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어진 눈동자가 이그니의 진의를 파악하듯 그를 천천히 살폈다.
“그는, 이곳에 들어와선 안 됩니다. 피 냄새에 질식해버릴 것 같아요. 이곳 신전은 많은 이들의 속죄와 기원을 도와주지만 이미 인간의 길을 벗어나 버린 존재까지 품어주지는 못합니다.”
차가운 목소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젖었지만, 여전히 달콤하다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미안하지만 오시리아, 조금 피곤해졌습니다. 대화는 나중에 하도록 해요. 오늘은 돌아가 주시겠어요?”
“아, 응.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돌아가려고 했어.”
머뭇거리며 라비엘을 살피다가 이그니의 손을 붙잡고 그를 잡아끌었다.
“내일 봐.”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멀리 나가지 못해 죄송해요.”
다정한 말투였지만 여전히 목소리에는 날카로움이 서려 있었다.
이그니의 손목을 붙잡은 채 신전의 성을 빠져나왔다.
“죄송합니다.”
나오자마자 이그니가 사과를 건넸다.
“아니, 네가 왜 사과를 해? 라비엘도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잖아.”
“신전의 신관들은 인간이 쌓아온 업에 조금 민감한 것 같더군요. 특히 지위가 높을수록 제 어두운 면이나 제 손에 묻은 피의 방대함을 쉽게 눈치챕니다.”
“……그래?”
“그가 지위가 높다면 아마 민감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이그니의 목소리에 괜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사람을 죽여온 것을 잘했다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기분이 이상해.’
라비엘에게 소개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듯했다.
나는 처음으로 신전 입구에 멍하니 선 채 페델리우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번엔 또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이렇게 늦게 돌아왔어? 이그니.”
“이것저것 처리할 일이 있었습니다.”
“용병으로 일하면서 의뢰받은 거야?”
“네, 비슷합니다.”
이그니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옅은 피 냄새가 풍기는 몸이다. 여전히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죽이다 왔을 것이 뻔했다.
‘알지만…….’
조금 더 좋은 쪽의 용병 일도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그니에게 들어오는 의뢰가 청부살인뿐인지 이그니가 그런 의뢰만 받는 건지 잘 모르겠다.
“저는 언제쯤 당신의 곁으로 돌아가도 됩니까?”
“응?”
“당신이 제가 곁에 붙어있는 걸 불편해하시는 것 같아 명령에 따랐습니다.”
이그니가 담담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그니가 처음에는 그다지 내켜하지 않았지만, 순순히 따라줘서 이해한 줄 알았는데…….
“내가 한 말은 그냥 네가 바깥에서 생활하다가 네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의미였는데…….”
간신히 멍한 정신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고 조금 조용한 삶을 살았으면 했다.
은퇴한 노장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저는 당신을 지키다 죽고 싶습니다. 주군의 곁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이그니가 단호하면서도 굳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덤덤한 목소리는 마치 전장을 호령하는 대장군만큼이나 망설임이 없었다.
“이그니, 이미 날 위협하는 건 없어. 난…….”
주먹을 꽉 쥐었다.
힘들 때 함께 있어줘서, 옆에서 도와줘서 정말로 고마웠다.
제 몸을 던져가며 지켜주려고 노력한 이그니도 이미 지켜주고 싶은 소중한 사람이 됐다.
그가 나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간신히 어딘가에 정착한 것처럼 이그니 역시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말이야, 이그니. 나는…… 정말로 네가 네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저는 이미 한 번 죽었습니다. 두 번째 삶은 주군께 전부 바쳤습니다.”
숨이 턱 막혔다.
내 머뭇거리는 말에도 단숨에 대답한 이그니는 단호했고 물러날 기색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주먹에 땀이 찼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이그니의 눈은 여전히 죽어있었다.
손을 뻗어 이그니를 끌어안았다.
사랑을 모르는, 애정을 모르는, 자신과 다를 바 없이 타인의 삶을 제 손으로 꺾는 것만을 배우며 자란 존재였다.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당신의 곁에 있는 것이 제 행복입니다.”
“말고. 그렇게, 교육된 것 같은 행복이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널 웃게 해줄 사람이 생겼으면 좋겠어.”
끌어안은 내 품에 마치 통나무처럼 안겨있던 이그니가 입을 꾹 닫았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눈동자에 말없이 안았던 이그니에게서 멀어졌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내 곁에 있는 게 널 괴롭게 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래도 좋아.”
굳이 밖에 나가서 사람만을 죽이기 위해 헤매고 다닐 거라면 그가 원하는 대로 곁에 있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림자 기사단에 대한 교육을 들은 바는 없다.
이그니는 그에 관해서는 얘기해주지 않았으니까.
황제를 위해서 제 목숨까지 내던지기를 아까워하지 않는 그들이 어떤 훈련을 받았을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가만히 이그니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잘 다녀왔어. 이그니.”
“네.”
무심한 목소리에 말없이 웃었다.
“페델리우스가 올 때가 됐는데.”
“…….”
살풋, 이그니가 소맷자락 끄트머리를 붙잡아왔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입을 꾹 닫은 채 나를 쳐다봤다.
“내 곁에 있는 건 좋아. 나도 이그니를 좋아하니까. 하지만 위험 상황도 없어졌는데 계속 내 옆에 머무는 건 안 돼.”
“……하지만.”
“하루에 한 번! 평상복을 입고 나가서 평범한 사람처럼 시장 한 바퀴 돌고 오기.”
내 말에 이그니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런데도 불만을 내뱉지 않는다.
싫을 때는 싫다고 말을 하면 좋으련만.
‘물러줄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것만큼은 양보할 마음이 없다.
“그 증거로 그날그날 이그니가 뭔가 사고 싶은 걸 하나씩 사 오는 거야.”
“그건 명령입니까?”
“널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응. 이건 명령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그가 입을 다물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지긋이 바라봐오는 눈동자에 결심이 흔들릴 것 같다.
애써 입매를 꽉 굳혔다.
“타인을 위협하거나 죽이지 말 것. 물론 네가 위험해졌을 때는 별개의 이야기야. 평소에는 그냥 평범하게 산책만 하는 거야.”
“…….”
“대답!”
“……알겠습니다.”
이그니가 한참 만에 떨떠름함이 역력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이그니의 대답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곤 작게 웃어 보였다.
“좋아. 약속했어.”
“네.”
이그니의 대답을 듣고서야 다시 벽에 기댔다.
멀리서 페델리우스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벽에 기댔던 몸을 다시 냉큼 뗐다.
페델리우스도 나를 봤는지 가까워지는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오시리아, 여긴 왜 나와 계십니까?”
“오늘은 라비엘이 아파서. 이그니도 돌아왔길래 조금 빨리 나와서 너 기다렸어.”
“그러셨습니까? 춥진 않으시고요?”
“이 날씨에 춥기는.”
작게 웃자 페델리우스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붙잡아왔다.
그러자 이그니가 반대쪽 손을 붙잡는다.
고개를 들어 이그니를 올려다보니 페델리우스와 이그니가 내 머리 위에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음. 눈만 마주치는 건 아닌가.’
싸우고 있나?
아니, 그건 아니고. 눈을 마주치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듯한 느낌인데, 분위기가 그다지 좋진 않다.
‘그래도 예전처럼 으르렁거리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은데.’
싸우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짧게 고민하는 도중 페델리우스의 입술이 열렸다.
“놔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내가 좋아하는 분이시다.”
“나도 주군을 좋아한다.”
페델리우스의 살벌한 말에 이그니가 무덤덤하게 맞받아쳤다.
어찌나 담담하게 대화가 오가는지 그들이 무슨 종류의 대화를 하는지도 눈치챌 수가 없었다.
“나는 너 따위보다 훨씬 더 이분을 좋아한다.”
“주군께 목숨을 바칠 수 있으니 내가 더 좋아하는 게 되겠지.”
어, 얘들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당황스러운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한껏 젖혔다.
위에 했던 생각 취소. 완전히 싸울 분위기다.
으르렁거리지 않는다는 건 나만의 꿈이었을 확률이 높다.
“나는 오시리아를 누구보다 사랑한다.”
“…….”
페델리우스의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얘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그니도 말을 잃은 듯 대답 없이 그를 쳐다봤다.
“결국, 고백했군.”
이그니가 손이 붙잡힌 채 중얼거렸다.
응……? 얜 또 무슨 소리야.
“너 알고 있었어? 이그니?! 페델리우스가 날, 사, ……그거 한다는 거.”
“그가 주군을 보는 시선이 마치 기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뭇 시선들과 닮아 있었습니다.”
이그니가 아주 담담하면서도 건조하게 대답했다.
“……뭐?”
내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내가 내뱉는 반문에 페델리우스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의 입이 더 벌릴 수 없을 정도로 넓어졌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페델리우스가 버럭 언성을 높이며 이그니의 멱살을 붙잡았다.
물론 내 손을 여전히 붙잡은 채였다.
페델리우스의 손길에 이그니의 발이 허공에 떠올랐다.
물론 이그니 역시 내 손을 붙잡은 채였다.
이게 뭐 하는 거지…….
멍하니 두 사람이 하는 양을 바라보다가 페델리우스와 이그니의 손을 꽉 마주 잡았다.
페델리우스와 이그니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나를 향했다.
두 사람의 손은 온기가 미묘하게 달라서 어느 쪽이 누구의 손인지 금세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싸우지 말자.”
“……싸우지 않았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냉큼 고개를 저었다.
이그니도 열심히 놀리던 입술을 다물었다.
‘그래도, 좋네. 이렇게 같이 있는 것도.’
언제나 아콰밖에 없던 일상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도 아니고. 품에 전부 안을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것들이 가득 들어찼다.
“가자. 페델리우스, 이그니.”
냉큼 두 사람을 끌어당기니 페델리우스와 이그니가 순순히 끌려왔다. 두 사람의 놀란 눈동자를 보다가 옅게 웃었다.
“어디를 가십니까?”
“집이지.”
이그니의 물음에 대답했다.
당연하다는 듯 나온 단어에 잠시 망설였지만 내가 힘껏 끌어당기자 고분고분 따라왔다.
“이그니, 이번엔 어디에 다녀왔어?”
“아. 아직 제국에 잔당들이 남아있어서 그것들을 처리하고 왔습니다.”
“……용병 일은?”
“그게 용병 일로 받은 의뢰입니다.”
“누가?”
걸음을 뚝 멈추며 묻자 이그니가 입을 다물었다.
굳이 이그니에게 용병 일을 맡긴 사람이 있다고?
그것도 트럼프 제국의 잔당 처리를 위해서?
“누구야?”
“엘레나 재상 각하입니다.”
대답을 한 건 이그니가 아니었다.
옆에서 들려온 페델리우스의 목소리에 눈이 절로 둥그레졌다.
엘레나 재상? 그가 왜 갑자기 이그니를 이용해?
‘이그니랑은 제대로 된 접점도 없었을 텐데…….’
내 의아한 시선을 눈치챈 페델리우스가 미간을 좁힌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소개해드렸습니다.”
“주군께 위협이 될 것 같다고 판단했고 주군께서 제가 한동안 떠나시길 바라는 것 같아서 의뢰를 받아들였습니다.”
“……아.”
숨이 멈췄다.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 이야기가 뒤에서 오가고 있을 거라는 것도, 바람을 쐬라고, 다른 일을 하라고 했던 내 말이 또다시 이그니의 족쇄가 됐을 거라는 사실도.
모두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넌, 또 나를 위해서 움직였구나. 이그니.”
얼마나 그를 길들여놨으면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됐을까?
왜 누군가를 모시지 않으면 삶의 의미가 없는 사람이 됐을까?
“…….”
대답 없는 이그니를 쳐다보다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고마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담담하게 대답하는 이그니의 말에 속이 아팠다.
슬쩍 페델리우스를 올려다보니 그도 미간이 좁아진 채였다.
나는, 네가 조금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차마 다시 내뱉지 못한 말이 쉼 없이 입 안을 맴돌았다.
‘그는 큰 화재로 양친과 식구를 모두 잃었거든요.’
머릿속에 떠오른 콘니르의 말에 자연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오늘도 페델리우스와 함께 자고 싶다고 권유를 해볼 생각인데…….
내색하지 말아야 해. 페델리우스가 말해줄 때까지는 모르는 체해야 했다. 언젠가 조금 더 가까워지면 분명 말해줄 테니까.
‘말, 해줄까?’
언제까지나 나를 어린아이로 보는 페델리우스가?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페델리우스에게 나는 언제나 지켜주어야 하는 존재다.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약하지 않은데 페델리우스는 나를 마치 아주 연약한 아이처럼 돌본다.
달칵, 문이 열리고 페델리우스가 들어왔다.
머리가 축축하게 젖은 것을 보니 이제 막 씻고 나온 듯했다.식사도 마치고 이그니와도 그 이상 싸우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안도해야 할 일들뿐이다.
왜, 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
“슬슬 주무실 시간입니다.”
“오늘도 옆에서 잘 거야?”
“아……. 봐주십시오. 오시리아의 곁에 누워있으면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페델리우스의 말에 눈이 절로 크게 뜨였다.
왜?
물어야 하는데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이 쉽게 튀어나가지 않았다.
“귀에 들리는 거라곤 심장 소리밖에 없습니다.”
“……아. 내가, 싫은 게 아니고?”
“예? 절대 아닙니다. 당신의 전부를 가지고 싶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축축한 머리카락을 한 채 다가오는 페델리우스가 자연스럽게 눈높이를 낮췄다.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내 손을 붙잡고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오늘도 여전히 좋아합니다. 오시리아.”
“…….”
이 애정은 대체 어디에서 샘솟아서 어디로 가는 걸까?
내게 와서 그걸 다시 돌려받지 못하면 그는 언젠가 지쳐서 포기하게 되는 건가?
“응, 고마워.”
꽉 멘 목을 간신히 달싹였다.
좋아한다. 좋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페델리우스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페델리우스. 나는 아직, 그게 어떤 감정인지 잘 모르겠어.’
내가 해줄 수 있는 답이란 고작 고맙다는 말뿐이었다.
페델리우스가 느끼는 감정이 조금이라도 이해된다면, 거짓말이라도 해줄 수 있을 텐데. 그러면 기뻐해 줄까?
“오늘도 손 잡고 잘까?”
“잠이 오지 않으실 것 같습니까?”
“……응.”
고개를 끄덕였다.
페델리우스는 아주 조금 곤란한 듯한 표정을 해 보였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그를 끌어안았다.
페델리우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알면서도 일부러 어깨에 얼굴을 부비고 조심스럽게 등을 토닥였다.
“사랑……을 나는 잘 모르지만 네가 행복하길 바라. 그러니까 힘든 일이 있으면 나한테도 얘기해줘.”
“……오시리아?”
“네 상담이라면 언제든지 두 팔 벌려 환영이니까. 네가 나를 구원해줬던 것처럼 나도 널 지켜줄 수 있게 해줘.”
페델리우스가 가슴 속 가득 담아놓은 것을 하나씩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어떻게든지.
“너에 관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다 궁금해. 네가 뭘 했는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어린 페델리우스는 어땠는지도 전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저 궁금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페델리우스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불쾌한 기분이 든다.
페델리우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건, 오시리아도 제게 관심이 있으시다는…… 그런 말씀이십니…….”
“주군.”
페델리우스의 말을 자르고 이그니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대화를 나누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확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왜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는 거야?’
마른 손으로 얼굴을 여러 차례 쓸어내리곤 뒤에 부복하고 앉은 이그니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그니? 갑자기 왜?”
“위험에 처하신 것 같아서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응? 위험? 무슨……. 그냥 페델리우스랑 대화를 한 것뿐인데.”
내 말에 이그니가 말없이 페델리우스를 올려다봤다.
대화를 나누니 올랐던 열도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함께 주무실 예정입니까?”
“응. 침대도 넓고, 혼자 자는 것보단 누가 있는 게 좋아서.”
내 말에 이그니의 미간이 좁아졌다.
어쩐지 한층 더 메마른 이그니의 눈동자가 곧장 페델리우스를 향했다.
시선을 받은 페델리우스의 표정이 흉흉하다.
‘얘들은 또 왜 이래?!’
안 아프던 머리가 다시 지끈거리는 것 같다.
이마를 짚은 채 말없이 두 사람을 훔쳐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그니. 뭐가 위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걱정해줘서 고마워. 다행히 나는 멀쩡해.”
양팔을 활짝 벌려 보이며 말했다.
이그니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난 잘 거니까 위험할 일이 없어. 너도 돌아가서 쉬어도 돼.”
“얼른 나가지 그래? 개가 주인의 잠자리에 멋대로 들어오면 쓰나.”
한껏 비꼬는 페델리우스의 목소리가 퍽 위험스럽다.
하하. 마른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더 싸움이 나기 전에 이그니에게 재차 돌아가 쉬라고 권유하려는데 이그니의 입술이 벌어졌다.
“저도…….”
“응?”
“저도 함께 자고 싶습니다.”
이그니의 제안에 눈이 절로 동그래졌다. 매번 어느 정도 거리를 두던 이그니였는데…….
“나랑?”
“네.”
“왜? 혼자 자는 편이 더 좋지 않아? 편히 쉬고. 날 지키려고 하는 거면 나는 괜찮아.”
이그니가 잠을 잘 때까지 불편하게 있는 건 바라지 않는다.
내가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치자 이그니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곤 페델리우스를 한 번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주군과 함께 자고 싶습니다. 저도 어둠 속에 혼자 있는 건 조금…….”
이그니가 말끝을 흐렸다.
여전히 담담하고 무심한 표정인 데다 건조한 목소리였다.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그니가 자기 속마음을 얘기하는 건 처음인데…….’
내리깐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셋이서 자자. 페델리우스, 괜찮아?”
“……예? 아뇨. 제 생각엔 침대가 그렇게 넓을 것 같지는 않…….”
“감사합니다.”
이그니가 어느새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는 침대 한가운데에 누워있었다.
페델리우스의 입이 경악으로 떡 벌어졌다.
‘와, 빠르네.’
이그니의 속도에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평소에도 빠르고 기척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유독 빨랐다.
“그렇구나. 페델리우스. 오늘은 이그니도 같이 껴서 자도 될까? 이미 누웠지만…….”
“아…….”
페델리우스의 시선이 여전히 누운 이그니에게 고정된 채였다.
아무래도 그는 셋이서 자는 건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넓긴 하지만 셋이서 자면 굴러다닐 공간이 조금 부족하니까.’
물론 자기 불편할 것 같지는 않지만.
페델리우스가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럼 페델리우스. 오늘은 방에 돌아가서 자도 돼.”
“……예?”
페델리우스가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오늘따라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것처럼 이상하다.
미간을 좁히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그니가 있으니까 페델리우스 혼자 자도 돼. 셋이서 자면 불편할 테니까.”
다시 한번 페델리우스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페델리우스가 나를 한 번 보고 침대 위 이불을 곱게 덮고 있는 이그니를 한 번 보고 다시 나를 쳐다봤다.
“아니, 저기……. 허.”
더듬거리던 페델리우스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시선이 이그니에게 향했다.
페델리우스와 눈이 마주친 이그니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나 피곤해.”
뚱하니 대답하자 페델리우스가 그제야 나를 다시 쳐다봤다.
“불편하다면 강요하진 않을게, 페델리우스. 세 명이서 자기에는 침대가 조금 좁을지도 모르니까.”
“……아뇨.”
“그럼 나는 잘……. 응?”
“괜찮습니다. 자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페델리우스가 환하게 웃으며 냉큼 대답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한껏 휘어진 눈꼬리와 입꼬리가 보기 드물었다.
그러나 이를 악문 듯 잇새 사이로 새어나오는 목소리는 살벌했다.
‘웃고 있는데 왜 살벌하지?’
분명히 페델리우스는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살기가 흐르는 것 같다.
저렇게 환하게 웃는 페델리우스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응……. 그러면 얼른 자자.”
“예. 옆으로 비켜, 개.”
페델리우스가 발을 들어 이그니를 꾹 밀어냈다.
물론 이그니는 가운데에 누운 채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지만.
“먼저 누운 사람은 나니 그쪽은 아쉬운 대로 알아서 자리를 잡도록 하지. 주군께선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이그니가 왼쪽 자리를 넉넉하게 비워주며 말했다.
페델리우스가 누울 곳이 굉장히 좁아 보였다.
어색하게 웃자 이그니가 내 손목을 붙잡고 조심스레 끌어당겼다.
“얼른 누워서 주무십시오. 피곤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아. 응. 고마워.”
고개를 숙인 페델리우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그니가 페델리우스에게 준 자리가 상당히 비좁았다.
어린아이가 눕기에도 빡빡해 보일 정도였다.
“이그니. 페델리우스의 자리가 좀 좁은 것 같은데.”
이그니가 대답 없이 눈을 감는다.
피곤하다는 듯 색색거리며 숨을 내쉬는 그를 쳐다보다가 페델리우스를 쳐다봤다.
“괜찮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대답하더니 성큼성큼 내 쪽으로 걸어왔다.
다가오는 페델리우스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살짝 살펴보니 이그니도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페델리우스의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짓궂은 악동의 미소였다.
페델리우스가 나와 이그니 사이를 비집고 드러누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키지 않는 이그니의 몸을 반 정도 깔고 누운 거지만.
아슬아슬한 거리 덕분에 페델리우스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조금만 밀쳐지면 그의 코와 이마에 맞닿을 것처럼.
“비켜라.”
이그니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네가 비키지 그러나.”
“…….”
이러다 큰일이라도 날 것 같다.
코앞까지 다가온 페델리우스 덕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도 잠시였다.
순식간에 감정이 싸하게 식어버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건, 어떤 의미로도 좋지 않다.
‘피곤해.’
조금만 조용해진다면 분명히 수마가 몰아닥쳐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조금’이 어렵다.
그 ‘조금’이.
꾹 짓누르는 페델리우스의 몸에 이그니의 분위기가 점점 어두워진다.
그럼에도 페델리우스는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짜증 나.”
울컥 차오른 말이 결국 입 밖으로 새어나갔다.
페델리우스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이그니는 페델리우스에게 가려서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둘 다 나가!”
허공에서 생성된 푸른 물줄기가 두 사람을 꽁꽁 묶었다.
물의 힘을 이용해 둘 다 밖으로 던져버렸다.
세상이 조용해졌다.
그제야 나는 이불 속에 파고들어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준비를 다 하셨으면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 응.”
페델리우스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끌어당기면서 들어 올린 페델리우스의 얼굴이 부어있다. 작은 상처도 보였다.
“얼굴이 왜 이래?”
“미친개가 길을 잘못 들어서 쫓아내느라 고생을 좀 했습니다.”
고민하던 페델리우스가 묵묵하게 대답했다. 도대체 얼마나 미친개였기에 얼굴이 이 꼴이야? 패싸움에라도 잘못 걸린 줄 알았다.
“개는?”
내 물음에 페델리우스가 말없이 웃었다. 개는? 다시 한번 물었지만, 입술은 열릴 기미가 없다. 뚱하니 입을 닫았다.
“이그니.”
“네. 주군.”
이그니에게도 전할 말이 있어서 불렀는데 아니나 다를까, 곧장 내 앞에 나타났다. 어제 쫓아냈는데 둘 다 그걸 신경 쓰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다행이야.’
피곤해서 질러놨지만, 아침에 일어나서는 정말 후회했으니까.
“내가 신전에서 돌아올 때까지 여기에 있을래? 아마 신전 안으로는 들어가기 힘들 것 같아서.”
라비엘의 격한 거부반응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이그니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이그니를 신전 안으로 데리고 가는 건 라비엘에게도 못 할 짓인 듯했다.
‘이그니가 사람을 죽인 건 사실이니까.’
태어나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를 손에 묻혔는지는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짐작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그니는 내내 핏빛으로 물든 시체가 낭자한 길목에서 살아왔을 테니까.
하지만 그 때문에 이그니의 삶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라비엘이 이그니를 경계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건 이그니의 탓이 아니다.
‘근데 얘도 얼굴에 상처가 났네.’
미친개를 쫓아내려고 둘이 힘을 합쳤나?
그랬으면 그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오늘은 으르렁거리진 않는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상황이 더 심각해진 것 같기는 하지만 싸우지 않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이그니 널 데리고 갈 수는 없는데……. 알다시피 라비엘이 네게 좀 민감하게 굴어서.”
“괜찮습니다. 신전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괜히 밖에서 그럴 필요 없어. 신전은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고 신전 일과가 끝날 시간이 되면 페델리우스가 데리러 오니까…….”
“기다리겠습니다.”
내 말에도 이그니는 굳건했다.
본인이 싫다는데 이 이상 뭘 더 강요하겠느냐마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쳐다봤다가 이내 주억였다.
“좋아. 대신 그사이에 오늘 약속한 거 하고 오기. 어때?”
“……알겠습니다.”
이그니가 묵묵히 대답했다.
그러면서 페델리우스를 슬쩍 흘겨보고는 나를 쳐다봤다.
“무슨 약속을 하셨습니까?”
“응? 그건…….”
꽈악, 이그니가 내 손을 살며시 쥐어왔다.
슬쩍 이그니를 쳐다보자 이그니가 고개를 젓는다.
고개를 젓는 이그니를 한번 보고는 다시 페델리우스를 살폈다.
어색한 웃음이 표정 위에 덧씌워졌다.
‘부끄러운가 보다.’
부끄러움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아는 감정이다.
페델리우스를 만난 이후로 홧홧해졌던 수많은 기억에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손을 들어 황급히 눈을 가리고는 한숨을 삼켰다.
“비밀이야, 비밀. 페델리우스.”
“…….”
암. 시장을 산책하면서 가지고 싶은 걸 사오는 건 부끄러울 수도 있다.
특히나 이그니는 단 한 번도 그렇게 평범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걸 더 부끄럽게 할 순 없지.’
나처럼 긴 과거의 추억이 되게 할 순 없었다. 그것도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새까만 추억. 떠올리며 다시 한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페델리우스의 표정이 문득 어두워진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