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페델리우스의 생일이 당장 내일이었다.
‘아직도 선물을 못 샀어.’
하루 정도 더 어울려줬던 프루니아도 자신은 어제 선물을 샀다며 냉큼 꼬리를 빼버렸다.
치사하긴.
오늘은 어떻게든 페델리우스를 따돌리고 나온 참이다. 그래도 마땅히 사주고 싶은 선물은 없었다. 검을 사주고 싶어도 페델리우스는 이미 왕에게 선물 받은 검이 있었다.
“다 별로야.”
같은 시장을 여러 번 뱅글뱅글 돌아봤지만, 더는 사고 싶은 게 없었다.
발걸음을 뚝 멈췄다. 피곤하고 재미없다. 가게마다 서서 뚫어져라 쳐다봤더니 이제는 슬슬 수군거리기도 한다.
보석가게에서 발이 뚝 멈췄다.
페델리우스한테 목걸이를 달랑달랑 걸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시선을 옮기다가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콰한테 물어볼까. 아니면, 라비엘?’
인간의 일이니까 라비엘에게 묻는 편이 낫다고는 생각하지만.
이미 신전에서 나왔는데 또 갔다 와도 되는 건가?
잠시 고민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만히 보석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마 전 프루니아에게 보여줬던 푸른색의 보석들이 떠올랐다.
“……분명히 보석에 힘을 넣을 수 있다고 했는데.”
물의 기운을 담은 보석은 소유한 사람을 지켜준다고 들었다.
페델리우스는 검을 쓰는 기사니까 분명 위험한 일을 당할 때도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 지켜줘야지.”
문득 떠오른 생일 선물은 생각보다 더 괜찮은 것이었다.
곧장 방으로 향했다.
기운을 모으는 건 아직도 조금 서툴러서 아콰의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오늘은 페델리우스랑 따로 자야 할지도.
곧장 집으로 향했다.
“오시리아, 이제 오십…….”
“안녕, 페델리우스. 나 오늘 저녁은 방에서 혼자 먹을게.”
페델리우스를 냉큼 지나쳐 아콰가 있을 법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중을 나와 있던 것인지 페델리우스가 멍한 소리를 뱉는 것이 들렸다.
“아콰!”
<네, 주인님.>
내 부름에 아콰가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아콰인지.
최근에는 푸른 피부보다는 인간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피부색을 볼 때가 더 많았다.
메리랑은 여전히 자주 붙어 다니고.
“나 뭐 좀 도와줘. 오늘 같이 잘래?”
내 말에 아콰가 눈을 큼직하게 떴다.
<주인님이랑요? 둘이서요?>
“응, 둘이서. 오랜만에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나 궁금한 것 좀 알려줘.”
아콰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인간, 아니, 페델리우스라는 남자는 같이 자지 않는 거죠?>
“응, 오늘 페델리우스는 따로 잘 거야.”
“……제가 따로 잡니까?”
어느새 뒤쫓아왔는지 페델리우스가 물어왔다.
뜨끔한 말에 몸이 절로 떨렸다.
슬쩍 그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하루만. 내일은 같이 자면 되잖아.”
“……무슨 일 있으십니까?”
침울한 표정의 페델리우스를 보다가 냉큼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들키면 곤란했다.
선물은 몰래 주는 거라고 했고 들켜서 괜히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페델리우스는 내가 무리라도 하려고 하면 분명히 그러지 말라고 할 테니까.
“제겐 상담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까?”
내 옆에 매달린 아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응, 하고 대답하면 될 텐데 어쩐지 쉽게 입술이 떨어지질 않는다.
‘페델리우스랑 있으면 이상해지는 느낌이야.’
말 한마디도 고르고 또 골라서 하게 된다.
내뱉기 쉬웠던 말도, 하기 쉬웠던 일도 페델리우스 앞에서는 쉽지 않았다.
“아콰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서.”
한참을 돌려, 돌려 입 밖에 올린 말은 그다지 마음에 차지 않았다.
페델리우스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묵묵히 바라봐오는 눈빛이 어쩐지 가슴을 콕콕 찔렀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어.
“알겠습니다.”
한참 만에 나온 허락의 말에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게 해주고 싶은데 페델리우스의 표정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그럼 내일…… 아침에 봐.”
“네. 식사는 메리에게 따로 챙겨드리라고 말씀해두겠습니다.”
“응. 고마워.”
“그럼 이만.”
고개를 숙인 페델리우스가 몸을 돌렸다.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선물을 해주려는 좋은 의도인데…….
‘왜 내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지.’
<가요! 주인님.>
팔을 끌어당기는 아콰를 보다가 고개를 주억였다.
오늘은 아콰와도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너무 오랫동안 교류가 없었으니까.
내가 손을 뻗자 아콰가 작게 웃으며 내 손을 마주 잡아 왔다.
언제나처럼 온기 없는 차가운 손길일 거라고 생각했던 아콰의 손에서 미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손이 따뜻해. 아콰.”
<따뜻하다고요? 전 잘 모르겠는데요.>
미간을 좁힌 아콰가 제 손을 주물럭거렸다.
그야 자기 자신의 손이니까 따뜻한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엔 무척이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신기하네. 아콰의 손은 늘 부드러웠고 포근했지만,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거든.”
내 말에 아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고개를 기울였다.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깨를 으쓱이곤 소년을 끌고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 달칵, 문을 잠그고 나서야 아콰를 데리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
아콰가 제법 기쁜 표정으로 어깨에 볼을 부벼왔다.
<오랜만이라 너무 좋아요, 주인님. 제가 필요 없어진 줄 알았어요.>
“내가 널 필요로 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넌 언제나 내 소중한 가족이고 친구이고 사랑하는 존재일 거야.”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지켜주어야 할 친구.
얼굴 근육을 움직여 웃어주자 아콰가 배시시 웃음을 터뜨렸다.
예전과 같은 장난기 넘치는 어린아이와는 많이 다른 웃음이었지만, 여전히 애정만큼은 뚝뚝 흘러넘쳤다.
<무슨 부탁이 있으신가요?>
품에 안겨서 뒹굴뒹굴하던 아콰가 내 무릎을 벤 채 물어왔다.
“나 보석을 만들고 싶어. 물의 힘을 담은 보석으로 페델리우스를 지켜줄 수 있는 거.”
<보석이요? 아, 물의 힘을 응축해서 만드는 돌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어렵진 않아요.>
“그거 오늘 중으로 될까? 팔찌나…… 아니면 반지도 좋아! 페델리우스가 항상 착용할 수 있는 거로.”
내 말에 아콰가 누운 채 나를 똑바로 바라봐왔다.
올곧은 푸른 눈동자가 나와 함께 눈동자를 움직여왔다. 아콰가 옅게 웃었다.
순간 아콰의 표정 위에 성인이 된 인간이 겹쳐 보였다. 눈이 절로 크게 뜨였다.
<주인님이 그걸 원하시는 건가요?>
“아, 응.”
대답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방금 뭐였지?’
분명 아콰였는데, 이상하게도 아콰가 아닌 것 같은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도와드릴게요. 저와 주인님이 함께 만들면 오늘 밤으로도 충분하답니다. 보호가 목적이시라면 반지보다는 팔찌가 나을 거예요. 돌을 여러 개 엮어서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아, 응. 그럼 그렇게.”
분명 눈앞에 있는 아콰인데도 이상하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는 너와, 가족이 아니었던가? 언제 이렇게 멀어졌지?
“요즘은, 뭘 하고 지내? 아콰.”
<메리라는 인간을 관찰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재밌더라고요. 인간이 사는 것도. 그렇게, 멍청한 인간만 있는 것 같지도 않고요.>
말하는 아콰의 표정이 퍽 밝았다.
아콰가 내가 아닌 인간에게 이렇게 밝은 표정을 보여준 적이 있었던가?
내가 생각하기엔 없었다.
“메리가, 잘해주나 봐?”
<인간치고는 저를 존경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답니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더라고요.>
“그래?”
훅 멀어진 거리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이렇게 멀어지고 또 멀어지다가 언젠가는 얼굴도 보지 않게 되는 건가…….
“요즘은, 손등에 들어가 있지 않네.”
내 물음에 아콰가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들어가 있길 바라세요?>
“……아니, 아마도 아니야.”
<주인님이 페델리우스라는 인간을 가까이했을 때 조금 많이 충격을 받았어요. 그 인간 남자보단 제가 더 주인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숨기기 급급하고 제 감정을 표출하기 바빴던 아콰가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보지 않은 잠깐 사이 내가 알던 아콰는 어딘가로 도망이라도 간 것 같았다.
<하지만, 인간들이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주인님께도 분명, 주인님이 살아가야만 하는 삶이 있을 테니까요.>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 몸을 앞뒤로 느릿하게 흔들며 아콰가 제 의견을 입 밖으로 내놨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뒤통수를 거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선사했다.
<주인님과 제가 살아갈 시간은 분명히…… 다를 거예요.>
나지막하게 전해오는 목소리에 숨이 턱 막혔다.
<그러니까, 제가 욕심을 부리면 분명히 주인님께서는 원하는 삶을 살아가실 수 없을 테니까. 주인님은 인간이시니까 분명 인간과 함께 살아야 훨씬 행복하실 거예요.>
아콰. 너는 언제 그렇게 성장해서, 혼자 고민하고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된 거야?
막힌 숨이 쉽게 터져나가지 않았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걸, 혼자 생각한 거야?”
<인간의 삶을 관찰하다가 문득 깨달았어요. 그들의 시간은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짧다는 걸요.>
“그래서, 놓아버리는 거야?”
내 물음에 아콰가 눈을 크게 뜨곤 고개를 저었다.
아콰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덥석 안겨 왔다.
훅 출렁이는 침대에 아콰를 쳐다봤다.
<저는 결코 주인님을 먼저 놓지 않아요. 필요하실 때면 언제든지 당신의 옆에 있을 테니까요.>
“내가 죽으면, 너는 어떻게 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아콰가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가정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아콰가 나를 묵묵히 보고 있다.
<이곳저곳 여행을 하면서 살아가지 않을까요?>
“언제까지?”
<……글쎄요. 정령에게는 생사라는 게 없으니까요.>
아콰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내가 죽은 후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콰는 혼자라는 말인 건가?
“그건…… 너무 슬프잖아.”
내 말에 아콰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웃으며 나를 끌어안은 채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곤 불쑥 고개를 들었다.
<부탁하신 거 도와드릴게요.>
“아, 응…….”
푸른 빛무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울 때까지 더 이상의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완성했다.”
푸른빛을 내는 팔찌가 손바닥 위에서 영롱하게 빛을 뿜어냈다. 아콰가 침대에 몸을 반만 걸친 채 축 늘어졌다. 돌멩이 하나를 응축하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생각지도 못했다. 그걸 열 개쯤 만들었으니 기력이 전부 사라졌다.
온종일 침대 속에서 뒹굴거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지막으로 팔찌처럼 보일 수 있게 엮고 난 후로는 완전히 몸이 녹아내렸다. 물먹은 솜처럼 몸에 힘이 쫙 빠졌다. 메리가 들어오기 전에 주머니에 팔찌를 집어넣었다.
“놀라게 해줘야지.”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려고 준비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애초에 선물을 정성들여 마련할 만큼 가까운 사람이 곁에 있었어야 말이지.
<근데 그 반지는 왜 만드신 거예요? 주인님.>
“……이건, 네 거야. 아콰.”
온몸에서 물을 쫙쫙 빼낸 느낌인데도 간신히 기력을 쥐어짜서 보석 한 개를 더 만들었다.
물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아콰에겐 그다지 큰 쓸모가 없겠지만…….
<제 거라고요? 하지만 저는…….>
“네 말대로 우리는 함께 있을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늘 네 곁에 있을 거야.
네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널 도와줄게.”
아콰의 손에 반지를 쥐여줬다.
이것이 언젠가 아콰에게 작은 위안이나 도움이 되길 바란다.
“너는 소중한 가족이야.”
결코, 다른 것과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가족이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행복해져야 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
아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두 손으로 반지를 손에 꽉 쥔 소년이 웃었다.
<천만에요. 저야말로 의지해주셔서 기뻤어요. 제가 아직, 주인님께 쓸모가 있는 것 같아서.>
페델리우스에게 시선을 빼앗겨 아콰에게 제대로 신경도 써주지 못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런 말 하지 마. 아콰가 모든 힘을 잃게 되더라도 내 소중한 가족이야.”
<그럼 페델리우스라는 인간 남자와도 가족이 되는 건가요?>
아콰의 말에 눈이 커졌다. 아콰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아콰가 고개를 기울였다.
“페델리우스는, 가족 같은 사람이지만 가족은 아니지 않아?”
<하지만, 아이를 낳을 거 아닌가요? 서로 좋아하잖아요.>
“응? 페델리우스를 좋아하기는 해. 근데 아이를 왜 낳아?”
<……저는 주인님께서 페델리우스라는 인간 남자와 다음 세대를 이어갈 아이를 생산할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페델리우스는 날 그렇게 좋아하지만, 나는 아닌걸?”
내가 대답하자 아콰의 고개가 한껏 더 기울어졌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아콰에게 나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보기엔 그 인간 남자가 주인님을 보는 눈빛과 주인님이 인간 남자를 보는 눈빛은 다르지 않은걸요?>
아콰의 말에 숨이 멎었다. 아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정령이기 때문인지 아콰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니까. 아콰가 저렇게 말했다는 건 정말 그렇게 느꼈다는 뜻이다.
턱 막힌 말문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콰는 더 이상 말을 잇지는 않은 채 자리를 떴고, 메리가 들어와 옷을 입는 걸 도와줬다.
오늘은 라비엘에게 쉬겠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굳이 신전에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까 반짝반짝하게 꾸밀 필요도 없었고.
‘페델리우스는 나갔다 오는 모양이지만.’
황성으로 나가는 페델리우스를 배웅해주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멍하니 침대에 누워 팔찌를 살폈다.
맨 처음 만들었을 때 눈부시게 빛났던 빛은 거의 사그라든 후였다.
팔찌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페델리우스가 돌아오면 줘야지.
“주군.”
“이그니. 며칠 확인을 못 했는데…… 약속 잘 지키고 있었어?”
“네. 사온 건 뒤뜰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뒤뜰에? 뭘 사 왔길래 뒤뜰에 가져다 놓지? 식물이라도 사 와서 새로 심기라도 했나?
내 의아한 표정에도 이그니가 담담하게 날 내려다봤다.
오늘은 시간이 많으니 굳이 이그니에게 묻기보단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쪽을 선택했다.
“안내해줘.”
“네.”
이그니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곤 앞장섰다. 느릿하게 그를 따라 뒤뜰로 걸음을 옮겼다.
“맨날 시장만 구경하니까 심심하지 않아?”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안 심심해? 지루할 것 같은데.”
이그니가 고개를 저었다. 묘한 표정의 이그니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달걀 두 개의 충격이 아직 가시질 않았지만 분명 이그니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이그니의 뒤를 쫓아 걸었다.
미야아아-!
꼬꼬꼬! 꼬!
뒤뜰로 다가갈수록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짐승의 울음소리를 닮았다.
이그니를 살짝 쳐다보니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다.
내가 소리를 잘못 들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지나가던 고양이랑 닭인가?’
하긴. 여기 경비병들이 고양이나 닭이 돌아다닌다고 쫓아낼 것 같지도 않으니. 이그니가 모퉁이를 돌았다.
“……어?”
“여기입니다.”
눈이 절로 끔뻑였다. 뒤뜰은 뒤뜰인데, 저건 뭐지……?
“사흘 전에는 달걀을 사 왔던 걸 기억하십니까?”
“응? 아, 응. 기억하지. 그럼.”
잊었을 리가 없다.
내 말에 이그니가 고개를 끄덕이곤 옆에 있는 닭을 가리켰다.
“이틀 전에는 닭을 사 왔습니다.”
“……어, 닭을?”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달걀 다음엔 달걀을 낳는 닭이 보고 싶을지도 모르잖아? 응. 아마도…….
이그니의 말에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이그니가 이렇게 진지한 모습은 처음이다.
물론 늘 진지하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를 이렇게 진지하게 대하는 건 처음 보니까.
“그리고?”
“이건 어제 사 온 고양이입니다. 새끼고 암컷입니다.”
그렇지. 내가 봐도 새끼 고양이처럼 보여.
이그니의 말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멍하니 울타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를 쳐다봤다.
닭이 언제 낳았는지 달걀도 울타리 안에 몇 갠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그니가 다시 몸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오늘은……?”
“오늘은 이제부터 갈 예정입니다.”
“아. 그래, 그렇구나.”
가늘게 뜬 눈으로 열심히 이그니를 이해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이해하지 않으면 머리가 과부하에 걸려 폭발할 것 같았으니까.
다행히 이그니는 더 엄청난 것을 내 눈앞에 내밀지 않았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다가 곧장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참고로 오늘은 뭘 사 올 건데?”
“일단 가서 보고 생각할 예정입니다.”
“……음. 그렇구나. 혹시 저것들은 어떻게 사오 게 된 거야?”
내 물음에 이그니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를 묵묵히 보더니 이내 한 박자 늦게야 입을 열었다.
“가서 보고 생각해서 사 왔습니다.”
“……달걀도?”
“네.”
대체 얘 시장의 어디 어느 부분을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목까지 차오른 말을 차마 내뱉진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이그니가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시킨 일을 하는데 명령한 내가 이제 와서 그걸 따지고 물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뭔가를 사 온다는 건 사람들이랑 간단한 대화라도 나눈다는 뜻일 테니까.’
숨을 삼켰다.
이그니가 고양이와 닭을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직접 사 왔다기에는 애정이라곤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다.
“닭이랑 고양이한테 밥은 줬어?”
“……줘야 합니까?”
“밥이 없으면 죽을 텐데?”
“……아.”
이그니는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낮게 탄성을 흘렸다. 탄성을 흘리는 것도 굶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은 아닌 듯했다.
“그럼 이번에 사 올 건 정해졌네.”
“네?”
“닭이랑 고양이가 먹을 사료를 사 오면 되잖아.”
내 말에 짧게 고민하듯이 보이던 이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하는 이그니를 보며 낮게 한숨을 뱉었다.
적어도 닭이나 고양이 이외의 다른 동물을 사 오진 않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아, 응. 그럼. 다녀와.”
생각보다 적극적인 이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까만 옷을 입은 모습 그대로 이그니가 저택을 나섰다.
가만히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디를 다녀오는지 쫓아가 볼까?’
최근에는 저택의 출입도 제법 자유로워졌다. 멋대로 뛰쳐나가는 나를 페델리우스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페드로한테 말하고 다녀와야지.”
다만, 페델리우스는 어딘가에 나갈 때는 반드시 페드로나 메리, 혹은 자신에게 허락을 받고 가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내가 그대로 하자 페델리우스는 어딘가를 나가는 것을 그다지 불안하게 여기지 않게 됐다.
‘저녁 식사 전에는 들어가야 하겠지만.’
조금 기쁜 것은 페델리우스가 나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애 취급하는 걸 관둔 게 아닌가 하는 작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흐음, 따라가 봐야지.”
도대체 이그니가 어디를 가기에 첫날은 달걀이고 둘째 날, 셋째 날은 닭과 고양이를 사 올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게다가 사료는 빼고. 울타리는 대체 어디서 난 거야? 직접 만든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하는 도중에 머릿속에 뚝딱뚝딱 망치질을 하고 있는 이그니의 모습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그건…… 정말 이그니랑 어울리지 않는다.
멀어져가는 이그니를 보다가 냉큼 하늘로 날아올랐다.
능력이 있어서 편한 건 서툴게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뒤따라 걷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하늘로 날아서 조금만 높이 올라가면 나는 상대가 보이지만 상대는 나를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물론, 페델리우스는 예외지만.’
아직도 주머니에 잘 자리 잡고 있는 팔찌를 매만지며 옅게 웃었다.
“페델리우스가 기뻐해 주려나.”
기뻐해 줬으면 좋겠다. 힘껏, 페델리우스만을 생각하며 만든 내생에 첫 선물이니까.
<제가 보기엔 그 인간 남자가 주인님을 보는 눈빛과 주인님이 인간 남자를 보는 눈빛은 다르지 않은 걸요?>
멈칫, 이그니를 따라가던 몸이 멈췄다. 아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페델리우스를 사랑하는 게 아닐 텐데…….
‘서로 보는 눈빛이 다르지 않다는 건 무슨 뜻이지?’
아콰가 잘못 느꼈을 리는 없는 건가?
생각하는 도중에 시장 인파 사이로 숨어드는 이그니를 뒤늦게 눈치채고 속도를 높였다.
“복잡해.”
페델리우스의 일은 언제나 단순하지만 복잡하게 느껴진다.
이마를 짚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이그니 일부터.”
감시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은 됐으니까. 시장의 샛길로 빠지는 이그니가 보였다.
‘어딜 가는 거지?’
나도 이그니를 따라 방향을 틀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이그니는 길이 꽤나 익숙해 보였다. 오늘 하루 갑작스럽게 가는 길은 아닌 듯했다.
망설임 없이 걸어가는 이그니의 뒤를 쫓았다. 수도의 시장에서는 조금 벗어난 골목길로 들어간다. 골목길은 두 사람이 지나가면 빠듯할 정도로 폭이 좁았다. 물론 나는 한참 위에서 뽈뽈뽈 날아가고 있었지만.
좁을 거라고 생각했던 골목길은 생각보다 훨씬 깊고 생각보다 훨씬 꼬불꼬불 복잡했다. 도대체 이런 데는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미친, 당신 또 왔어요?”
뚝, 이그니의 발걸음이 멎었다.
내 눈이 절로 동그래졌다. 들려온 목소리가 여자의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그니가 거기에 반응했다는 것이 조금 더 놀라웠다.
“가게에 오는 게 문제가 되는 겁니까?”
여전히 메마른 목소리의 이그니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냉큼 근처 건물의 지붕에 올라가 몸을 한껏 숙였다. 건물에 가려 누구랑 대화를 나누는지도 잘 보이지 않았다.
‘아, 어쩌지.’
그렇다고 허공에 떠서 보면 그림자가 아래로 드리울 것 같고.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면 이그니가 눈치채지 못할 리도 없다.
“오는 건 문제가 안 되는데……. 오늘 아침에도 집 앞에 멧돼지 잡아서 던져놓고 갔죠?”
멧……돼지?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도르륵 굴러가는 눈동자로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문제가 있습니까?”
“으아, 됐어요. 오늘은 왜요? 저번엔 달걀 두 개 가져가더니 그 다음 날은 닭, 어제는 고양이. 걔네들 잘 키우고 있죠?”
“…….”
이그니가 말이 없다. 물론 나도 할 말이 없다.
울타리에 가둬두고 밥도 주지 않았다고 말할 순 없었으니까.
숨죽인 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제법 흥미진진했다.
누군지도 보고 싶은데 건물 사이에 교묘하게 가려서 보이질 않았다.
보이는 거라곤 이그니의 뒤태뿐이다.
“아. 주군께서 먹이를 사 오라고 하셨습니다.”
“먹이요? ……설마 데리고 가서 한 번도 안 챙겨준 건 아니죠?”
“…….”
이그니도 불리하면 말을 하지 않는구나.
으음. 대체 어떤 여자랑 얘기하고 있는 거지?
궁금해 죽겠는데 이 이상 다가갈 수는 없다.
궁금했다. 궁금해. 궁금하다고! 바닥에서 뒹굴고 싶을 정도로 궁금했다. 메리의 잔소리를 생각하면 함부로 구를 순 없지만.
“으으…….”
뭐라고 하는 거지? 들키면 들키는 대로 문제가 생길 것 같고. 물론, 이그니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그니가 무려 친구를 사귀고 있다고! 물론 달걀과 닭, 고양이를 판 상인인 것 같지만.
지붕에 바짝 엎드린 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봐야 건물을 투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자, 여기 닭 모이랑 고양이 사료요. 혹시 애들이 아프면 언제든지 데리고 오든가 저를 부르러 오세요. 아셨죠?”
“그러겠습니다.”
“그럼 전 오늘 출장이라서 이만 가볼게요.”
훔쳐 듣고 있으니 무슨 도둑이 된 기분이다.
귀동냥도 도둑질인가?
물론 훔쳐 듣는 게 잘하는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어디에 가십니까?”
“아, 멜리사 백작부인의 코코가 갑자기 식욕이 없나 봐요. 제법 나이가 있는 아이니까 특별 관리가 필요하긴 했어요.”
건물 밖으로 이그니와 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반짝반짝한 은색 머리카락에 은회색 눈동자가 독특했다.
‘저런 머리카락도 있구나.’
정말 은을 머리카락에 발라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무로 된 이상한 가방을 손에 든 채 하얀색 가운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저도 따라가도 괜찮습니까?”
‘오오, 이그니 잘한다!’
뭔지는 모르지만, 친구가 되려면 역시 적극적으로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
지금은 이그니가 저 여자랑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인 것 같은데.
“당신이 왜요……?”
“호위를 해드리겠습니다.”
“아니, 무슨 진찰을 가는데 호위가 필요…….”
여자의 눈동자가 곤란함에 물들었다.
그녀가 고민하듯 볼을 긁적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그 옷은 안 돼요. 멀쩡한 옷으로 갈아입고 온다면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이그니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여자의 은회색 눈동자가 새삼 동그래졌다. 놀란 듯 보였던 그녀가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이 세계는 몇 년을 살았는데도 아직 적응이 안 된다니까.”
여자가 제 은색 머리카락을 흩뜨리며 중얼거렸다.
뚫어져라 여자를 쳐다봤다. 나쁜 기운은 없다.
이그니에게 해가 되진 않을 것 같았다.
‘더 따라다녔다간 페델리우스가 오는 시간에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고.’
이그니가 약한 것도 아니다.
밖에 내놔도 크게 걱정이 없는 게 이그니였다. 물론 사고를 치거나 사람을 죽일까 봐 걱정되기는 하지만.
“좋은 친구 사귀었으면 좋겠네.”
그래도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 기미가 있어 보여서 다행이다. 그녀가 이그니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주었으면 했다.
“다녀왔습니다.”
슬슬 몸을 일으켜 돌아가려는데 이그니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서 난 건지 제법 멀쩡한 옷을 입은 후였다.
급히 구했는지 저렴해 보이는 튜닉을 몸에 걸쳤는데도 불구하고 이그니의 외모가 한층 더 빛을 발했다.
제대로 꾸며주면 분명히 인기도 엄청 많아질 거다.
‘붙임성이 조금만 더 있어도…….’
너무 무뚝뚝한 것이 문제였다.
이상하게 눈앞의 여자에겐 살가운 것도 같지만.
이그니가 존댓말을 쓰는 사람은 나 이외에는 처음인 것 같기도 하고.
“이제 호위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호위는 필요 없다니까. 그나저나 이렇게 괜찮은 외모를 뭐 하러 검은 옷으로 꽁꽁 싸매고 다녀요?”
나도 놀랐지만, 여자도 놀란 듯했다.
검붉은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렇게 있으니 정말 말끔해 보이는 사람이다.
“호위보다는 그냥 보조라고 소개할게요.”
“알겠습니다.”
“늦겠네. 얼른 가요.”
다급하게 몸을 돌리는 여자의 뒤를 이그니가 쫓았다.
이그니보다 머리통 한 개쯤은 더 작아 보이는 여자는 제법 강단이 있어 보였다.
“나도 돌아갈까?”
엎드려 있던 몸을 슬쩍 일으켰다.
지붕에서 너무 굴러다녔더니 옷이 지저분해졌다. 최대한 안 굴러다니려고 노력했지만…….
‘잘 안 보였는걸.’
뚱하니 입술을 내밀어봤지만 봐주는 이는 없다.
메리한테 크게 혼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축 가라앉았다.
이그니의 새로운 모습을 본 건 좋았는데.
“메리의 새로운 모습도 볼 수 있을지도.”
크왕, 짐승처럼 덤벼드는 메리의 새로운 모습 말이다.
한숨을 내쉬며 느릿하게 바닥으로 내려왔다. 걸어가야지.
‘천천히 쉬었다가 걸어갔다가 하면 페델리우스랑 비슷한 시간에 만날 수 있으려나.’
그러면 메리한테 혼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골목길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나저나 프루니아는 뭘 사 간 거지?”
선물을 뭐 샀느냐고 그렇게 물었지만 결국은 가르쳐주질 않았다.
한숨을 푹 내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는데.”
주머니에 있는 팔찌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사랑하고 싶다고 페델리우스에게 말했고 페델리우스는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만약에 내가 페델리우스를 사랑한다고 하면 우리들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뭐가 달라지는 걸까?
고백의 다음은 뭐지?
‘바로 아이를 만드나?’
그럼 아이를 만들고 나면?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
“내가 페델리우스랑 같은 눈으로 페델리우스를 보고 있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알면 알수록 복잡한 일이 되어가는 것 같다. 고개를 내젓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물론 걸음은 무척이나 느렸다고 하더라도.