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99)

* * *

“공식 발표는 다음 달 초로 예정하고 있습니다. 각국에서 사절단을 보내겠다는 소식이 승전보를 올린 이후로 계속 오고 있고요.”

“음, 그래?”

소파에 흐트러진 채 누운 왕이 꼿꼿하게 선 엘레나 재상의 보고를 들었다.

오늘도 그의 호위를 맡은 페델리우스 역시 엘레나 재상의 반대쪽에 서 있었다.

“제대로 안 들으실 겁니까?”

묵묵하게 보고를 읊던 엘레나가 결국 주먹을 쥔 채 이를 악물었다. 잇새로 새어나오는 목소리가 퍽 살벌했다. 페델리우스는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소름에 한숨을 삼켰다. 이글거리는 엘레나의 분위기가 공기를 타고 물씬 느껴졌다.

왕이 슬쩍 눈을 치켜뜨며 위쪽에 서 있는 엘레나를 쳐다봤다.

“열심히 잘 듣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인가. 엘레나 재상. 내가 오랜만의 전투에 지쳤다고 했잖나.”

“같은 핑계가 한 달이 넘게 지속하면 제 인내심에도 한계가 오는 법입니다만.”

살벌한 목소리에도 왕이 어깨를 으쓱였다.

비단결보다도 더 고운 푸른색 머리카락이 바닥을 청소하듯 쓸고 있었다.

여전히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인 태도에 엘레나의 머릿속에서 마지막 이성이 뚝, 끊겼다.

“……아.”

말하던 엘레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엘레나가 옅게 웃었다.

“네. 마저 읊겠습니다.”

순순히 입을 여는 엘레나를 보던 왕의 눈이 의아함에 물들었다. 페델리우스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살폈다.

“각국 사절단은 인원을 보고 바로 승인을 내리고 있고 이미 출발한 나라의 사절단도 있습니다. 사절단들을 맞이할 준비도 바짝 하고 있고요.”

“흐음…….”

“트럼프 제국은 공식적으로 자르딘 왕국의 속국이 되었고, 곧 뛰어난 관리들을 색출해 정리하러 보낼 예정입니다.”

엘레나의 말을 들은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태도는 불량하기 그지없었다.

그 자세가 왕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게 그들의 가장 큰 불만이었지만.

“다음 달 초 큰 행사와 함께 자르딘 왕국을 정식으로 <자르딘 제국>이라고 명명할 것이며, 모범수들을 기준으로 특별 사면이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담담히 이야기를 읊어나가는 엘레나는 더 이상 왕의 성의 없음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보고서만 읊어갔을 뿐.

그제야 왕의 시선이 떨떠름함으로 바뀌어 엘레나에게 향했다.

“죄수들 목록은 탁자 위에 올려두겠습니다.”

“아, 그…….”

“그 외 진행 중인 사항은 딱히 특별한 건 없으니 자잘한 보고는 저의 선에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잘하고 있…….”

“제국 승격으로 인한 파티에 관해서는 담당 부서에 일임해두었고 페델리우스 경을 필두로 호위를 평소보다 두 배 강화할 예정입니다.”

왕의 말을 무심하게 잘라낸 엘레나가 정말 기계적으로 굴었다.

페델리우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왕이 미간을 좁혔다.

‘일 났군.’

이건 그녀가 정말로 화났다는 신호다. 페델리우스가 슬쩍 왕을 살폈다.

왕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애초에 단 한 번도 저런 식으로 말을 끊었던 적이 없던 엘레나다.

물론 왕의 말을 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끊기니 그도 기분이 나빠지려던 참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페델리우스의 피부를 따끔하게 만들었다.

‘……오시리아가 보고 싶어졌어.’

적어도 이 집무실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았다.

페델리우스가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무리 내가 귀히 여긴다고 해도 자꾸 내 말을 잘…….”

“그리고!”

한껏 가라앉은 왕의 말을 또다시 자른 엘레나가 내리깔았던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입을 열었다.

“제국으로 승격하는 행사가 끝나면 재상직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살벌한 엘레나의 말에 공기가 쩍 하고 얼어붙었다.

* * *

집무실을 빠져나온 페델리우스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 먼저 몸을 돌린 건 엘레나 재상이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던 왕이 결국 페델리우스에게도 축객령을 내렸다.

신전으로 그녀를 마중 나가기엔 제법 이른 시각이어서 연무장으로 향하는 도중이었다.

“펠. 좋은 아침이야.”

앞을 가로막은 인영에 페델리우스가 걸음을 멈췄다.

그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프루니아. 연무장까지는 무슨 일이지?”

“집으론 찾아오지 말라고 하니까 연무장에라도 있어야지. 오늘도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와서 다행이네.”

프루니아가 적갈색 눈동자를 휘어가며 옅게 웃었다.

페델리우스의 시선이 프루니아를 한 번 훑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땀이 송송 맺혀 있다.

손에 쥔 검을 보니 대련을 몇 차례 한 듯 보였다.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펠이 돌보고 있다는 황녀, 아니 신녀님은?”

“신전에 가 있다.”

“그렇구나.”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프루니아가 신코로 바닥을 쿡쿡 내리찍으며 한숨을 삼켰다.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어둡네.”

페델리우스 주변의 어두운 공기를 어렵지 않게 감지한 프루니아가 물었다.

페델리우스는 연무장 안으로 들어가며 프루니아를 슬쩍 쳐다봤다.

“아무것도. 네가 신경 쓸 일은 없다.”

“아, 그래?”

프루니아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를 하고는 싶은데 한마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프루니아가 애꿎은 신코를 바닥에 꾹꾹 눌렀다.

“있잖아, 펠이 돌보고 있는 신녀님은 어떤 분이야?”

“강하고 순수하신 분이다.”

“아…….”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신 데다가 생각보다 정도 많으시고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애쓰시는 분이지. 장난기도 많아서 종종 곤란할 때가 있기도 하지만.”

짤막하게 대답만 하던 페델리우스가 처음으로 긴 연설을 늘어놨다. 꺼낼 화제가 딱히 없어서 끄집어낸 물음이었는데…….

‘화제 선택은 제대로 한 건가.’

그런데도 마주 웃어줄 수 없는 이유는 왜일까? 프루니아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페델리우스를 이렇게 만든 걸까.

‘나는 계속 함께 있었는데도 어려웠던 일인데.’

어떻게 발버둥을 쳐도 자신은 언제까지고 친구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손을 꼼지락거리던 프루니아가 애써 얼굴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구나. 좋으신 분인가 보네.”

“무척이나. 내게 과분한 분이시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에 프루니아의 웃던 얼굴에 균열이 갔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그러니까…….”

“……?”

페델리우스의 의아한 표정이 프루니아에게 향했다.

짙푸른 군청색 눈동자가 몸에 닿자 프루니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 나한테도 소개해줬으면 해서!”

그녀가 애써 과장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잠시 프루니아를 쳐다보던 페델리우스가 미간을 좁혔다.

‘분명 여자인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하셨지.’

페델리우스의 시선이 다시 프루니아에게 닿았다.

그가 말없이 프루니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피부 위로 적나라하게 닿아오는 시선에 프루니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쿵쿵거리며 뛰는 가슴을 움켜쥔 프루니아가 애써 심호흡을 했다.

“프루니아.”

“으응. 왜?”

“황녀……. 아니, 신녀님을 만나 뵙고 싶은 건가?”

페델리우스의 질문에 프루니아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질끈 감은 눈의 프루니아는 퍽 곤혹스러운 듯 보였다.

“그럼 부탁을 좀 해도 되겠나?”

“부, 부탁? 으응. 그래. 펠의 부탁인데 뭔들 못 하겠어.”

숙였던 고개를 애써 들어 올리며 프루니아가 대답했다.

그녀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오시리아의 친구가 되어줬으면 하는데, 괜찮겠나?”

“……어?”

페델리우스 말에 프루니아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페델리우스가 그제야 프루니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가 친구가 없으니 제법 외로워해서. 프루니아, 네가 가능하다면 그녀의 친구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아…….”

한껏 쿵쿵거리며 뛰던 심장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어쩐 일로 시선을 제대로 마주하며 대화를 해주나 생각했는데…….

“어려우면 거절해도 좋으니 부담 갖진 않아도 된다.”

“아니, 할게. 근데 왜? 신녀님은 따로 친구가 없는 거야?”

프루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페델리우스의 머릿속에 순간 라비엘이 떠올랐다.

그의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

“글쎄.”

페델리우스가 말을 줄였다.

프루니아가 눈치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문 부탁인데 들어주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거절도 못 하겠지만.’

먼저 좋아해버린 사람이 나쁜 거다. 먼저 마음에 품고 시간이 흘러도 지우지 못했으니 어느 정도의 부당함은 그녀가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프루니아가 애써 웃음을 머금었다.

‘어차피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었고.’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무뚝뚝하고 무심하기 그지없는 페델리우스를 이렇게 무너뜨린 걸까.

고민하던 프루니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오랜만에 대련하지 않을래? 펠.”

“대련?”

“응. 오랫동안 하지 않았으니까. 내 실력도 제법 늘었고. 한번 봐줘.”

프루니아의 말에 고민하던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천천히 검을 뽑자 프루니아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거리를 벌렸다.

얇은 레이피어 두 자루를 뽑은 프루니아가 옅게 웃으며 페델리우스를 쳐다봤다.

검 끝에 닿아오는 페델리우스의 기운에 프루니아가 검을 꽉 쥐었다.

‘역시 페델리우스야.’

날카롭게 벼려진 기운이 여과 없이 프루니아에게 향했다.

프루니아가 먼저 페델리우스의 검을 향해 몸을 날렸다.

페델리우스를 공격하러 달려가던 프루니아의 눈에 막 연무장으로 발을 들이는 오시리아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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