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99)

* * *

‘오늘도 라비엘이 나오지 않았네.’

몸이 많이 아프다고 했는데 아직도 아픈 모양이다. 페델리우스는 어쩐지 한껏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멀어져갔다.

‘요즘 페델리우스의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한 것 같아.’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라비엘은 나보다 아는 게 많으니 물어보면 분명 도움이 되겠지만…….

‘미안하지만 오시리아, 조금 피곤해졌습니다. 대화는 나중에 하도록 해요. 오늘은 돌아가 주시겠어요?’

부드러운 목소리였고 다정했지만 그건 명백한 거절이었다.

그런 거절을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라비엘이였기에 그의 거절은 내심 충격이었다.

그도 그럴 게 라비엘은 무엇을 잘못해도 용서해줄 것 같았으니까.

“화가 난 건 아니겠지?”

“누가요?”

“누구긴, 라비…….”

말하던 입술이 절로 꾹 닫혔다.

익숙하면서도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

거기까지 생각하자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적갈색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와 살랑거렸다.

“넌 또 여기 왜 왔어?”

“다음에 또 찾아뵌다고 했잖아요.”

그런 것치고는 채 이삼 일도 지나지 않았다.

제멋대로 구는 라비엘의 행보에 구겨진 얼굴을 펴지도 않은 채 그를 노려봤다.

“나 오늘 기분 별로니까 돌아가.”

“에이, 신녀님 너무하신다. 페델리우스에 대해 궁금한 거 아니었어요?”

짓궂게 웃어 보이는 콘니르를 무심하게 쳐다봤다.

정말 장난기 넘치게 웃는 존재를 알고 있다.

짓궂으면서도 장난기 넘치는, 위험한 일을 할 때도 짓궂게 웃는 아콰. 나는 십수 년간 그것을 봐왔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콘니르의 저 웃음은 가짜다.

비뚜름하게 올라간 입술도, 억지로 휜 눈동자도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만들어낸 가면과 같았다.

“너는 왜 억지로 웃어? 내게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하면 될 텐데.”

사람들은 늘 이상하다.

원하는 걸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았다.

참고 또 참거나 혹은 한참을 돌리고 돌려서 말한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서로 쉽게 기분을 상하는 듯했다.

원하는 것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을 왜 두려워하는 거지?

“솔직하게 말하는 건 무서워?”

무섭다면 그 감정조차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

감정을 내뱉기가 무서워서 말을 못 하겠다고 하면 분명 상대는 이해해주지 않을까?

전달되지 않는 감정만큼 무의미하고 안타까운 건 없으니까.

입을 열어 전해도 생각하는 것의 반의반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그것을 말하지 않고 전한다는 건 나로선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흔들리는 콘니르의 눈동자를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뭘 원해? 내게 원하는 게 있어?”

신전 본관으로 향하는 길 한가운데에서 뭐 하는 짓인가 싶지만.

대답 없는 콘니르를 보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랑 살아가는 건 정말 힘드네.’

그 사람 기분이 나쁜지 아닌지 쉴 새 없이 확인해야 하고 원하지 않는 사람이랑도 엮이게 된다.

내가 하는 행동이 꼭 상대의 마음에 든다는 보장도 없었다.

생각해도 생각대로 되는 일도 없었고 원한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잘 굴러가 주지도 않는다.

“시간 내줄까?”

페델리우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건 눈앞의 남자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내 물음에 콘니르가 나를 천천히 살폈다.

“그래 주신다면 영광이죠.”

콘니르는 웃지 않는 얼굴로 내게 허리를 굽혀왔다.

장난기가 어린 짓궂은 웃음은 어딘가로 보내버린 것처럼.

일전에 알렉과 함께 갔던 본관 뒤쪽의 뜰로 향했다.

넓진 않지만 작은 티타임 의자도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내가 앉자 콘니르가 맞은편에 앉았다.

“내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제가 신녀님의 뭘 믿고 말을 해야 하나요? 제 얘기가 페델리우스한테 흘러들어간다는 보장도 없는데.”

콘니르가 삐딱하게 되물었다.

앞으로 살짝 기울어진 몸과 적갈색 머리카락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살짝 탄 듯한 피부에 검을 잘 다룰 것처럼 보였던, 페델리우스를 애칭으로 불렀던 여자.

이제 알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두 사람은 닮아 보였다.

“너, 프루니아라고 알아?”

내 물음에 콘니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제 여동생입니다. 그때 저택에 찾아갔을 때 만나셨다고 들었는데 제 여동생은 어땠나요? 사랑스럽지 않나요?”

휘어진 눈동자가 처음으로 진짜처럼 보였다.

부드럽게 끌어올려진 입꼬리를 쳐다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끄덕임에 그의 눈이 또 동그래졌다.

생각보다 감정표현이 얼굴로 잘 드러난다.

게다가 자기가 물어놓고 놀라는 건 또 뭐야.

“검을 잘 다룰 것 같아서 부러웠어. 나는 검 같은 건 못 들어서. 페델리우스도 못 들게 하고.”

뚱하니 말하자 콘니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이그니에게 독침을 쓰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걸 깜빡했다.

오늘 페델리우스 없을 때 슬쩍 물어봐야지.

“검을 배우고 싶어요? 신의 힘이 있는데?”

“너무 눈에 띄잖아. 힘만 쓰면 주변이 새파래져서 어디 밀실인 공간에서나 사용해야 해.”

“그래서 검을……? 누굴 죽이려고 하는 건가요?”

“혹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죽이는 건 싫…….”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닫았다.

죽이는 건 싫지만, 수없이 죽였다.

직접 손에 닿지 않았더라도 가진 힘을 사용해서 죽였으니 그건 분명 내 죄였다.

“그 여자가 네 동생이었구나.”

어쩐지 눈매나 머리카락 색이나 눈동자가 완전히 빼다 박은 듯했다.

“그 여자, 페델리우스를 좋아해?”

한껏 휘어진 기쁨의 눈동자.

그때를 생각하면 다시금 울렁울렁 요동친다.

여자는 페델리우스를 무척 좋아하는 듯했다.

콘니르가 말없이 웃었다.

나와 시선을 정확히 마주친 채로.

“그렇게 보였나요?”

“응. 그렇게 보였어. 오자마자 페델리우스를 펠이라고 부르며 끌어안았거든.”

“펠…….”

느릿하게 말을 늘인 콘니르의 입술이 달싹이다 꾹 여물어졌다.

그는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을 꾹 한 번 감았다가 떴다.

“페델리우스한테 무슨 잘못을 했어? 널 보기 싫은 사람이라고 했거든.”

“와, 보통 그런 건 상대를 생각해서 말하지 않는 거 아니던가요?”

콘니르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 상처받았다는 듯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려 보였다.

눈을 가늘게 떴다.

“말하지 않으면 너는 평생 페델리우스가 널 뭐라고 생각하는지 모를 거잖아? 차라리 말해주는 편이 좋지 않아?”

모르는 것보다 아는 편이 어떻게든 대화의 여지를 만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모르니까 이유를 알려달라고 징징거리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한다.

“내가 네게 사실대로 말해줘서 마음에 들지 않아? 사람의 마음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묻는 거야.”

페델리우스를 매개체로 어떻게든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었지만 아직은 어색하고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훨씬 더 많았다.

“……신녀님은 강하신 건지 둔하신 건지 잘 모르겠네요.”

“욕이야?”

“욕 반 칭찬 반입니다.”

콘니르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가 한층 풀어진 표정으로 옅게 웃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치채셨을진 모르겠지만, 저와 프루니아와 페델리우스는 제법 오래된 친우였습니다.”

콘니르가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친구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됐어? 싸운 거야?”

“차라리 싸웠으면 조금 더 나았겠지만요.”

콘니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싸운 게 아닌데 사람과 사람 사이가 이유 없이 이렇게 멀어질 수도 있는 건가?

잠시 고민 끝에 미간을 좁혔다.

내 의아함을 눈치라도 챈 듯 콘니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페델리우스와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약속?”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제 손으로 그의 부모님을 죽이게 됐습니다. 가문의 식솔들까지 전부.”

콘니르의 입술을 타고 나오는 말을 전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친구의 부모를 죽였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

페델리우스를 낳아준 부모를 죽였다고?

크게 뜬 눈으로 콘니르를 살폈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은 진지한 눈동자로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왜…….

“너 왜, 페델리우스 앞에 나타났어?”

그 말이 사실이라면 왜 원망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 상대 앞에 나타난 거지?

죽고 싶어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페델리우스는 그를 보기 싫은 사람이라고 표현했을지언정 죽이고 싶다거나 복수하고 싶다고 하진 않았다.

나를 끌어안던 페델리우스는 분명 괴로워 보였지만 그 안에 있는 감정은 원망이라기보단……

자책감에 가까웠다.

부모가 죽임을 당했는데 상대를 원망하지 않는 페델리우스와 스스로 친구의 부모를 죽였다고 말하는 콘니르.

누구의 말이 옳은 거지?

“후회해? 지키지 못한 걸.”

“당연하지만, 후회합니다.”

입을 열던 콘니르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긴 한숨을 내뱉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장난스럽게 보였던 남자가 그제야 조금 진지하게 보였다.

뭐라고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런 관계를 만나보는 건 난생처음이었으니까.

“그러나 같은 상황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마, 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왜?”

“……제게도 소중한 것이 있었으니까요.”

콘니르가 눈꺼풀을 한껏 내리깐 채 대답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살폈다.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묘하게 페델리우스를 닮았어.’

축 처진 모습이 특히나 그랬다.

귀가 달려있다면 한껏 땅으로 처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다가 결국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그래서 내가 뭘 해줬으면 해서 쫓아다니는데?”

“그와 얘기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페델리우스는 널 별로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데? 그냥 서로 멀리 떨어져서 잊은 채 살아가면 되는 거 아니야?”

굳이 부딪치지 않으면 페델리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멀쩡히 살아갈 수 있을 거다.

그가 나타날 때까지도 페델리우스는 평범한 삶을 살았으니까.

“신녀님이 만약 페델리우스에게 큰 실수를 했고 그가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떠날 수 있겠습니까?”

콘니르의 말에 멍하니 그런 상황을 떠올렸다.

페델리우스가 얼굴을 굳힌 채 집에서 나가라고 한다면…….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건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고 만약 그런 일이 닥친다면 울지 않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안 돼. 못 떠나. 잘못했다고 빌 거야.”

얼굴을 홱 구긴 채 대답했다.

잘못했다고 빌어야지. 잘못했으니 잘못했다고 하는 건 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페델리우스가 싫어하면…….

글쎄. 정말로 나가라고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느릿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페델리우스가 옆에 없으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을 거다.

이제는 정말 갈 곳이 없으니까.

혼자 살겠다고 마음먹었던 때는 어디로 갔는지 페델리우스가 없으면 이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과했어?”

“했죠. 오래전에, 수백 번도 더.”

“페델리우스는 널 용서하지 않았구나.”

내 말에 콘니르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웃는 것으로 내 추측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해줬을 뿐.

“그러니 제대로 다시 한번 대화다운 대화를 해보고 싶어서요. 그래도 안 된다면, 정말 그가 원하는 대로 서로 모른 척 살아가려고 합니다.”

“난, 잘 모르겠어. 네가 어떤 감정인지도, 페델리우스가 어떤 마음으로 네게 그런 말을 했는지도.”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마땅히 답을 찾지 못했다.

어떤 감정이어야 자신을 싫어하는 상대의 눈을 보고 다시 대화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지?

“생각할 시간을 줘.”

“그래요. 어차피 신녀님이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니까.”

어깨를 으쓱인 콘니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 가라앉은 눈동자가 어쩐지 힘이 없어 보였다.

“종종 이렇게 찾아올게요.”

“이 시간대라면 괜찮아. 다른 시간대에는 절대 안 돼.”

이야기를 들으니 페델리우스와 절대로 얼굴을 마주하게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도 생각이 필요했다.

그리고 결정한다면, 페델리우스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좋을지도 몰랐다.

“나는 라비엘한테 다시 가봐야 해서.”

“그러세요.”

어깨를 으쓱한 콘니르가 허리를 살짝 굽혀 보였다.

그것조차 장난스럽게만 보여서 눈을 쭉 가늘게 뜨고 흘겨봤다.

“이전에 보니 살기가 굉장하던데 사람을 많이 원망하셨나요?”

“무척이나.”

“그런데도 용케 제 부탁을 들어주려고 하시네요.”

“내가 원망한 건 트럼프 제국의 인간들이야. 네가 아니니까. 굳이 너한테 짜증을 풀어낼 정도로 바보 같고 한심하지 않아.”

사람은 여전히 싫지만, 그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 페델리우스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만으로도 조금 달가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당신을 바뀌게 한 건 페델리우스인가요?”

“……맞아. 페델리우스가 내게 모든 걸 줬어. 단 한 번도 겪어보지도, 경험해보지도 못한 것들을 전부, 그가 내게 줬어.”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겠다고 마음먹었다. 페델리우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페델리우스가 안다면 절대 그럴 필요 없다고 하겠지만.’

검을 가르쳐 달라는 것도 절대 안 된다고 했으니.

“페델리우스는 날 아직도 어린애로만 봐. 나를 지켜주려고만 해.”

“더는 뭐든지 잃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뚱한 내 표정을 보더니 콘니르가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들썩이는 어깨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랑 대화하면 내가 멍청해지는 것 같아.”

“그건 너무하네.”

툴툴대는 목소리를 듣다 냉큼 몸을 들렸다. 신전의 본관은 바로 코앞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콘니르가 손을 살살 흔들고 있었다.

민망함에 볼을 긁적이다가 대충 손을 마주 흔들어주곤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갔다.

“라비엘 오늘은 멀쩡하려나.”

익숙한 길을 따라 라비엘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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