 척하면서도 말투는 아직 어린애 같을 때가 있는 것도 같고요.”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그의 말이 점점 수위를 넘어왔다.
얼굴을 굳히자 푸른 기운이 넘실거리며 피부 위를 감쌌다.
“오, 무시당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시는군요. 돌봐주던 시녀들에게 많이 무시당하셨나요?”
빙글빙글 웃음기를 띤 얼굴로 물어오는 콘니르를 보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푸른 기운이 순식간에 손에 온통 몰렸다.
“죽고 싶어?”
내 물음에도 콘니르는 관찰하는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그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미간을 좁혔다.
“그 불안정한 유아기에 배운 건 완벽한 살기군요. 피부가 떨릴 정도로 무섭네요.”
콘니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대체 날 언제 봤다고 잘 안다는 듯 이렇게 떠들어대는 거야?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울컥, 화가 치밀어 들어 올렸던 손을 간신히 내렸다.
죽여선 안 된다.
죽이면 안 된다고 했다.
‘죽이지 않기로 했잖아.’
겨우 화가 난다고 죽이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진다고 왕이 그랬다.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 싶다면 앞으론 그러지 말라는 소리도 들었다.
하고 싶은 건 끝냈다.
이제는 그저 페델리우스와 함께 있고 싶었다.
다정한 목소리와 따뜻한 품속에서 그저 안락하게.
치솟는 화를 참았지만 그가 하는 말이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틀린 말도 없어서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당신은 페델리우스가 아주 좋아할 존재네요.”
콘니르가 생긋 웃었다.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페델리우스와 전혀 닮지 않았음에도 문득, 닮았다고 생각해버렸다.
망설임 없이 휘어지는 눈동자라든가 부드럽게 끌어올리는 입꼬리라든가.
“무슨 소리야?”
“한없이 그에게 의지하고 슬픈 과거가 있어서 그가 얼마든지 보듬어줄 수 있고 애정이 부족하게 자랐으니 그의 집착조차 애정처럼 느껴질 테고. 남 돌봐주는 것 좋아하는 그에겐 아주 완벽한 상대죠.”
쉴 새 없이 몰아닥치는 말에 입도 벙긋할 수가 없었다.
아니라고 하기엔 그가 아직도 나를 어린아이같이 대하고 있으니까.
“당신이 물의 힘을 가지고 태어난 신녀라 다행이네요. 불이었다면 페델리우스는 결코 신녀님을 가까이하지 않았을 테니까.”
손을 뻗어 콘니르의 멱살을 그대로 움켜쥐었다.
가만히 있으니 이게 나를 병신 취급하고 있다.
“너 어디 여기서 일주일간 옴짝달싹도 못 해보고 싶어?”
스멀스멀 올라오는 물이 콘니르의 발목을 확 움켜쥐었다.
발에 닿은 축축한 느낌에 콘니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서 저를 벌하시려고요? 이렇게 사람이 많은 데서……?”
눈을 크게 뜬 콘니르가 두 팔을 쫙 벌리며 말했다.
다른 신도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안 돼.’
자리를 잃을 순 없다.
페델리우스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이유였다.
당당히 그의 옆에 머무를 수 있는 이유였다.
왕님이 만들어준, 내 자리였다.
손에서 힘이 절로 풀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서 절 벌하시면 당연히 다른 신도들이…….”
“그거 말고. 그 전에 한 말. 내가 물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거.”
“아.”
콘니르가 작게 탄성을 흘리곤 웃었다.
그것이 정말 웃는 표정이냐고 묻는다면 과연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사이 콘니르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는 큰 화재로 양친과 식구를 모두 잃었거든요.”
웃는 얼굴의 콘니르가 말했다.
그의 웃는 얼굴은 어쩐지 한 꺼풀 벗겨내면 한껏 일그러져 있을 것처럼 이질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몸이 완전히 굳은 듯했다. 입술을 뻐끔거리다가도 입술이 절로 닫혔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아, 듣지 못하셨었군요.”
“듣지 못했…….”
“앗!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그럼 다음에 또 찾아뵈러 오겠습니다.”
누가 봐도 지어낸 듯한 놀란 표정으로 콘니르가 냉큼 뒤로 물러났다.
“아.”
뒤늦게 손을 뻗었지만, 그는 편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을 계속 하는데, 그리 엄청나게 기분이 나쁘진 않다.
‘이상해.’
내 속을 벅벅 긁는 말을 해대는데도 정말 나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다.
경멸이나 증오처럼 어두운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제가 매우 싫겠지만,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다음에도 저를 봐야겠군요.”
이죽거리는 그의 표정을 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싫지만 싫지 않은 느낌.
그러나 페델리우스와는 다르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신녀님. 다음엔 제 여동생도 소개해드리죠.”
“…….”
허리를 굽힌 콘니르가 훌쩍 몸을 돌려 멀어져갔다.
대답은커녕 목례도 해주지 않았지만, 내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콘니르는 신전을 빠져나갔다.
‘싫으면서도 싫지는 않고, 묘하게 서글픈 기운을 가진 사람이네.’
짧게 고민하다가 곧장 몸을 돌렸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어.
한 시간쯤은 서 있었던 것 같다.
“얼른 라비엘을 보러 가야겠다.”
여태까지 내가 오지 않았는데도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는다니.
라비엘의 행보라곤 생각할 수 없다.
‘설마 벌써 질린 건 아니겠지?’
쓸데없는 생각에 고개를 냉큼 좌우로 저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비엘은 그럴 리가 없다.
그는 친절하고 착한 데다가 상냥하고…….
“안녕!”
“안녕하…….”
본 신전으로 들어가면서 경비병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의 인사를 받기도 전에 훌쩍 안으로 들어갔다.
라비엘의 방으로 향하는 길은 이제 어렵지 않았다.
머릿속에 있는 길을 따라 라비엘의 방으로 곧장 향했다.
“어? 알렉.”
라비엘의 방에서 나오는 알렉의 모습에 눈이 절로 동그래졌다.
“오시리아 신녀님.”
내 부름에 알렉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냉큼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알렉이 왜 라비엘의 방에서 나오는 거지?
“라비엘은 안에 있어? 라비엘이 마중을 안 나왔어. 맨날 나왔었는데. 아, 근데 알렉은 여기 웬일이야? 무슨 보고할 거 있었어?”
내 질문에 알렉이 인자하게 웃었다.
언제나 흥분하지 않는 모습이 라비엘과 비슷하다.
‘신관들은 다들 무슨 감정 죽이는 연습이라도 하는 건가?’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을 것 같아서 조금 놀랍기도 하다.
알렉의 대답을 기다리며 방문 앞에 멈춰 섰다.
“대신관께선 안에 계십니다.”
“아, 그래?”
“다만, 비를 맞은 탓인지 감기에 걸리셔서 침대에서 옴짝달싹도 못 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만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알렉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라비엘이 감기라니……. 그만큼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호리호리해서 연약해 보이긴 했지만…….’
한창 침대 안에서 끙끙 앓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아. 감기에 걸리지 않고 걸려도 금세 나을 수 있어.”
그리고 어쩌면 라비엘에게도 내 힘이 도움 될지도 모르겠다.
칼에 잘려 덜렁거리던 다리도 치료했던 힘이니까 감기 같은 간단한 질병은 분명히 쉽게 고칠 수 있을 거다.
“그러십니까? 오시리아 님의 의견이 그러시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저는 잠시 대신관의 상태를 살피고 약을 드리러 온 겁니다.”
“흠. 정말 그것만?”
“사실 급히 보고 드릴 것도 있어서 그것도 함께 가지고 왔지만요.”
허허, 민망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는 알렉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들은 언제나 늘 솔직히 말해줘서 좋다.
“알겠어. 내가 혹시 돌봐줄 건 없어?”
반짝거리는 눈으로 알렉을 쳐다봤다.
음, 낮은 신음을 흘리며 고민하던 알렉이 낮게 웃었다.
“그렇다면 이마에 올려드린 수건이 마르거나 미지근해지면 다시 찬물에 적셔서 이마에 올려주시겠습니까?”
“응, 알겠어. 걱정하지 말고 가서 볼일 봐.”
알렉이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를 굽혔다.
다시 한번 손을 흔들어주곤 방문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돌렸다.
달칵, 문이 열렸다.
약간 어둑어둑한 방 안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침대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알렉 신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나 다정하고 듣기 좋던 목소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푹 젖은 음성이었다.
“라비엘, 나야. 오시리아.”
“오시리아?! 여긴 어떻, 콜록,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일어나지 마. 얼른 누워!”
몸을 비스듬히 일으킨 라비엘에게 다가가 냉큼 가슴을 꾹 눌렀다.
내 힘에 라비엘이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라비엘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간호해줄게. 알렉한테 허락도 받았어.”
“알렉 신관이 허락해줬다고요? 이런. 아무도 받지 않는다고 미리 말해둘 걸 그랬어요.”
“너무해. 네가 마중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다고. 곧장 너한테 뛰어왔는데…….”
“아뇨! 그냥 오시리아에게 감기가 옮을까 봐 그래요.”
내 우울한 목소리에 라비엘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픈 와중에도 여전히 다정하다.
의자를 질질 끌고 와서 라비엘의 침대 옆에 세워뒀다.
“라비엘은 연약하구나.”
“네에……?”
“비에 맞아서 감기에 걸렸다면서.”
“그건,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그 전에 피로가 많이 쌓여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잠을 못 자는 날들이 조금 있었거든요.”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나 식은땀이 뚝뚝 흐르는 몸을 보니 그의 괴로움이 물씬 느껴졌다.
이마에 올려져 있는 새하얀 수건을 바라보다가 라비엘의 시선에 눈을 맞췄다.
“고쳐줄까?”
“네?”
“나 아픈 것도 고칠 수 있으니까. 네가 원하면 고쳐줄게.”
푸른 기운을 손에 모은 채 라비엘에게 말했다.
라비엘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괜찮아요.”
“왜? 괴롭지 않아? 아프지 않게 해줄 수 있어.”
“죽을병도 아니고 저는 친구인 당신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고 싶지 않아요.”
라비엘의 말에 뻐끔거리던 입술이 꾹 닫혔다.
이용이 아니라 그저 해주고 싶어서 해주는 것뿐인데.
“이용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해주고 싶은 거야.”
“저도 인간인지라 한 번 편한 것을 경험하면 다음에 또 그걸 찾게 돼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오시리아를 이용하게 될지도 모르죠. 저는 그런 건 싫어요. 그러니까 이 정도는 제가 이겨내겠습니다.”
아픈 와중에도 여전히 그다운 생각을 가감 없이 내뱉는다.
단호한 거절도 아니고 부드러운 거절은 더 이상 말을 덧붙일 수도 없었다.
본인이 싫다고, 그것도 나를 위해 싫다고 하는데 더 무슨 말을 하겠느냐마는.
“제가 걱정된다면 말 상대를 부탁드려요. 아프다고 나가지도 못하게 해요. 알렉 신관이 경비병에게 단단히 일러둔 것 같더라고요.”
“그래.”
눈을 슬쩍 굴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하고 상냥한 말.
그 안에는 정말 나를 걱정하는 기색이 물씬 느껴졌다.
“라비엘은 정말 내가 꿈꿨던 천사님 같아.”
“……천사님이요?”
내 말에 누운 라비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다락방에 있을 때 누군가 구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 하늘에서 내려올 그 사람은 누구보다 다정하고 상냥하고 또 반짝거리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건…… 정말 과찬이에요. 오시리아.”
“너는 상냥하고 친절하고 다정해. 그리고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반짝거리는걸?”
“으아……. 감사합니다. 근데 부끄러워요.”
라비엘이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그런 라비엘을 바라보다가 나도 함께 마주 웃었다.
“그래서 그때 페델리우스가…….”
옅은 피 냄새와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눈을 크게 뜨며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그니……?”
“오시리아, 왜 그러…….”
“네.”
라비엘의 말을 끊고 들어온 이그니가 어느샌가 내 뒤에 부복하고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인지. 반가워서 냉큼 그에게 달려갔다.
“이그니!”
와락 끌어안자 그가 어색하게나마 내 등을 토닥였다.
여전히 검붉은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옅은 피 냄새도 분명히 나고 있었다.
“당신은…… 뭡니까.”
시린 목소리에 몸이 굳었다.
라비엘에게 소개라도 해주려고 몸을 돌렸다가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와 마주쳤다.
경계심 가득한 눈동자는 지금껏 라비엘에게서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오시리아, 그것에서 떨어지십시오.”
“라비엘, 이 애는 내…… 가족 같은, 사람인데. 이그니라고.”
내가 망설이며 머뭇머뭇 입술을 달싹이자 라비엘의 눈동자가 오묘하게 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