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한참 만에야 프루니아가 제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겠다고 바닥에 찰싹 붙어있을 때와는 제법 다른 모습이었다.
“이제 좀 괜찮아?”
슬며시 묻자 그녀가 퍼드득, 몸을 떨더니 냉큼 고개를 끄덕인다.
“네, 괜찮아졌습니다.”
“야라고는 이제 안 불러?”
“그건, 죄송합니다.”
프루니아가 제 실수를 떠올리며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탓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다시 날게 해볼까?’
생각하다가 프루니아의 눈동자를 보고 마음을 접었다. 또 했다간 무서워할 것이 뻔했다.
나중에 또 해볼 생각이지만.
“괜찮아졌으면 놀러 가자.”
손을 뻗자 프루니아가 떨떠름한 눈동자를 하면서도 순순히 내 손바닥 위에 손을 올렸다.
냉큼 손을 붙잡고 그녀를 끌어당겼다.
‘근데 뭘 하고 놀아야 하지?’
저번에는 시장에 왔을 때 페델리우스를 데리고 메리의 심부름을 열심히 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오늘은 메리가 시킨 심부름도 없고.
“있잖아, 프루니아.”
“예, 신녀님.”
“…….”
호칭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야’라는 소리를 해주는 친구가 제일 친한 친구라고 언젠가 아콰가 알려줬는데.
<계급으로 알아보는 친구사회!>라는 이름의 명강의였다.
물론 그때는 나와 매우 먼 나라의 이야기여서 제대로 듣지는 않았지만.
“야라고 불러도 돼.”
“……예?”
“야라고 불러도 돼. 아니면 오시리아도 좋고. 친구인데 자꾸 신녀님이라고 부를 거야?”
그게 무슨 친구야. 뚱하니 입을 내밀자 프루니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녀가 도통 종잡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근데 프루니아.”
“네?”
“보통 친구들이랑은 뭘 하고 놀아야 해?”
나는 어느새 시장 한복판에 선 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요깃거리가 되어 있었다. 그제야 프루니아가 몰리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냉큼 내 손을 붙잡았다.
“일, 일단 다른 데로 가시죠.”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냉큼 내 손을 끌어당겼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보폭을 따라가기가 퍽 버겁다.
‘내 체력은 대체 왜 이런 거야?’
프루니아는 저렇게 빨리 다니는데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다. 숨이 턱턱 차오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녀는 적당한 골목길에서 멈춰 섰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며 벽에 몸을 기댔다. 프루니아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다행히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짜증 나.’
이렇게까지 체력이 바닥일 거라는 생각은…… 물론 늘 하고 있지만, 같은 여자와 비교해도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정말 신의 힘이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아닌 힘없는 여자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이 드니 괜히 기분이 우울해졌다.
“이제 쫓아오지 않…….”
나를 돌아보던 프루니아가 말을 하다 말고 눈을 가늘게 떴다.
“힘드세요? 그렇게 빨리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이렇게 움직였던 적이 없어서.”
매번 날아다니면 날아다녔지.
몇 걸음 뛰기라도 하면 금세 숨이 차올랐다.
기억을 떠올리며 얼굴을 벅벅 쓸어내렸다.
“아아.”
프루니아의 가늘어진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내려다보는 눈길이 퍽 불순했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 뻔히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진 모르겠지만.’
눈앞의 이가 나를 내켜 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악의와 불순한 시선은 언제라도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그건 어쩔 수 없잖아.’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하라고 할 순 없다.
내가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고 해도 그것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프루니아가 나를 학대하던 사람들처럼 깊은 악의를 품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마음에 안 들지? 프루니아.”
좁은 골목길에서 얼굴을 마주본 채 묵묵하게 물었다.
굳이 티를 낼 생각은 아니었지만, 저렇게까지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으면 모른 척하기도 애매했다.
“네? 무슨…….”
고개를 저으려는 프루니아를 가만히
쳐다보자 그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페델리우스와 비슷할 정도로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요. 전 당신이 싫어요.”
“그건 네가 페델리우스를 좋아하기 때문이야?”
내 물음에 프루니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가 척 보기에도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확 치켜들었다.
쫙 편 가느다란 검지가 내 코앞에 닿았다.
“그, 그, 그걸, 당신이 어떻게, 어떻게 알아?!”
‘와, 반말.’
아무래도 프루니아는 당황하면 반말이 나오는 듯했다.
머릿속으론 그녀가 어떻게 계속 반말을 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는 사람이 바보가 아닐까?”
프루니아가 여전히 내게 삿대질하면서 입을 뻐끔거렸다.
금붕어도 아니고 뻐끔거리는 입술이 꽤나 당황한 듯 보였다.
“아, 그러면 페델리우스는 바보겠네.”
사람의 감정에 그다지 예민하지도 않은 내가 눈치챘는데 페델리우스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으니까.
내 말에 프루니아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주먹을 꽉 쥐는 게 어딘가 잘못 건드린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페델리우스 얘기를 괜히 꺼냈나.’
좋아하는 사람이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기분이 나쁠 만도 했다.
사과해야 하나, 아니면 도망을 쳐야 하나, 잠시 고민하고 있던 차에 프루니아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어, 있잖…….”
“맞아요! 페델리우스 그 똥멍청이!”
“…….”
소리를 내지른 프루니아가 씩씩거리며 화를 삭였다. 눈동자가 절로 굴러다녔다.
분위기가 영 불안정해서 내게 화를 내려는 줄 알았는데…….
“그쪽?”
“그 새끼는 멍청해! 어떻게 그렇게 졸졸졸 쫓아다녔는데도 한 번을 눈치채지 못하는지! 의심이라도 한 번 하면 얼마나 좋아.”
주먹을 꽉 쥔 프루니아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분노가 뚝뚝 떨어지던 눈동자에 순식간에 투명한 물이 차올랐다.
‘아…….’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듯 그녀가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그녀를 쳐다봤다.
뚝뚝,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에 몸이 뻣뻣하게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씨.”
프루니아가 손등으로 눈을 벅벅 문질렀다.
상처가 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거세게 문지르는 그녀를 보며 굳어진 몸을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메리도 그렇고, 프루니아도 그렇고…….’
나는 누가 우는 것에 되게 약한지도 모르겠다.
저렇게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 꾹꾹 눌러 담았던 것이 소리 없이 터져 나오는 것을 난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것을 눈앞에서 마주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메리도 간신히 손을 뻗어 끌어안아 줬던 기억뿐이고.
“당신도 그래. 훌쩍, 그렇게 갑자기 튀어나와서 한순간에 펠을 뺏어가는 게 어딨어. 나는…… 나는 그가 그렇게, 그런 표정을 짓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고.”
원망스럽게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 훌쩍임이 섞여 있었다.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다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뭐라고 대답을 해주고 싶은데.
“나는, 줄곧 좋아했어. 십 년이 넘게. 처음 만났을 때부터!”
터져 나온 눈물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쉴 새 없이 손등으로 눈을 닦아내며 프루니아가 감정을 터뜨렸다.
“근데, 뭐야. 펠은 당신을 그렇게 좋아하는데 당신은…… 별로 관심 없는 것같이 보이고. 좋아하지 않는 거라면, 펠을 놔줘.”
울먹이는 목소리에 몸이 굳었다.
갑작스럽게 골목길로 들어와서 당하게 된 사태에 머릿속이 제대로 사고를 하지 않았다.
“페델리우스는, 나도 좋아하는데…….”
그러나 눈앞의 프루니아처럼 절절하게 울 정도로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거기에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페델리우스를 좋아하지만, 그게 페델리우스와 같은 감정이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어.
사랑과 좋아함의 차이를 잘 모르겠고.
“그래도 페델리우스는 못 줘.”
양보해줄 순 없다.
고개를 저으며 하는 말에 프루니아가 눈을 크게 떴다.
페델리우스는 내 거다.
그가 직접 내 것이 되겠다고 말했다.
“페델리우스가 없으면 나는 갈 데도 없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말을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페델리우스가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페델리우스가 내게 새로운 세상을 줬으니까. 나를 어두컴컴했던 어둠 속에서 끄집어내준 건 페델리우스야.”
지금 가진 모든 것들은 어쩌면 페델리우스에게 있던 것을 그가 나눠준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페델리우스를 도와주고 싶어. 그러려면 앞으로도 평생 같이 있어야 할 거고.”
뚱하게 내뱉은 내 말에 프루니아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그녀가 몸을 바들바들 떨더니 나를 쳐다봤다.
프루니아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가 아무리 페델리우스를 좋아해도 나는 양보해줄 수 없어. 다른 거라면, 도와줄 수 있겠지만.”
페델리우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분명히 도와줄 수 있었을 거다.
페델리우스에 한해서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지만.
“그래도 난 네가 좋은데. 나랑 친구 할 마음 정말 없어?”
“당신 진짜……!”
“페델리우스를 줄 수 없는 이유를 말해줬는데, 왜 그렇게 불쾌한 눈을 해?”
프루니아에게 담담하게 되물었다. 문제가 있다면 어쨌든 말로 풀어내는 수밖에 없다.
나는 행동으로 표현하는 건 무척 서투니까.
“당신 황녀였다면서. 갇혀서 조금 부당하게 자랐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황녀였으면서 남의 나라 신녀 노릇을 하는 게 즐거워? 자기 나라를 스스로 망하게 해놓고!”
생각지도 못한 프루니아의 말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렇구나. 제대로 모르는 사람도 있겠네.
특히나 프루니아는 한참이나 떠돌아다녔다고 들었으니까.
“나는 너랑 다르게 애국심 따윈 없어. 그깟 나라, 망해버리길 가장 원했던 게 나였으니까.”
절로 낮아진 목소리에 프루니아가 제법 놀란 듯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목소리를 가다듬기는 늦었다.
어차피 지금 내뱉는 말은 거짓말도 아니고.
“뭘 생각하는지 대충 알 것 같은데…….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접받고 자라지 않았어.”
황녀라는 이름이 가져오는 파장이 이렇게도 크다.
황녀가 지하에 갇힌 죄수보다도 더 못한 대접을 받고 자랐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아직도, 가끔 후회해. 내 나라를 영원히 이 땅의 지도에서 지워버리지 못했다는 걸.”
그건 종종 꿈에서도 떠올라 내 목을 옥죄기도 했다.
분명 아무도 알아줄 리 없겠지만.
그들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지 못한 것은 아직도 후회가 됐다.
귀족들의 씨를 말리지 못한 것도.
내 아비의 목숨줄을 결국 내 손으로 끊지 못한 것도.
“나는 너와 다르게 내 나라를 증오해.”
담담하게 내뱉은 목소리에 프루니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즐겁냐고 물었지? 응, 즐거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즐거워. 그러니까 날 그런 표정으로 봐도 소용없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프루니아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살폈다.
그래봐야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서 그저 묵묵히 눈빛을 마주해준 것뿐이지만.
“그럼 친구가 된 기념으로 부탁할 게 있는데.”
“누가 당신이랑 친구를……!”
“페델리우스가 부탁했잖아. 넌 알겠다고 했고…….”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이자 프루니아가 몸을 한 차례 떨었다.
그녀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아무런 말을 내뱉지 못했다.
“나 검술 가르쳐주라.”
프루니아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 꽤 불순하다.
“……그 체력으로?”
“…….”
얘 너무한 말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사실 요 앞에 잠깐 뛰어오면서도 헉헉거렸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안 돼……?”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게 더 신기한데요.”
입에 칼이라도 물었나. 날카로운 한마디에 뚱하니 입술을 쭉 내밀었다.
페델리우스도 안 된다고 하고 이그니는 가르쳐줄지 아닐지 반반이고.
‘같은 여자면 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받을 말을 내뱉는다. 그래, 자기는 검 잘 다루고 능력도 좋다 이거지?
치사하긴.
“이 검으로도 안 돼?”
물의 힘으로 푸른 검을 만들어 프루니아의 손에 쥐여줬다.
내 손길이 닿자 그녀가 파드득 몸을 떨었지만, 순순히 검을 손에 쥐었다.
프루니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가볍네요? 아니 거의 무게가 없는데…….”
“그렇지? 그러니까 난 힘이 없어도 검을 들 수 있는데! 그래도 안 돼?”
“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칼에 잘렸다.
와, 진짜 너무해. 아무리 별로 상처받지 않는 나라도 어쩐지 상처를 받을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니 이미 상처를 받았을지도.’
프루니아가 검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휘둘러보더니 이내 내 손에 다시 돌려줬다.
떨떠름하게 바라보다 허공으로 던지는 것과 동시에 검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프루니아가 제법 놀란 눈으로 그 장면을 지켜봤다.
“검만 가벼우면 뭐 해요? 상대랑 검을 부딪쳤을 때 공격을 받아내고 버틸 힘이 있어야 하는데.”
“……아.”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그런 거야?”
프루니아의 한심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대답도 없는 걸 보니 대답해줄 가치도 없다고 느끼는 건가. 얘 정말 너무하네.
“너 나 싫어?”
“역으로 당신이 페델리우스를 두고 십 년쯤 어딘가 다녀왔는데 페델리우스가 다른 여자에게 푹 빠져있다고 생각해봐요.”
프루니아의 말에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으음……. 눈을 질끈 감고 생각을 하는데도 그런 모습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어때요? 싫죠?”
“페델리우스가 그럴 리 없어서 상상이 안 돼.”
도리어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프루니아가 입을 떡 벌리더니 또 바들바들 떨었다.대체 몇 번째 바들바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슬쩍 눈치를 보다가 살짝 웃어 보이니 프루니아가 으르렁대며 이를 드러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냉큼 입을 다물었다.
‘여자친구란 섬세한 거구나.’
잘 모르겠다. 보통은 이렇게 웃어 보이면 기분이 다 풀려서 마주 웃어주던데.
프루니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신이랑 있으면 내가 바보가 되는 것 같아. 친구는 무슨!”
프루니아가 냉큼 몸을 돌렸다.
골목길을 빠져나가려는 그녀의 뒤를 쫓아가다가 손목을 홱 붙잡았다.
“쫓아가기 힘드니까 붙잡고 갈게.”
“……뻔뻔하신 거 알죠?”
“보통 이런 건 끈기가 있다고 하지 않아?”
그래도 정말 싫다고 도망가지는 않는다.
티격태격 나누는 대화도 싫지 않았다.
대화를 나눠보니 그다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아아, 정말. 그러면 생일 선물이나 사러 가든가요.”
프루니아가 귀찮다는 듯 툴툴거렸다. 또다시 주변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프루니아의 눈이 곤란함에 물들었다.
“……일단 다시 골목길로 돌아가 계세요. 로브 사서 돌아올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도망가려고?”
“도망 안……. 아니, 절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프루니아의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뭐라고 생각하냐고?
글쎄. 수식어가 이것저것 떠올라서 딱 이거라고 말이 나오진 않았다.
일단 콘샐러드의 동생이면서 페델리우스를 좋아하는…….
“툴툴거리면서도 해줄 건 다 해주는 여자친구?”
“……자알 알겠습니다. 그럼 말씀대로 골목길에 돌아가 계시면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제대로 도망가 드리겠습니다.”
프루니아가 이를 악문 채 내게서 등을 돌렸다. 멀어져가려는 프루니아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아니, 기다릴게. 돌아올 거지?”
프루니아가 뚱하니 나를 내려다 봤다.
여자이면서도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모습이 꽤나 멋있어 보였다.
“알겠으니까 제발 어디 좀 숨어 계세요. 당신 눈에 너무 띈다고.”
“네에-”
간단히 대답하고 냉큼 아까 숨었던 골목길에 몸을 밀어 넣었다.
프루니아가 나를 한 번 흘끔 보더니 몸을 돌려 멀어져갔다.
‘으음, 정말 돌아오려나.’
벽에 기댄 채 신코를 바닥에 꾹꾹 누르며 하늘을 쳐다봤다.
아직도 새파란 하늘은 해가 지기엔 아직 멀었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근데 누구 생일 선물을 산다는 거지?’
프루니아의 말을 곱씹었다. 분명 생일 선물을 사러 간다고 했지. 그러고 보니 내 생일은 언제더라. 멍하니 생각하고 있으려니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껏 젖혔던 고개를 내리자 거친 숨을 몰아쉬는 프루니아가 눈앞에 있었다.
“허억, 허억. 여기, 얼른, 뒤집어, 쓰세요. 하아.”
한껏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말해놓고는…….
“뛰어갔다 왔어?”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돌아온 거야? 십 분도 채 기다린 것 같지 않은데. 놀라운 속도에 눈이 절로 커졌다. 달리기가 얼마나 빠른 거지.
내 지적에 프루니아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냥!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뿐이고, 시간도 없으니까!”
“어쨌든, 고마워.”
베이지색의 로브를 몸에 두르고 후드를 뒤집어쓰자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땀을 닦아내던 프루니아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근데 누구 생일 선물을 사는 거야? 콘샐러……. 아니, 콘니르 생일이야?”
“오라버니 만났어요?”
“얼마 전에 신전에 찾아왔어.”
어깨를 으쓱이자 그녀가 못 살겠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면서도 눈에는 제법 애정이 엿보였다.
“근데 누구 생일이냐니까?”
“아니, 그야 당연히 펠의……. 설마 모르고 있었어요?”
프루니아가 도리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몰랐지. 그런 날짜를 공유할 시간도 없었고.
내 생일도 잘 모르겠는데 페델리우스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을 리도 없고.
어쩐지 굉장히 탓하는 듯한 눈빛이 사람을 울컥하게 한다.
“페델리우스 생일이야? 언젠데?”
“삼 일 뒤잖아요.”
“……그래? 그랬구나.”
생각지도 못했다. 애초에 생일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를 챙겨줘야 하나? 챙겨줘야 한다면 뭘? 애초에 생일이 뭐지……. 태어난 날이 아니었던가? 머리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사고하지 않는 머리에 걸음마저 멈춰버렸다.
‘생일에는 뭘 하면 되는 거지?’
선물만 주면 되는 거야? 태어나서 축하한다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조심스럽게 프루니아를 쳐다봤다.
“있잖아, 프루니아 친구야…….”
내 부름에 프루니아가 어쩐지 굉장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생일에는 뭘 하면 돼?”
뭘 선물해줘야 하는지,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 말에 프루니아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지금까지 뭘 하면서 산……. 아.”
말을 내뱉던 프루니아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녀가 다문 입을 쉽게 열지 못했다.
이렇게 당황하니 도리어 내가 민망한데.
“내가 불쌍해?”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요? 그리고 나도 딱히 친한 친구가 없어서 생일 선물을 챙겨본 사람이라곤 오라버니뿐이고.”
퉁명스럽게 내뱉는 목소리에 웃음이 터졌다.
잘게 떨리는 어깨를 애써 꾹꾹 누르며 옅게 웃었다.
급하게 사귄 친구지만 잘 사귄 것 같아.
“그래서 생일날은 뭘 하면 되는데?”
“같이 케이크 먹고 맛있는 거 먹고 놀다가 생일 선물을 전해주는 날이에요.”
“……그게 전부야?”
“……아마도요?”
그게 뭐야. 눈을 가늘게 뜨자 프루니아가 흠흠, 헛기침하며 멈췄던 걸음을 다시 내딛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녀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다고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인가.
“어쨌든! 목표는 선물이에요.”
“케이크는?”
“저는 거기까지는 할 수 없을 테니, 케이크는 신녀님이 챙겨주면 되겠네요.”
덧붙이는 목소리가 쓸쓸하게 들렸다.
페델리우스를 좋아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그녀는 애써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래서 검은 안 가르쳐줄 거야?”
“그 체력으론 무리라니까.”
프루니아가 다시 단칼에 내 말을 잘라냈다.
무도 아니고 너무 깔끔하게 잘라내는 거 아니야? 너무하긴.
“그럼 체력단련부터 하면 어때?”
“당신 쓰러지면 페델리우스한테 무슨 원망을 받으라고.”
고개를 젓는 프루니아를 보다가 입을 뚱하니 내밀었다. 뭐든지 페델리우스한테 다 가로막히네.
“내 체력이 그렇게 별로야?”
“네.”
……얘 정말 너무한 애였어. 괜히 친구 하자고 했나.
너무 성급했다며 후회하고 있는데 그녀가 나를 슬쩍 흘겨봤다.
“당신은 남부러워할 것 없는 힘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굳이 왜 검을 배우려고 해?”
“그야, 그쪽이 더 멋있어 보이니까? 내 힘은 너무 눈에 띄고.”
푸른 빛이 눈이 아플 정도라서 밀실이 아닌 이상 힘을 쓰자마자 들키고 만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프루니아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펠은 분명 내가 화려한 검술 수백 번으로 적을 때려잡는 것보다 당신이 화려한 능력을 한 번 쓰는 것을 훨씬 더 멋있다고 생각할 텐데.”
“……페델리우스, 화려한 거 좋아하는 사람이었어?”
내 말에 프루니아가 걸음을 뚝 멈췄다. 곧 터질 것처럼 분노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다가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 말은! 그 남자는 당신이 나뭇가지를 서툴게 휘둘러도 그걸 더 멋있다고 생각할 사람이라고!”
프루니아가 씩씩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
내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자 프루니아가 거세게 발을 굴렀다.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나를 흘겨보는 그녀는 몹시 분해 보였다.
“다 가졌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구는 거 너무 짜증 나.”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난 잘 모르겠는데.”
프루니아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말에 ‘왜?’라는 의문스러움만 떠올랐으니까. 굉장히 매섭게 치켜뜬 눈으로 프루니아가 나를 노려봤다.
“당신은 정말 비겁해. 모르면 알아보려고 노력하든가.”
“그건 페델리우스가 나를 좋아하기 때문인 거야?”
고민하다가 다시금 궁금증을 입 밖으로 냈다. 프루니아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녀가 바들바들 몸을 떨더니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
“난 선물 사러 갈 거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완전히 몸을 돌린 프루니아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뚱하니 쳐다보다가 그녀의 뒤를 냉큼 쫓았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뭘 실수한 건가?’
남자인 친구와는 다르게 여자인 친구는 조금 더 섬세한 것 같기도 하다.
뭔가 불만인 것이 있으면 확실히 말해주면 좋을 텐데.
“프루니아야.”
성큼성큼, 프루니아가 대답도 하지 않고 멀어져갔다.
“프루야?”
움찔, 프루니아의 몸이 한 차례 떨렸다. 프루, 프루는 뭔가 발음이 이상하다. 불편했다.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루니야?”
“누가 루니야?! 이름 이상하게 줄여 부르지 말라고요!”
오, 멈췄다. 언성을 높이는 프루니아를 한 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싫다면, 어쩔 수 없고.
내 순순한 끄덕임에 그녀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흘겨봤다.
“선물 뭐 살 거야? 나는 뭘 사는 게 좋을까?”
“돈은 있어요?”
“보석이라면 잔뜩.”
일전에 아콰의 방법을 따라 푸른 보석을 손바닥에 잔뜩 만들어 보였다. 이건 능력을 다룰 수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분명했다.
프루니아의 입이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얼른 숨겨요! 이거 누가 알아요?”
프루니아가 황급히 내 손바닥을 자신의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경악한 목소리였지만 최대한 크게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녀를 보다가 미간을 좁혔다.
‘왜 이래?’
주변을 살피는 프루니아를 보다가 그녀가 원하는 대로 보석을 다시 없앴다.
“아직 아무도 몰라. 그러고 보니 페델리우스한테도 말하지 않았네.”
“페델리우스는 괜찮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말하지도, 들키지도 마세요. 펠도 분명 그렇게 말할 테고.”
프루니아가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프루니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게 왜? 보석은 좋은 거 아냐?”
“좋아요. 좋으니까 아무한테도 들키면 안 돼요. 당신은, 당신이 가진 힘이 세상에 어떤 위험을 끼치는지 알아야 할 의무가 있어.”
프루니아의 말에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보석이 세상에 위험을 끼칠 리가 없지 않은가. 내 의아한 표정에 프루니아가 깊은 한숨을 뱉었다.
“왜 펠이 당신에게서 한시도 눈을 못 떼는지 알 것 같네요.”
프루니아는 그렇게 한마디만 내뱉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인간들은 정말 이해하기가 힘들어. 왜 뭐든 끝까지 말해주지 않는 거야.
“왜인데?”
“……당신이 고민해보세요. 나는 두 사람 등 떠밀어줄 생각 조금도 없으니까.”
울컥, 차오르는 짜증에 주먹을 쥐었다.
뭐라도 다 아는 것처럼 꼿꼿하게 세운 허리가 내키지 않는다.
내가 뭘 어쨌는데.
“치사해.”
참다 참다 덧붙인 내 말에도 프루니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네 생일은 언제야?”
“다음 달 중순이요. 이건 왜요?”
“그냥. 궁금해서. 생일은 사람마다 있는 거구나.”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슬슬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하늘을 발견했다. 어둠이 내려앉기 전에 돌아가지 않으면 페델리우스는 분명 걱정하겠지.
“사람뿐만이 아니라 동물에게도 있겠죠. 태어난 날이 곧 생일이 되는 거니까요.”
“그렇구나……. 선물은 뭘 해주면 되는 거야? 페델리우스는 없는 게 없을 텐데.”
그가 돈을 못 버는 것도 아니고 직접 물건을 사러 나가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까. 굳이 내가 이제 와서 사줄 물건이 있기나 할까?
“그런 건 마음만 있으면 돼요. 뭘 줄지는 당신이 잘 고민해보면 되고.”
“넌 정했어?”
“당신이랑 말다툼하느라고 가게들이 반쯤 정리 중이라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있잖아.”
툴툴거리는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어깨를 으쓱였다.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생일을 축하해주면 뭐가 기쁜 거야? 태어난 걸 축하해주는 게 기쁜 걸까? 태어난 걸 축하받기 싫은 사람은 어떡해?
‘애초에 내 생일은 언제더라.’
내가 태어난 날 따윈 관심도 없었으니까.
아콰도 굳이 알려주지 않았고 나도 물어보지 않았다.
프루니아를 졸졸 쫓아다니며 그녀가 보는 걸 똑같이 눈에 담았다.
프루니아의 눈에 담긴 열기는 분명 페델리우스를 향한 거겠지.
“넌 페델리우스를 엄청 좋아하는구나.”
“좋아해요. 당신은 내가 페델리우스를 좋아한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프루니아의 말에 입을 꾹 닫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어깨를 으쓱였다. 프루니아의 물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
“네가 페델리우스에게 가지게 된 마음을 보고 내가 뭔가를 생각해야 해?”
“질투라도 할 수 있잖아.”
“……그건 어떤 감정이야?”
어감으로 따지면 그렇게 좋은 감정으로 느껴지진 않는데. 내 물음에 프루니아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어갔다.
그녀의 찌푸려지는 표정을 보다가 황급히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아무리 갇혀 살았다고는 해도 대체 어떻게 지냈길래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요? 당신 좀 이상한 사람 같아.”
프루니아의 말에 절로 몸이 멈칫했다.
해명하려면 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말을 해야 할까? 페델리우스에게 밝히는 것도 싫었다. 끔찍했다. 그런데 굳이, 내가 프루니아에게 말해야 할까?
‘이상하게 볼 게 뻔한데.’
다락방 따위에 갇혀서 식사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자란 황녀가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
그건 정상적이지 않았다.
“나는 페델리우스가 당신이랑 붙어있으면 슬프고 속이 뒤집힐 것 같고 짜증이 나. 펠이 당신이 아니라 나만 봐줬으면 좋겠어.”
“프루니아?”
“이게 바로 질투예요. 한없이 속이 좁아지는, 정말 싫은 감정이지.”
프루니아가 말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감정이에요.”
덧붙이는 목소리가 낮고 침울하게 들렸다.
말없이 그녀의 뒤를 쫓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다양한 감정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이 느끼는 감정에 공감해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페델리우스가 지금 내게 느끼고 있는 감정에 솔직하게 대답해줄 수 있을까.
“네?”
“아니, 돌아갈래. 오늘은 가게 문이 다 닫혔으니까 선물은 내일 사자. 내일 신전으로 와! 나 끝날 시간 맞춰서.”
“누가 간다고……!”
“올 때까지 기다릴게!”
프루니아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냉큼 골목길로 뛰어 들어갔다.
근처 골목길에서 곧장 날개를 만들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래로 내려다본 프루니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페델리우스 보러 가야지.’
술렁이는 감정을 차분하게 해줄 사람이라곤 페델리우스밖에 없으니까.
곧장 페델리우스의 저택까지 쉬지 않고 날았다.
찰박, 바닥에 고인 웅덩이 위로 슬며시 내려앉았다.
“돌아오셨습니까. 주군.”
“이그니. 시장은 잘 다녀왔어?”
“네. 명령대로 다녀왔습니다.”
고개를 숙인 이그니가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이그니도 기다리지 못하고 혼자 와버렸네.
“나 기다렸겠다. 미안해.”
“아뇨. 경비병에게 얘기를 듣고 곧장 돌아왔으니 괜찮습니다.”
이그니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고 보니 시장 다녀온 증거로 뭘 사 오라고 했는데…….
“뭐 사 왔어?”
“네. 이걸 사 왔습니다.”
“……달걀?”
뭐, 시장에서 살 수 있는 것도 맞긴 하지만. 의외의 것을 사 왔네.
그것도 달랑 달걀 두 개.
달걀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뻗어 이그니의 머리카락을 툭툭 두드렸다.
“잘했어. 내일도 다녀오기.”
“알겠습니다.”
머리카락을 톡톡 두드려주곤 옅게 웃었다.
‘이 달걀이 네가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길이 되면 좋을 텐데.’
누군가 정말 이그니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그니가 작은 새장이 아니라 정말 창공을 가르는 고고한 매 한 마리가 되었으면 싶었다.
“아까워서 못 먹겠다.”
어디에 박제라도 해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그니에게 쉬라고 이른 뒤 2층으로 곧장 올라갔다.
물론, 이그니도 뒤따라왔다. 내가 쉬라고 한다고 이그니가 쉬러 갈 리 없지.
“아.”
“페델리우스!”
냉큼 달려가 페델리우스를 끌어안았다.
양손에 달걀을 쥔 덕분에 세게 안지는 못했지만.
페델리우스의 몸이 한 번 흔들리더니 이내 내 허리와 다리 밑을 받치며 옅게 웃었다.
“오시리아. 잘 다녀오셨습니까? 늦으시는 것 같아 슬슬 찾아보러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응, 시장 보고 왔어.”
“……달걀 두 개 사 오신 겁니까?”
페델리우스의 눈이 내가 손에 든 달걀로 향했다.
아니 뭐, 이걸 사 온 건 아니었지만.
고개를 저으며 페델리우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울렁거리던 심장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페델리우스는 신기해. 너만 옆에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
“그렇습니까?”
“응. 페델리우스가 프루니아를 소개해줘서 잘 놀았어. 재밌는 사람이던데.”
청량하고 깨끗하다곤 말할 수 없지만, 분명히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게 따지면 사실 콘니르도 나쁘다곤 할 수 없겠지만.
‘하지만 이걸 물어보면, 분명히 넌 대답해주지 않겠지.’
페델리우스는 언제까지나 날 어린애로 보니까 말이다.
“페델리우스.”
“네.”
“널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페델리우스와 같은 감정으로 그를 바라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이 어떤 감정인지 과연 알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안심하고 페델리우스 곁에 평생 있을 수 있는 걸까?
“……예?”
“널 사랑하고 싶어. 어떻게 해야 해?”
페델리우스가 나를 안은 채 손에 힘을 줬다.
감정이 전해질 정도로 한층 꽉 쥐어지는 팔을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이야.”
“네.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당신 곁에서 도망갈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요.”
귓가에 바싹 다가와 속삭이던 페델리우스의 입술이 볼에 살포시 닿았다.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몰렸다.
“……애 취급.”
입술을 뚱하니 내밀며 불만을 뱉었다. 볼에 닿은 온기도 홧홧한 다정함도 좋지만, 애 취급은 싫다.
내 말에 페델리우스가 낮게 웃었다. 제법 기뻐 보이는 웃음에 말없이 페델리우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끌어안는 품이 온기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